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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querade 전체글ll조회 1622l 1



(bgm :  //www.youtube.com/watch?v=1sHqUsD0zUE)






호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며 제각기의 시간을 보내는 화려한 곳에는, 

그곳에 머무는 이들을 위해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뒤에서 일하는 이들이 있다. 

호텔리어.



멋지게 차려입은 유니폼에 늘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들을 보며, 어렸을 적부터 나는 막연히 그들과 나란히 서서 일을 하는 꿈을 가졌다.




호텔리어라는 직업의 특성 상 외국에서 보고 느낄 것이 많다고 여겨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평일에는 학교를 다니며 주말에는 호텔에서 인턴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늘 지치고 바쁜 일상 속에서 나는 점점 내가 진짜 이 일을 하고 싶은 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막연한 동경이 무모한 도전을 이끈 것은 아닌가, 매일 밤 침대 이불 아래에서 울음을 삼키며 그렇게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



하루하루 내 자신의 꿈에 대한 확신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마지막 기말 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툭 하고 노트 위에 붉은 핏방울이 번져나갔다. 급히 코를 틀어막고 바깥 화장실로 달려가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살짝 건드리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 손수건 여기 있어. 이걸로 닦아. ”


내미는 손을 거절할 수 없어 손수건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흐르는 피를 닦아내었다. 

계속 나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낯이 익어 슬쩍 고개를 드니, 그제 서야 내게 건네진 손수건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다니엘. 너도 도서관에 있었어?”

“final exam인데 놀 순 없잖아. 네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코를 막고 뛰쳐나가 길래 따라 나왔지. 

그건 그렇고, 요새 얼굴이 별로 안 좋던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그가 건넨 말에 울컥하고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오랜 타향살이 동안 지독한 외로움에 잠겨있는 줄도 모르고 지내온 지난 시간들이 의미 없고 허망했다.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괜찮다고 그에게 웃어보였다.


“손수건은 나중에 돌려줄게. 더러워졌으니까 깨끗하게 빨아서.”

“.. 진짜 괜찮은거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그의 등을 떠밀며 얼른 다시 공부하라고 재촉했다. 

세 번 쯤 돌아보다 나의 고집에 그제 서야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다니엘을 보며 나는 한참을 멀리서 그를 바라보다 여자 화장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흐르는 물에 손과 얼굴을 씻으며,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나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누군가가 나의 공허함을 알아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




다니엘은 그날 이후로 늘 나와 함께 지냈다. 늘 기운이 없고 어두워 보이는 내게 처음으로 친한 친구가 된 그는 평소보다 더 밝은 모습으로 나를 대했다. 부스스한 차림으로 강의실 뒤쪽에 앉아 수업을 준비할 때면 내 옆에 앉아 씩 웃는 얼굴로 인사했고, 점심을 먹을 때도 항상 나를 데리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 갔다.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같이 농땡이를 치기도 하면서 그와 나는 이전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와 나는 때로는 친구들과 교수님 이야기를 하다가, 또 어떨 때는 호텔리어라는 꿈에 대해 깊은 속내를 나누면서 점점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둔 방학이 다가오자 나는 호텔에서 정식 근무 제안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우리나라에도 지부가 있는 곳이라 나는 지배인님의 말에 흔쾌히 승낙했다. 너무나도 바라고 원했던 일이었다. 드디어 조금씩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말에 부럽다며 자기도 직접 일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다니엘도 같이 일했으면 좋았을텐데.


그 날 저녁, 그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다 문득 입을 열었다.


"다니엘, guess what!"

“무슨 좋은 소식 있나보네. 음, 길에서 돈이라도 주웠어?”

“아니, 그거보다 훨씬 좋은 거. 나 호텔에서 정식 근무 제안 받았어.”

“와, 진짜? congratulations! 대박이다 정말. you're so lucky, girl."


웃으며 와인이라도 하나 열어야 된다며 나보다 더 신난 그와 갑자기 축하 파티라도 된 듯한 상황에 나는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마주 앉아 마시며 한 잔 두 잔 늘어가는 술에 점점 취기가 올라왔고 흥겨웠던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와인 한 병을 다 비워갈 때 쯤 그가 잔을 위로 올려 건배를 하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물음표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그제 서야 숨기고 있던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사실 나도 그 호텔에서 근무 제안 받았어. 우리 같이 일할 수 있게 됐네.”


그가 전하는 소식에 나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니엘, 거짓말 아니지? 뛸 듯이 기쁜 마음에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난 나 혼자 일하게 되어서 뭔가 미안했단 말이야. 진짜.. feels like i'm dreaming. 그에게 안겨 말을 하자 그가 웃으며 나를 감싸 안았다. 이제 더 같이 있을 수 있게 됐어.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그를 올려다보자 따뜻한 눈을 한 그가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 이게 맞는 말 인지 모르겠지만, oo아,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네 꿈이 이루어지는 걸 항상 바라고 있고, 물론 나도 너랑 같은 길을 걷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음... ”


뭔가 망설이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그를 지긋이 바라보다 살짝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뜬 그가 귀여워 그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웃어보였다.


“내가 먼저 말 할거야. 다니엘, 좋아해.”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나의 한 마디에 나의 볼을 양 손으로 잡으며 깊게 입을 맞추었다. 진한 키스에 숨이 막혀오자 살짝 입을 떼고서는 나의 볼을 어루만지고는 끌어안았다. 지금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어. 막 벅차고 떨리면서 슬프고.. 너랑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너무 좋은데, 이 감정이 사라질까봐 무서워. 어린아이같이 불안해하며 자신을 꼭 끌어안은 그의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괜찮아 다니엘, 다 괜찮아.


"사랑해."


작게 읊조린 그의 목소리가 내 귀에 스며들었다.




***




호텔에서 정식으로 일을 하게 된 지도 반년이 지났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 동안 쌓아온 경험으로 제법 능숙히 일을 해내어 지배인님에게 칭찬도 받고 동료들과도 잘 지내면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행복 속에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물론 쉬는 시간 틈틈이 다니엘을 찾아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룸 서비스를 전담으로 맡은 나와 달리 다니엘은 화려한 외모 덕에 프론트 데스크에서 손님들을 맡는 일을 하게 되었다. 매일 나와 다른 부서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며 시무룩해하는 그를 어르고 달래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그를 속으로 보고 싶어한 나는 매번 시간이 날 때마다 다니엘을 찾아갔다. 웃으며 고객을 맞이하는 그를 멀리서 볼 때면, 졸업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학생 티를 완전히 벗은 진짜 호텔리어 같은 그의 모습이 누구보다 잘 어울렸고 근사했다. 또 그가 나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더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다니엘과 꼭대기 층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던 도중, 갑자기 울리는 전화에 나는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고 복잡한 번호는, 한국에서 온 전화였다.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응, 엄마. .....어? 지금 어디라고? 뭔데, 무슨 일인데!! 전화 넘어로 들리는 엄마의 흐느끼는 목소리는, 세상 그 어느 것 보다 절박하고 비참했다.




***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남겨졌지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아빠가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 너한테 그렇게 전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지금은 의식도 없는 상태라서...'


언제나 웃는 얼굴로 나를 응원하던 아빠였다. 처음 호텔리어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유학생활을 하고 학교를 다니겠다고 했을 때도, 나의 꿈을 묵묵히 지지해주던 아빠가, 아프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짐을 싼 지도 몰랐다. 정신없이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아빠, 제발...


이루지 못할 밤을 지새운 채 바로 다음 날 공항에 도착했다. 탑승 시간이 다가올수록 시간은 더욱 더디게 가는 듯 했다. 그제 서야 혼자 두고 온 다니엘이 떠올랐다. 그에게 연락을 할 새도 없었다. 괜찮아, 금방 돌아올 거니까. 기다려주겠지.



비행기가 점점 지상과 멀어져갔다.


그렇게 다니엘과 나는 예고 없는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




암 판정을 받은 아빠는 끝내 하늘나라로 갔다. 나에게 당신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전하면 꿈을 접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 올까봐 끝까지 말 하지 말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아빠의 영정사진 앞에서 나는 탈진할 때 까지 눈물을 쏟았다. 조금 더 일찍 올 걸. 모든 것이 내 욕심 때문인 것 같았다.

장례를 치른 뒤 집으로 돌아와 아빠의 물건들을 정리할 때, 당신이 평생 쓰신 일기를 발견하였다. 꽤나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데, 틈틈이 나에 대한 이야기도 쓰여 있었다. 우리 딸, 꼭 멋진 호텔리어가 돼야 돼. 아빠가 거기 딱 묵으러 갈 거니까. 눈물이 한 방울 그 위를 적셨다. 흐느끼며 일기장을 가슴에 품었다.




***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빠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한 동안은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내가 유학길에 오르지만 않았더라도, 아니 처음부터 호텔리어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지만 않았더라도 끝까지 아빠의 곁에 있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나의 머리를 가득 메운 건 아빠의 일기장이었다. 한 줌의 재가 된 당신의 모든 물건들 가운데 유일하게 내 서랍장 속에 남은 그 일기장 속 아빠의 유언과도 같은 그 말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시 호텔로 가자, 아니, 그건 니 욕심이야. 두 가지 생각이 항상 머리 속에서 부딪혔다. 그러던 도중 한국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관광 회사에서 일을 하며 성공한 친구였는데, 오랜만에 한 통화에서 그녀는 나에게 아직 다시 일할 생각이 들지 않냐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얼버무리는 나의 대답에 그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내가 잘 아는 호텔 지배인님이 지금 경력 있는 호텔리어 구한다는데, 마침 너 전에 일하던 데랑 같은 곳 이여서 내가 너 추천해 드렸어.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야. 아버지께서도 그런 모습은 보기 싫어하실 거야. 그녀의 말에 나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 살며시 요동치는 감정이 느껴졌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 아빠가 바랬던 일. 두렵지만 다시 한 번 해 보기로 했다.




***




지배인님은 마치 나를 식구같이 챙겨주셨다. 마침 잘 되었다며, 소문을 듣자니 유능한 친구 인 것 같다며 나를 위해서 다른 사원들 보다 더 많이 배려해주셨다. 바쁘게 일을 하면서 또다시 힘든 날들이 이어졌지만, 이전에 같은 곳에서 느낀 그 두근거림이 똑같이 느껴져 피곤한 줄도 몰랐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프론트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교대 시간이 다가와 업무 마감을 하고 있을 때, 한 손님이 다가왔다. 그냥 봐도 부잣집 딸 같은 차림에 나는 조금 긴장했지만 애써 태연한 얼굴로 그녀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ㄱ..."

"call the chief manager!"


다짜고짜 울리는 앙칼진 목소리에 직원들과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나와 그녀에게로 쏠렸다. 손님..? 당황한 나의 모습을 아니꼬운 듯이 바라본 그녀는 이내 뾰족한 그녀의 손톱으로 나를 가르키며 말했다.


"아니, 지배인 부르라는 소리 못 알아들었어? 여기 서비스가 왜 이래!"


아무리 손님이지만 밑도 끝도 없는 행동에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그녀 앞에서 쩔쩔매기를 몇 분, 한참 후에 누군가가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왜 또 화내. 조금만 기다리자, 응?"


급하게 전화를 걸던 손이 수화기를 놓쳤다.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추락한 수화기는 배터리가 분리된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귓전을 울린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다니엘, 이렇게 어리버리한 직원들 밖에 없는데 서비스가 제대로 되고 있는 게 맞아? 미국이랑 너무 차이나는 거 아냐?"

"내가 총지배인님한테 잘 말해놓을게."


그녀를 어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왔지만,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무서웠다.

하염없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나에게 그의 인기척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Daniel Lindemann, maybe already reserved."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수 년 전의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그는,

여전히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한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




그는 이 호텔에 새로 부임하게 된 사장이라고 했다. 미국 본 호텔 지부에서 초고속 승진을 한 유일무이한 사람이 우리 호텔에 오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지배인님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창백한 안색을 한 내가 걱정됐는지 동료 직원들이 모두 한 마디씩 건넸다. 괜찮다는 말로 일관하던 나는 결국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그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올 구멍이 보였다.


그 때 갑자기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그것도 무려 최고급 스위트룸에서 온 것이었다. 지배인님이 이미 퇴근하신 뒤라 치프 관리인인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꼭대기 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방문 앞에 서서 가볍게 노크를 하자 앙칼진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들어와요! 아까 그 프론트에서 마주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문을 열자 시큼한 향이 코를 찔러왔다.


"와인을 시켰는데 왜 안 오는 거죠?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일 똑바로 하는 거 맞아요?"

"손님 죄송합니다. 제가 레스토랑에 가서 한 번 더 확인해보고 바로 연락을.."

"됐고, 당신 내일부터 나올 생각 하지 마요. 치프 관리인이 일을 이것 밖에 못 하니까 호텔 평가 점수가 그 모양 그 꼴이지."


혀를 차는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 호텔 내의 높으신 분의 딸이 틀림없다. 해고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그녀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손님인 탓에 다시 한 번 참아내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인아, 이리로 와. 씻고 나서 화 좀 삭히고 있어."


그녀를 이끄는 그의 목소리에 곧바로 고분고분해진 그녀는 얌전히 그들의 침실로 돌아갔다. 멀리서 어렴풋이 보이는 더운 열기의 흔적에 나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기분이었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에게도 머리를 한 번 숙인 후 급하게 방을 나서려던 참에 그가 나를 불러세웠다.


"미안해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희 측 실수이니 확인해보고 곧바로 갖다드리겠습니다."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카페트에 시선을 두고 기계적으로 입을 떼었다. 그러자 무언의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다. 부담스러웠다. 한 시라도 여기 있다간 정말 무너질 것만 같은 마음에 얼른 그곳을 나섰다.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루 종일 신고 있던 힐 때문에 퉁퉁 부은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매일이 힘들었지만, 이렇게 일을 싫을 정도로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것은 즐거웠다. 이런 식으로 나를 괴롭힐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그가 직접.




***




상상보다 그를 매일 마주한다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하는 내가 출입하는 직원 사무실 쪽은 사장실과 정 반대였지만, 그는 자신의 차를 세운 채 굳이 직원실을 돌아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한 번은 우연인 줄 알았지만, 언제나 같은 시간에 같은 곳을 지나가니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뿐 만이 아니었다. 업무상으로 오전 미팅을 할 때면 그는 총지배인님 바로 옆에 앉는 나에게 항상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말을 할 때면 다른 곳을 보다가도 서류로 내가 눈을 돌렸을 때 항상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가 나의 곁에서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힘들 줄은 몰랐다. 마냥 행복했던 그와의 지난날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 갈 때면 이제 다 지난 이야기라며 고개를 내젓곤 했다. 설령 그것이 현재 진행형이 되고자 하더라도, 그에게는 이미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 내가 설 자리는, 없다.


며칠 밤을 술로 보내니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퀭한 얼굴을 하고 출근하자 역시나 오늘도 마주한 그가 나를 걱정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애써 외면한 채 직원실로 들어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프론트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도 어질한 기운에 결국 반차를 내고 일찍 호텔을 나섰다.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해 내 자신에게 화가 난 것도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그 때문이라는 결론 끝에 더욱 무기력해졌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걸까.

오래 전 일에 내가 너무 미련을 갖고 있는 걸까.


복잡한 생각이 나를 휘저었다. 그 때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 안녕."


그였다. 반말로 내게 말을 거는 그의 목소리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네 사장님. 무슨 용건으로 전화하셨어요?"

"사장님 아니고, 사적으로 만나고 싶어서 전화했어. 지금 나와 주면 안 될까?"


싫다. 지금 만나면 보나마나 애써 쌓아온 벽이 무너질 게 뻔했다.




하지만 나의 입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 어디로 갈까요."




***




두 개의 찻잔을 마주한 우리 앞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흘렀다. 그와 나 모두 누가 먼저 나서서 말을 걸 의사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듯한 눈으로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다인이 일은 미안했어. 정식으로 사과할게. 그렇게 심하게 뭐라고 할 일은 아니였는.."

"괜찮습니다. 이미 다 해결된 일인걸요. 앞으로 룸서비스 측에 주의를 주어 당부하겠습니다."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대답하는 나를 빤히 쳐다본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냥 반말로 이야기하면 안 될까? 나 호텔 일 이야기하려고 너 여기에 부른거 아니야."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의 그는, 여러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얼굴로 아마 호텔 일을 하면서도 평이 좋았을 터이다. 그러니 지금 사장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는 데 그게 한 몫을 했을 테고.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나 너랑 전처럼 다시 지내고 싶어. 호텔에서 따로 만날 시간이 없어서 언제쯤 이야기 할 수 있으려나 했는데, 이렇게라도 만난 기회에 너한테 할 말도 많고 해서.."

" 너 왜 계속 나한테 이러는 건데? 억지로 사람 멀리했더니 계속 들러붙고.. 나 너 부담스러워. 우리 예전 같이 그렇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이 아니야. 너는 버젓이 한 호텔의 사장이고, 나는 거기서 일하는 일개 직원인데 예전같이 희희낙락하게 막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제발 현실 인식 좀 해."

"내 말도 좀 들어봐. 나는..!"

"우리, 헤어졌잖아."


딱 잘라 끊는 나의 말에 그는 그제 서야 입을 닫았다. 넘어 오지 못하는 선을 그은 듯, 우리 둘의 사이를 명확히 구분하는 붉은 선을 그은 뒤에야 그는 나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귀찮게 했다면 미안해. 그는 그 자리에서 옷가지를 챙겨 자리를 나섰다. 나는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나가면 그의 품에 울면서 안길까봐, 그런 나의 모습이 두려워서 일어날 수 없었다.



허무함만이 남았다.

이게 현실이야. 이제 다 정리했어.




원하던 결말이었지만, 원하지 않는 감정만이 나를 파고들어 쓰라린 아픔만을 남겼다.








***


안녕하세요, masquerade입니다.

독방에도 올렸던 글인데 정식으로 글잡에서 찾아뵈게 되었네요.

우선 중복으로 올라오는 글들은 포인트를 두지 않겠습니다.

정들의 소중한 댓글들을 지울 수 없어서 독방에 있었던 글들은 지우지 않으려구요. 

다만 이곳에 올리는 글이 좀 더 보기에 수월할 듯 싶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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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우와 작가님 빙의글카데고리에 작가님글을보고 덧글을 처음남겨봅니다. 사실 저도 독방에서 작가님의 글을 뵙긴뵈었으나 시간관계상 작가님의 글을 접하지 못했네요.
그래도 이렇게 글잡에 와 보게되니 다행이구요. 제 최애가 독다인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9년 전
비회원197.17
헐 대박... 진짜 너무 먹먹해요 글로도 충분히 둘의 마음 느낄 수 있었어요ㅠㅠ 작가님 짱!
9년 전
독자2
여운대박이에요ㅜㅜㅜㅜㅠ
9년 전
비회원252.191
글이 참 먹먹하네요....밤이라 그런가....ㅠㅠ
9년 전
독자3
작가님 정말 먹먹하네요ㅠㅠ.. 재밌게 읽고갑니다 감사해요ㅠㅠ!!
9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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