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네."
그와의 약속에 늦어버린 시간에
덜 마른 머리를 손으로 대충 흐트리며
신발을 구겨신고 집을 나섰다.
다행히 도착해 둘러본 약속 장소에 그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항상 바쁜 스케줄에 늦는 그를
매일 기다리기만 하던 내가 잔상처럼 그려지고
몰려오는 허탈함에
머리라도 말리고 나올 걸 이라는 후회를 하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시간이 꽤나 지나는 것도 모르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으면
톡- 톡- 하는 소리에 돌아본 창밖에는
흐린 하늘 사이로 투명한 빗방울이 비춰지고 있었다.
물기가 사라진 머리와
감쪽같이 차가워진 컵의 표면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주었다.
옆에 놓인 핸드폰을 슬쩍 바라봐도
그를 기다리는 동안 한 번도
빛을 내지 않은 검은 화면은
어딘가 흔들리는 내 모습만을 담아낼 뿐이었다.
빤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들고 메세지 창을 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갔다.
[종인아 오늘은 못 보겠다. 기다리다 나 먼저 갈게.]
마지막을 어떻게 맺어야 할까.
미안해? 아니면
"..."
우리 그만 하자?
머뭇거리는 손가락이 나 조차도 짜증이났다.
혼란스러움에 나는 이리 저리 치여 중심을 잡지 못한다.
그 원인을 찾으려 해봐도 난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찾지 못하는 걸지도.
차오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면
"..."
그곳에 서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가 있었다.
"미안해요. 오다가 팬을 만나서."
돌아오는 바람에 늦었어요.
"그래? 그래도 다행이 왔네."
"응, 준면이 형이 도와 줬어요."
누나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아, 준면이 오빠가?"
그 형은 누나 엄청 마음에 들어해요.
"왜, 좋은 거잖아."
작게 웃으며 흘리듯한 내 말에
순식간에 뚱 해져서는 툴툴 거리던 그가
아, 하는 탄성을 지으며
활짝 웃어보이곤 말을 이었다.
"누나, 나 아빠 되었어요."
심장이 쿵- 하고 발 끝 아니, 그 밑으로 떨어졌다.
다시는 올라 오지 못 할 정도로 떨어진 심장은
그만큼의 통증을 가져왔다.
나는 종인이에게
내 안에 자리잡은 '이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혹시라도 그에게 큰 부담이 될까봐,
밋밋한 배에도 불구하고 만날 때마다의 옷차림도
어지간히 신경 쓴 것이 아니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혹시나 몰라 모자에 마스크까지 하고 다녀온 병원이었다.
근데 어떻게 종인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새 하얗게 백지가 된 머리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생각이 정리 되지 않은 채 급한 마음으로 한 말은
단어, 단어적으로 띄어저
두서 없이 내 뱉어 졌다.
"어, 아니 종인아. 내가 일부로 숨긴 게 아니라. 그, 나도 오늘에서야-."
"팬들이 나보고 아빠래요."
귀엽지 않아요?
눈까지 휘어가며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말하는 너를보며
나는 멍하니 창밖의 빗방울을
내 눈가로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어, 어 누나 왜울어요."
장난 친 건데. 미안해, 미안해요. 응?
맞은 편에서
당황함이 가득한 모습으로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주던 너는
이내, 내가 가장 두려워 하던
"근데 누나."
하지만 꼭 대답해야하던
"아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물음을 던졌다.
"일부로 숨긴 게 아니라느니, 뭐라느니."
스스로가 느껴질만큼 떨리는 입술을
애써 물어 감추며
그의 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
임신했어.
김종인
"..누나, 뭐라고.."
"나, 임신했어."
니 애 가졌어, 종인아.
그와 나의 목소리에 감춰졌던 빗소리는
침묵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보다 더 두꺼워진 그 소리는
그새 거세진 비의 증거였다.
저 비가 차고 넘칠 정도로 내려와
나를 익사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주 째래."
"..병원, 다녀온 거에요?"
"응."
"..누구랑요."
"혼자."
다시 들려오는
맞은 편의 깊은 한 숨에
나는 그저 떨어지는 빗줄기를 따라
한 없이 추락 할 수 밖에 없었다.
"..누나. 미안해요."
나한테 생각 할 시간을 줘요.
푹 숙여진 그의 고개에 의문이 들었다.
내 잘못인데 그가 왜?
내 죄인데 그가 왜?
매 순간 내게서 빛나기만 하던 그가
지금 나로 인해, 내 앞에서 빛이 꺼져가고 있다.
나는 그 빛이 꺼지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생각 할 거 없어."
괜찮아, 괜찮아.
"..무슨 말.."
"..수술 잡혔어."
나는 괜찮아.
"..네?"
"..삼 일 뒤야."
"..그런 게 어딨어요. 나랑 상의 정도는-."
"종인아."
나는 정말 괜찮아.
어느새 들어올려진 그의 눈동자에는
꽤나 못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에게 비웃음을 날리는 내가 있었다.
그 일그러진 모습으로
모순적이라며
나를 향해
악에 받쳐 욕설을 하는 스스로에
나는 다시 혼란이 오고
내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
나 선약이 있어서 먼저 갈게.
혀 끝까지 올라온 다음에 보자-. 라는 너무 쉬운 말을
끝까지 입안에 감춰둔 체
도망치듯 카페를 나왔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그의 소리를
빗소리라고 단정 지어 버리고 말이다.
"...가지 가지 한다."
꽤나 카페에서 멀리 떨어져 왔을 때
아련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되기 싫어
집에서 챙겨온 우산을 꺼내들었다.
우연인지 그 우산은 언젠가 고장낸 기억이 있는 우산이었고
당연히 제 역할을 할리가 만무했다.
마침 보이는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대략 집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보니
걸어서 20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평소라면 당연히 돈도 아낄겸 걸어갔겠지만.
"..택시-."
이상하게
곧 사라질
이 작은 존재가 걱정이 되었다.
집으로 가는 도중 그쳐버린 비에
괜히 몰려오는 허무감을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은 기분으로 택시에서 내려
집앞으로 걸어가면
"..다행이 많이 안젖었네요."
온몸이 젖은 채 서있는 그가 있었다.
"너 뭐야."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누나 우산 말이에요."
그거 고장난 거 잖아요.
새하얗게 질린 손에는
급하게 산듯한 투명한 비닐 우산이 들려 있었다.
"너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두 명 보다는 한 명이 걸리는 게 나아요."
누나 약도 못먹잖아.
"..두 명이라니."
"두 명이지."
누나, 그리고 우리 애기.
파랗게 질린 입꼬리를 올리며
예쁘게도 웃어보이는 그가
너무 벅차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작정 달려가 그를 안아버리는 나를
차가운 손을 들어
등을 어루만저주다
곧 제 몸이 차갑다며 나를 떨어트렸다.
그의 옷자락을 꼭 쥐고
아이처럼 울고만 있는 나를보며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다
내 앞에 조심히 몸을 낮췄다.
"..내가 진짜 아빠가 됐네."
더이상 나를 괴롭히는 혼란은 없었다.
"..우리 아기."
"..."
분명 사랑받는 아이가 될 거에요.
내가 장담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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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날라갔다가 다시써요ㅠㅠㅠㅠㅠㅠ어흐규ㅠㅠㅠㅠㅠ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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