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사람의 모습이 아른하게 보였다. 지용은 온통 백지인 공간에 시린 눈을 깜빡이며, 시선에 잡힌 인영을 따라 걸었다. 조금 가까워져 손을 뻗을려 하면 야속하게도 멀어져있고, 포기하려 그 자리에 우뚝 멈추면 바로 코앞에 닿아있다. 꼭 저를 놀리는 것만 같은 기분에 지용은 머리를 헝클었다. 다리가 아파왔고, 목도 말랐다. 쫒고 있던 인영의 모습도 이제는 영영 사라져가고 있었다. 지용은 좌절하며 눈을 감았다. 포기야. 더 이상은 무리라고. 숨을 몰아 쉬며 뜀박질을 하는 가슴을 쓸어내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가 왜 이렇게 아픈 줄 알아?’
그건, 너의 무심함에 대한 대가야. 지용은 그 웅웅거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머리를 굴렸고, 그 해답을 찾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승현이였다. 저와 죽고 못사는 연애를 했던, 이승현. 지용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콕콕 쑤셔왔다. 이것은 조금 남아있던 양심에 대한 가책이였다. 지용은 부정하고 싶어졌다. 이 악몽에서 어서 벗어나기를 - 꿈인 주제에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괴로워하지마. 당신이 저질른 행동에 비하면, 약한 벌이잖아.’
한번 더 양심을 찌르는 말에 지용은 숨을 멈췄다. 왜 이러는 건데.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거냐고 - !! 소리를 지르기 목을 써보았지만, 소리가 나가지는 않았다. 괴로웠다. 뭐가 그렇게 괴로운지는 몰랐으나, 지용은 지금 지독히도 괴로워 눈물이 흘렀다.
‘너무 약한 벌이지. 근데 왜 그런 줄 알아?’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하거든. 지용은 하얀 시야에서 승현의 얼굴을 보았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승현은 그저 환하게, 시리도록 환하게 웃고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