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밝은 빛이 바늘같이 날카로운 감각이 눈을 찔러왔다.
얼마 동안이나 기절해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몸은 힘없이 축 늘어져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어찌나 독한 마취약에 취해 있었던지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살며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지하실에서 '그' 의 옆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사내였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딱딱한 말로 안부를 묻는 그의 표정을 보며 나는 실소를 흘렸다.
"나 며칠동안 누워있었던 거에요?"
"이틀동안 미동도 없이 잠들어계셨습니다."
표정 없이 말을 잇는 그를 바라보았다.
다부진 체격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허리춤에 찬 검은 빛의 총도 빛을 받아 도드라졌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이 깨어 나길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병 주고 약 주고라더니, 내가 깨어날 때 동안 한 숨도 자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헛웃음만 나왔다.
그를 따라 복도로 나와 걸었다.
묵묵히 나의 앞을 걸어가는 그를 따라 가다가, 그의 목 언저리에 있는 검은 자욱이 눈에 띠었다.
어렴풋이 해골 무늬의 문신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손목 위에도, 셔츠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검은 자욱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이 조직 사람들 모두 같은 문신을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고위 간부들만?
저 해골의 의미는 뭘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검은 옷의 사내가 어떤 문 앞에 멈춰섰다.
그는 들어가시죠, 라는 말을 하고선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 들어서자마자 빼곡히 책으로 가득한 벽이 보였다.
서재인가. 한 발짝씩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란 책상 앞에 앉은 그가 보였다.
안경을 쓴 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그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일어났어?
너무 오랫동안 누워있길래 죽은 줄 알았잖아."
아무렇지 않게 씩 웃는 그의 모습에 왠지모를 화가 치밀었다.
"지하실에 가두고 묶어놓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수면제로 기절시켜?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낮게 읊조린 나의 말을 들은 그가 모니터에 고정한 시선을 들었다.
"그런 식이니까 니가 고작 인터폴에서나 일을 하는 거야."
"...?"
언짢은 기분에 그를 노려보았다.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하는 그는 옆에 두었던 시가를 집어들었다.
"조사원에 불과한 네가, 왜 마약 수사라는 굵직한 걸 맡게 됐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거든. 네 명석한 두뇌를 죄다 이용해먹고는 쓰레기 버리듯 내다 버린 거라고.
애초에 전략이나 짜던 애를 데려다 현장에 던져놓은 것 부터가 말이 안 되지."
한 쪽에 시가를 문 채 말을 잇는 그는 다리를 꼰 채 의자 등받이로 몸을 젖혔다.
"빈 껍데기 같은 건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네."
내가 더 이상 쓸모없어져서 버린 것이라고? 충격적인 말이 귓전에 흘렀다.
요근래 들어서 외근이 잦아진 건 사실이었지만, 푸대접을 받거나 다른 요원들에게서 이상한 낌새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직속상사였던 다니엘은 잦은 외근을 걱정해주며 매번 나를 챙겨주었다.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니 상사였지?
그 친구가 너 거기 가라고 오더 내렸어."
"....!!"
우리 쪽이랑 접촉하려고 누구 하날 보낸 것 같더라고. 어떤 애가 왔나 싶었는데 마침 그게 너였던거 있지.
시덥잖은 놈이었으면 애저녁에 머리통이 날라갔겠지만,
재밌는 걸 발견했지.
자기들도 놀랐을 거야. 널 여기로 데려온 걸 알면.
경찰이라는 것들이 뻔히 보이는 방법을 써서 시시했지만, 뭐 꽤 좋았어.
그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네 주민등록상 명의는 없어.
아예 존재 자체를 없애버렸으니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 거야."
그는 타다 만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느릿하지만 여유로운 그 손길이 가증스러웠다.
나에게로 걸어와 내 앞에 멈춰선 그는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러니까 이제 내 옆에만 있으면 돼."
한 쪽 뺨을 감싸쥔 그는 부드럽게 나의 입술을 감쳐물었다.
순식간에 모든 감정이 뒤섞이며 요동쳤다.
영원히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잔인한 족쇄가 그와 나 사이에 채워졌다.
「그대를 낳고 그대를 낳았던
사랑을 나눈 밤들의 서늘한 물결 속에서
그대, 말없이 타는 촛불을 보노라면
신비한 느낌이 그대를 덮쳐오리
그대는 더 이상 어둠의 강박에 매이지 않고
더 높은 사랑의 욕망이 그대를 끌어 올린다
그대는 마술처럼 날개를 달고 와서
마침내 미친 듯 빛에 홀려
나비처럼 불꽃 속으로 사라진다」
괴테의 <거룩한 갈망>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