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원 x 장동우 뱀파이어 x 뱀파이어
회사 건물위로 높게 뜬 하늘이 까맣게 물들자 온갖 매연이 뒤섞여 탁한 저녁을 만들어냈지만 그곳에 별은 없었다. 오래 전에 살았던 고향은 밤만 되면 하늘에 작은 별이 여러 개 박혀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맡았던 업무를 모두 끝낸 동우가 복도로 나와 밤하늘과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반짝이는 도로를 감상하며 퇴근 직전의 한가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창틀에 팔꿈치를 받친 채 정체불명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동우의 뺨으로 차가운 캔커피가 닿았다. 읏, 차가워. 뺨으로 전해진 한기에 동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뒤를 돌았다. 거기엔 호원이 자상하게 웃으며 양 손에 캔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이거 마셔요.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
땡큐. 호원에게서 캔커피를 받아 든 동우가 생글거리며 다시금 창가쪽으로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
“호원아, 새삼 느끼는건데, 서울 많이 변했다.”
“사람이 변하듯 환경도 다 그렇게 변하는 거에요. 50년도 훨씬 지났으니 오죽하겠어요. 강산이 다섯 번은 바뀔….”
“동우씨! 잠깐만 이리로 와볼래요?”
“네?”
호원의 말허리를 댕강 잘라먹고 동우를 호출한 사람은 낮에 호원에게 큰 창피를 당했던 한대리였다. 저녁이라 그런 지 피곤함과 짜증이 한데 뒤섞여 묻은 표정으로 동우를 향해 손짓을 하는데, 호원의 눈치를 살피던 동우가 잠깐 다녀오겠다며 살풋 눈인사를 건내고 사무실로 뛰어들어갔다.
멀뚱히 서서 동우가 떠난 자리만 보고 있던 호원이 이내 짜증을 삼키며 동우가 그랬던 것 처럼 창가를 향해 돌아섰다. 차가운 캔커피가 손의 온기로 인해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리기 전에 따서 마시려 했을 뿐인데, 캔커피를 따는 호원의 손길이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적 이었다.
캔커피를 따다가도 조금 전 동우를 부르던 한대리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 분주한 손을 놓아버리고 만다. 저는 대체 뭐가 불안해서 캔커피 하나 따는 것 조차도 삐걱거리는 지 모르겠다. 그냥 찝찝하다. 동우를 부른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저와 한 차례 충돌이 있었던 한대리라서.
퇴근 후 동우와 신경억제제를 새로 맞추기로 했던 사실이 떠오르자 호원은 자켓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뱀파이어 연구소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호원의 시선이 창틀에 올려둔 캔커피에 머물렀다.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난 캔커피의 표면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달칵. 안녕하십니까, 국립 뱀파이어 연구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구 인피니트 부대의 이호원입니다. 약물제조팀으로 연결 부탁드립니다.”
Vampire City
호원은 연구소와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쐬며 캔커피를 마시려던 차였지만 한대리에게 불려갔던 동우가 사무실에서 허겁지겁 뛰어 나오는 바람에 그 조차도 미루어야했다. 난감한 얼굴의 동우가 버벅이며 전해 준 말은 호원의 미간을 찌그러트리기에 충분했다.
“미안해 호원아, 나 연장근무 해야될 것 같아….”
“네? 갑자기 왜요. 업무 다 끝낸 거 아니었어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저장해둔 파일이 다 날아가는 바람에….”
“홍보팀한테 넘기기로 한 그 연계업무 파일?”
“…으응.”
“아, …하필 날려먹어도 그걸.”
동우의 입꼬리에 근심이라도 매달린 건지 아래로 주욱 늘어지는 모양새가 썩 보기좋지는 않았다. 호원은 제 뒷머리를 헝클었다. 어쩌다보니 동우에게 다그친 셈이 되어버렸다. 동우가 파일을 안전하게 저장하는 모습은 저도 똑똑히 봐두었던 터라, 파일을 날려먹은 건 동우가 아니라 컴퓨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도 말이다.
“연장근무 대충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오늘 연구소에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빨리하면 두 시간 정도…?”
동우의 목소리가 위축되었다는 걸 느낀 호원이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더니 동우를 사무실쪽으로 돌려세우고 말했다.
“그 연장근무 같이해요.”
“어, 어?”
“날려먹은 파일, 같이 복구하자구요. 아무렴 둘이 하는 게 빠를 거 아냐.”
돌려세워진 제 몸을 다시 돌려 호원과 마주한 동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 호원아.
“둘이서 하면 더 복잡해질 거야, …연구소 방문예약 해놨으면 먼저 다녀와. 아무래도 난 오늘 무리일 것 같아서….”
“형 없이 어딜 가요, 내가.”
“연구소에 내 혈액 샘플 보관되어 있을 거야, 그걸로 박사님이랑 상담해도 될 것 같아.”
“형.”
“빨리 가봐 호원아.”
아, 진짜, 완전 막무가내네… 찬공기가 스민 대리석 창틀을 손톱으로 콕콕 두드리던 호원이 정장바지에 손을 찔러넣으며 말했다.
“그러면요, 업무 다 끝내면 회사에서 꼼짝말고 기다려요. 연구소에 갔다가 데리러 올테니까. 응?”
호원의 말에 동우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호원은 다시금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퇴근시간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하나 둘 씩 저마다의 외투와 가방을 챙겨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동우의 조그만 뒷통수를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긴 호원이 이내 결심이라도 한 것 마냥 꾸욱 다물고있던 입을 열었다.
“한대리가 괴롭히면 말해요.”
“으응.” …그럼 다녀올테니까 업무 잘 보고있어요. 동우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고서 자리를 벗어나는 호원의 발걸음이 그다지 경쾌하지는 않았다.
Vampire City
자판과 모니터, 모니터와 차트 서류를 번갈아 보는 동우의 눈과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장시간의 타이핑을 동반한 업무를 두 번 하려니 여간 힘에 부치는 것이 아니었다. 손목과 팔근육에 무리가 오는 듯이 뻐근했고, 히터바람과 모니터 때문에 건조해진 눈이 감을 적마다 뻑뻑하게 느껴졌다. 힘들다. 전쟁중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육체적 무리를 일상생활에서 겪게 될 줄은 몰랐다.
늘어지는 고개를 붙들어올려 사무실 벽시계를 올려다본다. 호원이 오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동우는 업무의 한 파트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직원 휴게실에서 자판기커피나 음료수를 뽑아 마실 심산이었다.
사무실을 나와서 오른쪽 복도 끝까지 걸어가 코너를 돌면 직원 휴게실이 있다. 평소라면 별 생각없이 다녔을 복도가 오늘따라 길게만 느껴졌다. 터덜터덜, 휴게실로 향하는 동우의 발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호원이는 지금 쯤 박사님과 얘기중이려나, 주머니에 있을 휴대폰을 찾아 바지춤과 자켓을 더듬었지만 묵직한 휴대폰이 잡히기는 커녕, 제 주머니는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휴게실의 밝은 조명이 가까워질수록 동우의 걸음이 빨라졌다. 웅성웅성, 휴게실 쪽에서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휴게실에 들어갈 타이밍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코너를 돌기 직전, 복도 벽에 찰싹 달라붙은 동우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뒤따라 오는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묻어가듯 휴게실에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한 시간이었기에 그런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걔 알지?”
“아아, 그 날티나는 애?”
“날티? 하긴, 생긴 것 부터가 날티나긴 하지. 아 근데 걔 말고도 하나 더 있잖아. 존나 무뚝뚝해서는 폼 잡는 새끼.”
“어 알겠다. 근데 걔들이 왜?”
“내 참, 니가 생각하기엔 이 일류회사에 뱀파이어같은 게 껴있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수준 떨어지게.”
'날티'에서 제 얘기가 아닐까하며 품었던 약간의 의심이 '뱀파이어'라는 단어 덕에 거의 확실해졌다. 저들이 담소의 주제로 삼는 사람은 사내의 유일한 뱀파이어. 저와 호원임에 분명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일류회사에 끼어있는 수준 이하의 뱀파이어'…, 이건 조금 더 곱씹을 필요가 있었다. 몇 번을 되새겨도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다.
“그 둘이서 사귀는 것도 가관 아니냐? 더러워서 같이 일을 못하겠다니까?”
“아 맞다, 걔네 사귀지? 진짜 더러워. 그건 인정. …게이 새끼들, 사람 피 빨아먹는 것도 모자라서…으으.”
“근데 그 새끼 오늘 연장근무조로 남았다며. 분홍머리, 걔.”
“아, 장동우? 맞아, 한대리님이 시키시더라, 걔 컴퓨터에 저장된 업무파일 아예 깨트리라던데? 연장근무 시키겠다고.”
“그래서 니가 깨트렸냐? 걔 불쌍해서 어째, 일 다 해놓고도 또 하네.”
“한대리님, 아까 낮에 장동우한테 찝적거리다가 된통 깨져서 열받은 것 같더라. 너도 알잖냐, 한대리 빡쳤다 하면 죽 되는거.”
“제일 만만한게 장동우니까, 분풀이를 해도 장동우지, 뭐. 나라도 그러겠다.”
이제서야 정리가 되는 듯 했다. 분명히 안전하게 저장해두었던 업무파일이 잠깐 복도로 나간 사이에 날아가버린 것은 저 인간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대리. 그녀가 그런 유치한 짓을 벌였다. 호원에게 당했던 창피를 앙갚음하기 위해 한대리는 오늘 밤, 호원이 아닌 동우를 회사에 남긴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사원들이 저희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사람 피를 빨아먹는, 더러운 게이들.
동우는 제 어금니를 꽉 물고 복도 벽에 바짝 기대섰다. 제가 여기서 더 엿들을 말이 뭐가 있을까, 있다 한들 과연 좋은 말일까. 뒷걸음질을 치려던 찰나였다.
“야, 근데 남자끼리 사귀면 섹스는 어떻게 하냐? 서로 딸 쳐줘?”
“너 게이야동 못봤냐? 뒷구멍으로 하잖아.”
“미친, 뒷구멍이라고? 거기에 뭐가 들어가긴 해? 그럼 걔들은? 했을까?”
“했겠지 씨발아, 장동우 오늘 허리 붙잡고 다니는 거 한 번도 못봤냐? 걔들 분명 어젯밤에 떡쳤을 걸. 아오, 상상하니까 소름돋게 더럽네. 남자끼리 그 짓…, …야.”
“뭐 인마. 계속 해.”
“오늘 장동우, 회사에 남았다고 했지.”
“…너 설마… 아서라, 미친놈아… 욕 볼 일이라도 있냐?”
“왜, 너도 욕구불만이잖아-, 분홍머리 새끼 따자. 예전부터 그 쎈놈 옆에 빌붙어 다니는 거 재수 없었는데 마침 잘 됐네.”
분홍머리, 따자. 저속한 단어에 동우의 몸이 거하게 휘청이며 시선이 흐트러졌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담소를 나두던 두 사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는 지 발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지금…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동우의 의식은 앞으로 닥쳐 올 불행을 감지하고 제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혹여나 제 발소리가 샐까봐 휴게실쪽으로 향한 몸이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중. 탁, 뒷발에 걸린 무언가에 의해 동우의 뒷통수가 싸늘하게 울렸다. 누군가가 들을 것이 염려되어 저도 모르게 꾹 참고있던 숨이 허무하게 터져나왔다. 동시에 동우의 몸이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동우보다 한 뼘은 더 작은 키에, 단정하게 빗겨내려진 검은 생머리, 그와 대조되는 새빨간 입술.
…평소의 웃음과는 다른, 비식거리는 눈치의 한대리가 코 앞에서 동우를 마주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니 머리위에 올라 앉아있다'는 듯한 시선이 동우를 연신 내리찍는 듯 했다. 동우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키는 제가 더 컸지만, 조금 전 휴게실의 상황을 미루어보아, 상황적 우위에 있는 것은 동우가 아닌 한대리에 가까웠다.
동우의 목울대를 크게 울리며 마른침이 넘어갈 적에는, 한대리의 빨간 입술이 저를 조롱하듯 달싹였다.
“동우야, 일 안하고 여기서 뭐 해?”
마치, 동우의 어깨너머, 이제 막 휴게실을 빠져나온 두 명의 건장한 남자사원들에게 알리는 것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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