김명수 x 이성열 인간 x 뱀파이어
이성열 전용 옷장이 생긴 것은 그 많은 양의 옷을 사들이고 이틀이 지난 뒤 였다. 전체적인 블랙 컬러에 화이트로 포인트를 준 옷장은 명수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 모습으로 옷방에 들어섰다. 옷장을 열면 그 안을 가득 채운 명수 취향의 옷들 때문에 성열의 입에서는 일상적으로 한숨이 터져나오곤 했다. 이게 과연 성열의 옷인지, 명수의 옷인지 헷갈릴 지경까지 왔다. 백화점에서 구입해온 옷들과 명수가 스케줄을 소화 해내며 들고온 옷들은 성열이 입어오던 스타일의 옷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게 걸쳐질 검정 셔츠가 하나 씩 늘어갈 적마다 성열은 생각했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무슨 옷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꼭 옷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하나 쯤은 마음대로 결정할 권한이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특히, 푸르스름했던 제 머리를 의지와는 상관없이 검정색으로 물들일 적엔, 아랫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몇 번이고 깨물었더랬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성열은 벌써 제 몸의 반쪽이 댕강 짤린 듯한 허무함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이젠 완전히 낯선 색으로 물들어버린 머리카락을 헤집어본다, …옷은 그렇다 쳐도 머리색까지 손을 뻗어올 줄은 몰랐다. 마음까지 까맣게 물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뱀파이어는 허기를 느끼지 못하는 게 보통이라 따로 식사를 하지 않아도 일상에는 지장이 없었다. 정부 소속의 연구기관이 피튀기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든 것은, 낱알 대신 피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도록 시스템 된 인공 뱀파이어. 따라서 지금의 성열은 이만큼 무거운 공기속에서 명수와 식탁앞에 마주 앉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도 그런것이 명수의 성의를 생각해서 포크를 집어 올리려다가도 이렇게 무거운 공기 속에서는 도저히 뭔가가 목구멍으로 넘기기가 어려웠다. 무엇이 되었건, 억지로 하는 행동은 고역스러운 거니까...
그런 성열의 상황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제법 느릿한 속도로 면발을 감아올리는 명수가, 성열은 그렇게 미워보일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안 먹겠다며 아침식사를 완강히 거부하는 성열의 의견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무시 해버린 명수가 막무가내로 차려놓은 식탁을 엎어버리고 싶을 만큼 짜증났던 성열은 결국 자리에서 신경질적으로 일어나버리고 만다.
“난 도저히 못삼키겠으니까 너 혼자 먹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명수의 면전에 대고 하기엔 다소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지만 성열은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려는 듯 제 접시를 들고 조리대로 향했다. 성열이 명수의 옆을 지나가면서 생긴 공기의 묵직한 미동이 분위기를 더욱 서늘하게 떨어트렸다.
명수의 맞은편은 제가 원하는 성열대신 텅 빈 의자가 지키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수의 어깨너머로 접시가 부딪치면서 나는 딸그락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성열은 접시에 담긴 파스타를 몽땅 털어버리고 있는 듯 하다. 명수에게 그 소리가 달갑게 들리지는 않을 터, 딱딱한 그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모르고 멍하니 제 파스타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시선을 조금 끌어올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열이 채우고 있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파스타가 싫은 건가, 아니면….
“혹시나 잊고 있을까봐서 하는 말인데, 난 분명히 안 먹겠다고 말 했단말이야.”
“…….”
“근데 넌 내 말도 무시하고 멋대로….”
비워진 손으로 돌아오는 성열이 또 한 번 명수의 옆을 지나치자, 명수가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입을 열었다.
“넌 내가 싫어?”
“어?”
제가 잘못들었나 싶어 반사적으로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질문은 다를 게 없었다. 내가 싫으냐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성열이 벙찐 얼굴로 명수를 살폈다. 명수는 여전히 비워진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곤란하다는 듯 제 뒷목을 버석하게 긁던 성열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답했다.
“시, 싫은 건 아닌데….”
“그럼 다시 앉아.”
“…….”
“안 들려? 니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으라고. …내가 다 먹을 때까지.”
아무리 홧김이었다지만 명수가 만들어 준 파스타를 못먹겠다며 미련 없이 버린 건 결코 잘한 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성열은 알고 있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큰 목소리로 나오려던 말대꾸를 집어삼킨 성열이 고분고분하게 제 자리로 돌아가 착석했다. 시선은 식탁에 고정시킨 채 포크에 말린 면발을 입 안으로 천천히 밀어넣는 명수를 보고있자니 제가 또 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수에게 반항이라도 한답시고 목소리를 높였다가도 금방 기세가 꺾여서는 명수가 하자는대로 해버리는 이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패턴이 지겹고, 한편으론 제 자존심 때문에 인정할 수 없었다. 첫만남 때부터 자잘하고 사소한 문제까지 성열은 명수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탁, 제법 큰 소리가 나도록 놓인 포크가 성열의 시선을 이목을 끌었다.
“나도 혹시나 니가 잊고 있을까봐 하는 말인데, …내가 그랬잖아, 나랑 다니려면 뭐든 내 급으로 맞추라고.”
“…….”
“밖에서 저녁 약속 잡히면, 거기서도 그딴 식으로 행동할래?”
성열의 자존심을 설설 긁는 공격적 어투.
“무슨 말만 하면 언성 높이면서 삐죽거는 것 밖에 몰라?”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깎여내려지는 듯, 무심함이 가득한 표정.
“그딴 모습 보이지 마. 적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목소리 대신 격이나 높여.”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성열의 탓이 아닌데도 이런 말을 계속 듣고 있어야만 하나.
Vampire City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했건만,
제 아무리 명수가 밉다 한들, 당장 명수의 집을 나서서 돌아갈 곳도 없었다. 연구소로 돌아가면 앞가림도 똑바로 못하고 쫓겨났다며 군대에 있을 때처럼 천대와 무시만 받을 것이다. 어쩌면,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또 다시 수십 년을 재우려 할 지도 모른다. 연구소 안에서 그나마 말동무로 삼았던 우현도 사정으로 인해 민간인의 집으로 보내졌는데…, 고향이라 부르기엔 역겨운 그곳에는 결국, 성열을 웃으며 반겨줄 사람이 남아있질 않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명수도 그 사실을 귀띔 받았을 거라, 성열은 조심스럽게 생각 해본다. 그러지 않고서야 성열을 이렇게 장난감 다루 듯 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선택한 루트는 명수의 이번 스케줄에 검정 셔츠와 검정 바지를 입고 따라나서는 것 이었다. 차라리 명수가 원하는대로 행동하고, 못 이기는 척 그의 색에 잠식되는 게 50년 동안 잠드는 것 보다 훨씬 나았다. 사소한 것이었지만, 올블랙으로 차려 입는다는 것 자체가, 밝은 톤을 좋아하는 성열 쪽에서 백 번은 양보해준 셈이다. 그런 성열의 차림새를 본 명수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느슨하게 풀리고 나서야 촬영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명수가 제게 주어진 대본을 눈으로 읽어 나가기 시작했을땐, 매니저의 운전도, 제 입도 조심스러워졌다. 옆사람이 신경쓰이고 불편하게끔 만드는 김명수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봐야하는 걸까. 아니, 이기심이 아니라, 김명수에겐 머리 아프도록 고집스러운 무언가가 있다. 분명히. Vampire City
명수가 없는 대기실에서의 시간은 나름 자유롭고 즐거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시간은 생각보다 무료하고 지루했다. 명수가 테이블 위에 던져놓고 간 대본만 바라보다 그것을 슬쩍 들춰봤지만 다 부질없고 쓸데없는 짓이었다. 대기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위 아래로 훑어본다. 까만 머리, 까만 옷, 까만 신발. 성열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것 마냥 온 몸이 불편함 투성이었지만 명수가 보는 앞이라 꾹 참고 있었다.
계속 이 대기실에 틀어박혀 있기엔 불편함을 감수한 시간이 아까웠다. 쇼파 등받이에 뉘였던 몸을 일으켜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일어섰다. 김명수한테는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대충 둘러대면 되겠지, 생각은 아직 여기까지 밖에 못 미쳤지만 성열의 몸은 이미 대기실 밖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방송국 관계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소품과 장비를 들고 나르며 분주히 움직이는데, 그 틈을 용케 비집고 다니던 성열이 도착한 곳은 방송국에 딸린 작은 카페였다.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았지만 카페의 안은 비교적 한산해 보였다.
“신인이에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자, 목소리만큼이나 낯선 얼굴의 여자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인? 지금 나더러 연예인이냐고 묻는 건가? 아닌데요…. 꽤 오랜시간 입을 열지 않아 잠겨버린 목을 가다듬고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여자가 순순히 수긍하는 듯, 그렇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이다 말을 덧붙였다.
“이쪽 계열 사람인가요?”
“…네? 아니 저는.”
“뱀파이어야. 나랑 같이 사는.”
성열과 여자 사이를 가로막으며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다름아닌 명수였다. 성열이 누구인지 여자에게 확답을 해준 명수는 여전히 성열을 등지고 있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명수가 지금쯤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 지 성열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 의문이 가득한 여자의 목소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명수의 너머에서, 명수에게 묻고 있었다.
“김명수 너, 뱀파이어가 사람 피 먹는다고 싫어했….”
명수의 뒤에 가려진 성열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뱉어버린 말이, 스스로의 꼬리를 잘라버림으로써 그치고 말았다. 성열의 시선이 명수의 뒷통수에 박혀들었다. 뱀파이어가 싫었구나. 그래, 이해해. 사람의 피를 먹는다는 건 나도 가끔 끔찍하게 느껴지니까. 성열은 속으로 차근차근 씹어 넘기려 했으나 명수로 인해 그마저도 어려워졌다.
“현재진행형이야. 지금도 싫어해.”
…뱀파이어를?
나를?
“…싫어하는데… 왜 데리고 살아?”
여자가 성열을 의식한 듯 목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묻자 명수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뒤에서 듣고 있을 성열은 아랑곳않고 입을 열었다.
“캠페인에서 떠맡겼으니까.”
“……야, 명수야….”
“뱀파이어 데리고 살면서 좋은 건 딱 하나야.”
“……?”
“이미지 메이킹.”
물음에 대한 대답이 여기까지 올 줄은 미처 몰랐는 지, 아니면 그 대답이 생각보다 잔인하고 냉정해서 였는 지, 명수의 대답을 끝으로 여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지 메이킹?
나를 데리고 사는 이유가, 뭐든 제 급에 맞추어 입고, 행동하라 당부했던 이유가, 단지 이미지 메이킹 때문이었나? 어울리지 않게 베풀어오던 친절과 가끔씩 지어주던 웃음은 내가 쉽게 도망가지 못하도록 죄어둔 또 하나의 목줄이었던 건가.
저도 모르게 깨문 입 안의 여린 살에 제 송곳니가 깊게 박혀 피가 고였다. 순식간에 입안을 감돌게 된 비릿함에 정신을 차린 성열은 실없이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굳이 삼키지 않았다. 방송국의 매끈한 바닥에 머물러있던 시선을 끌어올렸다. 명수의 뒷모습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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