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자집 세실리아 04
w. Cascade
#포레노아
루님께서 주신 표지입니다. 감사합니다! :D
*
"박찬열. 내가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게 노력해봐."
루한은 팔짱을 끼고 찬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찬열 뒤에는 세훈, 백현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찬열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실실 웃다가, 슬금슬금 계산대 뒤로 들어갔다.
"이 작은 가게에 일하는 사람이 네 명이라니. 그것도 덩치 큰 사내놈들로만!"
"어쩌다보니..."
"어쩌다보니 하루 아침에 2명이나 더 가게에 들이셨다?"
"세훈이는 너도 동의한거잖아!"
"그럼.. 얘는?"
백현은 루한의 말에 쭈뼛거렸다. 괜히 찬열 쪽을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당신이 오라고 그랬잖아.'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찬열은 계산대 뒤에서 걸어 나오더니 루한 어깨를 붙잡았다.
"루한, 화났어? 이게 말하자면 좀 복잡한데..." 찬열은 곤란할 때 나오는 특유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루한은 가만히 찬열의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널 이길 수 있겠냐. 알아서 해. 네 월급을 나눠서 주던지, 더 열심히 케이크를 팔던지..."
"응!"
찬열은 백현 쪽을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야 변백! 다행이다!"
백현은 그런 찬열이 부끄러운듯 찬열의 시선을 피해 식탁 위에 이쁘게 놓여진 식탁보만 바라보았다.
"오늘 새로 주문한 재료들 배달 오니까, 잘 확인하고 연락해. 나는 오전에 약속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
루한은 의자 위에 두었던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매고는 가게 문을 나섰다. 세훈은 찬열의 눈치를 보다 루한 뒤를 따라나섰다. 어느덧 떠들석한 가게에는 찬열과 백현만이 남게 되었다. 백현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나 여기서 일해도 되는거야?"
"당연하지. 내가 여기 사장이라니까."
"무슨 일을 하면 되는데?"
"일단 너는 서빙부터 시작하자. 빵 굽는 방법은 차차 알려줄게."
찬열은 백현의 손목을 잡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가게 내부와는 달리, 생각보다 넓은 주방 풍경이 펼쳐졌다. 각종 요리기구들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꽃무늬 접시들도 진열대에 놓여져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밀가루, 소금, 설탕 등 재료들이 쌓아져 있었고, 그 위 벽면에는 이런 문구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Cecilia : justicia en nuestra vida
"이거 무슨 뜻이야? 영어는 아닌 것 같은데.."
"아 이거? 스페인어래. 루한이 페루에 갔다 오더니 자신의 꿈이 생겼다며 적어놓은거야. 무슨 뜻인지 물어봤었는데, 우리들 삶의 정의라던데. 정확히 뭘 의미하는 지는 모르겠다."
"어렵네... 근데 주방은 왜 데려온거야?"
"일 줘야지. 오늘은 설거지부터 하자."
"서빙이라며."
"서빙은 일단 오세훈 시켜야지. 그 녀석이 능글맞은건 한수위니까. 너는 그냥 주방 안에서 일해."
"그러던지."
"학교 끝나자마자 여기로 와. 아니면 내가 데리러 갈까?"
"당신이 왜 데리러와? 내가 애기도 아니고.."
"너 처음 이 곳에 온 것도, 쫓기다가 들어온 것 아니었어?"
"어떻게..알았어?"
"척하면 삼천리지. 아무튼,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찬열은 백현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을 뺏더니 꾹꾹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이름은 네가 알아서 저장해. 네 번호는 알고 있으니까 문자 보내 놓을 필요 없어."
"언제 또 알아낸거야, 내 번호는!"
"집에서 너 핸드폰 두고 화장실 갔을 때."
"난 뭐로 저장되어 있는데?"
백현이 찬열의 핸드폰을 뺏으려 하자, 찬열은 손을 높게 들어 머리 위로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자 백현은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너 키 좀 더 커야겠다."
찬열은 백현의 머리를 헝클이며 귀여운듯 웃더니, 주방을 나갔다. 아마, 배달이 온 모양이다. 주방에 혼자 남은 백현은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굉장히 깨끗하게 정리된 주방, 삐뚤빼뚤한 글씨로 빼곡히 써져 있는 레시피...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보니 경계를 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백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열과 있으면 이상하게도 안정감이 들었다. 마트에서 알바를 할 때에도 10시만 넘으면 괜시리 찬열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씨리얼 두 박스를 양 팔에 끼고 다가오는 찬열을 발견하면 자신도 모르게 반가웠다. 친 형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굳은 살이 이 곳 저 곳 박혀 있는 찬열의 손을 보며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어깨를 토닥여 줄 때에, 등에서 전해져오는 손의 억셈이 느껴졌다. 베이킹을 하면 저렇게 손이 거칠어지는지 처음 알았다.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함께 한다는 느낌은 굉장히 오랫만이었다. 학교에는 경수가 있지만, 학교 밖에서는 간간히 연락만 할 뿐, 이렇게 직접 살을 부딪혀가며 사람들 속에 있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싫은 느낌은 아니다. 이 곳, 세실리아는. 그리고 박찬열도.
"당신, 내가 뭐 들어줄 것 있어?"
박스채로 짐을 옮기는 찬열을 보며 백현은 서둘러 가게 문을 활짝 열어주며 물었다.
"저기 뒤에 밀가루랑 체리 두 박스."
"체리?"
"오늘 포레노아 만들거거든."
"포레노아?"
"체리를 장식으로 올린 케이크야. 오랫만에 주문이 들어왔거든. 만들어볼래?"
"진짜? 그래도 돼?"
찬열은 백현을 만난 이래로 가장 환한 표정을 보았다. 신나서 앞장서서 주방으로 들어가는 백현의 뒷모습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하루 걸러 비가 내리는 장마철이었지만, 세실리아 가게 안에는 싱그러운 풀들이 자라나는 듯 했다.
*
"비닐 장갑 끼고, 이거 계속 반죽하고 있어. 나는 체리 좀 씻어올게."
"이렇게?"
"아니. 자 봐."
찬열은 어색한 손짓으로 반죽을 하고 있는 백현을 보더니 백현 등 뒤로 다가섰다. 키가 큰 탓인지, 백현은 찬열의 턱 밑으로 쏘옥 들어갔다. 비닐 장갑 손 위로 찬열의 손이 올라오더니, 백현의 손목을 꼬옥 잡았다.
"리듬 타면서. 손 끝에 힘을 주고 반죽해야 나중에 빵의 결이 잘 나와."
조그맣게 백현 머리 위로 속삭이는 찬열의 저음이 감미로웠다. 백현은 너무 자신에게 밀착해 온 찬열이 부끄러운지 반죽하던 두 손을 꺼내 올려 찬열을 떼어냈다.
"아..알았어. 쉽네."
찬열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싱크대로 걸어갔다.
"근데 당신.."
"응?"
"언제부터 배웠어? 제과.."
"10년 됐나."
"굉장히 오래 배웠네. 어떻게 시작하게 된거야?"
"내 유일한 행복이었거든."
"유일한? 당신답지 않게 되게 어두운 대답이네."
"그런가... 야 변백, 반죽 다 했어?"
"아 깜짝이야. 자꾸 변백이라고 부를래?"
"그럼 뭐라 불러줄까. 너 설마 루한처럼 '가나슈' 이런 애칭을 원하는거야?"
"미쳤어? 남자끼리 징그럽게. 그냥 변백이라 불러."
찬열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듯 싱글벙글 웃으며 행주로 오븐 위를 닦아내었다. 평소같으면 조용히 가게에서 혼자 아침을 맞이했을 것이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걸그룹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오프닝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백현이 옆에서 나름 이것저것 도와주고 있고, 또 이 일을 즐겨하는 백현의 모습을 보니 자신도 절로 긍정적인 에너지가 솟는 기분이었다. 바야흐로 비가 개고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자라나는 싱그러운 여름이다.
******
"가나슈! 여기!"
루한이 멀리서 다가오는 민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루한! 가게는?"
"잠깐 나왔어! 밥 먹자!"
"그래그래, 뭐 먹을까.."
"수육 국밥 어때! 역 앞에 새로 생겼더라."
"콜콜!"
루한은 민석이 무척이나 반가운듯 입꼬리에 귀에 걸리었다. 민석은 전공서적을 양 팔에 안은 채 루한 옆에서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민석 앞에서는 자신이 평소에 갖고 있던 긴장감들이 모두 무장해제되는 기분이었다. 항상 내일의 일을 걱정했던 지난 삶들과는 달리, 최근 루한은 내일의 일을 기대하며 살고 있다. 가족과 다름 없는 찬열 앞에서도 애교 없이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루한이다. 하지만 민석 앞에서는 일부러라도 자신의 감정 표현을 하고자 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에 자리잡은 사람이다. 그 짧은 2주간의 시간 동안.
"우와 여기 진짜 시원하다."
"여기 수육 국밥 두개랑, 감자 만두 한 접시요!"
"루한, 몇 시에 다시 돌아가야돼?"
"점심 먹고, 3시 쯤? 아마 늦어지면 박찬열이 화낼거야."
"박찬열이라는 사람.. 어떤 사람이야?"
"왜?"
"그냥. 되게 친해보이고, 네가 신뢰하는 사람 같아서."
"아... 동네 친구였어. 소꿉 친구!"
"그렇구나. 루한 너는 되게 처음 이미지가 고독해보여서 그런 친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
민석은 감자 만두를 하나 입에 쏘옥 넣으며 얘기했다.
"이렇게 둘이 얘기하고 있으니까 마추픽추에서 있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 때 진짜 좋았지.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었어."
"루한 너는 왜 왔던거야? 마추픽추에"
"말했잖아! 그냥 쉬고 싶었어."
"아니.. 내가 앉아있던 곳으로 와서 먼저 말 걸어줬잖아."
"그랬지. 그냥 뭔가 궁금했어 네가. 그리고 달라지고 싶었어. 예전이었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거야."
"그 때 말 걸어줘서 고마워."
"그 때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마워."
"남자끼리 이런 이야기하니까 진짜 어색하다."
민석은 입을 오물거리며 활짝 웃었다.
"난 아직도 그 때 생각하면 정말 행복해. 이거봐. 내 핸드폰 배경화면이다?"
루한은 민석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어 보였다. 그 액정 안에는 드넓은 고원이 펼쳐져 있었고, 금방이라도 그 안에서 바람이 불어 그들의 앞머리를 흩날릴 듯 했다. 민석은 액정 안을 빤히 쳐다보더니 씨익 웃었다. 동그란 눈으로 사진 이 곳 저 곳을 둘러봤다. 마치 그 배경 안에 자신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루한, 너한테는 그 2주가 어떤 날들이었어?"
"나? 말했잖아. 가장 행복했던 순간. 처음으로 '믿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순간. 가나슈, 너는?"
"나는.. 예상보다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으로 수백번 울었던 순간.."
"말도 어렵게 한다.. 누가 문과 아니랄까봐."
"그런가.." 민석은 뒷 머리를 긁적였다. 어느덧 둘 앞에 놓여진 접시가 하나 둘 비워져갔다.
"먹다보니까 생각난건데.."
"응!"
"김민석, 너 만두도 닮았다? 이 감자만두.."
"뭐?? 내가 너 닮은 것도 꼭 찾고 말거야. 맨날 나만 놀리고.."
"이제 일어나자. 슬슬 가게 가봐야지. 가나슈 너는 어디로 가?"
"나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카페로 갈 것 같아."
"만날 사람? 누구?"
"넌 모르는 사람이야~ 연락할게!"
전공책을 품에 껴안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민석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루한은 몸을 돌려 가게로 향했다. 민석이 없어지자 다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듯 했다. 침착해졌고, 또 웃고 있느라 긴장한 얼굴 근육이 풀렸다. 이런 느낌을 갖는 자신이 루한은 너무 신기한듯 자신의 손으로 볼을 쓸어내렸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의 액정을 켜 배경을 바라보았다. 처음 민석을 만난 바로 그 장소다. 민석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저 배경 오른쪽 아래에 언덕에서 처음 만났다, 루한과 민석은. 그리고 민석을 바라보며 지금의 가게 이름을 떠올렸다. 세실리아.
*
비가 온 후여서 그런지 날씨가 굉장히 습했다. 민석의 팔에서 땀이 나 책을 쥐고 있는 부분이 끈적여 불쾌했다. 아직 주말 점심이라 그런지, 신촌 거리는 굉장히 한적했다. 루한을 만나면 즐거웠다. 오랜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 들었고, 자신에게 굉장히 호의적으로 변하는 루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루한의 무표정에서 문득문득 보이는 어두운 면이 있었지만, 자신에게는 시종일관 눈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는 표정이다. 아까 자신에게 핸드폰 배경을 보여주며 설레하던 루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페루에서의 2주.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굉장히 자신있게 대답해주던 루한과는 달리, 사실 고민했다. 어떤 기억일까...
어느덧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했다. 민석은 손에 들고 있던 전공책을 주섬주섬 가방 안에 우겨넣었다. 그리고 3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다. 여름이라 역시 사람들은 삼삼오오 손에는 아이스커피를 들고 친구들과, 연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벌써 1년이다.
******
"박찬열! 나 왔다!"
"루한? 오늘 아침 배달은 다 와서 백현이랑 내가 거의 준비했어. 곧 오븐에서 빵들은 나올거야. 세훈이는 지금 서빙하고 있고."
세훈은 자신의 일을 만난듯 굉장히 즐겁게 일을 하고 있었다. 손님들도 가게에서 보는 새로운 얼굴에 굉장히 반가워했고 언제 소문이 났는지 세훈을 보러 한바탕 여고생들도 다녀갔다. 찬열은 굉장히 뿌듯한 표정으로 세훈을 바라봤고, 루한에게 '내가 뭐랬어'라며 의기양양해했다. 백현은 주방 안에서 땀방울을 송골송골 맺혀가며 오븐 앞에 앉아 있었다. 마치 초코렛을 기다리는 아이마냥 오븐 안에서 부풀어오르고 있는 빵들을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변백현씨죠? 이름."
"네."
"찬열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고등학생이라던데.."
"맞아요."
"반가워요. 잘 부탁해요."
루한이 내민 손에 백현은 주저하다가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찬열과는 달리 굉장히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역시나 손은 무척이나 거칠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루한의 눈이 굉장히 또렷했다. 그 눈은 굉장히 총기가 있었고, 생명력 넘치는 눈이었다.
"포레노아 12개 주문한 손님은 언제오신대?"
"음.. 앞으로 두 시간후?"
찬열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 대답했다.
"포레노아 주문한 것을 보면 케이크에 관심 있는 손님이라는건데.. 궁금하네. 누굴지."
"분명 늘씬늘씬한 여성분일거야."
서빙을 마치고 빈 접시를 들고 세훈이 들어오며 말했다.
"오세훈, 너는 일이나 열심히해. 딴 곳에 눈독 들이지말고. 여자 조심해야돼 너는."
띵동- 오븐에서 벨이 울렸다. 루한은 능숙하게 오븐 문을 열었고, 그 안에서 고소한 냄새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백현은 코를 킁킁대며 한껏 그 연기를 마시었다. 찬열은 기다란 칼을 뽑아오더니 능숙하게 커다란 빵 덩어리는 조각내었다.
"당신, 칼질 좀 하네."
"내가 또 왕년에 한 칼 했지."
찬열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루한은 팔꿈치로 찬열을 툭- 쳤다.
"뭐라는거야." 백현은 찬열의 대답이 싱거운듯 다시 식탁 위에 놓여진 빵들을 구경했다. 깨끗하게 씻어진 체리들이 냉장고에서 꺼내졌고, 찬열은 빵 위에 생크림을 쓰윽 발랐다. 아직 남아있는 빵의 열기에 생크림이 닿자 살짝 녹아 빵 안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한 층 더 초코 크림을 바르자 어느덧 케이크의 모양이 갖추어졌다. 루한은 빠른 손놀림으로 사탕 가루를 뿌렸고, 마지막으로 생 체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올렸다.
"포레노아 완성."
세훈이 가져온 이쁜 상자에 루한은 케이크를 담았다. 그리고 리본으로 그 위를 묶어 마무리했다. 이제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됐다. 네 남자는 열기가 가득한 주방에서 나왔다.
"저 좁은 주방에 네 명이나 들어가있으려니 답답하다."
루한은 눈매를 찌푸리며 찬열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찬열은 아랑곳하지 않고 포장된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었다. 그 때, 세실리아의 작은 종이 울렸다.
*
네 남자의 기대와 달리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마른 체구의 남자였다. 그 남자는 가게를 한참 두리번대더니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네 남자들을 보고 당황한 듯 했다.
"저.. 저번 주에 케이크 주문한 사람인데요.."
"네 손님. 방금 막 완성해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찬열이 능숙하게 손님을 맞았다.
"성함이..?"
"김종대라고 예약되어 있을거에요."
"잠시만요."
찬열이 눈짓을 주자 세훈이 냉장고에서 이쁘게 포장된 케이크를 꺼내왔다.
"여깄습니다."
"저.. 이거 취소는 안되겠죠?"
"취소요?"
"네. 사실 이 케이크가 필요 없어졌거든요."
"아.. 죄송하지만 이미 완성해서 취소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럼 제가 돈은 낼테니 케이크는 판매하시든지 아니면 출출하실텐데 직원분들이 드셔주세요."
"실례가 안된다면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사실 제 약혼식에 쓰려했는데 필요가 없게 됬네요."
종대의 말에 찬열이 미안한듯 차마 종대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분위기를 감지한 종대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맛있게 만들어주셨을텐데 정말 죄송하네요. 제가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케이크. 여자친구와 처음 데이트 했던 장소도 이 곳이구요. 근데 사람 일은 정말 맘대로 안 되는가봐요."
루한은 케이크를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 이쁜 접시에 케이크를 조각내어 가지고 나왔다.
"방금 만들어서 정말 맛있을거에요. 한 조각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루한은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종대를 앉혔다. 그리고 그 주변 자리에도 케이크 조각들을 내려놓았다.
"괜찮으시다면, 저희도 함께 먹어도 될까요? 마침 손님도 없는 타임이라."
종대는 머뭇거리더니 포크를 먼저 들었다. 그리고 케이크 한 쪽 끝을 잘라 먹었다. 갑자기 서러운 감정이 북받치는 듯 종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청승맞죠. 죄송해요.."
가만히 이 광경을 지켜만보고 있던 백현이 입을 처음 열었다.
"힘내세요. 그래도 단 것을 먹다보면 기분이 좋아지더라구요. 이게 해결책은 되지 않겠지만, 순간의 힘듦을 이겨내기에는 좋을 거에요." 백현은 무심한척 종대에게 자신의 케이크 반 조각을 잘라 종대의 접시에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찬열이 굉장히 흐뭇한듯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은 계산대 뒤로 가서 앉았다. 세훈이도 손님이 오자 주문을 받기 위해 다른 쪽 테이블로 이동했다. 종대가 앉아있는 테이블에는 어느덧 루한과 백현만이 남았다. 조용히 케이크를 먹던 종대가 백현에게 물었다.
"되게 어려보이는데.. 몇 살이에요?"
"고3이요."
"여기서 알바하는거에요?"
"네. 여기 주인이랑 아는 사이거든요."
"저 계산대에 앉아있는 분 말하는거죠? 저 분도 되게 젊어보이네요. 부러워요."
"뭐가요?"
"되게 젊은 사람들끼리 의기투합해서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 정말 즐거워보여서요."
"손님도 젊어보이시는데.. 저는 사실 연애고 사랑이고 하나도 몰라서, 그걸 잃는 기분을 몰라요. 전혀. 그래서 깊게 공감을 해 줄 수는 없지만... 힘내세요. 응원할게요."
백현은 자신이 말하고도 부끄러운듯 볼이 빨개졌다. 20분 쯤 지났을까, 종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를 대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챙겨주시고, 말도 걸어주시고.. 혼자 다시 돌아갔더라면 분명 길거리에 주저앉았을텐데.. 그래도 기분이 많이 좋아졌네요. 종종 올게요."
그러자 앉아있던 찬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히가세요, 손님. 또 만나요. 이 곳, 세실리아에서."
종대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세실리아의 작은 종이 경쾌하게 울렸다.
******
"변백~ 꽤 하던데?"
집으로 가는 길에 찬열이 장난스럽게 백현을 툭툭치며 놀렸다. 백현은 그런 찬열이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제 당신이 맨날 하던 소리가 뭔지 알 것 같아."
"뭐?"
"사람 사는 거. 오늘 하루 일했지만.."
"그치? 사실 길거리에서 지나치는 사람들보면 죄다 귀에 이어폰 꽂고 있고, 무표정에 어딘가 바빠보여서 말 걸기 조심스러운데, 막상 그들도 말해보면 다들 재미나고 다양하고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같은 사람들이거든. 의외로 그들과 소통하면서 나 자신이 굉장히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고.. 또 오늘처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때에는 뿌듯하기도 하고.."
"그래서 나도 도와주는거야?"
"너?"
"응."
백현은 빤히 찬열을 쳐다봤다.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진 백현의 얼굴이 유난히 하얗고 빛났다. 찬열은 두 손으로 백현의 볼을 잡아당겼다.
"아! 아퍼!"
백현은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잡고 찬열을 노려봤다. 찬열은 백현을 뚫어지게 보다가 와락 백현을 끌어안았다. 찬열의 넓은 어깨에 백현이 쏙 안겼다.
"아 뭐야 당신!"
"조금만 이러고 있자."
"뭐?"
"수고했어. 오늘."
"아..응.."
"힘들면 나한테 기대. 화나면 날 마구 때려도 좋아. 슬프면 막 울어. 참지말고."
"갑자기 왜그래.."
"나중에 말하려면 부끄러울 것 같아서 지금 미친척하고 말하는거야. 대답해 변백."
"알았어. 당신답지 않게 왜이래 무섭게."
"언젠간 하고 싶었던 말이었어. 저녁 뭐 먹을래."
"라면."
"또?"
"아까 케이크를 너무 먹었더니 느끼해서 그래."
"알았다~ 내가 맛있게 끓여줄게! 가자! 집으로!"
밤공기가 선선하다.
*
드르륵- 루한은 가게 문을 내렸다. 세훈은 쇼핑을 하겠다며, 서둘러 가게를 떠났고 오늘도 루한은 혼자 마무리를 했다.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아서 굉장히 배가 고팠다. 서둘러 집에 갈 생각에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거리가 나오고, 사람들이 복작대는 중심부로 들어섰다. 그 때였을까, 루한은 자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미친듯이 달렸다. 김민석이 건장한 여러 남자들에 둘러쌓여 있었다,
"너네들 뭐야!"
루한은 거칠게 남자 둘을 밀쳐내고 민석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민석은 루한의 등장에 당황한듯 했다.
"넌 뭐야?"
"김민석, 넌 좀 떨어져있어." 루한은 민석을 자기 뒤로 보내고 건장한 남자 셋 앞에 맞섰다.
"너네야 말로. 뭔데?" 루한의 눈에는 살기가 느껴졌고, 꼭 쥔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남자들 중 하나가 한 걸음 다가서더니 루한의 얼굴을 톡-톡- 기분나쁘게 건드렸다.
"얼굴은 곱상하게 생긴게. 어서 집에나 가라. 우린 쟤한테 볼 일이 있거든. 넌 이름이 뭐냐?"
"말하지마!!"
루한 뒤에 있던 민석이 소리쳤다. 루한은 민석의 말에 움찔하더니 다시 앞에 있던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쟤 건들면 너넨 다 죽을 줄 알어."
루한이 거칠게 남자의 턱을 쥐었다. 그 남자는 고통스러운듯 눈을 찌푸리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루한은 그 남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남자는 턱을 쥐며 고통스럽게 바닥에서 뒹굴었다. 예상보다 강한 루한의 등장에 그 남자들은 움찔하는 듯 했다.
"김민석.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이 말을 남기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부축여 서둘러 사라졌다. 루한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씩씩대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저 새끼들이 네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어!"
"화내지마..무서워.."
민석은 처음 보는 루한의 모습에 잔뜩 겁 먹은듯 했다. 루한은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듯 숨을 연신 몰아쉬었다.
"가나슈, 괜찮아?"
"응.. 가게 지금 끝난거야?"
"어. 니가 만난다고 했던 사람들이 저 놈들이지?"
"아 응.."
"누구야?"
루한은 민석의 어깨를 붙들고 물었다.
"예전에 나 도와주던 분들이야."
"도와주던?"
"응. 좋은 사람들이야. 너무 걱정하지마."
"믿어도 되는거지?"
"믿어줘."
민석은 루한의 눈을 쳐다봤다. 깊고 맑은 눈.. 마추픽추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눈을 갖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사슴이 물을 찾으러 마을로 내려온 것 같았다. 민석은 생각이 많았다. 마추픽추에서 도착한 후부터 줄곧 불안했다. 아직 자신은 너무나도 어린 것 같았고, 지금까지 내려왔던 결정들이 올바른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저 위태위태하게 부유하는 뿌리가 뽑힌 개구리밥 같았다. 루한을 만났을 때, 공중에 갈 길 못 찾고 부유하던 뿌리가 길게 내려와 땅에 단단하게 박힌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굉장히 물이 잔잔해 고정되어 있지만, 후에 물살이 점점 세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루한의 눈 안에서 민석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루한은 민석을 덥썩 안았다. 여느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온 몸으로 민석에게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루한의 포옹은 굉장히 억세고 절절했다.
"떠내려가지마... 내가 잡을게.."
루한의 말에 민석의 가슴 속 뿌리가 쿵-하고 물 속 땅 안으로 박힌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겠지.. 루한? 우리 만나기 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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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 몽블랑 예고)
"박찬! 나랑 어디 좀 가줘."
"쉿. 조용히, 가만히 있어."
"한국에서 널 다시 만난다면 한번 해보고 싶었어."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오늘만 옆에서 자도 돼?"
안녕하세요, Cascade입니다. 다음화에서 암호닉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확인해주세요 ^^ 항상 댓글로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그 힘으로 열심히 글 쓰는 것 같아요. 다음 화는 그냥 루한, 민석 그리고 찬열, 백현 모두 달달 포텐을 터뜨려버리려구요. 작정하고...
항상 감사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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