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한빈이랑, 지원이랑, 동혁이 보고 싶지 않냐?”
“여기 없다고 이름 막 부르네? 형들한테 이른다?”
“뭐 어떻다고, 그럴 수도 있지 뭐.”
나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소파가 흔들렸고, 푹신한 느낌에 눈을 꼭 감았다.
“그래도 오늘이면 보잖아.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동혁이 보고 싶어. 파티만 시작하면 바로 칵테일 바에 가야지.”
이번 작전에서 동혁이는 바텐더로, 지원 오빠는 카지노 딜러로 근무하며 AFT의 수장을 색출하는 것을 맡았다. 적당히 상류층 행세를 하며 작전 전체를 지휘하고 국가와 지속적으로 컨택할 한빈 오빠와, 배 전체를 누비며 AFT의 말단 요원을 처리할 구준회. 나는 그들이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AFT 수장의 금고로 접근하여 침몰 계획이 적인 문서를 빼내오면 되었다.
그 작전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타이타닉이 출항하는 날이기도 했다. 저녁에는 연회장에서 출항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린다고들 했다. ‘바벨탑의 설계자’ 멤버가 모두 참석할 파티였다. 서로 아는 척은 하지 못하겠지만, 다섯 명이 다 함께하는 합동 작전인 만큼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특히나 동혁이가 실제 작전에 직접 투여된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껏 워낙 세계 각국을 떠돌아다니며 ‘바벨탑의 설계자’ 멤버로 활동해온 터라, 뉴욕과 같은 큰 도시의 공항에 가면 이따금 같은 멤버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국가 정보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터라 인사를 하지는 못하지만, 서로를 스쳐 지나갈 때면 아무도 모르는 미소를 공유하곤 했다. 그렇게 일하는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왔지만, 동혁이가 직접적으로 역할을 얻어 작전을 수행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바텐더면 친절함과 능글맞음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할 텐데, 능청맞게 잘 연기할 수 있을지 기대도 되었다.
지원 오빠야 원체 능구렁이가 한 마리 앉아 있는 성격이라 잘해낼 것이었고, 한빈 오빠 역시 꾸준한 작전 수행으로 단련된 몸이었다.
문득,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고상한 상류층인 마냥 타이타닉 내부를 거니는 구준회의 모습이 떠오르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키킥, 하고 웃는 나를 구준회가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쳐다보았다.
“또 무슨 생각하길래 그렇게 쳐 웃냐?”
“김동혁 생각했다, 왜?”
구준회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파티 가면 내 옆에만 붙어있어.”
이번에는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친, 안 그래도 남매 설정 짜증 나는데 왜! 나는 잭 같은 남자나 찾아다닐 거야. 너도 로즈 같은 여자나 찾아봐. 돈 많고 예쁜 여자 하나 꿰어서 결혼까지 하면 되겠네.”
“한빈이 형이 우리 둘은 붙어 있으라고 이메일 보냈어. 너, 네 계정 확인한 지도 오래됐지? 메일 좀 확인하고 다녀. 지시사항 다 내려왔는데.”
전화나 문자로는 보안의 문제도 있고, 바쁜 일정에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한빈 오빠는 거의 항상 이메일로 구체적인 지령을 내리곤 했다. 서로 소통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역시 우리는 이메일로 연락을 취했다. 동혁이가 개발한 발신자 제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익명으로 메일을 보내고, 코드네임을 끝에 덧붙임으로써 발신자를 밝혔다. 우리가 사용하는 계정 역시 여러 단계의 보안이 걸려 있었다.
돌이켜보니 이메일을 확인한 지가 꽤 오래된 듯싶었다. 침실에 들어가 침대 옆 탁자에 대충 던져두었던 업무용 스마트폰을 주워 암호를 풀었다. 일반인의 핸드폰처럼 보이게 하려고 평범한 SNS 앱으로 보이도록 위장한 ‘바벨탑의 설계자’ 전용 이메일 앱을 실행시켰고, 곧이어 익숙한 화면이 떠올랐다. 맨 위에 있는 메일의 제목은 Op. T였다. Operation Titanic, 작전명 타이타닉의 약자겠지, 하며 메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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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Op. T. (9 hours ago)
보낸 이: Not Available
내용:
이미 다 탑승해 있을 거라 믿는다.
출항 날 저녁 파티에는 전원 참석한다. 미다스의 손과 위저드 네메시스는 연회장에서 근무하도록 미리 조처를 해 두었다. 밀실의 저격수, 초선의 환생은 계속 둘이 함께 이동한다. 개인행동은 안 된다.
멤버들 간 연락은 이메일을 통해 한다. 미다스의 손, 위저드 네메시스는 타 멤버들을 만날 때 정보가 새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한다.
위저드 네메시스는 메인 시스템에 접속이 완료되면 내 객실 비밀번호를 코드넘버로 바꿔라.
배의 탑승객 중 우리의 존재를 아는 고위 비밀 요원을 몇 위장하여 숨겨 두었다. 목깃에 달린 금색 브로치로 그들을 식별할 수 있다.
이번 작전에 타이타닉 모든 탑승객의 안전은 바벨탑의 설계자에게 달렸다. 할리우드 톱스타와 세계 10대 기업 CEO들은 물론이고, 미국의 대통령과 영국의 여왕도 탑승해 있는 선박이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1022. 바벨탑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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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빈 오빠 특유의 사무적인 말투가 그대로 묻어나는 이메일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구준회랑 계속 붙어 다녀야 하네. 한빈 오빠의 명령은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어기고 싶어도 어길 수 없었다. ‘바벨탑의 설계자’의 리더가 그로 결정된 것은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십 년 넘게 리더 역할을 해온 한빈 오빠의 말에는 그만큼의 신의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봤지? 그냥 조용히 이 오빠랑 다니세요, 어디 가서 사고 치지 말고.”
“아, 예, 오빠.”
한마디 던지고 구준회의 얼굴을 살피니 뭐 씹은 표정을 하고 있길래 뭐, 이 자식아, 라고 입을 열려는데, 그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한탄 섞인 말투로 내뱉었다.
“오빠라고 부르는데 혈압 오르는 건 또 처음이다.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가.”
썅, 오빠 오빠 그 타령 지겨워서 그렇게 해 줬더니, 또 지랄이다.
“해줘도, 안 해줘도 난리야. 그냥 고혈압 걸려서 뒤지는 게 어때, 오빠? 오빠? 오빠?”
“난 먼저 나가서 옷 갈아입는다, 옷 갈아입고 나와.”
구준회는 연신 오빠거리며 낄낄거리는 나를 애써 외면하고는 옷장을 열어 수트 한 벌을 꺼내들었다. 문을 쾅 닫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는데, 그의 양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미친, 쟤 진짜 고혈압 걸려서 뒤져버리면 어떡하지?
뒤지거나 말거나, 지 알아서 하겠지, 조용히 뇌까리며 열린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대충 눈에 띄는 새빨간 롱 드레스를 빼보니,
“미친, 이걸 어떻게 입어.”
등이 훅 파인 것이 입지도 않았는데 너무나 확연히 보일 만큼 노출이 심했다. 구준회며 김동혁이며 지원 오빠, 한빈 오빠, 모두 있을 텐데 이렇게 야한 옷을 입고 싶지는 않았다. 평소 임무를 수행할 때는 더한 옷도 많이 입어봤지만, 멤버들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이는 건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내가 특별히 할 일은 없었기에 굳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을 필요는 없었다. 옷장을 다시 뒤져 그나마 노출이 덜한 무릎까지 오는 하늘색 시폰 드레스를 꺼냈다. AFT 수장과 마주하기 전까지는 청순한 이미지로 가지, 뭐, 하는 생각으로 드레스를 입고 재빠르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어떻게 할까, 하다 가볍게 컬을 주는 선에서 그쳤다.
문을 열고 나가니 구준회가 소파에 앉아 저격용 총을 닦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가 손을 멈췄고, 고개를 들어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살짝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눈길에 나는 그를 향한 질문을 끄집어냈다.
“오늘 총 쓸 일 없지 않아?”
“저격수가 총 쓸 일이 없기는 왜 없어. 뭐, 없더라도 준비는 항상 해둬야지. 준비 다 됐으면 가자.”
그가 저격용 총을 금고에 넣고 금고를 잠갔다. 소파에 걸쳐둔 수트 재킷을 걸치더니, 탁자 위에 둔 권총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 옆에 서자 새삼 키 차이가 실감이 났다. 키가 크기는 더럽게 크구나.
그에게 살짝 팔짱을 끼고 문으로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김동혁 보고 싶어.”
“아는 척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야, 내가 그걸 모르겠냐? 우리가 정보요원 한 지도 오 년 째인데.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봐?”
“벌써 오 년이야?”
구준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말이 좋아 정보요원이었지, 우리가 하는 일은 조폭이 하는 일과 같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나는 홍일점으로서 오십도 넘은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여 꾀어내어야만 했고, 구준회는 사람을 죽여왔다.
사실상 ‘바벨탑의 설계자’중 가장 힘든 일을 맡은 것은 구준회였다. 열여덟, 첫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구준회는 거의 일주일 동안이나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사 년이나 그 짓거리를 해온 것이었다. 급격히 우울해진 그의 얼굴에 나는 애써 분위기를 바꾸려 말을 걸었다.
“오빠, 오늘 파티에 미국 대통령이 출항 축하 연설 하는 거 알아?”
오빠라고 부르자마자 반응이 왔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으로 그가 나를 응시했다. 복도잖아, 우리끼리 있을 때 아니면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데, 웃으며 입 모양으로 조용히 속삭이자 그가 기가 차다는 듯 허, 하고 웃었다.
“새삼 타이타닉 스케일 실감 나네, 미국 대통령이라니.”
연회장은 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니, 바로 연회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껏 내가 경험했던 파티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모차르트의 왈츠가 연주되고 있었고, 나직한 목소리로 연설하는 말소리가 연회장 전체를 울렸다. 타이타닉의 상징인 떡갈나무 목재로 된 기둥과 아치, 높은 천장에는 드리워진 고풍스러운 샹들리에는 1800년대 후반, 혹은 1900년대 초반 유럽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깔끔하고 모던하다기보다도 예스럽고 클래식한 모습에 그렇게 떠들어대더니, 진짜 제대로 재현했구나, 감탄하며 연회장 깊숙이 들어섰다.
연회장은 사람으로 빽빽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유명 배우부터, 신문의 헤드라인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CEO까지. 현대판 귀족이라 불리는 사람이란 모든 사람은 다 타이타닉에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And today, we are here celebrate the most glorious moment in this century- (그리고 오늘, 우리는 축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세기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
복층 구조로 된 연회장의 2층 발코니에는 미국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The rebirth of the Titanic. (타이타닉의 부활을.)”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졌고, 배가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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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바벨탑 / 신 / 주내 / 마그마 / 토마토 / 준회원 / 준회 / 카누 / 준회(오빠) / 뿌요를 개로피자 / 꾸주네 / 둡우 / 숨소리 / 쓴다 / 동그라미 / 구주네 / 87주내 / 메추리 / 극찬준회 / 아침 / 밀실의 저격수 / 환생
안녕하세요! 맥심화이트골드입니다
약속대로 이번에는 빨리 들고왔네요 헤헤
방학 안에 최대한 진행을 많이 시켜두려구요 :)
지금은 초반부라 약간 지루하고 질질 끌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ㅠㅠㅠㅠㅠㅠ
벌써 두 회 연속 준회만 등장했지만...☆
다음 화에는 지원이 한빈이 동혁이 다 나올 예정입니다 쪼금만 기다려주세요!
호흡이 긴 소설이예요, 초반부보다 후반부가 훨씬 재미있을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 천천히 즐겨주시길!
재미없는 글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정말 사 사 좋아합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