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제자님, 선생님 부탁 좀 들어주지 않을래?"
"네, 그러지 않을래요."
"시끄러. 이것 좀 갖다버리고 와라."
"지금 5월인데 왜 아직도 작년 교과서를 안 버리셨어요....?"
"내 맘."
헉, 무거워. 교과서만 주는 줄 알았는데 학습지에 온갖 이면지까지 다 내 품에 안겨주신 담임이 상큼하게 웃는 얼굴로 말한다. 분리수거장 어딘지 알지? 인간적으로 이면지는 좀 재활용합시다, 환경을 보호해야지 대체... 어휴, 그렇게 터덜터덜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애초에 생전 안 오던 교무실에 들른 게 잘못이였다. 난 그저 반 애들 서른명이 똑같이 인쇄된 프린트가 내것만 잘못 인쇄되서 온 것 뿐인데. 아무래도 난 운이 정말 안 좋은 인간같다.
"아오!!!! 짜증나!!!!!!!! 무거워!!!!!!!!!!!!!"
평소 내가 담배장사 하러 자주 온 장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구석탱이에 배여있는 미미한 담배냄새까지도 내 짜증을 유발한다. 온갖 종이들을 분리수거함에 처넣고 있는데,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다. 말소리 같은데? 급히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그걸 엿들었다.
"...해."
"뭐?"
"...너 좋아해."
참 나, 남녀공학 살판났구만. 허구한 날 학교에서 몸 섞던 것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로맨스 영화를 보고왔는지 꽃피는 봄에 안 어울리게 고백질이다. 으, 소름끼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남은 교과서를 몽땅 분리수거함에 쑤셔넣었다. 근데 여기서 내가 간과한 게 하나 있다.
"내가 좋다고?"
고백하는 놈이나, 고백받는 놈이나. 목소리 톤이 비슷하다는 거다. 그 말인 즉슨,
....얼씨구나 게이파티로구나. 그런데 한놈 목소리가 어디서 되게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징그럽게.
"...응."
손을 탁탁 털고 슬쩍 벽에 기대서 건너편을 훔쳐보는데, 아니나다를까 남학생 둘이 마주보고 서있다. 왼쪽에 서있는 놈은 처음보는 애다. 커다랗고 동글동글한 눈이 도륵도륵 굴러다니는 게 꽤나 귀엽게 생겼다. 시력검사 때마다 양쪽 1.5로 나오는 몽골리안이라 명찰 색깔을 봤는데 2학년. 뭐? 우리 학년이라고?
...그리고 나는 굳어버렸다. 그 맞은편에 서있는 놈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민석아, 나도 남자고 너도 남자야."
"상관없어!"
박찬열. 고백받고 있는 놈이 찬열이였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미친듯이 뛰었다. 절대 훔쳐보면 안 될 것을 훔쳐본 기분이였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너 좋아했어. 더럽다고 해도 괜찮아, 나는 그냥...."
"...민석아."
"나 니가 정말로....흑....."
눈 큰 남자애가 말을 잇지 못하고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컨데 찬열이는 지금 잔뜩 당황했을 거다. 내가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를 모르겠다. 좆됐다. 운도 없지, 왜 이딴걸 봤을까. 시발... 입술을 꾹 깨물고 소리없이 일어나 두 놈이 마주보고 있는 쪽을 다시 몰래 쳐다보았다. 당연히 만만치 않게 큰 두 눈으로 남자애를 쳐다보며 쩔쩔매고 있는 모습이 내 앞에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내 예상이 틀렸다.
"...울지 마."
찬열이는, 그 남자애를 꼭 안아주고 있었다. 두 손으로 남자애의 등을 토닥여주기도 했다.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매달려 울고있는 남자애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찬열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가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그곳을 빠져나와버렸다.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와 미친듯이 달리는 와중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찬열이가 안아주고 토닥여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유일했다. 제 동생이 울어도 절대 안 달래주는 주제에 내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안 좋아보이면 갖은 재롱을 다 떨어가며 웃게 해주는 놈이 박찬열이였다. 정말 바보같이, 존나 병신같지만 난 그랬다.
......내가 제일 처음 느낀 감정은 질투였다. 빌어먹게도. 난 어쩐지 울고 싶어진 기분에 눈을 꾹 감았다.
*
"...쟤 누구냐?"
어차피 졸업하면 돈벌러 갈 거 문과인지 이과인지 결정하기 귀찮아 몇몇 놈들처럼 코카콜라로 정한 나다. 그러므로 수학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이과생을 발견하는 것도 우리학교에선 흔한 일이였다. 침만 안 흘렸지 거의 실신상태에 빠져있던 내가 앞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에 깜짝놀라 일어났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교장이나 교감이 아닌 남자애 하나였다. 그냥 남자애였으면 말도 안 했다. 짧은 갈색머리에 커다란 눈을 굴리며 총총총 교실 안으로 걸어들어와 함수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미친불독(입꼬리가 귀엽고 깜찍하게 쳐져있어서 붙은 별명)에게 옆반에서 왔는데, 프린트 두 장만 주실 수 있으세요? 라며 애교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애는 아까 찬열이와 같이 분리수거장 뒷편에 있던 그 애였다. 이름이...어, 민석이라고 했던가.
웬만해선 남의 이름이랑 얼굴을 잘 매치 못하는 내가 기억할 정도라면 확실히 인상적이였다. 겨울방학때 박찬수에게 반 강제로 레드와인 염색을 당했다가 다시 염색할 돈도 없고 귀찮아 그냥 놔둔 내 얼룩덜룩하고 긴 머리카락과는 확실히 달랐다. 머리와 인상은 단정했지만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있고, 교복 셔츠 소매는 반쯤 접혀있었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교칙을 지키는 것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튀는 것도 아니다. 근데 내가 이렇게 확실히 기억하는 이유는 뭘까.
건너편 분단에서 똑같은 자세로 졸고 있던 김종인을 지우개 던져서 깨운 뒤 다짜고짜 물었다. 으, 저새끼 침흘렸어 존나 더러워. 하긴 주로 밤에 일하는 놈이라 학교에선 잠이 부족할 만도 했다.
"쟤...어, 그 뭐지? 얼마 전에 전학왔다던데."
"말세로구나, 몇반?"
"2반."
...2반. 그러고보니 아까 옆반에서 왔다고 했지, 찬열이네 반이였다. 괜시리 기분이 나빠졌다. 오늘 처음 본 저 민석이라는 남자애가 무지 신경쓰였다. 김종인에겐 일부러 티내지 않고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다시 자리에 엎드렸다.
"쟤 박찬열 옆자리더라."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고."
찬열이는 유치원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반에서 최장신을 맡아왔다. 어지간하면 키순으로 자리를 정하는 통에 10년 가까이 한 번도 앞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맨 뒷자리, 옆자리는 비어있었을 거고 그 자리에 저 전학생이 앉았다 이거지. 척 봐도 나보다 작아보이는데 차라리 자리를 싹 바꾸던가, 괜히 옆반 담임이 원망스러워졌다. 잠깐, 근데 내가 왜 이지랄이지?
"뭔일인지 모르지만 이제 그만 화해해라 변백, 보는 내가 답답해 죽겠네."
"싸운 거 아니라니까."
"시끄러, 누가봐도 싸웠어 니네. 생전 안 싸우던 놈들이...돈 문제냐?"
"제발 좀 닥쳐...."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냥 엎드렸다. 역시 김종인은 도움이 안 된다. 그러고보니 이번 시간 끝나고 종대를 만나러 가야 했다. 완벽하게 완성된 십자수를 건네주고 보수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크리스는 내가 했을 거라곤 꿈에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만 받으면 난 되는거다.
"...뭐?"
"니가 대신 전해주라는데?"
"내가 오세훈인 줄 알아?! 같은 말 두번 할 필요 없어!!! 내 말은 대체 왜 내ㄱ....."
"아아, 학교를 주름잡는 여왕벌도 첫눈에 반한 남학생에게는 그저 한 떨기 꽃일 뿐. 자신이 없으시대잖냐."
"오페라 찍음? 지랄말고 그럼 니가 가!!!!"
"장난하냐? 시커먼 내가 가리? 싸대기 맞고 올 지도 몰라. 그나마 니가 나보다는 고백녀 비주얼에 좀 어울리잖아."
...차마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미쳤어 변백현, 이젠 하다하다 고백대행까지 해주게 생겼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십자수를 건네받았다. 남자 곰돌이와 여자 곰돌이. 다른놈도 아니고 크리스라니, 내가 진짜 미쳐.
"2만원 더준대."
"...친구야 갔다올게."
이게 뭐야, 백현? 3학년 5반 교실 맨 뒷자리 (이쪽도 박찬열과 같은 최장신) 에 고고하게 앉아 음악을 듣고 있던 크리스를 불러내 다짜고짜 십자수를 내밀자마자 들은 말이다. 나 주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크리스에게 쭈뼛거리며 말했다.
"이거...제가 주는 건 아니구요, 그게 그러니까...."
"귀엽다. 백현이 한 거야?"
"그게...제가 한 건 맞는데 제 이름으로 주는 건 아닌......"
"백현이 했다고? 오, 진짜 잘했다! 백현 이런 재능도 있었어? 주유소 말고 이런 거 하지."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 멍청아!!!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무리 멍청해도 나보다 나이많은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1초만에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I love you? 나한테 하는 말이야? 나랑 사귀자고?"
"그게 아니구요 크리스!!! 좀 끝까지 들어봐요!!!!"
"좋아, 그 고백 받아줄게. 나도 백현이 좋으니까."
"제발!!!!!"
"우리 오늘부터 1일인거야."
그런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들었어!!!!! 식겁한 나머지 고개를 들어 크리스를 쳐다보았는데, 줄곧 십자수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크리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는 걸 보았다. 내 뒤에 있는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크리스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
"...."
"...."
찬열이다.
3학년 각 교실을 돌아다니며 유인물을 전달해주는 방송부 셔틀짓을 자주 하는 놈이라 그런지 손에는 방송부 관련 프린트가 몇 장 들려있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였다. 찬열이는 나와 크리스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그대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버렸다. 당황한 내가 따라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누군가의 손이 나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그 누군가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가지마."
"...."
"백현, 가지마."
대체,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나는 어떡하라고요. 나보다 한참이나 큰 크리스를 올려다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몰라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
"너!!!! 너어!!!!!!! 아빠한테 이를 거야!!!!!!!!!!"
"일러라 일러라!!!! 너만 아빠있냐 나도 아빠 있어!!!!!! 난 엄마도 있거든?!!!!"
"...나도 엄마 있어!!!!!!!!"
흐어엉-엄마아-!! 또래의 평균치보다는 제법 덩치있어 보이는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남자꼬마가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무릎은 다 까졌으며 얼굴에는 온통 시퍼런 멍이 든 채로 울면서 달려갔다. 그리고 흙투성이가 된 몰골로 그 장면을 씩씩거리며 쳐다보던 또다른 꼬마가 놀이터 모래밭에서 일어났다.
척 봐도 방금 전 눈물콧물 흘리며 엄마를 부르짖었던 남자아이 덩치의 반밖에 안 되어 보이고 키도 머리 하나는 작은 꼬마의 옷은 비록 모래범벅이지만 뽀얀 얼굴에는 생채기 하나 없다. 아무래도 싸움의 승리자는 의외로 이 쪽인 듯 하다. 그러나 꼬마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지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약육강식의 세계에 발을 내민 수만초등학교 1학년 3반 병아리 변백현 되시겠다.
"백현아!!!!!"
저 멀리 놀이터 입구서부터 백현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는 이는 부모님도 형제도 아닌 같은학교 같은반 박찬열이다. 호리호리하고 말랐지만 키 하나는 아까 그 덩치큰 꼬마보다도 조금 더 큰 찬열이 흡사 팔랑거리는 바람개비와 같은 몸놀림으로 달려와 백현의 앞에 섰다.
"많이 다쳤어? 어떻게 된 거야!!!"
"에이, 왜 이제 와. 다 끝났는데?"
"...이겼어?"
"응, 히히."
와, 다행이다. 지도 조막만한 게 어디서 배웠는지 백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는 찬열의 눈빛에 정말로 다행스러운 감정과 대견함이 섞여있다. 방금 전 백현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그 큰 꼬마에게 뒤돌려차기 등등 살인기술을 써가며 무찌른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찬열은 다음부터 시비 건다고 싸우지 마, 다치면 어쩌려구. 라며 걱정했다.
동네에 아파트라곤 존재하지 않는터라 번쩍거리는 고급 아파트 전용 놀이터가 아니라 미끄럼틀과 그네 두 개, 그리고 철봉 서너 개가 다인 소박한 놀이터지만 백현과 찬열은 8년 인생의 대부분을 여기서 보냈다. 작년까지는 눈뜨면 밥도 건너뛰고 하루종일 놀이터에서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쯤에서야 집으로 설렁설렁 기어들어왔지만 올해부터는 진정한 청소년의 길로 들어선 나머지 놀이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그것을 백현은 많이 아쉬워하는 중이다. 찬열은 백현과 놀 수만 있으면 어디든지 좋았지만.
둘다 외향적인 성격이라 반에 친구는 많았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면 가장 재밌고 웃음이 끊이질 않는 친구는 서로뿐이다. 물론 종인도 있었지만 그는 뭔가 찬열과 백현이 감당하기엔 좀 벅찼다. 학교도 안 들어간 미취학 아동은 갖고싶은 게 생기면 아무생각 없이 문구점에서 그것을 가져왔다. 그게 도둑질이라는 걸 알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근데 나 어제 찬수한테 맞았어."
"...뭐? 왜?"
"몰라, 걔가 사과나무는 봄에 심어서 가을에 수확한다잖아. 옆에서 비웃고 있으니까 갑자기 내 머리 막 때렸어. 요기 혹도 났다?"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 백현의 조막만한 머리통에 볼록 나 있는 혹을 들여다보던 찬열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박찬수 디졌어, 라는 말이 어렴풋이 들렸지만 백현은 개의치않고 많이 때려줘야돼? 라며 맑게 웃었다. 하얗고 천진난만한 모습에 찬열이 저도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다른애들이랑은 잘만 싸우면서 왜 박찬수한테는 맞아? 걔 허접이야, 시비걸면 그냥 때려."
"그럴려구 했는데...팔이 안 닿아....."
찬열이 한숨을 내쉬며 백현을 들처업은 자세를 조금 바로잡았다. 부딪치거나 까진 데도 없고 다리를 삐지도 않았으나 백현은 못걷겠으니 업어달라며 쌩구라를 쳐댔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찬열은 넙죽 백현을 업었다. 유독 성장이 늦은 백현이 찬열보다 한참 작아서 그런지 찬열은 동갑인 백현을 곧잘 업어주곤 했다.
사실 부모님이 두분 다 계실 적의 백현은 무척이나 포악했다. 소년가장이 된 지금도 물론 온순한 편은 아니지만, 합의금 걱정은 커녕 싸운 후에 왜 돈이 오가는지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초딩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였다. 그리고 그런 백현의 행적을 따라온 숱한 도전과 시비는 아이의 전투의지를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너 어른되서도 사람들 막 패고다니고 그럴 거 아니지?"
"난 먼저 시비 안 걸면 안때려."
"넌 안심이 안 돼. 어른 될때까지 내가 옆에서 지켜볼거야, 너 지고 있으면 내가 와서 구해줄게."
"흥, 그럴 일 없거든? 그리고 니가뭔데 날 구해줘? 너 나랑 결혼할거냐?"
새침하고 도도하게 말하는 백현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찬열은 생각했다. 이미 귀까지 새빨개진 찬열은 어버버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나랑 결혼해!!"
"엉?"
"변백현 너 나랑 결혼해, 평생 니 옆에서 지켜줄거야."
"뭔 소리야, 결혼은 남자랑 여자가 하는 거거든? 학교에서 어제 배웠잖아!"
바보, 그걸 벌써 까먹냐? 제 등에 찰싹 달라붙어 킬킬거리는 백현은 못 들을만 한 목소리로 찬열이 중얼거렸다. 니가 여자하면 되는데......
여덟 살. 초딩 박찬열의 첫 번째 고백이자 변백현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말. 백현은 사흘만에 까먹었지만 찬열은 10년이 넘도록 그 순간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찬열아, 우리엄마 집 나갔다."
"...뭔 개소리야, 꿈꿨냐?"
"구라 아니거든."
이딴 거 놔두고 나갔어. 백현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종이 한 장을 팔랑거렸다. 대충 미안하다, 돈 많이 벌어서 꼭 돌아올테니 잘 지내고 있어라 뭐 이런 내용이였다. 사실 얼마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별로 충격받지는 않았다.종이쪼가리에 적혀있는 말 중에 미안하다는 거 빼고 전부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 이제 어떡하냐, 아직 알바도 못 할텐데 어떻게 먹고살지?"
"...우리집 들어와."
"됐거든."
굶어죽기야 하겠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백현은 찬열에게 눈물 한 방울 보인 적 없었다. 아홉살때 아버지가 사고로 떠나고 장례식장 이후로는 한 번도 울지 않았던 백현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찬열은 차마 그 앞에다 대고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넌 닥쳐, 저딴건 내가 사줌. 내가 사줄테니까 넌 받기만 해."
"...."
"...대신, 내가 원하는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말해봐."
수도없이 했던 말이였다. 말하는 사람은 정말 진심을 담아 했던 말인데 정작 듣는놈은 늘 흘려버리기 일쑤였다. 언제쯤 내 말을 기억해줄까, 언제쯤 내가 한 말을 진심이라고 생각해줄까....
"나랑...."
"...."
...결혼하자.
바로 위에 지나간 헬기 때문에 제 열세번째 고백이 묻혔음에도 찬열은 그저 빙긋 웃었다. 더이상 이런식으로 어린애 장난처럼 말하지 않을 것이다. 풋풋하고 달달한 연애, 사실 찬열에게는 필요없었다. 찬열은 그저 제가 온전히 백현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길 바랬다.
좋아해, 백현아.
사랑한다는 말도 몰라 그저 제가 아는 말로 얼버무려야 했던 박찬열에게 변백현은 일곱 살 무렵부터 이미 인생의 전부였다.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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