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
: 12
그렇게 박지민은 한참을 훌쩍이다 이내 부끄러웠는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 쪽팔려. 작게 들리는 목소리에 웃음이 터지고, 내 웃음소리에 박지민은 더욱 부끄러운지 웃즈므르 라고 이를 꽉 물곤 나즈막히 말한다. 그런 박지민이 귀여워 여전히 새까만 머리를 한껏 만진다. 내 손길을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게 꼭, 강아지 같다.
“ 나 다시 염색할까 ”
“ 무슨 색으로? ”
“ 음 .. 뭐가 어울릴까 ”
“ 검은색 ”
“ 에? 그럼 그대로 있을래 ”
“ 왜? ”
“ .. 친구 말이 곧 법이니까 !! ”
내 인생 가치관이거든. 뭐래. 터무니없는 말에 또 터진 웃음. 박지민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런 나를 마주하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웃는다. 너라면 무슨 색이든 제 것인 마냥 잘 어울리겠지만, 역시 나는 새까만 너의 머리가 좋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작게나마 들리던 이터널 션샤인의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고 세상이 멈춘 것처럼 고요하다. 이제 일어날까? 내 말에 약속이라도 한 듯 둘 다 번쩍 일어나 벽에 기대어 앉는다. 시계를 봤는데 아직 7시밖에 안되었다는 게 놀라웠다. 역시, 겨울 해는 빨리 진다니까. 흰 눈이 흩날리던 그때와는 다르게 오늘은 하늘에서 감감무소식이다. 많이 아쉽다. 함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었는데.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건지 박지민은 뜬금없는 말을 꺼낸다.
“ 김여주 넌 꿈이 뭐야? ”
“ 음 .. ”
글쎄. 나는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고 부모님도 굳이 강요하시는 편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박지민처럼 물어봐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아 이 말은 좀 슬픈 것 같다. 나의 꿈을 궁금해하는 첫 번째 사람이, 박지민이었다.
나를 다정히 쳐다보는 박지민의 눈이 내가 말할 때 까지 언제까지 기다려주겠다 하는 것 같다. 그런 박지민을 한번, 다시 바닥을 한번 쳐다보면서 아무리 고민해봐도 박지민이 요리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그런 욕구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늘, 먼지처럼 살아오던 나였으니. 대학과 학과도 성적에 맞춰서 대충 넣어 간 것이었기에 딱히 상관없었다. 나는 길잃은 방랑자와 같은 신세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박지민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결국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 잘 모르겠어 ”
“ 뭐, 아직 우리는 젊으니까. 괜찮아. ”
말이 참 다정하게 나를 위로한다. 문득, 나도 너처럼 그렇게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고 무언갈 얻기 위해 혹은 이루기 위해 노력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허 그런 눈으로 보지 마 ”
“ 응? ”
“ 내가 부럽다는 그런 눈 말이야 ”
이번에는 박지민이 내 두 눈을 가린체 말을 이어나간다.
“ 아까 말했었지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멋진, 열정적인, 매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애가 아니야 ”
“ .. ”
“ 그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음 .. 양아치? ”
아니, 아니었다.
단언컨대 더 이상 양아치라는 명칭은 박지민과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그 손을 내리고선 박지민의 두 눈을 제대로 마주한다.
“ 거짓말, 너 요리 좋아한다는 거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데 ”
“ .. ”
“ 그리고 난 그런 박지민을 바라거나, 원하는 게 아니야 ”
“ .. ”
“ 그저 너 자체가 좋으니까, 그대로 있어주기만 하면 돼 ”
“ .. 너 ”
어 .. ? 방금 내가 무슨 소릴 한 거지.
“ 아! 아니 그런 .. 그런 게 아니라 ! 친구로서, 그러니까 .. ”
“ 알아, 알아요. ”
박지민이 호탕하게 웃는다.
“ 감동이네 ”
그 말이 나는 저를 제대로 봐줘서, 마주해줘서 고맙다는 소리로 들렀다.
박지민이 갑자기 손가락을 뻗어 창문을 가리켰다. 김여주, 눈 와. 거짓말처럼 눈이 흩날리던 그날같이 오늘도 작은 창문 사이로 내리는 흰 눈이 보였다. 박지민은 아이처럼 신 난 목소리로 연신 나를 부르더니 먼저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마당으로 나섰다. 그런 박지민을 따라나가자 흰 눈과 별이 만들어낸 장관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하늘이 가까이 닿아있는 높은 곳이기에, 그 어느 곳보다 도시의 볕이 덜 드는 곳이기에 이것들이 더욱이 잘 보이는 게 아닐까 싶다.
“ 매일 크리스마스였으면 좋겠다 ”
“ 산타할아버지 힘드실걸? ”
“ 음, 그럼 매일 오늘만 같아라 ”
박지민은 그 말을 하며 장난스럽게 두 손 모아 기도를 하는 시늉을 하더니 그대로 눈을 감고 말을 이어 나간다.
“ 있지 김여주 ”
“ 응 ”
“ 네가 하고싶은게 생기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줘야 해, 알았지? 누구보다 응원해주고, 도와줄 거니까 ”
아까의 나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구나. 나는 박지민의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답했다.
“ 응 그럴게 ”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내가 가장 따뜻하고, 행복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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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 새해에 다다랐다. 새해에도 같이 보낼 수 있을까 내심 기대를 품어보았지만, 새해에는 영업합니다 라는 사장님의 방침에 따라 좌절되었다. 새해부터 그 애는 바쁘겠구나. 떡국은 챙겨 먹을까? 주제넘은 걱정만 하며 방안에서 뒹굴다 문득 지난날들의 우리를 떠올려본다.
박지민과 유독 붙어다닌 한 해였다. 박지민이 짚어준 계절들과 감정들 또 이터널 션샤인, 사소하지만 모든 것들이 각각의 의미가 있고 내게 닿았다. 장난스럽게 말을 걸던, 좋아하는 영화와 취미 따위를 말해주던 노란색 머리의 양아치는 이제 저가 좋아하는 요리를 실컷 하는 검은색 머리를 가진 아이로, 그 애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나는 어느새 그 애에게 많은 약속을 하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 애의 아픔을 듣고 먼저 달려가겠노라 다짐하는 아이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사이는 서로가, 서로로 일컫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 많은 나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 여주야 새해 카운트다운 시작한다 ”
“ 네! ”
급히 거실로 나가려다 아차 하고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티브이에서는 아나운서들이 제야의 종 앞에서 생중계하고 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렇게 새해가 밝아오는군요. 자, 이제 2018년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함께 외쳐봅시다. 5.4.3 .. 그 순간까지 박지민에게 문자를 보낼까 고민하며 초조해하는 나였지만, 2.1 !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새해 복 많이 받아, 스무 살도 잘 부탁해 - 박지민 ]
이내 곧이어 온 문자에 마치 내 앞에 박지민이 있기라도 한 마냥 활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 나도 잘 부탁해, 식당이라 바쁘겠지만 .. 새해 복은 까먹지 말고 받아야해 ]
열아홉의 박지민과 김여주를 지나, 스물로 다시 맞는 너와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새해부터 내 모든 스물살들을 너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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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여주님들 ! ( 암호닉 )
감귤주스 / 일독 / 윈미 / 유딩 / 벨 / 치킨
암호닉 신청은 그 애 11 편에서 해주시면 됩니다 : )
안녕하세요 ! 허석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학생 여주 X 요리하는 짐니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너무 다른 생활방식에 있어 둘은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 .. 없지 않을까요 ?! 흠 ..
아 참,
암호닉을 신청해주신 여섯분의 독자분과 더불어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더 좋은 글을 보여드리고자 글을 쓰는 방법을 바꾸었답니다 !
예전에는 한글에서 작성하고 바로 바로 게시했다면,
지금은 손으로 직접 쓴다음에 한글에다 타이핑 하면서 자체 첨삭과정을 거치고 있어요.
이처럼 혼자서 이것 저것 시도하면서 독자분들 덕분에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
제 글을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그 자체만으로 정말 감사한 일 인 것 같아요.
더 더 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