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현재보다 조금 예전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예를들면 자동응답기 있던 시절. 엥 왠 자동응답기? 라고 하면 뻘줌쓰.
1. 카사노바
나에게 수없이 상처주었던 사람.
이렇게 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지옥을 맛보게 해주었던 사람.
그 사람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내겐 한 번도 보이지 않던 환한 미소를 지은채.
![[고르기] 카사노바와 순애보&집착 고르기 | 인스티즈](http://www.instiz.net/images/blank.gif)
난 태연한 척 그의 앞을 지나치려한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있는 늘씬한 몸매의 여자를 애써 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예상했던대로 마주치는 그의 반갑고, 한편으로 당황스러워 보이는 눈. 그리고 자동으로 붙들리는 나의 팔.
"손 치워."
생각보다도 더 차갑게 말이 나왔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내 말에 고갤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의 여자와, 이젠 더욱 당황스러운듯 흔들리는 그의 눈.
"먼저 붙잡은건 너였어. 난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고."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지 말아줄래? 날 장난감처럼 갖고 논 것도 너였고, 지쳐서 헤어지자 말하게 만든 것도 너였으니까. 그렇게 할 말을 다하고 뒤돌아섰다. 후련하다고 해야되나? 아니면 오히려 더 찝찝한 기분을 남겼다고 해야할까? 난 어쩐지 뒤늦은 긴장으로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마치 금단현상을 겪은 것 같이 떨려오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만큼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마침내 숨을 고를만한 근처 공원에 도착했다.
세상에, 그를 우연히 만나게 되다니.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이 분명 3년 전이었던가. 아니, 적어도 3년이다. 하지만 절대 잊을 수 없다. 무려 7년 동안의 밀고 당기기 게임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다. 저런 남자가 뭐라고. 지금은 쉴새없이 자신의 옆을 몸매좋고 늘씬한 여자로 채워넣기 바쁜 남자를, 몇 년 전엔 진정한 사랑으로 여겼다니. 너무 한심하잖아.
하지만 한편으로 든 마음은 마치 날 일깨워주듯 고함치고 있었다. 넌 그를 그리워 하고 있었잖아!
인정할 수 없어. 아니, 난 그렇지 않아.
애써 무시했다. 그를 과거에 묻은 척, 그렇게 넘어갔다.
*
며칠 뒤, 외출 후 켜 본 자동응답기엔 그의 메시지가 남아있었다.
"보고싶었어, 정말 많이."
당신이 날 많이 미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 제발 나에게 용서를 빌 시간과 기회를 주지않...삑. 메시지를 삭제했다. 뒤에 있는 수많은, 구구절절한 메시지들도 들어보지 않고 모두 삭제했다. 정말, 이걸 정말. 말이라고 하는 건가? 할 말이라고? 난 너무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 화를 삭히기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했다. 하지만 그 노력 끝에는, 왠지 아쉬운 눈빛으로 자동응답기를 바라보는 스스로가 남았다. 메시지를 곧바로 삭제하지 않았더라면 메시지를 남긴 번호로 당장 전화를 걸어 나 역시 보고싶었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 우습다.
"번호는 대체 어떻게 알아낸거야? 여러가지로 짜증나게 만드네."
내일 당장 전화기도 바꾸고 집번호도 바꾸던지 해야겠어.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왁자지껄 떠들고 신나게 돌아온 길이었는데. 친구를 만나기 전보다 어째 훨씬 기분이 꿀꿀하고 복잡해진 느낌이다. 혼자 바람이라도 쐬야겠다 싶어 다시 벗어제꼈던 외출복을 주섬주섬 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왠지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러자 현관의 계단 아래, 거짓말처럼 그가 서있다.
어제와 달리 나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그리고 왠지 그의 눈가는 촉촉히 젖어있었다. 멍청하게도,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문득 든 생각. 이대로 그와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떡하지. 다시 상처를 받게 되면? 그러자 촉촉하던 눈가가 무서울정도로 빠르게 메말라간다. 그래, 이건 정말 아니야. 그에게 받았던 수많은 상처와 지옥같던 기억들을 떠올려보라고. 마침내 계단을 모두 내려와 메마르고 서늘한 눈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계단 위에서 보았던 것과 다른 내 눈을 보자 어련히 상처를 받은 모양이다.
![[고르기] 카사노바와 순애보&집착 고르기 | 인스티즈](http://www.instiz.net/images/blank.gif)
당황스러움에 하려던 말을 잊었는지 입을 벙긋벙긋 열었다 닫았다만 반복한다. 그 모습을 보니 냉정을 되찾은 내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안쓰럽긴 한데, 이걸 계속 지켜보고 있긴 좀 그렇다. 카사노바에, 구질구질하게 과거에 매달리는 남잘 두고 내가 더이상 낭비할 시간은 없으니까.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아낸건진 모르겠지만, 오늘 부로 더이상 연락하지마."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야. 알겠어? 그를 지나쳐 걸어간다. 좋아, 성공이다. 이젠 내가 그에게 상처를 줬다. 그에게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아주 크게 자국을 내주었다. 며칠 전과 달리 손도 떨려오지 않는다. 정말 그를 떨쳐내버린걸까? 아니면 이 순간 복수와 과거의 상처로 단단히 방어태세를 취한걸까? 모르겠다. 그냥 이 순간 드는 기분은 되갚아줬다. 그뿐이다. 하지만 그 기분도 얼마가지 못해 깨졌다. 다시 그때처럼 붙들리는 내 팔에.
정말 이 느낌은 몇 번이든간에, 언제든간에. 아주 불쾌하다.
미간이 팍 찌푸려진채로 뒤돌아 그를 바라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그의 눈물에. 처음 본 그의 순진하고 열망에 찬 눈동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볼을 타고 한 방울씩 보도위로 떨어지는 그의 눈물은, 내겐 매우 낯설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카사노바의 눈물이라 하기엔 너무도 순수해보였다. 그 때부터였다. 견고하게, 마치 시멘트를 바르듯 한 겹씩 덧발라 그로부터 방어하던 내 마음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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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웠어. 보고싶었어. 며칠 전 본 네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어."
2. 집착과 순애보 사이
![[고르기] 카사노바와 순애보&집착 고르기 | 인스티즈](http://www.instiz.net/images/blank.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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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친구 만나러?"
피아노를 치다 말고 짓는 저 순진한 웃음. 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같이 하얗고 순수해보이는 얼굴. 늘, 어떤 때는 아이보다 더 순진무구해보이는 그가 어쩐지 질리기 시작한 것 같다. 하지만 차마 그 얼굴 앞에다 대고 헤어지자는 통보를 하진 못한다. 난 차마 그가 흘리는 눈물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도망쳤다. 다른 사람에게로. 물론 그와 만나는 동시에. 이걸 도망쳤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더러운 진흙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야하나. 알 수 없다. 아니, 알기 싫다.
"응, 친구 만나러. 오늘 늦게 오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알겠어. 대답을 뒤로하고 현관 밑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간다. 높은 굽의 구두를 신었지만 거침없다. 어서 빨리 그를 만나고 싶다. 순둥순둥한 그 얼굴에게서 벗어나 그와 반대로 날 부드럽게 리드하고,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선사하는 그와 함께하고 싶다. 한적한 거리위로 정신없이 뛰었다. 그리고 '그'의 집 근처에 멈추어 서 다급한 뜀박질에 고동치는 심장과 숨을 잠시 가다듬었다. 잠시 후, 초인종을 누르기 위해 잔뜩 구둣소릴 내며 향하는 내 발걸음은 무척 가볍다. 이 문 너머엔 '그'가 있다. 바로, '그'가 있다. '그'가...그 때 들려오는 한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킨다.
"자기, 늦은거야? 뭘 그리 급하게 가."
![[고르기] 카사노바와 순애보&집착 고르기 | 인스티즈](http://www.instiz.net/images/blank.gif)
반지. 두고 갔길래. 씩 웃는 그의 미소가 왜일까, 이 순간만큼은 어쩐지 무섭다. 네번째 손가락에 천천히 끼워지는 이 반지가 날 옥죄는 족쇄처럼 느껴진다. 아, 내가 어떻게 반지를 두고 갈 수가 있지? 나도 참. 너무 급하게 챙겼나보다. 고마워. 영혼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한다. 그에게 보이는 내 미소도 역시 그렇다. 영혼같은건 이미 달아난지 오래다. 가식적인 미소. 하지만 그에 화답하듯 지어보이는 저 미소는 뭐란 말인가. 저 해맑은 미소는 대체 뭐냐고. 이쯤되면 눈치채지 않나? 점점 더 무서워진다. 방금 전 반지처럼 날 옥죄어오는 미소다.
"그럼 친구랑 놀다 천천히 와. 알았지? 사랑해."
등 위로 당황스러움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지만, 태연한 척 손인사를 하고 다시 초인종을 향해 뒤돌아섰다. 그리고 난 자기, 하고 날 불렀던 그의 인사를 들었을 때보다 더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나와 비밀스런 연애를 나누던 '그'가 감옥과 같은 창살로 된 문 너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맙소사. 그는 이 창살같은 대문 너머로 있는 남자의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에겐 한 번도 소개시켜준 적이 없는 사람이다. 친구라고 믿을 리가 없다. 대체 날 향한 근거없는 믿음은 어디서 솟아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오로지 나에 대한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 맙소사. 이 정도였을줄이야.
머릿속의 생각들이 미로처럼 얽힌 느낌이다. 충격적이다. 이 상황에서 난 도저히 비밀스런 연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창살너머의 '그'에게 나중엔 기억도 나지 않는, 같은 변명을 지껄여대곤 또각또각. 발걸음을 돌려 집까지 정신없이 걸었다. 정말 말그대로 정신없이 걷기만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낯익은 계단이 눈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계단엔 흐느껴 울고있는 순수한 그 사람이 있었다. 이젠 정정해야겠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순수함이다. 그 때문에 더럽고,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내가 더 멍청한 짓거리를 그만두고, 그에게. 어그러진 사랑을 하고 있는 우리 사이에. 이별을 고해야 한다.
"속여서 미안해."
이제 나한테 말해. 헤어지자고, 어떻게 날 속이고 다른 남자를 만날 수가 있냐고. 넌 정말 나쁜년이라고 말해. 마음이 너무도 여려 날 바라보며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는 그에게 도리어 고함쳤다. 오로지 내 죄책감을 덜기위한 말들을 나에게 외쳐달라 말했다. 하지만 내 시선을 피해 점점 더 고갤 푹 숙이는 그에게 맞춰 무릎을 꿇고, 고갤 기울여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은 나로인한 상처로 난도질 당한듯 보였다.
그 순간 내 마음 역시 그처럼 산산이 부수어지는 것 같았다. 쓰라렸다. 내 잘못된 행동의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상황이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건지 이제서야 조금씩 감이 잡혀왔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그와의 행복한 기억들이 마치 날 두들겨 때리듯 스쳐갔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다. 그는 항상 날 바라보고 있었는데. 항상, 날 행복하게 해주었는데. 심지어 방금 전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난 늘 나만을 바라보는 그를 시험하고, 상처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는 것 역시 원했다. 한 마디로 미이었다. 감당할 수 없을만큼 몰려드는 그에 대한 죄책감과, 이기적이게도 아직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딩하고 멍하게 울려오는 머릿속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걸음씩, 여전히 쭈그려 앉아 고갤 숙이고 있는 그에게서 멀어져 도망치려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가 오로지 자신의 마음만을 생각하고 도망치려하는 여잘 붙잡았다.
그는 어떤감정에선지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으로 간신히 날 붙들고선, 계단에 걸쳐앉은상태로 내게 힘없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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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게. 기회를 줄게. 그러니 제발 내 곁에만 있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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