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야, 이 드라마 할래?"
"……어, 네."
"사실 너한테 들어온 게 좀 많은데…… 니가 관리하는 게 낫겠어?"
"……영화도 들어왔어요?"
"영화는 니가 안 한다고 들어서."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너 영화 안 찍은지 5년 정도 됐잖아."
영재가 그의 말에 말갛게 웃었다. 벌써 5년이나 됐어요? 그 말을 물으려다 당연하게 입을 꾹 다물었다. 대현의 말처럼, 이 사람은 정말로 소속사 대표인건지 매니저인건지 아니면 동네 형인건지 스스럼없기로는 회사에서 1인자 급이었다. 회사 때문에 여태껏 곤욕을 치렀던 영재에게 그는 정말로 편하고도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영재의 의견을 다 들은 그는 알겠다며 영재를 마주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전에, 혹시나 영화를 할 마음이 있으면 먼저 말해달라고, 받아놓은 대본이 있다는 말도 빼지 않고. 영화? ……영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라고 하면 어, 해야지, 라는 말이 당연하게 나오는데 그 말을 뱉자마자 하는 말은 또, 아니, 안해. 이런 말이다. 그렇게 영화만 또 몇년을 안 찍었나, 싶었는데 벌써 5년이었다.
"……대현이는요?"
"녹음중일걸, 왜?"
"어, 아니예요."
"넌 쉬고있지만 걘 요즘이 제일 바쁘다, 알아?"
그 말에 영재는 그저 웃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가고 영재는 괜한 핸드폰만 꺼내 대현의 번호를 눌렀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걸어도 안 받을 것이고, 받아도 아마 그 장소에 있는 사람이 급하게 받아 끊어 버릴텐데. 결국 핸드폰을 내려두고 직접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런 생각을 전에는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 영재가 허한 웃음소리를 내며 슬며시 일어섰다. 대표님이 준 대본도 한 손에 들고. 그의 목소리가 왠지 영재의 머릿속에서 공명하는 듯 했다. 그냥 가지 말까. 머릿속이 이렇게 헝클어졌다 저렇게 어지러워졌다 꽤나 복잡해졌다. 정대현 보고싶은데. 언제 이 사람이 본인한테 이 정도까지의 영향을 미친 건지는 영재 자신도 모를 법이었다. 그냥 원래, 이렇게 가까웠던 사람이 여태껏 없어서 그랬던 거였나. 영재의 생각이 부풀어 오를수록 멍하게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누군가가 그 방에 들어오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방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처음으로 전화를 건 사람은 대현이 아닌 대표님이었다. '대표님, 저 그 영화 할게요.' 어떤 영화인지 사실 잘 몰랐지만, 왠지 그가 제의한 영화라면 믿어도 될 것 같았다.
*
영재가 스무 살 때엔, 뮤직비디오도 몇 차례 찍은 적이 있었다. 전 소속사 사장은 영화를 찍기 않겠다고 한 영재에게 어떻게든 일을 시키려고 이것저것 제의받은 것들을 다 그에게 안겨주었고, 그 중 하나가 대현의 신곡 뮤직비디오였다. 대현은 당시 톱급의 가수였고 영재 역시도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배우였으니 둘이 함께 연기한 뮤직비디오는 분명히 엄청난 파급력을 몰고 올 것이었다. 영재와 대현은 처음으로 그곳에서 서로 마주했고, 아마 서로 처음으로 한 생각도 서로의 외모가 정말 잘났다는 것일 테였다. 하지만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대현은 고된 연습과 이 전에 촬영한 솔로 보컬부분으로 인해 충분히 지친 상태였고, 영재 역시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꽤 편치 못한 때였으니까. 그래도 이곳에 불려 온 것은 연예계에선 엄연히 선배인 영재였으므로, 인사 역시도 그가 하는게 맞다고 여겼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그리고 또 정적이었다. 대현은 영재를 몇 초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영재가 음악 프로그램에서 몇 번 봤을 법한 대현은 분명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 역시도 굉장히 힘든 삶을 산다고, 동정 내지의 연민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대현을 바라보다가, 처음으로 그가 저 혼자 환히 웃는 모습을 보았다. 누군가가 그를 웃게 행동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유 없이 허하게 웃은 것도 아니였다. 제 노래가 뮤직비디오 세트에서 재생되어 울리는 순간에, 그가 웃으면서 제 노래를 입모양으로 따라 불렀다. 영재는 그 순간 또 깨달았을 테지. 아, 이 사람은 나처럼 당연하게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구나. 하고.
대현은 본업이 가수고 또 할 줄 아는 것이 많은 노래와 적은 춤 실력이라 연기에는 사실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대현의 연기 연습을 지켜보던 영재는 또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가르쳐 드릴까요, 하는 물음. 대현은 그 때에 자신의 연기실력이 정말 또 그렇게 못났었구나, 하는 한탄을 속으로 내뱉었고 당연스럽게 영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영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때다 싶어 감정은 이렇게, 표정은 이렇게, 동작은 이렇게 가르치며 대현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대현은 또 다시금 깨달았다. 정말 내가 연기를 못하는구나. 언젠가 들어온 드라마 제의를 정말 거절해야한다고 또 되새겼다. 그리고 또 영재의 속내를 모르는 입장에서, 이 아이는 정말 천상 연기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영재가 연기를 정말 당연하게 또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라도 그것은 영재의 천직임이 분명했다.
"여배우는 누구신지 알아요?"
"아, 네? 어…… 저희 회사 신인분이신데……"
"그분도 배우시고요?"
"네."
영재는 무의식적으로 그분이랑은 한번도 호흡을 안 맞춰 보셨나봐요…… 하는 탄식의 말을 뱉을 뻔 했지만 정신이 꽉 잡혀있어 다행히 그 말을 하진 않았다. 대현은 사실 뮤직비디오 콘티를 처음 봤을 때 스토리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처음엔 포옹신 키스신 다 있었으나 그의 팬들이 보고 해탈할 것만 같아 다 지워달라고 부탁했고, 차마 지우지 못한 감독은 포옹신을 영재에게 넘기고 키스신은 고뇌와 또 고뇌를 반복해 결국 없애버렸다고 한다.
"……번호 드릴까요?"
"아, 저요?"
"네."
"핸드폰이…… 곧 받을 예정이거든요. 번호는 드릴 수 있어요."
영재는 또, 저도 모르게 웃을 뻔 했다. 이 사람은 또, 지나치게 원칙주의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영재는 그러고 또 나이를 물었고, 반말을 하라며 권하기도 했다. 대현은 그 말에 당장 네, 하고 대답했다. 영재가 기어이 그 말에 웃음이 터졌고, 이유를 모르는 대현이 의아해하자 아니라며 손사래까지 치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현은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고 이 상황에 영재는 다시 또 웃으면서 번호를 대현의 손에 적어줬다. 왠지 이 사람은, 종이에 적어 주면 다 잊어버릴 것만 같아 그랬다. 대현은 영재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꾹꾹 눌러 저장했고, 그 후에 내 생일에 전화하면 번호 저장할게. 하는 말도 이었다. 영재는 그 말이 왠지 또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굳이 전화번호를 적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또 대현이 그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매너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근데 그게 지금 중요한가, 쪽팔린 게 먼저지.
"적을 필요 없었네."
"……어? 아냐~ 니 번호 있어야 내가 기억하고 저장하지."
그리고 또 대현이 수많은 팬들에게 시달린다는 사실 또한 알아챘다. 어쨌든 뮤직비디오 촬영이 끝날 즈음에 둘이 번호를 교환하고, 결정적인 포옹신을 마친 후에 둘은 지친 듯 인사도 서로 겨우 한 채로 제 밴을 타고 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 그날 둘의 만남의 마지막이었다.
또 사실 웃기기도 한 것이, 번호를 교환했음에도 서로 연락을 그닥 하지 않았다. 서로 바쁘기도 바쁜 터라 그냥 가끔 쉴 때에, 연기 연습은 하고 있냐는 장난섞인 문자나 앨범 잘될거라는 전화, 이번 드라마 잘 하라는 문자 같은 것들만 간간히 하는 정도였다. 서로 직접 만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마주하려면 대현의 뮤직비디오를 영재가 다시 찍거나, 대현이 영재가 찍는 드라마에 카메오로 나오는 정도가 가능했을텐데 그 이후로 그런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니까, 이동하는 밴 안에서 서로의 드라마나 음악방송을 모니터해주는 것이 다였을 거다.
"언제 한 번 봐야하는데, 그치."
영재의 말은 예언이라고 치면 예언이었다. 거의 1년만에 연락한 대현의 대화 이후 영재는 정말로 대현의 회사와 계약을 맺었으니 말이다.
*
대현의 녹음실에선 그의 목소리와 용국의 다시, 하는 낮게 깔리는 목소리, 그리고 노래의 멜로디, 비트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재가 문을 열자 당연히 시선이 그곳으로 끌렸고, 대현은 지친 상태로 녹음을 하다가 그를 발견하고 어, 하며 큰 눈을 더 크게 떴을 것이었다. 영재는 한 손에 요즘 대세라는 걸그룹 멤버가 선전하는 비타민 음료를 들고 녹음실에 들어섰고, 용국은 그를 발견하자 날카로워진 신경을 내려두고 헤드셋을 빼 그를 보며 왠일이예요, 하고 물었다. 영재는 당연히 그냥. 하고 대답했을 테지만.
"대현아, 나와."
"……네."
대현의 목소리에서 지친 기색이 보였고, 그것에 영재는 딱한 마음이 들어 먼저 비타민 음료를 따 그에게 건네주었다. 대현은 하마터면 날카로운 뚜껑에 손을 베일 뻔 했지만 영재가 급하게 뚜껑을 떼어내 그런 상황은 면하게 되었다. 용국은 둘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병 하나를 들고 제 작업대 위에 두곤 3분 후에 들어와, 하는 무미건조한 말을 던지고 다시 작업대로 몸을 옮겼다. 대현은 멍하게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고, 영재는 또 그런 모습이 딱해 보였다. 영재는 왠지 이 곳에 있다간 눈치가 남아나질 못할 것 같아 나간다며 일어섰다. 대현은 그런 영재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 삼 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대현은 피곤한 몸을 일으켜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용국도 당연하다는 듯 곡을 재생시켰고, 삭막한 분위기에서 그걸 그저 지켜보던 영재는 아무 말 없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너 떴다고 이딴 식으로 나오면, 니 노래는 앞으로 나 말고 또 누가 주고, 니 노래는 또 니 팬들 말고 누가 들어주며, 니 노래는 또, 어디서 관심이나 받겠냐, 어?'
대현은 요 근래에 정말 피곤한 일 투성이었다. 방송에서도 순간적으로 멍하게 있다가 정신을 차려 방송에 겨우 집중하고, 그냥 밴 안에서도 십 분만 자자, 하고 눈 감다가도 다음 스케쥴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잠들기까지 하니까. 물론 대현의 사정을 용국이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앨범에 들어가 평생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재생될 노래를 그런 자세로 부른다는게 용국의 입장에선 용납이 되지 않았던 거였다. 영재는 그 말이 계속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그래도 노래는 정말 좋아하는 놈인데. 영재는 그 새에 대현이 쥐어준 비타민 음료를 꽉 쥐고 녹음실 밖으로 나왔다. 진짜 힘들게 산다. 걔나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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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려야 했는데 오늘에야 올려 죄송합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