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성용이 물어왔다. ' 잘 말했어? 뭐라고 했어? '. 나는 그저 앉아서 액정만 보며 묵묵부답이었다.
" 야. 잘 말했냐고. 또 헛소리 한 건 아니지? "
" 안했어. 그냥 만나서 얘기하자 한거야. "
" 뭐? 만나서 또 뭐하게. "
아직 내가 못 미더워서였다.. 그렇게 부드러운 얼굴로 남의 등 쳐먹을 사람이 아닐거 같았다.
..사실 믿고싶지 않다고 하는게 맞겠지만. 그의 친구가 그렇게 말 할 정도라면 거의 100%이겠지만, 괜히 머릿속에선 혹시나하는 마음이, 설마 하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또 가슴 속이 이상해서 두드렸다.
" 아, 이 답답이. "
" ...만나서 말할게. "
" 뭘 말해. "
" 진짜냐고. 내가 들은 게 사실이냐고. "
기성용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한테 말했다, 내 꼴이 지금 엄청 여자같다고.
" 알아. 내 꼴 우스운거. "
" 쑨양이 그렇게 좋냐? "
" 좋은게 아니야. "
" 그럼 뭔데. "
뭐라고 말을 할 길이 없었다. 그냥 뭔가 그가 옆에 있어주면 편했다. 그냥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가 웃으면 괜히 나도 웃겼고, 항상 바보같은 말만 하는 그가 편했다. 내 머릿 속은 그 뿐이었다. 내 마음은 아닌 것 같지만.
" 하아, 그래. 니 알아서 해. "
머리를 한번 슥 위로 올리더니 바로 뒤돌아서서 하품을 한다. 갑자기 벽과 바로 맞닿은 바닥에 이불을 깔더니 벽에 등을 대고 앉아서 베개를 꼭 껴안고 티비를 본다. 그러다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 난 언제나 괜찮습니다! ' 라고 카톡이 왔다. 이 사람 지금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내가 나중에 자기에게 어떤 말을 할지도. 아직 오후 2시였다. 내일까지 기다리긴 힘들었다. 지금이라도 쑨양한테 내가 들은게 사실이냐고 따져 물을 것 같았다. 결국 다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다가 보냈다.
[ 그냥 말나온김에 오늘 만날까요? ]
당연히 쑨양은 오케이라며 답장을 보냈다. ' 6시 까지 몇 일전에 처음 만났던 그 스파게티집 앞에서 봐요. ' 라고 해놓고 바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카톡을 보내긴 했는데, 왠지 그를 만날 기분이 안났다. 심경이 복잡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이상한 얘길 들었지 뭐예요. 당신이 이상한 내기를 했다는 사실. 아니죠? .... 아니야. 기성용이 자꾸 당신을 헐뜯더라고요. 양아치라고. 하하. 아니잖아요, 그죠?... 아니. 이것도 아니야.
도저히 생각이 안난다. 뭐라고 말해야 그에게서 진실을 끌어낼 수 있을까.
옷을 벗었다. 수건 걸이에 대충 걸어두고 물을 틀었다. 머리 위로 미지근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항상 어중간한 이런 온도의 물이 싫었다. 차라리 뜨거우면 뜨거웠지 이런 이도저도 아닌 온도는 정말 별로였다. 그냥 찬물로 휙 돌려버린 채 정신이 쏙 빠질 만 한 찬 온도의 물을 맞았다. 정말 ' 헉, '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미지근했던 그 물 보다야 나았다. 순간 물을 맞으며 굳어버렸다. 내 꼴이 딱 내가 싫어하는 미지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쑨양을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닌 그냥 내 맘을 모르는 그런 상태. 지금의 상태로서는 그에게 좋아한다, 싫어한다 등 왈가왈부 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 어떤걸 선택해도 나중엔 후회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또다시 쑨양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쑨양의 키스가 생각났다. 생각하니 다시 입 안에 씁쓸한 알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씻자. 씻고, 잡 생각도 씻어버리자, 항상 그랬듯.
=
그래도 몸이 깨끗해지니 그나마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옷방에 들어와 대충 아무거나 걸치고 반지 몇 개를 손가락에 끼웠다. 거실에 나오니 기성용이 티비를 보며 낄낄 거리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 배고파. 밥 줘. "
" .. 그래. "
시계를 보니 이제 3시 30분이다. 역까지 가는 데 그렇게 많이 걸리진 않았으니 밥 차릴 시간은 있을 거 같아 냉장고를 열었다. 재료를 보니 대충 된장찌개 정도는 끓일 수 있을것 같았다. ' 된장찌개 끓여줄까? ', ' 나 울엄마꺼 아니면 안먹는데~. ', ' 그럼 먹지 마. 개새끼야. ', ' 죄송요. 사실 잘 먹어요. '.
=
기성용 밥도 먹였겠다. 시계를 보니 어느 새 5시 좀 넘었다. 솔직히 집에 있기엔 기성용이랑 좀 어색해서 싫다. 결국 먼저 나가서 기다릴 생각으로 현관에 앉아서 신발을 신는데 기성용이 말을 건다.
" 쑨양 만나러 가지? "
" ..... "
" 아우, 븅신이 쑨양 얘기 꺼내니까 말도 안해요, 이제. "
" ..... "
" 잘 다녀와. "
저 말이 왜 오늘따라 울컥하게 하는지. 신발끈을 매는 데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원래 눈물이 없는 난데, 이상했다. 이런 일에 휘말리고 울고 싶을 줄은 몰랐다. 입술을 꼭 깨물고 말했다.
" 다녀올게! "
" 어. 아 그리고.. "
" ... 왜. "
눈물 날거 같으니까 빨리 말해.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 ... 니가 생각하는대로 해. "
" .. 무슨 소리야, 갑자기. "
" 뭔 소린지 몰겠으면 됐어. 갔다 와. "
괜히 쑥스러운듯 가라고 가라고 한다. 결국 웃으며 알겠다고 - 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저번에 나왔을때랑 다른 공기가 나를 덮친다.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을 몇 번 짝 짝 하고 때렸다.
" 정신 차리자, 박태환. 너 답게. "
원룸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후 ○○역으로 향했다.
=
정신 없이 걷다보니 어느 새 그 근처였다.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 코너만 돌면 그 스파게티집이 나오는데 다가가면 갈수록 다리가 무거워진다.
쑨양이 일찍 나왔을까? 아니면 시간에 맞춰서 올까? 하는 궁금함을 가슴에 지고 코너를 돌았다.
있다. 쑨양이 있다.
휴대폰을 확인하며 내가 오는지 안오는지 둘러보고 있는 듯 했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보니 발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워졌다.
결국 한달음에 스파게티집 앞으로 당도해버렸다.
" 쑨양, 일찍 나왔네요. "
" 어, 태환! 일찍 왔어! "
또 환하게 웃는 저 모습. 불과 오늘 오전이었더라면 나도 같이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을텐데, 그러질 못하겠다. 결국 억지 웃음을 흘리며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그러자 쑨양도 알겠다며 들어간다. 빨리, 빨리 말하고 끝내자. 더 이상 지체하면 폭발해버릴지도 모르겠다, 내 심장이.
쑨양은 자기가 했던 예약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자리 안내를 요청하지 않는다. 내가 의아해 하는걸 눈치 챘는지 뒤를 돌아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 그때, 우리 처음 앉았었던 자리예요. "
" 아.. 그렇구나. "
" 음식도 미리 주문해놨어요. "
" 예?.. 뭘로..? "
그러자 쑨양은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채 웃으며 ' 뽀모도로랑, 쉬림프 앤 머쉬룸! ' 한다. 그러고는 이어 ' 우리 그때 제대로 못 었잖아. 태환은 아예 먹지도 못했고. '. 그 말을 듣고 괜시리 기특하기도 해서 웃었다. 억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런건 다 기억해주는구나 하는 안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쑨양은 그때 그랬던것처럼 " Fallow me. " 하며 가게의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걸을수록 가슴이 더 뛰었다. 내가 앞으로 할 말에 대한 두근거림인지, 아니면 그와 함께 있다는 것에 대한 떨림의 두근거림인지 나도 몰랐다. 긴장한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계속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 Sun ] 이 적힌 자리에 착석했다. 나도 얼른 착석했다. 쑨양이 웨이터를 불렀다.
" 아까 예약 한 사람인데요. 미리 주문 했던 음식들은 나와있나요? "
" 아, 예. 서빙해드리겠습니다. "
하더니 쏜살같이 주방으로 가 음식을 가져온다. 도저히 쑨양의 얼굴을 바라 볼 수가 없어서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붉은 스파게티와 넵킨에 싸인 스푼과 포크를 보고 살짝 놀랬다. 정신차리자, 태환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포크로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솔직히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말할지 계속 궁리중이었기 때문이다.
" 태환, 말이 없네요. "
입에 하얀 소스를 살짝 묻힌 채 나에게 물어온다. 그, 그런가. 하면서 웃어 넘겼지만 왠지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박태환! 표정관리 제대로 하자!
" 오늘 이상해. 갑자기 막 만나자 그러고.. 무슨 바람이 부신거야? "
" .. 무슨 바람이냐니. 그냥.. 할 말도 있고.. "
" 오, 태환의 할 말. 궁금합니다. "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척 하는걸까 아니면 진짜 모르는걸까. 이젠 그의 사소한 모든 것들 까지 다 의심스럽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그럼, 좀 물어볼게요. "
" 무엇이든. "
하, 하고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쉬며 내뱉었다. 그리고 물었다.
" ... 하나 들은게 있어, 쑨양 당신에 대해. "
안 돼. 목소리가 떨린다. 갑자기 눈이 뜨거워진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꼭 감았다 떴다. 좀 괜찮아진 느낌이었다.
" ? 나에대해? "
하면서 살짝 당황한 기색의 쑨양이다.
" 네. 당신에 대한.. "
" 뭔데요? "
오히려 관심을 가지는 듯한 쑨양. 입을 떼려는데 갑자기 입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다시 눈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입술을 살짝 뗐으나 입술이 떨렸다.
" ...솔직히 오늘 당신한테 뮬어볼게 엄청 많았는데. "
" .. 태환 울어? "
망했다. 억지로 눈이 눈물을 맽어냈다.
한번 흘린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 물어볼게.. 엄청 많았는데.. 물어보기 싫어졌어요. "
" 그게 무슨 소리야. "
" 두려워요. "
" ... 자세히 말해봐, 태환. 울지 말고. "
쑨양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건 왜일까? 내가 울어서? 아니면 내기로 걸었던 자신의 바이크를 뺏기게 되어서?
" 당신도 알잖아.. 당신이 왜 나한테 들이댔어요? "
" 그야.. 태환한테 첫 눈에.. "
" 그런 거짓말 말고! "
모르고 화를 내버렸다.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더 못생겨지고 있는 듯 하다.
" 내기 했잖아요, 당신 친구랑. "
" ... 무슨 소리야, 태환?.. 그런 소리는 또 어디ㅅ.. "
" 기성용이. 기성용이 알려줬어요. 난 정말 듣기 싫었어. 왜냐면 당신이 그래도 내 맘속에 들었으니까. 근데, 당신 친구가 다 말했어요. 내기 때문에 나한테 접근했다고. 처음엔 믿지 않으려고 했어요. 믿기 싫었어요. 그렇게 당신한테 싫다 싫다, 짜증난다, 뭐다 하면서 거칠게 말하긴 했지만.. 갑자기 어느 새 내 맘에 들어버려서 믿고싶지가 않았다고.. 그런데.. 자꾸 이게 진짜래. 믿으래.. 당신이 그런 사람이래요. "
" ....... "
쑨양이 벙찐 표정이다. 틀렸어.
" 말해줘요. 거짓말이라고. 그냥 당신이 맘에 안들었던 기성용이 자기 친구랑 짜고 친거라고. 그런거 아니라고 말해줘요, 얼른! 당신 입으로 말 해요! 사랑한다고, 한 눈에 반했다고.. 다시 말해줘요, 쑨양. 제발. "
쑨양은 우는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
" 미안해요. 가지고 놀았어요. "
그리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탁 놓고 일어섰다. 어디가요, 가지 마요. 할말 다 안 끝났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쉽게 뿌리치며 ' 전 할 말 없고, 들을 말도 없네요. ' 하며 나와 눈을 마주치는것을 피하며 날 밀쳤다. 나가면서 잠시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나지막히 말했다. ' 죄송해요. 계산은 하고 갈게요. '
그는 그렇게 그냥 떠나버렸다.
=
어쩌면 제가 쓴 것들 중에 제일 긴 편이 아닌가 싶은정도로...!
처음으로 브금도 넣고... ㅎ...
에휴... 절정에 달했네요..
이제 점점 결말로 치닫는 인더클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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