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연재... 사실 비축분이 29화까지 있어서 그래요.
요즘 원은 경수를 잘 따랐다. 깡총깡총 앙증맞게 뛰며 경수를 쫓아다니기도 하고, 소파 위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을 때면 폴짝폴짝 뛰며 올려달라고 성화였다. 우쭈쭈 내새끼. 경수가 원의 작은 몸을 들어올리면 고민없이 경수의 배 위로 올라가선 얼굴을 부볐다. 귀여워 … 경수는 하루 온 종일을 원과 함께였다.
경수가 씻으러 화장실을 들어갈때도, 빨래를 걸러 베란다로 걸어갈때도, 한참 잠을 자도 모자를 새끼 강아지임에도 불구하고 벌떡벌떡 일어나 경수를 따랐다. 경수는 그런 원을 예뻐했다.
─ 야, 근데.
“ 엉, 왜. ”
제 손을 파고들며 쓰다듬어달라 아우성인 원을 보며 경수가 꺄르륵 웃었다. 알았어~ 쓰담쓰담~ 평소에 내지도 않는 귀여운 목소리를 내는 경수에 휴대폰 너머 백현이 우웩, 토하는 소리를 냈다. 아, 더럽게.
─ 너 설마. … 아직도 그대로야?
“ 뭐가. ”
─ 이름 말이야 이름.
이름?
경수가 되물었다.
─ 이름이 원이 뭐냐 원이 …
“ 뭐 어때서. ”
─ 야, 좀 이쁜걸로 바꿔줘라.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니야?
대충? 경수가 원과 눈을 마주쳤다. 이름 마음에 안 들어? 원, 원. 경수의 물음에 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경수는 또 한번 껌뻑. 아오 내새끼!! 귀여워 귀여워!
─ 이름 좀 바꿔줘라. 쪽팔리게 …
“ … 니가 뭔데 내 네이밍센스에 지적질이야. ”
원의 앙증맞은 발바닥을 만지작거리던 경수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원이라고 짓든 투라고 짓든 니가 뭔 상관인데.
─ 또 발끈한다.
“ 니가 발끈하게 만들었잖아. ”
─ 예쁜 이름들 널리고 널렸는데 왜 하필 원이야? 이왕이면 예쁜 이름이 좋잖아.
조금만 더 고민해보면 얼마든지 예쁜 이름도 … 말을 잇던 백현의 목소리가 뚝, 끊긴다. 경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변백현. 변백현?
─ 열아! 뭐하는거야! 그거 먹는 거 아니야! 떼엑! 떼엑!
들리지 않던 백현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열이? 처음 듣는 이름이다. 분명히 변백현네 집에 있는 강아지는 비글 두마리와 말티즈 한마리로 구성되어있지 않았던가. 이름은 차례대로 쫑, 백, 하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티즈는 암컷이었던 것 같고.
가만히 머리를 굴리던 경수가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투 이름을 바꿨구나!
─ 아 미안미안. 갑자기 열이가 …
“ 이름 바꿨어? ”
어? 백현이 되물었다.
이름, 바꾼거냐고.
─ 어떻게 알았어?
“ 내가 아는 너희 집 개 이름들이 아니니까 그렇지. ”
─ 너희 집에서 데려오던 날 바로 이름 바꿨는데.
야, 이름이 그렇게 이상해? 경수가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백현이 대답했다.
“ 야, 열이라는 이름도 딱히 예쁘진 않거든. ”
─ 예쁘거든? 열매에서 따온거야 열매.
“ … 열매? ”
─ 주렁주렁 새끼 낳으라고.
“ … 니 머리에서 나오는 게 뭐 그렇지. ”
경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이름 하나 지어줄까?
“ 됐어. ”
─ 왜?
니 네이밍 센스 믿고 싶지 않다.
“ 끊어, 귀찮아. ”
─ 도경수?
“ 이름은 내가 알아서 잘 지을테니까 신경 꺼. ”
─ 야!
경수가 무심하게 전화를 끊었다. 아, 음.
“ 뭐가 좋을까? ”
그새 제 배 위에서 새근새근 잠에 빠진 강아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경수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심각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래, 수컷이기도 하니까 … 멋있는 이름으로 해주자!
새근새근 원의 숨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
아, 늦었다. 늦었다!!!
경수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랐다. 분명히 알람 맞춰놨는데 … 경수가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확인했다. 출석 체크 하나는 꼼꼼하게 하는 교수님 때문에 경수의 발에는 불이 나고 있는 중이였다.
문을 열어젖힌 경수가 헥헥, 숨을 가다듬었다.
“ … 조, 죄송합니다! ”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나보다. 다행히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교수님에 경수가 안심하고 계단을 올랐다. 오른쪽 맨 구석 자리 찌질하게 모여앉은 백현과 종대가 보였다. 경수가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강의가 시작되기 무섭게 백현이 공책 위에 무언가를 휘갈기더니 백현에게 들이밀었다. 뭔데. 궁금하다는 듯 종대도 고개를 쑤욱 내밀었다.
[이름은 바꿨음?]
경수가 힐끗 백현을 쳐다봤다. 얼마나 이름을 잘 지었나 보자는 심산이 분명하다.
[어]
경수가 공책을 다시 백현에게 들이밀었다.
[뭔데?]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얼마나 멋지게 지었나 궁금해서. 단지 그뿐이야]
경수가 백현을 힐끗 쳐다봤다. 진짜라니까. 백현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카이.]
마지막 마침표까지 완벽하게 찍은 경수가 백현쪽으로 다시 공책을 들이밀었다.
[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야, 아이돌 이름인 줄. 카리스마 폭발하네.]
[열이보다 낫다.]
[뭐래? 니가 뭔데 내 좋은 취지를 짓밟아?]
[너는 뭔데 내 좋은 취지를 짓밟아. 얼마나 멋있어. 카이. 남성적인 매력이 줄줄 흐르는구만.]
[자랑할 게 없네.]
[ㅡㅡ내 나름대로 많이 고민한거라고.]
[의미가 없잖아 의미가.]
[말을 말자.]
[카이가 대체 뭐가 멋있는데.]
[아이돌 이름 같다며 니가ㅡㅡ]
백현이 입을 막고 끅끅거리며 웃었다. 저 새끼가.
[말을 말아야지. 오늘 우리 열이 이유식 두그릇이나 먹었어.]
[너희 집 강아지는 한 그릇도 잘 안 먹는다며?ㅋ]
[밥 많이 먹으면 비만되서 안돼.]
좀 부럽기야 하다. 한참 잠을 자다 제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번쩍 눈을 뜨고 졸졸 따라다니면서도 밥 먹는 건 그렇게 귀찮아했다. 제법 몸도 컸겠다 이유식을 먹이고 있는데 도대체가 먹으려는 시늉도 안하는거다. 혹여나 열이보다 성장발육이 늦춰질까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같은 어미 아래에서 똑같이 태어난 강아지인데 차이가 나는 건 싫었다. 사실 백현이 카이의 성장 발육 문제로 얼마 전부터 경수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열이는 이만큼 자랐는데~ 너는?
늘 이런 식이다. 백현은 늘 비슷한 형식으로 경수를 괴롭혔다. 그럴때마다 적절하게 대응을 해주긴 했지만.
[그러고보니 도경수.]
[너 아침에 카이 밥은 먹이고 온거야?]
[늦어서 헐레벌떡 나왔을텐데. 밥 챙겨줄 시간적 여유는 없었을 거 아냐.]
아, 그러고보니.
우리 카이 아침을 안 챙겨줬잖아? 아, 아 … 경수가 백현이 쓴 글을 천천히 읽어내려가다 이내 절망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배 많이 고플텐데 …… 큰일났다 … 경수가 안절부절하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 어떡해 어떡해 ……
아침에 늦을까봐 너무 급했던 나머지 아침을 챙겨줘야 한다는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경수가 달달달, 다리를 떨었다.
“ 왜그래? ”
옆에 앉아있던 종대가 경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아침을 안 챙겨주고 나왔어 … 경수가 속삭였다. 아, 어떡해.
“ 한 끼 굶는다고 안 죽어. ”
“ … 나 다음 강의 세시간 연강이야. ”
“ … 오, 저런. ”
아, 망했다 …… 경수가 머리를 박았다. 아, 어떡해? 나 세시나 되야 집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경수가 울상을 지었다.
“ 우리가 가서 챙겨줄게. ”
“ … 뭐? ”
종대의 말이였다. 그 뒤에 있던 백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 나 이유식 하나는 기똥차게 … ”
“ 변백현 넌 제발 닥치고 있어. ”
또 자랑하려고. 경수가 백현을 노려보았다.
“ 하여튼 맡겨만 주십쇼. ”
… 딱히 신용이 가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삑삑, 삐리릭.
도어락 해제소리에 잠에 빠져있던 카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기분좋게 그르릉, 거리던 카이가 현관 앞으로 가 앉았다. 경수가 들어올때마다 늘 취해오던 리액션이었다. 나른했던 눈이 크게 뜨여 반짝거리고 있었다.
안녕 카이야! 형들이야! 히사시부리! 발랄하다못해 한껏 업이 된 목소리가 좁은 현관을 가득 메웠다. 자리에 엎드려 있던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백현과 종대. 얼굴을 쭈욱 스캔하듯 고개를 움직이던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뒤도 보지 않고 이내 제 집으로 걸어갔다. 카이야 어디가! 백현이 신발을 벗고 급히 카이를 따랐다.
귀찮다는 듯 몸을 웅크린 카이가 눈을 감았다. 뭐야 … 얘 자는 거야? 백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종대를 쳐다봤다.
“ 도경수가 말하던 거랑 딴판인데. ”
“ 그러니까 … ”
분명 도경수가 말한 카이는 이런 애가 아닌데. 어딜가든 쫄래쫄래 쫓아다니면서 다리에 얼굴을 부벼대고, 애교 부리고. … 그런다고 하지 않았나?
아 잠깐. …… 그러니까 너 지금. 내가 네 주인이 아니다 이거야? 백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냈다. 야, 내가 점심도 안 먹고 왜 여기에 온 줄 알아? 너 아침 안 먹었대서 챙겨주러 온거라고! 백현이 카이의 몸을 흔들었다. 일어나, 형아가 밥 준다니까.
난 밥에는 관심이 없어요. 경수 형아를 내놓으세요. 카이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이 놈 보소? 벌써부터 남자를 밝혀. ”
“ 얘 수컷이거든. ”
종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야, 안 일어나면 밥 안 준다? ”
종대의 말을 무시한 백현이 괜히 심술이 났는지 카이의 몸을 또 한번 흔들었다. 그러자 이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어, 우. 깜짝놀란 백현이 손을 떼어놓고 뒤로 멈칫 물러섰다.
새끼 주제에 성격이 장난이 아니네. 백현이 입을 삐죽였다.
“ 밥 해올게! ”
종대가 가만히 카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다 백현을 쳐다봤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뚱한 얼굴이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부엌으로 사라지는 백현에 종대가 헛웃음을 지었다.
부엌으로 들어온 백현은 읭?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얘는 개한테 뭐가 이렇게 지극정성이야? 사료 잘 불려서 주면 될 것을 왜 비싼 초유 분유까지 사먹인대? 백현이 기겁을 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비싼 것만 먹여대니까 애 성격이 저 모양이지! 백현이 씩씩거리며 손을 퍽퍽 움직였다.
“ 내가 너 완전 쪼그만 했을 때 데려왔다? ”
종대가 카이의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귀여워.
“ 형이 널 키우려고 그랬는데. 형이 널 키울만한 사정이 못 돼가지고 말이야 … ”
“ …… ”
“ 우리 형이 동물병원을 하거든. 사실 병원에도 너희 데려갔었어. 기억 나? ”
“ …… ”
“ 사실 너희가 평범한 놈들이기만 했어도 내가 키웠을 수도 … ”
“ 야!! 김종대! 놀지만 말고 나 좀 도와 봐!!! ”
아 귀청이야. 알았어, 가면 되잖아.
종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쩍 눈을 뜨고 있던 카이가 그르렁, 소리를 내며 다시 눈을 감았다.
*
─ 야! 숟가락으로 입에 가져다 주니까 겨우 먹더라. 아니 한창 배고플 시기인데 왜 밥을 안 먹어?
“ 그래서 걱정이야. ”
─ 애가 계속 자기만 하고. 어?
“ 잠이 너무 많은 것 같지?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가. ”
─ 제일 큰 문제는! 무슨 놈의 개가 애교가 없냐?
… 뭐? 경수가 되물었다.
─ 야, 귀엽고 깜찍하고 이만한 요물이 없다며.
“ 거짓말 아닌데. ”
─ 애교는 무슨! 으르렁거리기만 하던데!
그럴리가 … 오늘 아침에도 급히 준비하는 제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만져달라 아우성 쳤던 아이인데.
“ 진짜로? ”
─ 그래! 김종대도 찬밥 신세였다고. 완전 주인이랑 차별 …
“ 우리 카이가 보는 눈이 있네. ”
─ 뭐 이 새끼야?
뭐 내가 잘못말한 거 있나. 전혀 없는 것 같은데.
경수가 커다란 백팩을 매었다. 집에는 예쁜 강아지 카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 신난다.
“ 너랑 김종대는 어딘데. ”
─ 학교 들어왔지. 십분 뒤에 실용 음악 강의있어.
“ 그래, 수고하셔. ”
─ 다음에 밥 쏘셈.
강아지 이유식 하나 챙겨준 것 갖고 겁나 뜯어먹으려고 드네. 백현의 거머리 정신은 늘 칭송할 만 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경수가 급히 강의실을 나섰다. 가는 길에 내새끼 장난감이나 하나 사갈까.
경수의 머릿속은 카이, 카이, 카이. 카이 뿐인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