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상으로 11
w.기분이나쁠땐
선선한 바람이 가득 채워진 골목길을 걸었다. 이런 골목길을 걸을 때마다 항상 민석이와 함께 걷고 싶다. 민석이와 함께 오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며 걸어왔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맞는 지 틀린건 지 잘 모르겠다. 내가 이제 민석이를 생각하고 민석이와 뭘 해야할지 고민해야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민석이를 보내는 걸 차마 볼 수 없어서 오늘 의사선생님의 방에서 눈물이나 뚝뚝 흘리던 놈이. 그런 놈이 더 이상 민석이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민석이의 모습은 약과이고 이제 더욱 더 가혹한 상황들이 내 눈앞에 놓여질텐데...차라리 나 말고 다른 사람을 구했더라면.. 아니 그 때 그렇게 간절하지 말껄...
면접 때 간절했다. 마치 그 면접장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너무 간절하게 내앞에 앉아 계신 의사 선생님께 호소했다. 단지 죽은 내 전 여자친구 때문에.
난 중국인이다. 아버지는 중국인이고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그런데 중국인이다. 언제나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넌 중국인이야! 하면서 나에게 중국인으로써의 자랑스러운 자긍심과 프라이드를 주입식 교육을 시키셨다. 그리고 빠듯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좋은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그 학교를 다니면서 만난 게 내 전 여자친구이다.
중국인과 한국인 둘 다 아시아권사람이고 동양계쪽이라서 왠만해서는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다 중국인만 다닐꺼라 생각했다.
어느 날, 내가 등교하자 친구들이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슬쩍 껴들어 엿들어보니 한국인이 전학왔다는 이야기 였다. 그것도 여학생이 전학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 역시도 여느 학생들처럼 전학생을 궁금해했다. 한국인 전학생에 그것도 여학생이라니. 나도 여느 남학생처럼 열광하며 내 나름대로 그 여학생을 머릿속에 그리며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예뻤으면 좋겠다. 중국어는 잘할까? 말이라도 한번 걸어볼까? 하며 갖은 상상을 머릿속에서 늘어 놓았다.
점심시간즈음, 친구들끼리 모여서 전학생이 있다는 8반으로 향했다. 왠지 가슴이 뛰었다. 한국인은 처음보고 또 한국인 여자전학생은 처음보기 때문일꺼다. 나와 친구들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문을 열었다. 나름대로 우리끼리 정한 설정은 너무 껄렁껄렁한 이미지로 보이지 말고 8반에 친구들이 있어 놀러 온 설정으로 하자는 그런 어설픈 설정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어설픈 연기로 미리 입을 맞춰둔 친구와 발연기로 대화를 하며 한쪽 눈으로는 흘깃흘깃 그 여자전학생을 보며 그 아이의 미모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전학생 여자아이는 예뻤다. 한국인들은 전부 저렇게 생겼을까? 나는 친구들과 약속했던 설정도 잊은 채 그 아이만 넋 놓고 바라보았다. 친구놈들이 은연중에 나를 가르키며 루한이 사랑에 빠졌구나~ 라며 놀리는 말이 내 귀를 살짝 건드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가 없었다.
사랑이구나, 이게바로 고등학생의 사랑이구나.
그 여자아이 뒤에서는 알게 모르게 은은한 광채가 나오는 것 같았고 그 아이의 행동하나하나가 조신하고 아름다워보였다. 나는 더 이상 뭐다뭐다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망설임 없이 그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도 모를 제멋대로 구겨진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그 여자아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전화번호"
내가 한국말을 쓰는 걸 보고 그 여자아이는 움찔했다. 아마도 중국인인줄 알았던 학생들 중 하나가 다가와 한국말을 하니 놀랐을꺼다.
"..너..한국인이야?"
목소리조차 고왔다. 사탕을 두개쯤 입안에 넣고 있는 달콤한 목소리였다.
"..전화번호.."
하지만 아직 감정표현에 서툴고 연애를 제대로 해본적도 없었던 나는 그저 무뚝뚝하게 전화번호란 말을 되풀이 하며 그 여자아이게 우악스럽게 종이를 내밀었다.
당황한 표정과 함께 읽던 책을 내려놓는 그 여자아이는 서둘러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필통을 꺼내 그 속에서 펜을 하나 들었다. 그리곤 내 손에 들린 종이를 조심스레 잡아 천천히 무언가를 썼다. 천천히 쓰는 것 같아 꽤 오랜시간 기다려야된다고 생각했으나 금방 다시 종이를 돌려주었다.
종이를 돌려 받자마자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이미 반 아이들의 모든 시선은 나와 이 여자아이를 향해 쏠려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한 행동에 후회를 했다. 물론 이 여자아이에게서 번호를 얻은건 기분이 좋았지만 아이들이 모두 자신을 보고 있는건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 여자아이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냥 그대로 교실을 뛰쳐나왔다. 내가 뛰쳐나오는 모습을 보고 내 친구들도 뒤따라 뛰어오면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가뿐히 무시하고 서둘러 우리반, 내 자리로 돌아와서 그냥 멍하니 앉아있었다. 내 주머니속에서 그 아이가 적어준 종이가 조신하게 요동치는 것 같았다.
시끄럽게 뒷문으로 들어와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낼 듯이 큰소리로 외쳐대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앞으로 평범하게 학교생활 하기는 글렀구나 하는 생각이 몰려왔다.
친구들은 오오라고 연신 감탄사를 외쳐대며 무슨 대화를 했냐고 번호 딴거냐고 계속 물어댔다. 그런 아이들의 질문에 대충대충 질문해주고 나는 엎드렸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여자아이가 나에게 질문했을 때 그 표정과 목소리, 그것만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남은 수업시간을 모조리 엎드려서 오로지 그 여자아이만을 생각했다.
방과후가 되자 나에게 휘바람을 불며 잘해보라는 친구들의 머리통을 한대씩 때려준 다음에 학교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내 주머니에서 계속 조신히 요동치는 것 같은 종이를 조심히 꺼내서 펴보았다.
종이에는 중국어로 어설프게 씌여진 숫자들이 나열되 있었다. 글씨 역시 그 여자아이답게 조신했다. 그리고 귀여웠다. 도저히 눈을 뗄 수 가 없었다. 어쩌면 글씨도 본인같은 느낌을 가득 담아서 쓸수 있는지.. 그렇게 한참을 그 종이만 들여다보고 있던 찰나. 누군가 조심스레 내 어깨를 톡톡쳤다.
나는 분명 내 친구놈 중에 한명이라 생각하고 다소 귀찮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내 뒤에 있는 건 귀찮은 친구놈이 아닌 수줍게 웃고 있는 그 여자아이였다. 그 여자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손인사를 해보였다. 순간 나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던 내 자신을 원망하고 애써 몰려오는 당황스러움을 제어하며 웃으며 손인사 해보였다. 그 여자아이는 조심스럽게 내 옆자리를 가르쳤다. 아마도 내 옆자리에 앉아도 되냐는 물음 같았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종이를 서둘러 주머니에 넣었다.
"너.. 한국인이야..?"
조심스럽고 의문에 가득찬 목소리였다. 아마도 아까 내가 한국어를 쓴 게 계속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아니.. 난 한국인은 아니고... 중국인인데... 아버지가 중국인이고 엄마가 한국인이야.."
가족사를 너무 쉽게 말했나? 생각하다가 그 여자아이가 아무 감정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안심했다.
"이..이름이 뭐야...?"
나름대로의 호감을 주기 위해 웃으며 물었다. 하루 빨리 이 아이와 잘되서 이 아이를 보듬어 주고 학교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고 이 아이와 우리학교 축제를 즐기고 싶고 내 친구들을 소개시켜주고 이 아이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비밀이야.."
아까와는 다르게 약간씩 다운된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 아이. 그러고보니 이름표도. 명찰도. 이 아이의 이름을 증명해줄 만한 것은 한가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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