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 안 인어
w. 문달
Chapter 14. spirit away
밤이 걷힌다. 도림은 창문을 열고 가볍고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꿀렁꿀렁 해가 솟아오른다. 어떤 날은 쌀쌀맞고, 어떤 날은 친절하다.
계절 하나를 지나가고 있다. 밖으로 보이는 나무가 앙상하다.
무릎 아프다고. 제게 퉁명스러운 걱정을 날리던 목소리가 걸레질할 때마다 들렸다. 그때마다 도림은 손을 잠시 멈추고 정우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시뻘게진 얼굴로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일어나야 뭘 좀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판형은 두 가지를 물었다. 첫 번째는 바쁜 자기를 대신하여 정우의 방을 관리하는 일을 해줄 수 있겠느냐였다. 도림은 하겠다고 했다. 두 번째는 자기의 결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느냐였다. 도림은 모르겠다고 답했다. 정우 처지에서 보면 정우의 손을, 판형 입장에서는 판형의 손을 들어줄 만 했기 때문이다.
정우는 어떻게 지내는 지아시냐고 종종 묻는다. 그때마다 판형은 그럭저럭 지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계주가 보안상 촬영은 못 한다고 하더라.
개인 전자기기를 안으로 아예 들고 갈 수 없는 삼엄한 경비라고 했다.
정우를 기다리는 이들은 그의 말만 무조건 믿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판형은 정우가 무사히 돌아오고 나서도 관계 회복이 되지 않을까 봐 두려워했다. 도림은 겉으론 위로했지만 어쩔 수 없는 대가를 치를 것으로 생각했다.
물이 다 빠진 욕조는 한없이 어색해 보였다. 여전히 욕실은 시간을 알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도림의 귀에는 정우의 목소리가 아닌 손목에 찬 시계의 작고 하찮은 바늘 소리가 크게 들렸다.
만져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림은 허공에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스르륵 팔이 내려갔다.
도림은 무교였지만 엄마인 말희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원망할 곳이 필요해서였다. 아무런 응답이 없어서 마음 놓고 탓하기 좋았다.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완전히 감지는 않았고 종종 실눈을 뜨고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을 살핀다. 즙 짜내듯 손바닥끼리 딱 붙여서 속으로 세게 부른다. 주님! 저는 기다릴 수 있으니까 정우가 무사한지만 알려주시라고요. 엄마한테는 꿈으로 이것저것 알려주며 제게 훈수 두게 하시면서 저한테는 왜 안 알려주세요? 꿈에서라도 만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말희는 또래 사회 초년생들보다도 돈을 쉽게 많이 버는 도림더러 친구들과 비슷한 직장을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언제까지 여기서 염치없이 일할 순 없지 않으냐 바가지를 긁었다. 도림은 바깥으로 나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가며 일하다가는 정우를 잊을 것 같다고, 두렵다고 버텼다.
후회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말희는 전반적인 생을 통틀어 도림을 이 집안에 들인 것을 가장 후회했다. 자기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사는 것만 같아서.
청소를 끝내고도 오래도록 정우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 도림을 보며 생각했다. 판형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다고. 하지만 현재의 판형은 도림이라도 없으면 정말 쓰러질 수 있었기에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참았다.
판형은 일기를 쓴다. 일에 바빠서 시간이 나면 자는 게 우선이었는데 피로를 내쳐가며 한 자라도 더 적으려고 했다.
대부분 내용은 파괴적이고 암울해서 판형도 뒤돌아보지 못하는 문장들이 엮여 있다.
피눈물로 적신 육아 일기를 가끔 뒤적인다. 지금 쓰는 일기보다야는 수위가 낮지만, 상대적일 뿐 결코 일반적인 사랑이 담겨있지는 않다.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날 사랑한 적 없던 거야.
서로를 할퀴고 무너뜨리는 것 말고는 없는 관계가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을까. 그러는 너는 날 사랑했던 적 있냐고 묻고 싶다.
오늘도 정우의 널따란 침대에서 자는 도림을 보다가 살살 문을 닫고 나왔다. 제 방으로 돌아가 메일함을 살피던 판형은 계주가 사흘 전 보낸 메일을 아직도 읽지 않았단 걸 확인했다.
하도 일이 많아서겠거니 했다. 이해하려던 마음은 의혹으로 옮겨갔다.
극도의 불안을 느낀 판형은 모든 스케줄을 미뤄두고 스위스행을 끊었다.
몇 통의 메일을 더 보냈지만 죄다 읽지 않음이었다. 비행하는 내내 눈도 못 붙이고 다리만 떨었다. 모든 연락 수단을 다 써봤지만, 계주는 받지 않았다.
주소는 받아놓았었어 그곳으로 바로 찾아갔다.
에밀 박사를 찾았지만, 경비들은 모른다고만 했다. 동양인 남자가 여기서 일하지 않냐고 물었지만 돌아가라는 대답만 내놓았다.
답답하고 분통이 터져서 눈물이 나왔다. 일주일을 수소문하며 떠돈 끝에 에밀 박사를 아는 이를 만났다.
[생체 실험으로 협회에서 쫓겨난 지가 언젠데 그 인간.]
보이지 않는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억장이라고 하던가.
판형은 가슴을 뜯을 듯이 잡고 주저앉았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여기서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야 한다.
그들에게 정우를 빼앗겼다.
도림이 정우를 자기 못지않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안다. 판형은 한국에 있는 말희와 도림에게는 일단 절망적인 이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동사무소에 장기 체류 신청을 넣어놨다.
임시 거주 아파트는 썰렁했다. 토막잠만 자다 나오는 곳이라 온기가 없었다.
쓰러질 듯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돌아다녔다. 전화는 계주가 아니면 받지 않았다. 죽을 뻔한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인정 많은 옆집 여자가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기지 않는 판형을 챙겼다. 철없이 방황도 해보았다. 예전처럼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에 절어 보내기도 했다.
축 늘어져선 바닥에 빈 와인 병을 굴려 보내던 자신을 말간 눈으로 멸시하던 어린 정우.
그 애를 생각하면 속이 뒤집혔다. 가만히 있는데도 줄줄 눈물이 흘러서 울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엄마 한 번만 용서해주라.
[주민들이 당신이 갈 곳은 정신 병원이래요.]
옆집 여자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네며 걱정했다. 판형은 말없이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컵에 코를 박고 있었다.
판형이 제정신을 차리고 짐을 싼 건 계주가 답 메일을 보내온 새벽 두 시였다.
×××× / ×× / ×× ××:××:××
미안해, 답이 늦었어. 정우는 걱정하지 마. 네가 스위스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 우리는 다음 주 금요일에 한국에 갈 거야.
몇 시 비행기인지 정해지면 다시 연락할게.
계주가 일러준 시각에 맞춰 공항에 도착한 판형은 전보단 나아졌지만, 여전히 푸석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 뒤에서 도림과 말희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만 살폈다.
마침내 눈에 익은 계주의 얼굴이 보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혼자 트렁크를 끌고 나온 계주에게, 판형은 정우가 어딨는지 찾기보다는 먼저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마찰음이 크게 울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멈칫하며 쳐다보았다. 멀찍이 있던 도림과 말희가 놀라 뛰어와 말렸다. 계주의 얼굴이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맞아도 싸지."
계주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옛정을 생각해서 이걸로 그치는 거야."
"정우는요?"
도림이 치고 들어왔다. 말희가 도림의 등을 치며 눈치 좀 보라고 작은 소리로 나무랐다. 정우는요! 도림이 개의치 않고 따져 물었다.
대답을 함께 채근하는 판형의 눈빛에 계주는 발개진 뺨을 만지며 떠듬떠듬.
"곧. 곧 나올 거야."
도림은 약간 기대에 찼다. 설마 걸어 나올까, 혼자서? 목을 빼고 둘러봤다.
바삐 움직이는 인파 사이에서 창백한 얼굴의 정우를 마침내 발견했다.
잔뜩 굳어 선 채로 정우를 내 려 다 봤 다.
이제까지 올려다본 적도 없지만 정우를 내려다보는 건 전과 달랐다.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내며 도림이 손을 뻗었다.
물 없이 마르고 부드러운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김정우..."
흐리멍덩한 눈빛은 도림에게 오지 못했다. 정우를 부르는 도림의 목소리가 점점 가냘파졌다. 판형이 도림을 제치고 정우의 손을 꽉 잡아 흔들었다.
"정우야. 엄마야. 정우야."
원망의 눈총이 계주에게로 향했다. 판형이 고개를 홱 돌려 계주를 노려보았다. 계주가 시선을 피하며 외면했다. 정우의 다리를 덮고 있던 담요를 들춰내고 판형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정우의 하얗고 마른 다리는 온데간데없고, 차갑고 딱딱한 고철이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애한테 뭘 한 거야!"
판형이 소리를 지르며 계주에게 달려드는 걸 말희가 겨우 말렸다. 도림은 충격으로 공항 바닥을 더듬거리다가 바닥만큼이나 차가운 인조다리를 만지며 흐느꼈다. 공항 경찰들이 소란을 제지하려 몰려왔다.
움츠러든 계주는 그저 미안하다고 손을 모아 빌었다.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걸고 정우가 회복될 수 있게 성심껏 돕겠다고 하는 걸 판형이 내쳤다.
"나도 돈 많고 능력 있어. 넌 한 가지만 지키며 살면 돼. 다신 눈앞에 띄지 마."
Chapter 15. 온점
집에 돌아온 정우는 난생처음으로 자기 방의 침대에 앉게 되었다.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 언제든지 피부가 벗겨질 수 있다고 했다.
눈도 잘 못 마주치면서 뻔뻔하게 할 말은 다 하는 계주의 태도가 기가 차서 판형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혀를 두드렸다. 도림은 정우와 같이 있고 싶었지만 말희에 의해 끌려나갔다.
매일 기다렸던 아들인데. 차라리 악담을 퍼붓는 게 나을 텐데.
판형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입을 닫고 있는 정우를 보니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이 느껴졌다. 정우 곁에 살포시 앉아 동그란 뒤통수를 가만 보다가 발발 떨리는 손으로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아들. 엄마 좀 안 볼래?"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니 정우 같지 않았다. 판형은 올라오는 감정을 삼키며 계속해서 정우의 말문을 트이게 하려 시도했다. 날개뼈가 도드라진 등에 볼을 댔다. 끌어안은 허리는 품에 한참이나 남았다. 사납던 아이가 이렇게 얌전해지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이 끔찍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판형은 미동 없는 정우를 끌어안고 똑같은 말만 애달프게 되풀이했다.
도림은 새벽에 정우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 말희가 당분간 정우 방에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 일렀건만 한 귀로 듣고 넘겨버렸다.
원래 정우는 언제 찾아가든 항상 깨어 있었는데.
혹시라도 뒤에서 말희가 뒷목을 잡아 챌까 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까지 눈알을 도륵 굴렸다.
"으아규아그아욱아하아으흐...정우야아아...앉아서 자는 거 아니지?"
침대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있는 인영을 보고 놀란 도림이 문고리를 잡은 채 주저앉았다. 어두워서 눈이 뜨여 있는지 감겨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정면을 바라본 자세라 벽에 붙어서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정우야? 나 도림이야, 도도림."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것인지. 가까이서 본 정우는 두 눈을 가지런히 감고 있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조금씩 이동하면서 정우를 불렀다.
"정--우--야--자--니--?--?"
소곤소곤 귓가에 대고 물었다. 자나 보다 싶어 도림은 정우의 허리 뒤로 오른팔을 받쳤다. 편하게 눕혀놓고 갈 생각이었다. 깨지 않게 조심하려다 보니 힘이 들어가서 식은땀이 다 났다. 베개에 머리까지 뉘이고 깔린 팔을 빼려는데 강한 힘이 도림을 당겼다. 순식간이라 버티는 거 없이 정우 가슴께에 코를 박았다.
"늦었어."
얼얼함에 인상을 쓰던 도림이 눈을 번쩍 뜨고 턱을 추켜올렸다.
"정우 너"
잠도 안 자고 있었고 말도 할 줄 알았네. 라고 하려고 했으나 정우가 잘랐다.
"아주 많이 늦었어."
"나? 늦었다고?"
"기다렸는데.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안 왔어."
"정우야... 미안해. 내가 네 옆에 못 있어 줘서 미안해."
안간힘을 쓰며 옆으로 움직이려는 게 도림더러 누우라는 뜻인 것 같아 도림은 두 다리를 침대 위로 올렸다. 손바닥으로 헐떡이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혼자 악착같이 버텼을 정우가 가여웠다. 머리를 대고 있는 어깨조차도 부서질 것 같아 도림은 꿈틀거리며 위로 올라가 베개를 벴다.
"정우야. 나는 안 궁금해. 네가 무슨 일을 겪었고,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하나도 안 궁금해. 그냥 나는 네가 내가 알던 재수 없고 까탈스럽고 귀엽고 애 같은 정우였으면 좋겠어."
"나도 그래. 다 잊고 싶어. 끔찍해."
끔찍하다는 말에 부들부들 떠는 정우를 도림은 옆에서 꽉 껴안았다.
경련이 점차 멎어 들었다. 안정된 정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정우야. 네 옆에 있어 주진 못했지만 매일 네 생각은 했어! 진짜. 뻥 안치고 나 온종일 김정우 김정우 보고 싶어 정우야 돌아와 우리 정우 보고 싶어 이랬다니까?"
"그래?"
긴장이 탁 풀렸는지 도림의 입이 바빠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닦은 데 또 닦고 또 닦고 한다고 무릎 관절 다 나갔다 널 위해서 일요일마다 교회 나가서 기도도 했다, 조잘거리는 도림에 정우는 응, 응하며 장단 맞춰 주었다.
"내가 밤새도록 같이 있을게."
"당연히 그래야지."
"근데 나 잠버릇 좀 있어."
"설마 잘 생각을 했어? 발칙한데?"
"발칙은 너를 위한 단어고. 그럼 안 자냐? 봐봐하아 나 하품 나와."
"나 잠 못 자. 악몽 꾼단 말이야."
"내가 네 꿈속으로 놀러 갈게. 그래서 악몽 다 무찔러줄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도도림 넌 여전하구나."
"재밌는 얘기 해줄게. 자기 전에 듣는 마지막 얘기가 재밌으면 악몽은 안 꿀걸?"
"나 진심이야. 나 진짜 무서워. 아파서 깨는 게 아니야. 꿈속에서라도 그곳으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아 그래."
거의 애원하는 목소리로 정우가 말했다. 도림이 그를 토닥이며 화제를 돌렸다. 위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안 잔다고 하더니 느리게 기던 음성은 코골이가 되었다. 고목에 매달린 코알라처럼 정우 몸에 팔다리를 올리고 자는 도림이었다. 몹시 불편했으나 옆구리를 뜨겁게 채워주는 도림의 온기가 좋았다. 배 곯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정우는 괜히 도림의 눈치를 봤다. 얼른 해가 떴으면 좋겠다. 배고프니 얼른 아침 가져와.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어둔 새벽부터 입이 근질거렸다.
Chapter 16. off
정우는 도림의 입단속을 확실히 시켰다. 절대 자기가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며. 판형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그러나 판형은 굴하지 않고 정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개의치 않아 했다. 그녀가 노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정우의 입술은 그런데도 끄떡없었다.
갑작스레 열린 주주총회에 사람들은 당황해하면서도 모두 참석했다.
판형은 말희와 도림 그리고 정우에게도 와서 문 옆자리에 앉아 있으라 했다.
도림은 처음 와 보는 판형의 일터를 신나서 돌아다녔다.
그리고 생각보다 엄숙한 분위기에 왜 초대받았나 싶어 어리둥절해 하며 구석에 박혀 있었다. 정우는 안 가려고 고집을 부리다 도림에게 넘어가 하는 수 없이 왔지만 심기 불편한 표정이었다.
어떤 말을 하려고 모이라는 건가? 다들 의아해하는 중 판형이 뒤늦게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굳은 얼굴로 아무리 웃어봤자 편해 보이지 않았다.
정우는 판형이 있는 앞을 보려 하지 않았고, 판형은 맨 뒤에 있는 정우에게 시선을 두며 마이크에 입을 갖다 댔다.
"급작스럽게 잡힌 일정에도 불구하고 많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당분간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려고 합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탁한 숨과 함께 마이크로 퍼지는 목소리엔 결단이라는 게 서 있었다.
"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저를 둘러싼 괴소문들을 들은 적 있는 분들이라면 아실 것입니다. 애를 가둬놓고 키운다더라,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네. 저는 아들을 꼭꼭 숨겨두고 키웠습니다. 한 번도 밖에 나가게 해준 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 아들은."
도림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턱밑에 댔다.
"물에 몸이 닿아있지 않으면 전신의 피부가 벗겨지는 희소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아이는 욕조 밖을 나선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나쁜 엄마입니다. 일을 더 우선순위에 두고 아이를 집안에 버려둔 자격 없는 엄마입니다.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정상적인 모자 관계로 회복시키는 게 불가능 하다고 봅니다. 저와 회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실제로 행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얘야, 나는 널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너보다도 널 먹여 살릴 내 회사가 더 소중하다. 얘야, 온종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엄마는 돈을 벌어야 해. 틈나는 대로 찾아오는 거로 만족하렴. 얘야, 조금만 참으렴, 화내지 말렴, 울지 말렴."
판형의 목소리에 점차 울음이 번졌다. 도림이 찡한 코끝을 문질렀다.
" 제가 근 이십 년 동안 육신을 갈아가며 일한 결과 이렇게 좋은 분들과 크고 탄탄한 회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꼬리표를 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십 년은 말이죠, 여러분. 제 아들의 자그마한 인생과 맞바꾼 것입니다. 아이는 더는 저를 기다려주지 않는대요."
판형은 확실하게 울고 있었다. 그녀의 발음은 처음과 다를 바 없이 또박또박했지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만약 제게 이십 년이라는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면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고 나약한 감정에 호소해 이 자리에 나온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감히 이해해주시길 바란다는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연설문 하나 준비하지 않고 두서없이 뱉은 말.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판형이 허리를 앞으로 깊이 숙였다. 침묵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못 견뎌 한 정우가 도림의 옷자락을 쥐고 나가자고 했다. 옥상으로 가고 싶어 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하늘 정원`이라고 한쪽엔 흡연 부스를 두고 나름 예쁘게 조성된 직원 쉼터였다.
휠체어에서 손을 떼고 두 팔을 벌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던 도림을 정우가 나직이 불렀다.
"도도림."
"응?"
"난 엄마가 싫어."
"정우야 춥다. 이제 내려가자."
"무지무지 미워. 앞으로도 용서할 생각 없어. 난 엄마가 김계주만큼 싫어."
딴말하며 휠체어 방향을 돌리려던 도림의 손을 잡고 정우가 계속해서 판형을 향한 악담을 퍼부었다. 맞장구를 칠 수도 나무랄 수도 없었다.
어떡해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
"진심 아니잖아."
"뭐가?"
"정우 넌 툭하면 이거 싫다, 저거 싫다. 하지만 그거 다 진심으로 하는 말 아니잖아."
"아니야. 엄마한테는 달라. 싫은 건 싫은 거야."
도림이 뒤에서 목을 끌어안았다. 경직돼서 곁눈질만 겨우 한 정우를 알고 능청스레 비비적댔다.
"천천히 해 정우야."
"뭐, 뭘 천천히 해."
"용서하는 거. 사장님도 바로 사이가 풀어지는 건 기대도 안 하고 계실 거야.
그러니까 당장에 어떡할 생각 말고 천천히 해, 뭐든지."
바람에 도림의 머리칼이 나부낀다. 코를 간질이는 샴푸 향에 정우는 나른해짐을 느꼈다.
"도도림."
"응."
"네 말 잘 들을 테니까 평생 나랑 살아."
"엥? 지금 청혼하는 거야? 좀 당혹스럽다."
"진짜 싫다. 싫은데 좋아서 짜증 나."
"김정우 화법 어쩌면 좋지. 평생? 생각은 해볼게."
선심 썼다는 듯 거만한 어투가 거슬렸지만 참고서 말했다.
"천천히 하는 거 도와줘. 걷는 것도, 무언가를 배우는 것도."
"응응."
"엄마를
이해해보는 것도."
"...그래!"
"마지막은 엄청 힘들고 오래 걸리고 아마 죽어서도 못할 것 같긴 한데 지금 심정으로선."
부루퉁한 뺨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해주자 눈으로 욕을 했다. 도림은 재밌다고 깔깔거리며 도망치다가 다시 돌아와 반대쪽에도 똑같이 입을 붙였다. 배를 잡고 웃다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러면서도 웃음은 멈추지 않는다. 정우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피식 웃는다.
두고 보라고, 재활 치료 열심히 해서 너보다 더 빨리 뛸 거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새파랗게 질린 하늘에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웃음소리가 퍼진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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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 안 인어가 끝이 났습니다 우와~~ 오랜만에 후기로 찾아뵐게요~!~!
그동안 욕조 안 인어를 시청해주신 달달들 감사감사함디다 히히히히
++신..신알신 죄송함다!! 혹시 글이나 저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질문 남겨주세용 ㅎㅅ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