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바라기
아씨, 참말로 안 보실 작정이여요?
여지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이른 시각에 장독이 무수히 널려 있는 곳을 눈으로 가리키며 언년이는 그녀에게 무언의 재촉을 전해왔다. 며칠 전 자신에게 전해져 온 서신을 애써 외면하려 장독 밑에 숨겨두고는 모른 채 하는 그녀를 대신해 더 안달나하며. 그런 언년이의 물음이 무어가 대수랴, 오늘도 그녀는 안채 뜰에 가만히 서서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낙네들의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여전히 아씨라고 불러주는 언년이가 고맙기도 하면서, 밉기도 한 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맑게 개어있던 하늘에 난데없이 옅은 빗줄기가 내려오고 그것을 여우비라 단정 지은 그녀는 어렴풋이 그와의 추억이 떠오르자 다른 생각은 하도 못한 채 버선발로 안채를 뛰쳐나오다시피 해서는 있는 힘껏 독대를 들어올려 그 밑에 깔린 서신을 꺼내 방 안으로 들어갈 여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마저 읽기도 전에 혹여 서신이 제 손에 구겨질까 싶었는지 소중히 가슴팍에 끌어안다시피 한 채로 서글피 울었다.
정인. 그래, 정인이였다. 여느 규방 아가씨들과 달리 사내와 같은 심성이 강해 매번 그녀는 어머니께 배워왔던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그에게 물었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녀가 그에게 매번 묻고, 묻고, 물어왔던 그 많은 물음들의 답을 그는 뒤늦게나마 이 서신 안에 남겨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했고, 또한 그의 마음이 담겨있기도 하였다. 지나치게 말을 아끼던 그는 그녀에게 서신으로나마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속에서 올라오는 울음기로 인해 끅끅거리는 요상한 소리를 내며 그녀는 혹여 소리가 크게 새어나갈까 싶어 한 손을 들어 입을 가린 채로 품에 안다시피 했던 종이를 다시 눈 앞으로 꺼내어 마저 읽어내려가기 시작하였다. 허나 쉬이 읽을 수가 없었다. 그의 필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떠올라 다시금 시야가 뿌옇게 차오르려 하고 있었기에.
그러고보니 단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가 단정한 자세로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아 먹을 갈았었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먹을 가는 그였기에 그 시간이 지루하기 그지없어 그녀가 참지 못하고 새어나오는 하품을 가려보려 손으로 입을 급히 막자 그는 먹을 갈고 있던 손을 멈추고 다정한 미소를 만면에 띈 채로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었다. 앞으로 많은 시간을 이러한 채 지낼텐데 벌써부터 지루해하면 어찌하냐고. 그에 질겁하던 그녀였다. 허나 한 편으로는 들뜬 마음도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그녀와의 뒷날들을 이야기하고 있었기에. 이야기를 마친 그는 그 이후로도 먹을 갈았다. 한참이나. 그리고 그 뒤에 붓을 들어 그 끝에 정성스레 간 먹을 두어번 정도 묻힌 뒤에 한지 위에 조심스레 붓의 끝을 올려 마치 그림이라도 그리듯이 유연하게 글을 써내려갔었다. 곧은 자세로 앉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마지막까지 글을 써내리는 그 모습이 마치 신선과도 같아 보여 그녀는 눈을 떼지 못하였었다. 글을 다 써내려간 그는 차마 글을 읽어내지는 못하고 주저하며 글의 내용을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말했었다.
뭐라 하셨었지 ….
갑작스레 단절되어버린 기억에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며 서신의 끝부분을 눈으로 마저 담았다. 아. 아아. 떠올랐다. 떠오름과 동시에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느낌에 잇새로 신음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미리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요.
그리고 그는 난생 처음으로 그녀에게 서글퍼 보이기만 하는 미소를 지어보였었다. 그 때의 서신이 지금에서야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이다. 아아, 어찌 이리도 무지했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그녀는 자신의 뒤로 다른 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주먹을 쥐고 가슴팍을 여러번 치기 시작했다.
그 날은 그녀의 혼담이 오고 간 날이였다. 그녀만 모를 뿐, 그녀의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은 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 허나 그 혼담은 그와 그녀의 혼담이 아니었다. 그의 형님인 이와 그녀 자신의 혼담이었다. 그녀는 흔히 한양의 제일 가는 집안의 여식이었고, 또한 그도 한양의 제일 가는 집안이라 불리우는 뼈대 깊은 곳의 자식이였다. 단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녀가 연모해오던 그는 서자라는 것. 그와 그녀에게는 중요치 않기만 했던 신분의 차이가 다른 이들에게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그녀는 그의 형과 혼담이 오고 간 뒤였고, 뒤늦게 그것을 알아챈 그녀가 현실을 부정하려 부모님께 애를 써보기도 하고 난생 처음으로 대들어 보기도 했던 그 때에 그 또한 현실을 부정하려 들었었다.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유서란 것도 하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리 단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의 형과 혼담이 오고가는 것으로 인해 그가 목숨을 끊었다고. 그리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목숨을 끊어버린 그가 미워질 것만 같았고 또한 그를 따라 자신 또한 목숨을 끊으려 할 것만 같아서. 허나 그녀는 아직 미련이 많았기에 끊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그리 믿었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시간이 지나 그녀의 미련을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뒤늦게서야 그의 서신이 도착한 것이다. 미리 궁금해하지 않아도 된다던 그 서신이. 그 때 그의 말이 중요했었다. 허튼 소리를 하지 않고 그녀에게 거짓 한 번 말한 적이 없었던 그가 미리 궁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한 이상 언제든간에 그녀는 그 서신 안에 담긴 내용을 알 수 있을거란 것이었다. 그래서 차마 그를 따라 이 생을 떠나질 못하고 그 날 그가 쓰던 그 서신을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도착했다. 그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려는듯이.
하나만 알아주길 바라오. 내 그대를 진심으로 연모하여 왔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그러니 나를 따라 올 생각은 하지 말아주시오. 그 곳에 남아 내가 연모하던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좋은 것만을 보고, 듣고, 또 느껴주시오. 그리고 훗날 만날 날이 온다면 그 때에 꼭 말해주시오. 그대도 나를 한 때 연모하였었다고, 그리하였다고. 그 증표로 이리 좋은 것들을 긴 세월 함께 보고, 듣고, 함께 느껴주었다고. 그 전까진 내가 한없이 지켜주겠소. 그대는 물론이거니와 그대의 지아비인 나의 형님. 그리고 지금에서야 빛을 보았을 것이 분명한 그대의 여식까지. 그러니 부디 건강하시오. 부디.
서신의 마지막 구절을 하염없이 눈에 담으며 되새기고 있는 그녀의 뒤에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그녀는 더욱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올 정도로 고생하여 낳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여식이 언년이의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어이하여 알고 있었는지는 그녀 자신도 모른다. 허나 그녀의 자식이 여아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은 분명했다. 눈과 코, 그리고 입술까지 그 어떤 것 하나 그와 닮지 않은 곳이 없는 자신의 여식이었다. 그래, 그의 여식이기도 했다. 그녀를 욕심 낸 것이 그를 죽게 만든 것만 같다며 이 모든 사실을 눈감아 준 그의 형님이자 자신의 지아비 덕분에 살아 빛을 볼 수 있는 그와 자신의 여식. 아마 그는 여기까진 몰랐을 것이다. 이번에도 그리 믿고 싶었다. 분명 자신의 아이가 뱃 속에 있음을 알았음에도 그가 목숨을 끊을 위인은 못 되었을거란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를 향한 그의 말은 모두 거짓이 하나 없었다. 그렇기에 그 날, 미래를 약속하던 그의 말 또한 거짓이 없었다. 허나 그 중 단 하나만이 틀렸다. 앞으로 많은 시간을 그는 그녀의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루해 할 틈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안에서 살아가는 그는 매일 새로운 과거를 끄집어내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며, 또한 그와 자신의 사이에서 나온 여식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 절로 행복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매일 그녀를 위해 이 뜰에 피어있는 꽃을 꺾어 안채 마루에 놓고는 모른 채 하는 자신의 지아비를 한 번쯤 다시 되돌아봐주려면 아직은 ….
언년이의 품에 안겨있던 자신의 여식을 받아들어 품에 안은 그녀는 자신을 보자마자 손을 뻗어오는 아이에게 눈물을 애써 감추고 최대한 밝게 웃어보였다. 맑게 갠 하늘이 구름 아래로 따스하기만 한 햇살을 내보이며 비에 촉촉히 젖은 땅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미소에 생기를 얹어주었다. 이에 절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떠오른 그녀는 어렴풋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의 이름은 연이 좋겠구나. 연아.
- 연 (緣) , 인연 연.
전에 잠깐 새벽에 잠도 안 오고 해서 썼던 글인데, 아마 이것도 독방에서 보신 분이 계실 거예요.
잠이 안 오는 틈을 타서 짧게 쓴 글이라 완성도도 많이 낮아요. 뭐 .. 항상 제 글에서 완성도라는 건 없다고 보면 되겠네요 ㅠㅠ ..
한글날이기도 하니 다른 글보다는 과거 중심의 글을 한 번 써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지식도 없고 해서, 전에 썼던 글을 또 이렇게 가져오게 됐어요 ..
구상하고 있는 스토리는 많은데 다 쓸 여력이 되질 않아서 매번 이렇게 전에 썼던 글을 가져오니 염치도 없고 ㅠㅠ
그래도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일부러 따로 주인공이나 학연이의 이름은 넣지 않았어요. 이미지로만 그려냈던 글인지라 ..
그와 그녀로만 이루어져서 읽으실 때 많이 불편하실텐데 매번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