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다, 다다음 주 수학여행 가잖아."
"...그러네."
"너 장기자랑 나갈거지? 올해는 축제 안한다던데."
"봐서."
"보긴 뭘 봐, 무조건 나가야지 너한테 걸린 돈이 얼만데!!! 2,3학년 같이 간다 그래서 3학년 선배들이 지금 너 몇반이냐고 찾고 난리남. 올해는 좀더 센 걸로 나가라."
...수능을 친 후 사회에 나가 장성한 어른이 된 작년 3학년 선배들의 계보를 이어받은 올해 3학년들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아 몸서리가 쳐졌다. 시발, 그냥 작년에 그거 하지 말걸 그랬나. 하지만 올해는 적어도 두 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냥 무대에서 확 다 벗어버릴까? 존나 아무렇지도 않게 수련원 강당을 AV촬영장 세트로 만들어버릴 생각(그렇다고 내가 그만큼 섹시하다는 건 아니다.)을 하던 나는, 뒤이어 들린 김종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박찬열은 춤춘다던데."
....지랄, 그 춤신춤왕이?
그 어떤 춤도 한국무용이나 부채춤으로 만들어버리는 저주받은 몸의 소유자가 박찬열이다. 팝핀을 춰도 개다리춤이 된다 그새끼는. 아니, 그나마 부채춤이라도 되면 몰라. 내가 보기에 그냥 그새낀 오징어다. 흐느적흐느적. 그 슈퍼모델마냥 쭉쭉 뻗은 팔다리를 왜 활용을 못하는지. 나 봐, 작년에 강당 폭발하는 줄 알았잖아.
"축제 안한다니까 다행이다. 축제 싫어, 돈만 들고 식상하고."
"작년에 전교 통틀어서 가장 많은 수입을 가져간 변백현은 그런말 할 자격 없는걸로 아는데."
"...닥쳐, 병신아."
하여튼 변지랄, 김종대가 질린다며 교실을 나서자마자 책상에 장렬하게 엎드렸다. 수학여행이라니, 이 무슨 사치스럽고 귀족냄새나는 단어란 말인가. 사실 난 내돈 주고 수련회니 뭐니 한 번도 가본 적 없다. 정부의 도움이 컸지. 우리동네 유난히 그런 거 지원이 잘 된다. 그나저나 3학년이랑 같이 가는거면...크리스도 가려나. 과연 그 도련님이 한 방에 일고여덟명씩 우르르 몰려 자는 그 수학여행을 갈 지 모르겠다.
아무튼 돈만 주면 가랑이 사이로 기는 거 빼고 거의 모든걸 다 하는 내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 올해는 뭐할지 구상을 지금부터 해봐야겠다. 작년에는 걸그룹 댄스였으니 올해는 그냥 심플하게 성인식으로 갈까, 아니지 약간 올드한 느낌이야. 그럼 차라리 솔로무대를 하지말고 몇 명 더 끼워서 진짜 걸그룹을 만들까?
"하아...."
개뿔, 못해먹겠다. 장기자랑 계획을 짜려다가 복도를 쳐다보면 박찬열이 보이고, 수업시간에 창문 밖을 내려다보면 체육 수업중인 김민석이 보이고, 점심시간에 급식실로 가면 나란히 앉아 밥을 처먹고 있는 박찬열 김민석이 보였다. 하나도 집중이 되지 않고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놓는 통에 머리만 아파왔다. 시발, 다 쌩까고 싶은데 그게 어디 맘대로 되면 내가 왜이렇게 청승을 떨까 싶었다. 박찬열 개새끼, 박찬열 씨발놈.
"야, 오세훈 마누라."
"디진다."
나잇값 못하고 핸드폰으로 포켓몬스터 게임을 하던 김종인이 성의없이 대답한다. 피처폰으로 포켓몬 게임이 될 리가 없었다. 것도 골드가 아닌 파이어레드라면. 몇주 전이랑 또 핸드폰이 다르다. 나나 박찬열이랑 집안 사정은 비슷한 놈이 핸드폰은 자주 바뀌는 게 아마 누나들이 사주나 싶었다. 아 시발, 또 죽었어. 이슬이 좆나 빡쳐....지우와 삼천궁녀 중 한명 주제에 겁나 쎄. 웅이는 좆밥인데. 혼자 중얼거리는 폼이 딱 왕따 잘 당할 스타일이다.
게임에 집중한 탓인지 아니면 무뎌진건지 오세훈 마누라라는 약간 자극적인 호칭을 썼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
"넌 오세훈 보면 느낌이 어떻냐?"
빨빨거리면서 숲을 돌아다니다가 운좋게 피카츄를 잡았다고 존나 좋아하던 김종인이 내 말에 그제서야 핸드폰에서 시선을 뗐다. 갑자기 뭔 개소리냐는 물음이 표정에 역력히 드러났지만 모두 무시했다.
"뜬금없이 뭐래냐, 어떻긴 뭘 어때 병신이지."
"아 장난치지 말고."
"글쎄,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데? 얼굴 좀 반반하고 꼬추는 열라 크고. 딱 내 이상형. 돈도 많아."
"...쿨팩 하나에 수줍어했으면서 지랄한다."
"닥쳐, 백현아."
하긴 머리에 든거라곤 술 담배 돈 섹스밖에 없는 놈한테 내가 뭔 말을 기대하겠냐만은, 그래도 친구가 이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는데 고개라도 한번 돌려주지 그러니? 응? 종인아, 나 지금 너 무지 패고싶어... 물론 싸웠다간 발린다. 아주 손쉽게. 누가? 내가. 박찬수 다음으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놈이 김종인이다. 그러고보니 모순인게 박찬수는 박찬열한테 좆나 발린다. 둘이 심각하게 싸우는 거 봤는데 진짜 상대도 안된다. 맞고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어쩌다 한대 맞고 빡쳐서 더 때리고. 박찬열이 그랬다. 김종인도 박찬열한테는 게임이 안 된다. 근데 난 그런 박찬열이 세상에서 제일 만만했다.
박찬열의 존재는 언제나 나의 지갑이오 택시였다. 어디 돈 문제 뿐인가, 숙제며 필기며 박찬열이 내것까지 다해줬다. 박찬열의 여름방학은 언제나 3개월이었다. 개학 3일전에 밀린 내 일기까지 대신 써주는 게 일이었으니까. 난 놀러나가고 박찬열은 일기에 탐구생활에 독후감에, 정말 완벽한 집요정의 일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나의 만행을 누군가 알게되면 나를 욕하기에 앞서 사실 여부를 판단할 것이다. 설마, 박찬열이 정말로 그랬단 말이야? 못 믿을만도 하지, 김종대 말대로 찬열인 나한테만 좆밥이었으니까. 이제 알겠다. 인정한다.
"뭐가그리 심각해, 좋으면 좋은 거지. 그래 내가 한때는 오세훈을 좆나게 싫어하긴 했다만 현재가 중요한 거야, 좋아 죽겠다. 엄청. 됐냐?"
"몸 한번 섞었다고?"
"한번 아닌데."
말자, 말아... 내가 너랑 뭔 대화를 하겠냐, 그럼 나도 찬열이랑 몸을 섞어봐야 되니. 순간 상상해버린 내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박찬열과 내가 서로를 끈적하게 쳐다보며 몸을 지분거린다고 생각하니 아까 오세훈한테 뜯어먹은 매점빵이 올라올 것 같았다. 박찬열이 남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아직도 나는 찬열이가 친구에 가깝다. 좋아하긴 하는데, 아직은 사랑한다는 감정이 익숙하지가 않다.
"김조닌, 누가 하루에 담배 두갑씩 피래! 혼나야겠어 오빠한테."
"뽀뽀해주면 끊는 거 생각 좀 해볼게."
내 앞에서 연애질하는 바퀴벌레 한쌍. 둘다 치워버리고 싶다. 아무리 김종인이 구릿빛 피부에 탄탄한 복근을 가진 자칭 섹시의 아이콘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교실에 우리말고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담배냄새 때문에 토할 것 같은 저 입에다 딥키스를 하고 싶을까? 오세훈 의외로 비위도 강하다. 말라빠진 몸으로 김종인을 휘어잡는 것만 봐도 확실히.
+
"흑...사랑이 식었어... 내가 얼마나 지한테 잘해줬는데!!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갈 수가 있어!!!!!!"
"야 야, 기운내라. 여자가 뭐 별거냐 세상의 반이 여잔데."
"세상의 반이 여자여도 우리 민서는 하나야!!!!! 70억 명 중에 하나!!!!!"
지랄싼다, 진짜.
오늘도 어김없이 부업에 열중하며 책상에 고개 처박고 열심히 본드를 짜는데 건너분단 놈들이 매우 시끄럽다. 자기 반도 아닌 남의 반에 와서 동갑내기_여친한테_차인_썰.txt을 줄줄이 늘어놓고 있는 3반 임상혁을 주축으로 주변에 빙 둘러 원을 그리고 있는 한심한 새끼들. 미간을 멋지게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이어폰을 귀에 꽂아넣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이어폰이 없다. 그런 거 살 돈으로 쌀이나 더 사겠다. 임상혁도 오세훈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우리학교 부유층에 속하는 놈이다. 부유층=자기 방 있고 집에 컴퓨터 있는 놈=친구많음. 슬프지만 지금 임상혁을 위로해주고 있는 저 바퀴벌레 군단들 중에 과연 임상혁을 진짜 친구로 여기는 놈이 몇이나 될까 싶다.
"아직도 민서와의 첫키스를 잊을 수가 없어...."
"뭐야, 키스 안했다며."
"간접키스. 내가 마시고 놔둔 콜라 같은 빨대로 민서가 마셨어...."
"정민서 애 배겠네, 원래 간접키스하면 애 생기잖아."
"맞아, 나 아는누나도 남친이 마시던 물컵으로 물마셨더니 애생김."
육갑떤다, 나랑 박찬열은 초중고 내내 리코더 멜로디언 같이 썼는데 그렇게따지면 우린 벌써 축구단 만들고도 남았다 씨팍 새끼들아. 임상혁은 진지한데 그걸 위로해준답시고 모여앉은 놈들은 하나같이 다 낄낄거리고 있다. 시끄럽고 경박스러운 웃음소리가 귓방맹이를 때려서 짜증이 폭발한다. 안그래도 머리 복잡해 죽겠는데 이자식들아.
"야 임상혁, 니네 반 가서 떠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쏘아붙였더니 시끄럽던 무리가 조용해졌다. 그러다 누군가 슬쩍 입을 연다. 야, 변지랄 오늘 생리하나보다. 가자. 내가 아무리 일년 열두달 헤헤거리고 다녔다지만 생리드립이 나한테까지 뻗을 줄은 몰랐다. 투덜거리며 교실을 나가던 놈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이 반은 반장부터 시작해 왜이리 생리하는 놈들이 많냐면서.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볼래 아이들아?
도저히 이대로는 안되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전투적인 동작으로 문을 열었다. 천천히 2반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바로 옆반임에도 불구하고 존나 멀게 느껴졌다. 근데 가봤자 할말이 없잖아, 원래는 할말이 있든 없든 심심하면 가는 게 찬열이네 반이었는데. 물론 지금 그걸 기대하는 건 힘들다. 나도 안다. 망설이던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건 2반에 있는 친구 김준면. 그래, 다음 시간 체육이니까 체육복 빌리는 척 가보면 되겠다. 지금 내가 왜 이러냐면, 솔직히 말하자면 찬열이가 보고싶어서.
"준배야!!!!!"
아무렇지 않은 척 괜히 문을 세게 열었다. 몇몇 놈들이 나를 힐끔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자기 할 일 한다. 좁은 동네인 이 수만동에서 니 친구가 내 친구고 내 친구가 니 친구다. 어차피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나와 다 아는 놈들이라 괜찮다. 양 옆에 만화책을 잔뜩 쌓아놓고 잉여로운 자태로 나루토를 정독하고 있던 준면이가 고개를 든다. 생긴건 전교1등같이 생겨가지고 허구한날 띵가띵가 노는 게 일인 놈.
"변백 왔냐? 웬일이야, 니가 나 찾으러 오고."
"나 체육복좀."
"새끼...."
준면이가 가방에서 체육복을 꺼내려고 고개를 숙이자마자 미친듯이 눈알을 굴려 찬열이를 찾았다. 맨 뒷자리. 무표정으로 앉아 교과서를 읽고있는 찬열이에게서야말로 전교1등의 아우라가 뿜어져나왔다. 하지만 찬열인 그냥저냥 상위권이지, 전교1등까지는 아니다. 공부보다는 축구에 많은 시간을 쏟기 때문. 하긴, 저 스펙에 전교권에서 놀기까지 하면 나 쟤랑 안 놀았을 거다. 다행인건 나한테 박찬열이랑 비교할 부모님이 없다는 거.
하, 잘생겼다. 새카만 흑발에 공부할 때만 끼는 뿔테를 쓰고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교과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야말로 존잘이다. 한참을 넋놓고 박찬열 얼굴감상에 열중하는 나를 준면이가 툭툭 친다. 야, 체육복 가져가. 아 시발 좀만 더 늦게 찾지 그랬냐.
"찬녀라...종 쳤어어?"
"아직 1분 남았어, 슬슬 잠좀 깨야지. 민석아 이제 일어나."
니미럴, 체육복을 받아드는 내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꽂혔다. 그러고보니 김민석 박찬열 옆자리라 그랬지, 옆에서 담요를 덮고 정신없이 잠에 빠져있던 놈이 누군가 했더니 김민석이였다. 찬열이가 김민석을 살살 달랜다. 씨발, 나도모르게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나오는 것 같다. 어딜 손대, 어딜!!!! 이제 대놓고 질투하는 나를 발견하고 나도 좀 놀랐다. 그런데, 찬열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거다.
헐, 나도모르게 순간 고개를 돌려버렸다. 찬열이가 나를 쳐다보는데, 그냥 왠지 째려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 니꺼 꼬라봤다 이거지. 빡친다.
"...준면아, 나 간다."
"뭐야, 아직 안갔음?"
"이제 간다고."
넌 친구도 아니야, 발걸음을 돌려 곧장 반으로 향하는데, 복도에서 누군가 나를 불러세운다. 익숙한 저음. 설마.
"변백현."
"...."
찬열이다.
"...왜...?"
"...."
불렀으면 말을 하라고. 평소엔 빙구같던 놈이 무표정으로 부르니까 좀 무섭다. 아까 김민석 쳐다본 게 그렇게 기분 나빴냐, 아주 애를 키워라 키워. 질투난다. 정말 솔직하게, 김민석을 보는 그 눈빛이 나를 보는 눈빛이었으면 좋겠다.
"...."
"...그냥, 잘 사나 해서."
어느새 뿔테를 빼고 나를 또렷하게 쳐다보고 있다. 평소같으면 상상도 못할만큼 멀리 떨어진 거리. 바로 앞에 서서 히히덕거리며 내 머리를 정리해줘야 할 너는 뒷문과 앞문의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한테 화난 건 아니지, 그치? 이렇게 친히 말까지 걸어주시는 걸 보면 화난 건 아닌것 같다. 다행이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다. 이렇게 어색하고 눈치만 보는 사이 말고. 그것만으로도 난 행복할 텐데.
...정말 그럴까?
"토요일에 나 알바하는 카페로 와."
"...주말에 안하잖아."
"그날만 대타 뛰기로 했어."
"뭐하게."
"오라면 그냥 와라."
간다, 찬열이가 뒤도 안 돌아보고 교실에 들어선다. 창문 넘어로 빤히 쳐다본 찬열이는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는다. 여느때와 다름없는 말투. 딱딱하기 그지없는 일방적인 통보지만 나는 병신같게도-.
"...웬일이야, 저새끼가."
기분 째지게 좋았다. 망할. 아무래도 나 중증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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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 다 분량이 적어서 그냥 한꺼번에 올려여ㅋㅋ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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