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온도 10 ℃
written SOW.
6.
입학식 전날 까지 이어져온 반톡의 분위기는 꽤나 괜찮았다. 여주도 그 틈에 이모티콘하나를 보내봤지만
그 누구도 아는척 하지 않음에 그저 눈팅만 하고 있었다. 내일이 입학식이라 그런지 반아이들은 반톡으로 조금 더 친해져보겠단 생각인 것 같았다.
덕분에 반톡은 불이 날 지경이었다. 열심히 반톡을 읽던 여주는 반톡을 무음으로 돌려놓고 열심히 게임 중이었다.
그것도 PC방에서.
남자를 무서워하는 여주가 유일하게 견디는 장소는 바로 PC방이었다. 게임이라면 환장을 하는 여주는 비싸다는 플스, 엑박, 등
게임에 돈을 쏟아부었다. 그 만큼 잘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요즘 여주가 빠진 게임은 핫하다는 '워버오치'였다. 덕분에 PC방 단골이 될 수 밖에없었다.
OT후, 여주는 만나자는 친구들에도 불구하고 PC방에서 살았다. 아침 이벤트하고, 점심 이벤트하고, 저녁에 PC방 만두를 먹으며 휴식을 즐기면
그만큼 편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친구들이 같이 와주기도 하지만 거의 혼자 오는게 대부분이었고, 그게 더 편하기도 했다.
P.M. 7:30
이제 집에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여주는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났다. 자그마치 5시간동안
게임만 해서 그런지 허기졌기도 했고, 이예리나 불러서 라면먹자고할까. 핸드폰을 꺼내 예리에게 전화를 걸던 여주는
난데 없이 PC방 귀퉁이에서 튀어나오는 남자둘과 부딪혔다. 상황을 보아하니 라면국물을 달라며 실갱이를 벌이던거 같은데,
문제는 그 라면국물이 모조리 여주의 모자 위로 쏟아졌다는 거였다.
원래 여주는 욕을 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욕을 좀 해도 될 상황인거 같았다. 씨발.
여주의 하얀모자 위로 흐르는 라면국물에 지민과 태형은 경악했다. 헐, 좆됬다.
눈빛을 교환한 지민과 태형은 신속히 행동을 실천했다. 일단 태형은 여자에게 사과를 구해야했다. 쏟아부운건
지민의 라면국물을 들고 튄 태형이었으니. "아, 저 죄송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화장지를 통으로 들고 온 지민은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 여주의 모자를 닦아내렸다. 다행히 모자를 써서 얼굴은 안 젖었으나 여주가 가장 아끼는 옷인 항공점퍼가 젖었다. 흠뻑.
"아, 씨발 진짜 ‥."
짜증나다 못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이 가장 아끼다 못해 사랑하는 제 남동생이 세뱃돈으로 사준 거였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게 남자든 뭐든 여주는 그냥 화가나고, 눈물이 났다. 빌어먹을 눈물샘은 항상 슬플 때가 아니라 화날 때 터지더라.
"헐, 울어요? 아, 어떡하지."
우는 여주에 당황한건 두 남자였다. 지민은 더욱더 모자를 깨끗이 닦았고, 태형은 여주의 항공점퍼를 제 손으로 툭툭 털었다.
다행히도 방수인지 방울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라면국물에 태형은 내심 안심했다. 아, 항공점퍼까지 다 젖었으면 그냥 난 뒤지는거야.
하지만 문제는 여주의 상태였다. 퐁퐁쏟아져나오는 여자의 눈물에 안 약해질 남자는 거의 없다.
게다가 남자형제만 있는 지민은 오죽하랴, 지민도 눈물을 한바가지 쏟고 싶었다. 아, 김태형 씨발.. 라면국물을 왜 들고 튀어선.
"아, 괜찮,끕,아여.."
라면국물은 라면국물이고, 남자는 남자였다. 뒤늦게야 자신에게 국물을 쏟은 이들이 남자라는 걸 확인한 여주는
자리를 빠져나가려했다, 그러했다. 하지만 제 손을 부여잡는 남자에 그를 올려다봤다. 하, 죽고싶다.
데자뷰인가, 왜 지금 내 손을 잡은 남자가 나한테 천원을 뜯어간 걔처럼 보이지.
"어, 천원?"
"뭐? 그 여자애?"
태형도 여주를 알아봤는지 천원? 이라고 말해왔고, 그를 알아들은 지민이 곧 여주를 알아보곤
모자 벗어달라며, 자신이 빨아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여주는 그런 지민에게 괜찮다며 모자를 벗어 나가려했다.
하지만 또 다시 잡힌 팔목에 태형이겠거니 손을 뿌리치던 여주는 꽉잡고 놓아주지 않는 남자에 뒤돌아서 놓아달라고 했지만
생판 처음보는 남자에 말문이 막혔다. "누구세요?"
"누구세요라니, 니가 나한테 미안하다고도 안하고, 손도 뿌리치고 간 사람인데."
"내가 언제 그랬...!" 반박하려던 여주의 입이 다물렸다. 아, 있다. OT날 아침, 너무 무서워서 그냥 튀었지 참.
아 이 사람 겁나 무섭게 생겼는데? 나 때리는거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 사람 많은데선 안 때리겠지..?
눈치를 보는 여주에 승기는 정국쪽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전세역전된 상황에 지민과 태형은 어리둥절해 했다.
"야, 전정국. 너 천원이랑 아는사이야?"
태형이 정국에게 아는 사이냐고 묻자, 정국은 태연히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온 여주의 입에선 아니라고 했다.
어느 쪽을 믿어야하나 혼란스러워하는 지민과 태형에 정국이 여주에게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쪽은 사람 쳐 놓고 그냥 잊으면 끝인가봐."
정국의 차가운 말투에 말랐던 눈물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한 여주가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했다.
"죄송해요, 제가 그 날 렌즈를 안 껴서 그 쪽 얼굴을 못 봤을꺼에요."
순순히 사과하는 여주에 오히려 당황한 건 정국이었다. 이렇게 쉽게 사과해버리면 뭔가 내가 나쁜 놈이 된거 같은데,
게다가 ‥ 아, 눈물은 또 왜 고여있어.
"그럼 갈게요. 세탁비는 괜찮아요."
모자를 쓰지 않은 덕에 여주의 눈에 눈물이 찬 걸 못본 사람은 없었다. 지민과 태형은 '이 쓰레기 새끼.'라는 표정으로 정국을 봤고,
이 상황을 보고있던 PC방 주인(지민이네 삼촌)은 마저도 혀를 찼다. 황급히 나가는 여주의 뒤에 대고 PC방 주인은 "다음에 오면 10시간 줄게! 미안해요!"
라고 외쳤다. 여주는 대꾸 없이 나갔지만 그건 들썩이는 어깨가 우느라 대답하지 못했음을 알려줬다. 한숨을 쉰 정국이 자꾸만
아른거리는 여주의 눈물에 자꾸 후회감이 밀려왔다. 아, 아는 척하지말껄. 괜히 말 걸고 싶어서, 애 같이.
"아, 진짜 미안해 죽겠다. 저거 라면국물 냄새 엄청날텐데."
지민이 라면국물에 적셔진 많은 양의 휴지를 치우며 말했다. 그에 태형은 항공점퍼를 털었던 손을 씻고 물기를 털며
화장실을 나왔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머리를 긁적이는 정국에 태형이 정국의 등을 탁! 치며 말했다.
"너 답지않게 뭘 또 죽어있냐! 어차피 이제 안 볼지도 모르는 사이인데. 그냥 털어버려 임마!"
"씨발, 안 볼 사이가 아니니까 이러는거 아니야."
정국의 의미모를 말에 의아해하던 지민이 무슨소리냐고 물었다. 그리고 태형과 지민은,
정국의 답을 듣자마자 뒷목을 잡았다.
"너랑, 같은 반이라고?"
"와, 그럼 우리랑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라는거..?"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정국에 태형과 지민은 절망했다. 벌써부터 학교가 가기 싫어지는 느낌이랄까.
7.
일어나자마자 얼굴을 확인한 여주는 눈이 붓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후, 첫날에 붕어로 찍힐 뻔 했네.
여유있게 일어난 덕에 오랜만에 멋 좀 부려볼까 하는 생각에 여주는 중학교 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선크림을 발랐다.
아침에 내가 선크림을 바르다니, 스킨로션도 제대로 바르지 않던 중학교 때에 비하면 사람됬다며 저를 칭찬해줄 친구들에 웃음짓던
여주가 선크림을 다 바르자 마이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코를 한 번 훌쩍였지만, 그래도 새 교복 위에 겉옷을 입을 순 없었다.
홀로 가는 등굣길이 쓸쓸한지 계속 친구들과 메신저를 주고 받던 여주는 어제 새벽에 온 자신의 친구의 메세지를 확인했다.
원래 연락도 잘 안하던 앤데, 왠일로 나한테 먼저? 대화의 내용은 여주의 학교에 친구가 있는데 걔도 4반이라더라, 같이 다녀라.
뭐 이런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름도, 얼굴도 안 알려줬다는 점.
"어쩌라는거야."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여주가 교문을 통과했다. 와, 진짜 여자애들 다 예쁘다.
중학교 때랑은 많이 다르게 꽤나 화장을 한 여자아이들에 여주가 감탄했다. 제 친구들도 어디서 꿀리진 않는데,
이 학교는 여신들만 오나.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3층으로 향하려 했을까, 익숙하지만 낯선 세 개의 머리통에 여주가 발걸음을 멈췄다.
PC방 얼간이들. 여주는 저 세 남자애들을 그렇게 칭하기로 했다. 근데, 자신과 같은 학교였다니.
절망에 절망을 더해도 이렇게 절망스럽진 않을 것이다. 여주는 그저 저 세 사람 중 아무도 자신과 같은 반이 되지 않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반에 들어갔지만, 아무도 모르는 얼굴에 여주는 창가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 심장떨려.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먼저 다가갈까? 아니면 그냥 기다려? 괜히 단톡에 아무말이나 보내놓고 친구들의 답을 기다렸을까,
갑자기 제 옆에 앉는 누군가에 여주가 화들짝 놀라며 옆자리의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와, 드럽게 예쁘네 진짜. 흘끗 본 명찰엔 '배주현'이라고 적혀있었다. 스탯을 외모에 다 찍은거 같은데, 부럽다.
난 게임에만 스탯을 찍었나봐 .. 엄마 나 너무 서럽다..
"여기 앉아도 되지?"
"어, 응!"
목소리도 예뻐, 마상. 여주는 제게 말을 건 주현에 넋을 놓고 쳐다봤다. 그에 작게 웃은 주현이
왜 그렇게 쳐다보냐며 물었다. 당황한 여주가 아, 미안. 너무 예뻐서..라고 하자 주현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뭐래, 나 안 예뻐. 친해지려고 칭찬하는거면 사양이야."
"아 진짜야! 진심으로!"
"역시, 정수정 말대로네."
"어? 너 수정이 알아?"
정수정, 여주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나왔으며 내내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여주는주
현과 수정이 아는 사이인게 신기한지 계속 말을 걸었고, 주현은 귀찮아하지 않고 계속 답해줬다.
"너네 학교에서 혼자왔어?"
주현의 말에 시무룩해하며 그렇다고 대답한 여주가 자기 빼고 다 근처 학교라며 이건 저주라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주현이 자신도 혼자 떨어졌다며 다른 애들도 같이 왔는데 중학교 때 별로 안 친했던 애들이라고 했다.
"아, 정수정이 말했던 애가 너구나. 걔가 원래 연락 안하던 앤데 갑자기 톡해서 깜짝 놀랐는데
친하게 지내보라면서 이름도 안 알려주고 그랬어. "
"걔 원래 이상해."
수정이의 얘기로 공통점을 찾자, 주현과 여주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실제로 말이 잘 통하기도 했고.
여주는 친구를 사귀었다는 기쁨에 '세 얼간이'를 잠깐 잊었다. 다시 그들을 떠올린 건 담임선생님이 출석을 거의 다 부를 때 쯤,
뒤늦게 들어온 남자아이 하나 덕분이었다. 미친, 쟤 설마 우리반은 아니겠지? 아닐거야.
"니가 전정국이냐."
"예."
"앞으로 늦지 말아라. 앉아."
담임선생님의 작은 꾸지람을 들은 정국은 제 가방이 놓여져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여주는 자꾸 정국이 자신의 뒷자리, 비어있는 뒷자리로 오는 것 같아 제발 아닐 것이라며 현실을 부정했지만
이미 정국은 여주의 뒷자리에 앉은 후 였다.
말도 안돼, 쟤가 우리 반? 아니, 그것보다 동갑이었어?
담임선생님이 뭐라고 하는 줄도 모른 채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여주는 '모른 척' 작전을 실시하기로 했다.
어제 눈물을 보인 것도 창피해 죽겠는데, 같은 반이라니. 1년 동안 어떻게 피해다녀야 하나에 대한 걱정으로 여주의 머리는 이미
가득 찬 상태였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의 '제비뽑기'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여주가 옆자리의 주현을 붙잡고 물었다.
"설마, 제비뽑기로 자리 뽑는다던가, 이런거 아니지?"
"맞을껄."
아, (비속어). 여주는 운이 없는 편이었다. 17년동안 그래왔고, 그럴 것이다. 하지만 가장 없는 운을 꼽자면 바로 '자리 운'이었다.
항상 친한친구들과는 떨어져 앉고, 껄끄러운 사람들과만 붙는 여주의 '마이너스 손'은 이미 친구들 사이에선 유명했다.
그저 저 남자애, 전정국이라고 했던가. 저 애만 안 걸리면 좋으련만. 여주는 빌고 또 빌었다.
"여주야, 몇 번이야."
"나, 24번."
"오, 나 18번인데."
다행히 이번엔 새학기라고 자리 신이 주현이를 내 앞자리로 보내주신건가. 여주는 안도하며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설마. 짝궁이 전정국이겠어? 그럼 진짜 드라마지.
억지로 자신의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던 여주는 제 옆에 드리우는 익숙한 그림자가, 익숙한 가방이.
아니길 바랬다.
"…."
옆자리에, 전정국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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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고마워라 근데 아직 정식 연재는 아님 큼큼!
벌려놓은게 많아서ㅠㅠ 댓글 하나하나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암호닉은 이건 아직 안 받을거 같아요!
다들 시험 힘내시고!!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