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의 역사
02
(부제: 연애학개론)
연애학개론.
내가 이 교양 때문에 전공필수도 제쳐두고 수강신청에 목숨을 걸었다. 수 공강 만들려고 했는데, 연애학개론 때문에 깔끔하게 포기했다. 수강신청은 웬만한 아이돌 콘서트보다 치열했다. 다들 사랑에 목말랐구나... 연애학개론은 최근 대학가에서 유행하고 있는 사랑과 성에 관한 교양과목이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한 학기 동안 한 달에 한 명씩, 총 세 명의 가상 연애 상대와 데이트 미션을 해야 한다는 점. 독특한 커리큘럼 덕분에 '대학판 우결'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연애학개론 수업에서는 데이트 코스를 짜서 기차여행 다녀오기가 과제로 주어지고, 이것저것 성에 관한 유익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이번 수업이 두번째였나, 세번째였나. 수요일 1교시였지만, 학생들이 바글바글하다. 아마 여기 도강하는 사람도 꽤 되지 싶다.
"김민규"
"네"
익숙한 이름에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역시나 익숙한 얼굴. 얘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아무렇지도 않게 내옆에 앉는다. 그러고서는 한다는 말이
"카톡 답 안하지"
"야, 누가 들으면 우리 그렇고 그런 사인줄 알겠다. "
출석을 다 부르고 시작해볼까요? 하는 교수님의 말씀에 고개를 돌렸고, 지난 시간 OT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짝을 정한다고 했다. 교수님 말도 끝나기 전에 갑자기 김민규가 내 손에 깍지를 끼더니 위로 들어보이고는 크게 외쳤다.
"교수님 저희는 짝 정했습니다."
아니, 이놈이?
놀랄새도 없이 김민규는 앞으로 나가 자기이름을 쓰고, 내이름도 쓰고.
나 진짜 김민규한테 평생 코 꿰이는게 아닐까... 교양을 핑계로 우리는 또 밥도 같이 먹어야 하고, 여행도 가야하고, 데이트도 해야하고... Aㅏ...
찌질의 역사
김민규는 확실히 우리학교 유명인사였다. 고등학교때 부터 주변 학교에서 잘생겼기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이 넓은 대학에 와서까지 유명할줄은 몰랐다. 동기에게 김민규를 물었더니, SNS에서 한번 화제였단다. S대 경영학과 훈남으로. 김민규가 잘생긴건 인정. 근데, 그렇게 잘생겼나. 그정도는 아닌것 같은데...
고등학교 시절, 나는 성수여고에서 예쁜 언니로 통했다.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예쁜 애가 누구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아니었지만 서너 명 정도는 꼭 나를 언급했던 것 같다. 급식 먹으러 갈 때나 이동수업시간에 복도에서 진짜 예쁘다... 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동아리 홍보하러 갈 때나 후배들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언니 예뻐요 하고 지나가는 아가들도 몇몇 있었다. 응, 나 예쁘다고.
아, 그리고 별명은 하나 더 있었다. 쌈닭. 어디 가서 절대 지고는 못 산다. 그렇다고 먼저 싸움을 걸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한 번뿐인 삶인데 지고 살면 억울하잖아. 또 성수여고에서 선도부장을 맡았는데,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1학년이었나 2학년이었나. 어쨌든 아침 등교 시간에 교문을 통과하는 애기 머리가 노란거다. 뿌리는 까맣고 그래서 불렀지. "친구야^^ 머리" 하고, 그런데 눈을 똑바로 보고 한다는 말이 "자연갈색인데요? 알지도 못하면서 왜 지랄이래" 몇 년 전 일인데도 화나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어쩌긴 뭘 어째 전교 다 돌아서 찾아냈지. 선도부장 선생님한테 넘기고, 착하게 타일렀다. 아마? 이 이야기를 왜 꺼냈냐고?
김민규가 학교 내에서 유명인사였기에 덩달아 나까지 피곤해졌다. 세 번째 연애학개론 시간이었다. 김민규는 안 보이고, 혼자 자리에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 쟤 아니야? 김민규 뺏어간 애? 와? 나? 이게 무슨 개소리야 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웬 여자 무리가 나를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수군댄다. 들으라고 하는 건가. 뭐, 이거 그냥 나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고, 직접 이야기 하자니 귀찮고 놔 두자니 신경쓰인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들 가까이로 가니 움찔하는게 눈에 다 보인다.
"저기요, 제가 김민규 채간게 아니구요. 둘이 무슨 사인지는 모르겠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데, 아 그냥 제발 김민규 좀 데리고 가세요."
때마침 김민규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선다. 잘 왔네 김민규. 3자대면 각인가.
"민규야, 내가 너 채갔대. 네 사생활 안궁금한데, 왜 나까지 엮어서 욕먹게 해. 짜증나게. 미친놈아"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김민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OO야, 예나 지금이나 오빠가 인기가 너무 많네. 어쩌겠어. 니가 이해해. 내가 미안해."
진짜 진심으로 김민규 없애고 싶다.
*
오늘 너무 피곤한 하루를 보냈다. 아까 수업을 마치고 김민규가 과제도 할겸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귀찮기도 하고, 아까 있었던 일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라 수업있다며 거절하자, 김민규가 오늘 수업 교양밖에 없는거 다 안다며 먼저 선수쳤다. 정문언저리에 위치한 식당으로 들어서자, 여자들이 또 김민규를 보고 수군댄다. 오, 내 이야기도 들린다. 들으나 마나 김민규랑 무슨 사인지, 내 얼굴이 어떻고 몸매가 어떻고 아깝니 마니 하는 이야기겠지. 여자들의 시기와 질투란. 오늘은 빨리 자자 라며 이른시간에 침대에 누웠다.
(카톡)
나는 잠들려고 하는데 카톡하는 애들이 제일 싫더라. 또 누구야.
16 경영 김민규
-자?
-아니, 근데 카톡 너무 구남친스럽다.
- 안자고 뭐해
- 자려고 누웠는데 네 카톡 때문에 잠 다깼다.
-기숙사 앞이야
-잠깐 나올래?
나갈까 말까.
여러분 체리에요.
찌질의 역사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