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사실이다. 은교는 이제 겨우 열입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아니, 새해가 왔으니 이제 일흔이다. 우리 사이엔 오십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 당신들은 이런 이유로 나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변태적인 애욕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명저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당신들의 그것도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뭐 상관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일 뿐이니까. (중략) 눈이 내리고, 그리고 또 바람이 부는가. 소나무숲 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 (중략) 나는 곤히 잠든 소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열대엿 살이나 됐을까. 명털이 뽀시시한 소녀였다. 턱 언저리부터 허리께까지, 하오의 햇빛을 받고 있는 상반신은 하얬다. 쇠별꽃처럼. 고향집 뒤란의 개울가에 무리져 피던 쇠별꽃이 내 머릿속에 두서없이 흘러갔다. 브이라인 반팔 티셔츠가 흰 빛깔이어서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계속됐다. 고요하면서도 밝은 나팔 소리 같았다. 마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누군가의 숨소리를 이렇게 생생히 듣는 일은 처음이었다. 눈썹은 소복했고 이마는 희고 맨들맨들, 튀어나와 있었다. 소녀가 아니라 혹 소년인가. 짧게 커트한 머리칼은 윤이 났다. 갸름한 목선을 타고 흘러내린 정맥이 푸르스름했다. 햇빛이 어찌나 ㅣ맑은지 잘 보면 소녀의 내장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팔걸이에 걸쳐진 양손과 팔은 어린아이의 그것만큼 가늘었다. 콧날엔 땀방울이 송골, 맺혀 있었다. 초목 옆에서 나고 자란 소녀가 이럴 터였다. 침이 고였다. 애처로워 보이는 체형에 비해 가슴은 사뭇 불끈했다. 한쪽 가슴은 오그린 팔에 접혀 있고, 한쪽 가슴은 오히려 솟아올라 셔츠 위로 기웃, 융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았다. 창이었다. 창 끝이 쇄골 가까이 솟아 있었다. 처음엔 목걸이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문신이었다. 셔츠의 브이라인 아래에서부터 직립해 올라온 푸른 창날에 햇빛이 닿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고인 침이 꿀꺽 목울대를 넘어갔다. 정교한 세필로 그려진 창이었다. 가슴에 그려넣은 창의 문신이라니. 그렇다면 창의 손잡이는 셔츠 속에 감춰진 젖가슴이 단단히 거머쥐고 있을 터였다. 창날은 날카롭고 당당했다. 셔츠 속에 은신한 채 이쪽을 노리고 있는 전사를 나는 상상했다. 흰 휘장 뒤에서 전사는 황홀한 빅뱅을 꿈꾸며 지금 가파르게 팽창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사의 창날에 바람 같은 긴 풀들이 소리 없이 베어지는 이미지가 찰나적으로 흘렀다. 풀은 베어지고, 그리고 선홍빛 피로 물들었다. 손끝이 푸르르 떨렸다. 앞으로 나가려는 손끝을 내 의지가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욕망인가. 욕망이라면, 목이라도 베이고 싶은, 저돌적인 욕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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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 3까지 나온 마당에 이나은은 진짜 불쌍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