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할머니의 전시회를 간 적이 있었다. 갤러리가 문을 닫을 즘이어서 사람들도 몇 없는 한적할 때였다. 제일 구석, 내 노트북 모니터만한 종이에 연필로 거칠게 스케치된 소년의 얼굴이 자리잡고 있었다. 소년의 눈은 올곧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소년의 웃음이 내 머리에, 가슴에 주먹을 날렸다. 소년의 눈에서 나는 꽤 복잡한 감정을 읽었다. 기쁨으로 위장한 슬픔과 분노. 나는 심리학자도 예술평론가도 아니었으나 그것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귓속에서도 심장이 쿵, 쿵,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으니 아마 그림 속 소년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두근거림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소년 때문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미술품에는 손을 대면 안되는 건 우리 옆집 꼬마도 알 터였지만, 나는 그 순간 소년의 뺨에 손을 가져다댔다. 소년이 눈물을 흘렸다. 나 혼자 소년을 위로하던 손짓은, 깜짝 놀라 달려온 할머니의 걸음 소리가 내게 들렸을 때에야 멎었다.
그 날 밤 할머니에게 나는 그 소년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유명한 화가였다. 그 이유는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이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당신의 그림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과 슬픔, 분노를 표현해냈다. 점점 잊혀져가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중들에게 조금이나마 회자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소년도 위안부 피해자였다고 했다. 그 대목에서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흉통을 느꼈다. 아마 목이 매어오는 것이겠지. 꼴에 사람이라고 그들에게도 취향이 존재했던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굳게 쥔 내 주먹 위로 당신의 손을 얹으셨다. 그리고는 천천히 토닥였다. "아가, 분노하지 마라. 그 분노가 얼마나 슬픈 것인지 이 할미는 너무나도 잘 안단다." 할머니의 말씀에 나는 또 한번 분노했다.
할머니가 소년을 만났을 당시, 그 소년은 그들에게서 거의 버려진 상태라고 했다. 그들의 거친 행위에 소년의 항문이 남아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소년은 배변활동도 원활하지 못했다. 아기들이나 차고다니는 기저귀를 열아홉 소년이 차고다녀야 했다. 그들이 물고뜯었던 열아홉 소년의 피부는 온갖 상처도 뒤덮혀있었다. 그들이 성적 쾌감에 못이겨 쥐어잡았던 소년의 머리칼은 빠지고 빠져 하얀 두피가 군데 군데 드러났다. 그들은 소년을 노리개로 삼았다가 소년이 제 기능을 못하자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그 소년은 할머니가 보살폈다.
소년은 할머니가 그림을 곧 잘 그린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어느 날 밤, 소년이 할머니에게 부탁을 해왔더랬다. "덕이야, 내 얼굴 좀 그려주련?" 소년의 부탁에 할머니는 곧장 연필을 쥐었다. 그리고 소년은 며칠 안가서 그 그림을 품 안에 안고 세상을 떴다. 할머니는 기어이 눈물을 떨궜다. 좋은 곳에 갔을 것이라고, 꼭 그래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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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날 또 할머니의 갤러리를 찾아갔다. 나는 곧장 소년의 앞에 섰다. 어제처럼 소년은 나를 올곧게 나를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나는 또 흉통을 느꼈다. 어젯밤 파들파들 떨리던 할머니의 손을 잊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소년의 이야기를 하던 할머니의 목소리 또한 잊을 수가 없었다. 열아홉. 고작 열아홉이라고 했다.
열아홉 소년의 외로움과 슬픔과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다다랐을지, 소년의 얼굴을 보며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어제 처음 봤을 때 소년의 눈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뻑뻑하게 매여오던 목구멍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안녕."
내 목소리가 갤러리를 울렸다. 그 소리의 울림이 울리고 울려 소년의 귀에도 전해졌기를. "나는 박찬열. 스물 세살." 나는 소년 앞에서 내 소개를 했다. 나는 소년의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몇십년이 지난 지금,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나는 소년의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나를 보며 미소짓는 소년을 보며 나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갑다, 백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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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날 뒤로 할머니의 갤러리에 매일같이 찾아갔다. 구석, 소년의 조그마한 자리에 들어서서 인사를 건넸다. 소년은 언제나 나를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소년의 앞에서 중얼거리며 말하는 나를 갤러리에 찾아온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지나갔으나 나는 그런 시선 따위 신경쓰지 않은지 한참 되었다. 지금 이 시간, 이 세상에는 백현이와 나, 둘 뿐이었다.
백현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웃어주었다. 바깥에서 사람들 틈에서 부대끼고 부대낀 나를 감싸주는 건 백현이였다. 내가 한탄을 해도, 짜증을 내도, 백현이는 늘 웃어주었다. 종국에는 나도 백현이를 따라 웃었다. 나는 마구 짜증을 내고 나중에는 "미안해." 하고 작게 사과를 하기도 했다. 그러자 백현이는 또 웃어보였다. 늘 따스한 사람이었다. 서로 마주보고 아무 말 없이 웃고만 있어도,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사람이었다.
백현이에 대한 연민은 처음엔 우정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사랑으로 변해갔다. 나는 백현이 없이는 살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백현이는 나를 목마르게 하는 사람이었다. 백현이를 볼때마다 나는 늘 갈증을 느꼈다. 안고싶다. 입 맞추고 싶다. 머리칼을 내 손가락으로 빗어내리고 싶다. 계속해서 나를 충동이란 시험에 들게하는 사람이었다. 백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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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급기야 나를 갤러리에 찾아오지 못하게 했다. 백현이와 대화를 나눌 때면 찾아와 눈을 치켜 뜨고 나를 갤러리에서 쫓아내셨다. 갤러리에서 나를 쫓아내며 할머니가 호통치셨다. "정신차려, 이놈아. 백현이는 그림이야!" 할머니는 나와 백현이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백현이가 그림이면, 뭐? 백현이는 내게 그림 그 이상이었다. 내게 언제나 웃음을 주는,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백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면 세상 어느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돈을 집 한켠에 가득 쌓아둔 부자들보다, 저를 사랑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인 스타들보다 백현이와 단둘이 함께 있는 내가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나를 갤러리에 들이시지 않으시므로 나는 갤러리 바깥 백현이가 있을 구석자리 창 밖에 섰다. 창문을 바라보며 나는 백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백현이가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또 여느때와 같이 웃는 낯이었다. 차게 시들었던 내 마음이 다시 뛰며 제 온도를 찾아갔다.
"백현아, 오랜만이야."
내 인사에 백현이가 웃었다. 우리 둘은 아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쥐어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에 목이 매여왔다. 백현이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흉통이 다시 도졌다. 그러나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백현이를 쳐다보았다. 백현이는 언제나 나를 올곧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 다시 한번 느꼈다. 창밖으로, 창안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음에도 우리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 둘 사이에 차가운 유리창이 있지만 우리 둘은 영원하다는 것. 내가 너를 사랑하듯이 너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사랑해."
백현이가 말했다. 유리창 너머로 백현이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물이 났다. "나도." 내 대답에 백현이는 여느 때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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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너머로 대화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백현이에 대한 내 갈증은 심해져만 갔다. 안고 싶어, 안고 싶어. 백현이의 뺨을 쓰다듬고 싶어. 예쁘게 말아올린 입꼬리에 입맞추고 싶어.
그러나 갤러리의 문은 확고하게 닫혀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울면서 갤러리의 문고리를 돌려도 꿈쩍도 않아셨다. 할머니가 미워졌다. 왜, 어째서? 무엇때문에 나와 백현이를 허락하지 않는 거지? 꽉 쥔 주먹이 빨갛게 달아오르도록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백현아, 백현아!" 백현이의 이름을 목이 갈라지도록 불렀으나 백현이는 대답이 없었다. 전에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던 백현이는 내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백현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백현이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결심했다.
백현이를 구해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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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도 모르는 어느 밤이었다. 할머니가 집에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나는 갤러리의 문 앞에 섰다. 백현이의 이름을 그토록 부르짖어도 열리지 않던 유리문. 유리문에 찰싹 달라붙은 나는 작게 백현이의 이름을 속삭였다. 갤러리 안에서 당장 자기를 구해달라고 백현이가 외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손에 꼭 쥐고 있던 망치를 휘둘렀다. 주먹으로 두드려도 깨지지 않던 유리는 허망하게도 망치질 몇 번에 금이가고, 부서져내렸다. 드디어 나는 오랜만에 갤러리에 입성했다. 주위에서 나를 말리는 듯한 시끄러운 경보소리가 들려왔으나 나는 지금 그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곧장 백현이가 있을 구석으로 뛰어갔다.
"백현아!"
백현이가 내 부름에 나를 보며 웃었다. 아마도 저를 구해주러 와서 고맙다는 뜻이겠지. 나는 백현이를 품 안에 껴안았다. 백현이의 몸이 차가웠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백현이의 몸은 내가 빨리 데워줄 수 있었다. 백현이를 더 품 안에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보고싶었어."
사랑해, 백현아. 정말로 보고싶었어. 백현이를 품 안에 끌어안고 중얼거리던 내 입술은 갑자기 밝아진 주변에, 달싹거림을 멈췄다. 웅성거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와 백현이에게 총을 겨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들 중간엔 할머니도 있었다.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 왜? 왜 할머니가 우는 거야?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림 내려놔!"
남자가 소리쳤다. 나는 백현이를 내 뒤로 숨겼다. 위험했다. 나는 망치를 꼭 쥐었다. 마른 침을 삼켰다. 여기서 백현이를 지켜내느냐, 마느냐.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망치, 망치 내려놔!"
싫어. 망치를 내려놓으면 그들은 나를 제압하고 백현이를 데려갈 것이 뻔했다. 내 손을 잡은 백현이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내가 지켜줄게." 내 뒤에 선 백현이를 돌아보며 작게 속삭였다. 백현이가 작게 웃었다. 나는 내 손에 쥔 망치를 위로 치켜들었다. 제일 앞에 선 이 남자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망치를 휘둘렸다. 내가 휘두른 망치에 남자가 맞았다. "으악!" 하는 비명을 지르고 갤러리 바닥에 쓰러졌다. 빨갛게 피가 흘러나와 하얀 대리석위에 고였다.
"쏴!"
소리를 지르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남자가 쥐고 있던 총에서 불꽃이 일었다. "안돼!" 백현인지 할머니인지 모를 비명소리가 들리고, 내 가슴 한 켠에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백현이를 처음 만난 날 느꼈던 흉통보다도 더 쓰린 고통이었다.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나는 백현이를 돌아보았다. 백현이는 여느 때처럼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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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허구에요, 저거...
실제로 위안부 피해자 중에 소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께서 그림을 그리시는지 아닌지 잘 몰라요...
오해 하지 마시길 바래요!
아... 쓰면서도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얼른 해결되야할 문제 같습니다.
그림 백현이와 사랑에 빠진 찬열이는 스탕달 신드롬을 앓고 있습니다.
사실 이건 인포 초록글 보고 모티브를 따온 건데요...
참 마음이 아프죠? 그림이랑 사랑에 빠진다는게...하...ㅠㅅㅠ
어쨌든 주말 잘 보내세요 여러분! (급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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