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김준면 빙의글]
독(毒), 마지막 이야기
written by.허니찬
본 글은 2013.02.03~2013.03.07까지 제 개인적인 공간에서 연재된 픽션입니다.
* * *
'오늘 오전 열한 시 사십 분,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뉴욕행 비행기가 기체 내의 결함으로 인하여 추락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승객 231명과 승무원 23명, 총 254명 중 220명이 사망하였으며 34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현장에서는 탑승객들의 시체와 함께 구조 당시 사용 되었던 구명조끼와 사고 당시의 항공기의 잔해가 남아있ㅇ….'
TV 브라운관을 가득 채운 아나운서의 침착한 목소리. 머리를 돌로 맞은 듯한 충격에 얼굴 표정을 굳히던 크리스가 조용히 TV 전원을 껐다. 초점을 잃어 뻑뻑한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다. 꿈이다, 이건 꿈이여만 한다.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던 남자의 눈에선 통한의 눈물이 후두둑 쏟아지고 있었다. 왜 나는 너를 잡지 않았을까. 왜 나는 너를 붙잡지 못했을까. 왜 나는 너를 보내야만 했던 걸까.
왜,
도대체 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을까.
* * *
OO와 갈라선지 꼬박 두 달만의 일이었다.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던 자신에게 생각보다 담담하게 이별을 말하던 너. 확고한 너의 말투와 그 전과는 다르게 단호해진 너의 시선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가지 말라는 말 한마디조차 꺼내지 못했고 자신들 이외에 아무도 모르게 이혼 절차를 밟았다. 혹시나 양가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일이 커지게 될테니까. 그녀를 위한 그의 마지막 배려였다.
"남은 짐들은 천천히 챙겨서 나갈게요…. 그래도 되죠?"
"…그래."
이혼을 요구하고난 다음부터 훨씬 홀가분한 얼굴로 지내던 너는 다짜고짜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만약 지금 이순간에라도 자신이 OO를 붙잡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과 함께 살던 이 집을 떠나 준면의 집으로 들어가려는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표현에 서투른 자신이 어떻게 OO를 붙잡을 수 있을까. 이미 자신은 그럴 명목도, 면목도 없는 남자였다. 헛된 욕심에 더이상 OO를 아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 크리스."
"응."
"미안해요."
너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너를 보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비록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더라도 나는 너를 잡았어야 했다.
* * *
"바쁠텐데…. 시간 뺏은 것 같아. 미안해요."
합의 이혼 신청서를 제출하고 법원을 나서는 길, 한 눈에 보기에도 살이 빠진듯한 크리스의 얼굴이 몹시 야위어보였다. 4주 간의 숙려기간을 통보 받고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OO의 이혼 요구와 함께 잠시 별거를 하게 된 우리. OO가 없는 집에서 끼니를 제대로 챙길 그가 아니였다. 어쩌면 그녀가 나가고나서 지키는 사람마저 없이 텅 비어버린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은수를 다시 만난다고해도 할 말은 없었다. 이혼을 요구한 것은 그녀 자신 쪽이었고 더이상 크리스가 은수를 만난다고해서 문제가 될 일은 없었기에.
"집으로 다시 들어와도 되는데."
"크리스."
"불편하잖아. 내가 나가도 되고."
"…괜찮아요."
"나는 금방 오피스텔 구해서 나가면 되니ㄲ…."
괜찮다고 했잖아요. 배려해주려 애쓰는 크리스의 말을 자른다.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 남편과 전 부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 남자는 좌절했다. 차갑게 돌아서는 여자와 뒤늦게 사랑을 깨달아버린 애달픈 남자. 크리스와 OOO, 우리의 관계였다. 먼저 갈게요. 어렴풋이 미소를 띄우고 뒤돌아서 계단을 내려간다.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먼저 가려는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크리스의 얼굴엔 알 수 없는 슬픔이 번져갔다.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 * *
"준면아."
"짐은 다 챙겼어?"
"응. 어디쯤이야?"
"이제 출발할 거야. 20분이면 도착하니까 전화 할게. 그때 나와."
"응, 알았어. 끊을게."
사랑해. 수화기 너머 준면의 따스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진다. 준면의 사랑 고백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 문득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 때도. 사랑해. 로 끝이 나는 준면과의 통화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매일 혼자 남겨진 집에서 오지 않는 크리스를 기다리는 일보다 훨씬 더.
뉴욕 가자. 가서, 아무도 없는 데서 너랑 나랑 둘이서 살자. 준면이의 한마디는 간신히 결혼생활을 이어오던 내 마음의 끈을 놓게 만들었다. 크리스와 이혼을 하고 법원을 나서던 길, 엄마에게 연락을 드렸다. 이혼했단 말 한마디가 나오지 않아 30분을 그 자리에서 목 놓아 울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그와 함께 뉴욕으로 갈 결심을 한 것은.
"왜 벌써 나와있었어. 날 추운데."
"그냥 커피 마시고 싶기도 하고…."
"그럼 사오라고 하지."
"…빨리 보고 싶어서."
내 말 한마디에 환한 웃음으로 번져가는 너의 얼굴이 보였다.
* * *
공항에 도착해 출국 절차를 모두 마친 뒤 잠시 의자에 앉았다. 준면이가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울릴 생각조차 않는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 속에서 꺼냈다. 홀드를 해제하고 통화기록을 살피자 크리스의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망설이다 통화버튼을 누른다. 아마도 내가 한국을 떠난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그이기에. 평소 그의 성격답게 깔끔한 통화연결음이 들렸다 끊기고, 이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덤덤하고도 먹먹한 음성이었다.
-…여보세요.
"크리스, 나예요."
-어…, 왠일이야?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목소리도 듣고 마지막 인사도 할겸."
마지막? 들려오는 의문의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 뉴욕 가요.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크리스가 다시 입을 뗀다. 떨리는듯, 먹먹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어 나를 울린다.
잘 다녀 와. …보고 싶을 거야.
* * *
"뭐 불편하신 점은 없으세요?"
"네, 없ㅇ…."
친절한 승무원의 질문에 반박이라도 하듯 갑자기 기내 안이 미친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요동치는 비행기 속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쳐대고 있었고 침착하라는 승무원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옆 자리에 앉은 준면이는 본능적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심하게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승객 여러분, 침착ㅎ….'
두려움으로 창백해진 얼굴은 눈물범벅이 된지 오래였고 준면이의 떨리는 손을 여전히 꼭 붙잡고 앉아 있었다. 마주한 준면이의 얼굴은 애써 울지 않으려 눈물을 삼키는 모습이었다. 준면아, 나 살고 싶어. 왜 우리 사랑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아파야 해.
왜 우리는, 왜.
"…OO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가, 널 지켜줄게."
준면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내 눈물을 다 바쳐서 사랑했던 남자, 크리스의 목소리를 되뇌이며.
내 가슴이 닳도록 사랑했던 남자, 김준면의 곁에서.
독, fin.
H O N E Y C H A N N N N ! |
우선 처음 완결을 내고나서 올렸던 거지만, 결말에 대한 제 개인적인 부연설명과 견해를 털어놓자면. '나'와 준면이의 죽음. 홀로 남겨진 크리스. 크리스가 잡지 않았던 이유는 미안해서, 붙잡을 수 없어서였던 것도 있지만 저 나름대로 크리스에게 벌을 주고 싶었어요. 혼자 남겨지는 외로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글 속의 '나'가 어땠을지. 늘 상대방에게 아픔을 주기만 하던 크리스에게 벌이자 면죄부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지난 3월, 마지막으로 독을 올렸었던 진날도 충격적인 결말에 원망 섞인 말을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이 글은 저 자신도 굉장히 아끼고 좋아하는 글이라 올릴까 말까 많이 고민 했었던 건 사실이에요. 본의 아니게 업데이트 밀당을 많이 했는데, 참고 기다려주시고 재밌게 봐주신 모든 분들 감사해요. 한 분, 한 분 댓글 다 확인하고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잘것 없는 글에 구독료도 흔쾌히 지불해서 봐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셨던 모든 분들. 잊지 않고 열심히 글 쓰겠습니다. 만약 이해 안 가시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댓글에 따로 질문해주세요. 확인하는대로 답글 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따로 더 암호닉을 정리하지는 않겠습니다. 8편에 함께 올려져 있는 암호닉을 확인하시면 될 것 같아요. 좋은 밤 되세요. 아듀, 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