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남편, 최고의 사업 파트너, 김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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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 번도 누구에게도 말하진 못 했지만, 나에겐 늘 그려왔던 이상적인 미래가 있었다.
늘 엄하기만 하신 부모님을 보며, 난 꼭 나중에 돈과 계약만이 오가는 정략결혼이 아닌,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와 사랑의 맹세를 하고, 애정과 축복속에 젖어 태어난 그와 나의 아이를 넘쳐나는 사랑과 관심 속에서 키우겠노라고.
우리 부모님께선 나를 온실 속 화초처럼, 때론 방 한 구석에 나뒹구는 옷가지처럼 기르셨다. 차가운 어머니 아버지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자란 난, 물질적으론 부족함 하나 없이 컸어도, 마음 한 구석 어딘가는 많이 결여된 채였다.
영민그룹의 훌륭한 딸로 자라는 순간 속에서 난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준면을 처음 만난 건, 그래, 열 아홉 무렵이었다. 아마 그는 기억 못 할 거다. 말이 좋아 대한민국 상류층들의 사교모임이었지, 역겨운 가쉽을 위한 자리나 다름 없었다.
난 그런 모임 속에서 준면오빠를 처음 발견했다.
난 모두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자 시기와 멸시의 대상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저런 모임이건 발레학원에서나 자주 마주쳤을 법한 얼굴들이 다였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난 매일같이 그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녀들에게 다리를 걸려 넘어지고, 깔깔대며 비웃는 아이들의 모습에 화장실로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고개를 들면, 신기하게도 내 앞엔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내미는 준면오빠가 있었다.
오빤 늘 웃으며 자신의 깨끗한 행거치프로 내 드레스에 쏟아진 음료나 크림을 닦아주었다.
그 후로 그런 그의 친절이 몇 번이나 다가왔을까, 나는 남몰래 오빠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의 미소엔 오만함과 교활함 그 무엇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늘 지저분하고 가식만이 덕지덕지 붙은 가면들을 마주하던 난, 처음으로 깨끗하고 인간다운 미소를 봤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 정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사람이란,
바로 당신같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구나.
나는 항상 그를 바라보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오빠의 곁엔 남자건 여자건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난 알고있었다.
그것은 그가 태성그룹의 차남이라서가 아니라는 걸.
당신은 충분히 멋지고, 도덕적이며, 따뜻한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당신에게 존재하는 사람과 신뢰는 당연했다.
어느날은 학교에서 다녀오자 우리집에 그가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하하호호 떠드는 어머니의 등 뒤로 숨어버리고 말았지만, 한편으론 기뻤다.
아버지께선 태성그룹의 둘째 아들이라며 내게 준면오빠를 소개했다.
우린 집안 간의 연결고리로 왕래가 잦아졌고, 그럭저럭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난, 점점 너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느껴갔다.
넌 날 편한 여동생 혹은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따로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서, 우리가 훌쩍 커 버렸고,
아버지의 입에서 너와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맞아, 비겁했다.
난 가약이 아닌 계약을 택했고,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딸이라는 핑계로 네 옆자리를 차지하고싶었다.
이상했다.
내가 그려왔던 미래 속에 너와 난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 보니,
난 세 사람이나 울려버리고 말았다.
**
마음을 추스리고 난 뒤는 이미 시곗바늘이 자정을 넘은 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우린 반나절이 넘는 시간이 걸린 거리를 이동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어렵사리 파도소리가 들리는 가까운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결정 했다.
따뜻하게 난방이 된 바닥에 이불을 덮고 누워 깜깜한 천장만 주시하다가, 나직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여보."
"응?"
"내가 저번에 말했던 장기 출장 있잖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병원에서 너와 내가 다투었던 그 날. 죽을 다 먹는 모습을 보고 떠날거라 말하던 당신의 차가운 모습.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이쯤 되면 떠날 시기도 지났다. 미뤘다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나 많을 정도로 그의 일상은 여유로웠다.
"좀 많이, 길어질 것 같아. 목적지도 뉴욕 지사로 바뀌었고."
미국의 한 지명을 읊는 그의 목소리에서 자연스레 난 항상 어떻게든 나쁘게 굴러갈 수 있는 우리의 끝을 그린다.
우리가 사이가 아주 나쁘지 않았을 때, 난 항상 출장을 나서는 당신을 배웅해주며 장난처럼 말하곤 했는데. 회장님 눈 밖에 난 건 아니죠, 이사님?
쫓겨나듯 해외 지사로 발령나는 회사 임원들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 그래서 지금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가지 뿐이었다.
얼마, 얼마나 걸리는데 대체.
"누군가를 잊기엔 부족함 없을만큼의 시간."
"…"
"같이 갈래?"
그 물음에는 수많은 말들이 함축되어 있겠지. 어쩌면 우린 새로운 곳에서, 모두 다 잊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당신이나 나나 서로의 얼굴을 보며 죽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괴로워 할 수도 있겠지.
내가 지금 당신의 손을 잡는다면, 우린 함께 뉴욕으로 떠나 그녀를 서서히 잊어 가면 되는 거고,
내가 지금 당신의 손을 놔 버린다면 당신은 그곳에서 홀로 날 잊어야 할 것이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지금 그의 손을 잡게 되면, 앞으로 평생 놓을 수 없다는 것.
"싫어…."
"…"
"안 갈래…."
아니, 우린 평생 그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 할 거야.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마주할 때마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누군가를 찾는 일이 당신에게 더 쉬울지도 몰라.
그러니 당신은 날 잊어.
나도 당신을 천천히 잊어갈게.
**
그가 뉴욕으로 떠나기 이틀 전날 밤의 한 호텔의 뱅큇홀에서 송별회가 있었다. 우리가 모두의 눈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그 곳.
그래도 마지막은 잘 마무리 해야겠지 싶어서, 서로의 식구들에겐 우리가 함께 떠날 것처럼 입을 맞췄고,
이혼 숙려기간이 지난 덕에 조용히 서류를 정리하기만 하면 우리 관계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그의 가족들과 나의 가족들, 그리고 여러 지인들이 그의 앞날을 위해 함께 축배를 들었다.
"제수씨, 오랜만이네요?"
"아, 안녕하세요 아주버님. 오랜만에 뵙네요."
"두 사람, 새로운 곳에 가서도 행복하길 바라요."
"감사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와의 끝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맞는 인사는 모두 그와 나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것들이었다.
만약 그와 내가 평범한 집안에서 자라, 평범한 인연으로, 평범한 만남을 가졌더라면.
이런 형식적인 인사치레들마저도 반가웠을 텐데.
온갖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섥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샴페인 잔을 들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렸을 적처럼 내게 씩 웃어줬다.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온 그는 내 손을 잡고 강단 위로 올라갔다.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저희 이혼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소식을 몰랐던 어른들께선 굳은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셨다. 왁자지껄했던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숨이 막혔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흰 사랑 없는 결혼을 했습니다."
어렸던 우린 모든 걸 맡긴 채로 어른들의 넘치는 야욕을 잠재워 줄 선택을 따라야 했다. 그 뿐이었다.
"그 때문에, 제가 이 사람을 많이 힘들게 했습니다."
"…"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모든 걸 돌려놓으려고 합니다."
"…"
"저의 앞길과 더불어, 이 사람의 앞길을 축복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는 정중히 모두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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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생각 정리가 다 안 된 터라 조만간 이것저것 잡다한 문제로 공지 올릴게요...
여러분, 괜찮은 거죠?
전 항상 여러분이 행복하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