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ㅡ Written by.세모론
으아아, 피곤해. 신발을 아무데나 벗어던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발을 질질 끌어 방으로 향했다. 역시, 집이 최고다.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얼마나 집이 그리워서 눈물을 훔쳤는지. 그대로 몸을 침대 위로 던져버리자 침대가 크게 요동친다. 출렁출렁. 침대의 움직임이 잦아들고, 뭉쳐있던 근육들이 나른하게 풀어지는 것 같더니 움직이기가 싫어진다. 씻어야 하는데, 꼭 물먹은 솜 마냥 몸이 무거워져서 손끝 하나도 까딱하기 힘들고 눈도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적으로 계속 감겨 온다. 아, 씻는거고 뭐고 그냥 자고싶다. 사실 이제 의식만 놓으면 그대로 잠들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억지로 눈에 힘을 줘 부릅뜨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느끼게 될 찝찝함이 상상만으로도 더 끔찍하다. 핸드폰으로 게임이라도 한 판하면 잠 깨겠지? 끙차.
“독창적 별명 짓기, 예를 들면 꿍디순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자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오늘, 눈치 보며 무음카메라로 몰래 찍었던 김성규의 사진이 생각났다. 아, 맞다! 내가 사진 찍었었지. 나는 벌떡 일어나 아빠다리를 하고 침대 위에 앉았다. 어깨에 엄청난 피로가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재빠르게 갤러리에 들어가서 카메라 폴더를 눌렀다. 그러자 확 펼쳐지는 김성규의 사진들. 으하하, 이건 몰랐지 김성규? 나는 제일 첫번째에 있는 사진을 클릭했다. 밥 먹는 김성규. 정면보고 있는 김성규. 못생겼다, 으하하! 옆모습은 좀 봐줄만 하군. 히히힣. 김성규는 죽어도 이 사진들을 모를 거라는 사실이 너무 재밌고 신나서 배를 잡고 웃었다. 만약 알게 되면 얼굴을 붉히며 이게 뭐냐고 다다다 나를 쏘아붙이겠지, 아마. 오늘 있었던 한 번의 만남을 가지고서, 나는 벌써 김성규의 성격을 다 파악했다. 그러므로 이제 김성규는 이제 내 손 안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뛰어봤자 벼룩이다 벼룩.
이건 빨대 물고 나를 쳐다보는 김성규. 어쭈, 눈 크게 떴네. 예쁜 시계보고 눈 반짝이는 김성규. 김성규도 나와 같게 멋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하긴, 나를 만나러 왔을 때 보니 패션센스가 장난 아니었다. 김성규는 나름 숨기려고 했던 거 같지만 내가 옷 칭찬하니까 뿌듯해 하는 것도 그렇고. 큭큭. 쇼핑하자고 백화점에 데려가니 그 작고 긴 눈이 반짝 반짝. 앞으론 같이 쇼핑하자는 핑계로 자주 불러야지. 아, 몇 장 못 찍었다. 다섯 장이 끝이라니. 조금만 더 찍을걸. 들킬까봐 조마조마해서 이렇게 밖에 못 찍었다.
“어?”
다시 한 번 사진을 돌려보고 있는 데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하더니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창이 떴다. 발신자를 보니 김성규다. 웬일이야? 잘못 온 건가? 나는 얼른 확인버튼을 눌렀다.
[이, 이짜나 오늘 뭐 솔직히 돌아다니기 싫고 귀차났으;; 근데 생각보다 쫌 재미써따 고마워..]
“익, 으하하하하하하하!!”
김성규의 예상치도 못한 문자에, 예상치도 못한 귀여움이다. 뭐야, 이 이단콤보는? 아, 귀여워, 귀여워, 귀여워!! 미치겠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위로 쓰러져 허공에다 발차기를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방방 뛰며 한 밤중에 혼자 난리를 쳤다. 김성규의 성격상 나에게 절대 고맙다고 할 리는 없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근데 이렇게 귀엽게 문자하냐, 아이고 진짜. 나는 망설임 없이 문자 내용을 캡처 했다. 흐미, 얘 좀 봐! 백번은 읽어야지. 너무 귀엽다, 진짜.
“미치겠다. 깨물어주고 싶다는 게 이런 거야?”
당장 김성규에게 달려가 머리를 쓰담쓰담해주고 싶다. 진심으로 그러고 싶어서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다. 그러면 내 손을 따갑게 쳐낼 김성규가 분명하지만 이제는 김성규의 모든 앙칼진 행동도 내 눈에는 마냥 귀엽게만 보일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든다. 이러다가 나 김성규의 노예가 되는 거 아니야? 내 팬들이 왜 김성규의 팬이 됐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매력이 넘쳐서야.
맞다, 답장해줘야지. 김성규는 답장을 안 했다고 삐질지도 모른다. 으하하. 뭐라 쓰지? 나도 귀엽게 써볼까? 맞겠지 그러면? 헹.
[성규야아ㅠㅠㅠㅠㅠ느므 기여워ㅠㅠㅠㅠ]
[뭐라는 거야 ㅡㅡ]
[내가 놀아줘서 고마웠어?ㅠㅠㅠㅠㅠㅠ앞으로 이 오빠가 자주 놀아주껭ㅜ.ㅜ]
[th l 바 너한테 문자를 보낸 내가 바보지 ]
[헉...욕하면 안 돼 성규야....근데 넌 귀여우니깐 내가 용서해 줄게^.^]
[아 너 왜 이래 진짜 ㅡㅡ]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냐, 아오]
[이응^.^]
[아씨, 나 잘 거야]
[응, 잘 자 내 꿈꿔♥♥ ~.~]
[가위 눌릴라;;]
[내가 전화해서 자장가 불러줄까?!]
아씨. 난 진심이었는데 김성규는 또 내가 자기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자장가를 불러준다는 내 은혜로운 문자를 씹었다. 내가 자장가를 불러준다고 하면 넙죽 받으면서 고맙다고 해야지. 귀가 정화되는 일을 공짜로 해준다는데. 하긴 단번에 해줘, 라고 하면 김성규가 아니지. 역시 김성규.
[자?]
[잘 자요, 굿나잇! 귀염둥이 성규 ~.~]
[넌 이제 귀염 돋는 성규닷!ㅋㅋㅋㅋㅋㅋㅋㅋ]
아침에 이걸 보면 김성규가 엄청난 욕을 나에게 문자로 보낼지도 모르겠다. 전화로 욕해주면 아침부터 김성규 목소리 듣고 좋지, 뭐. 뭔가, 나는 점점 팔불출이 돼가는 기분이다. ……. 김성규가 너무 귀엽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난 잘못 없어.
나는 얼른 전화번호부에 들어가서 ‘내안티’로 저장되어있는 김성규를 찾아내 편집버튼을 눌렀다. 아, 근데 내안티도 좋은데. 나만의 안티. 진짜 좋다, 이것도. 내안티로 그대로 남겨둘지, 아님 귀염둥이 성규로 이름을 바꿀지 심각하게 고민돼서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댔다. 아, 둘 다 좋은데. 내 안티이자 귀염둥이 성규. 뭐지 이건?
그냥 나중에 바꿔야지. 아, 근데 갑자기 김성규가 애교부리는게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은근히 귀여운 것도 좋지만 확실한 애교도 한 번 보고 싶다. 김성규가 뿌잉뿌잉 하면 어떨까? 으하하!! 상상해봤는데 너무 웃겨서 나는 또 한참동안 허공에다 발을 차며 웃어 댔다. 나중에 협박해서 꼭 봐야지. 나는 얇은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가 잘 준비를 했다. 그리고 핸드폰이 진동한 건 그 때였다.
[th l 바 너 스팸등록할꺼야ㅡㅡ]
으이이이익!! 나는 김성규의 문자를 보자마자 온몸이 근질거리는 이상한 현상에 어찌할 줄을 몰라 이불을 발로 뻥뻥 걷어차며 몸부림을 쳤다. 그 덕에 이불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상관 안 하고 나는 침대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혼자 미친 듯이 중얼거리고 실실 쪼갰다. 아, 귀여워 죽겠네. 진짜. 어디서 귀여운 짓 배워오나? 김성규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여운 걸까. 엄마? 아빠? 김성규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책임지라고 해볼까나. 아, 김성규 때문에 오늘 잠 다 잤다. 아, 근데 졸리네? 나도 김성규 꿈 꿔야지. 꿈에서 만나면 귀엽다고 콱 깨물어줄까?
*
“뭐야, 오늘 나무 오빠 아침부터 기분 좋은가?”
“아침부터 브이텍을 날려주신다니. 은혜로운 오빠야.”
“야, 빨리 찍어. 오늘 무슨 날인가보다. 아침 출근길부터 막 싱글벙글 웃고.”
“오빠아아아아!!!!!!!!!!! 으허허허헝.”
대포 모양의 큰 카메라를 든 여자들은 아파트에서 나오는 길에서 부터 싱글벙글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벤으로 향하는 우현을 앵글에 담고 빠르게 사진을 찍어댔다. 제목은 좋은 꿈 꾼 우현이, 아침부터 기분 좋은 우혀니, 가 좋을 거 같다고 사진 찍으면서 생각을 했다. 팬들 모두 다 왜 우현이 기분 좋은지는 몰랐지만 오빠가 기분이 좋아 보이니 팬들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머리 손질은 은하누나에게 맡기며 눈을 감고 노래나 흥얼거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눈을 떠 핸드폰 액정으로 발신자를 확인하는데, 헉! ‘내안티’라는 검은 고딕체 글자가 액정화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김성규다. ……진짜 김성규? 헐! 김성규가 왜 나한테 먼저 전화하지? 나는 얼른 통화버튼을 눌러 귀에 가져다 댔다. 손이 덜덜 떨리고 땀이 갑작스럽게 많이 나 몇 번이고 핸드폰을 떨어트리려 했단건 비밀이다. 김성규가 나한테 먼저 전화라니, 정말 웬일이야?!
“여보세요?”
「아씨…….」
“성규야, 왜?”
「…….」
“김성규우, 왜 전화했어? 말 해봐.”
「…….」
“귀염둥이 성규야, 빨랑!”
「…….」
“아씨, 왜!”
얘가 왜 아무 말도 없지? 싶어 휴대폰 액정을 봤는데 허, 참나. 전화는 끊긴 지 오래였다. 나를 반기는건 허한 메인화면뿐. 젠장. 겁나 쪽팔려. 나 혼자 뭐하고 있던 거야? 나 누구랑 대화하고 있던 거니? 미치겠다. 아오! 김성규도 나 골탕 먹이는데 선수라니까. 나는 다시 김성규에게 전화를 했다.
「어.」
“아씨, 너 왜 전화 걸자마자 끊어? 나 너랑 계속 통화하는줄 알고 혼자 쪽팔리게 막 말했잖아!”
「뭐? 푸흐흐…너 바보냐?」
“전화 먼저 걸고, 받자마자 끊는게 어디 있어? 짜증나.”
「푸하하하하!」
“웃지 마. ……근데 왜 전화 했어?”
「아, 맞다. 야, 너 트리클로버에 접속해봐.」
“왜, 김성규 너 또 신명나게 나 디스 했구나?”
「아니거든? 아무튼 ‘아침부터 기분 좋은 우혀니’ 라는 제목의 직찍 사진 있을건데, 거기 댓글 봐봐.」
“나 까는 걸 자랑하고 싶어진 거야? 니가 나 까면 나 상처받는데.”
「좀 닥쳐.」
“근데, 아까 우혀니 할 때 귀여웠다?”
「아, 진짜 너 자꾸 귀엽다, 귀엽다 할래? 소름 돋거든?」
“귀여운 걸 어떡해~”
「맞아 죽고 싶지, 남우현? 내가 트리클로버에 니 욕으로 도배를 해 버릴 거야.」
으하하! 역시 김성규는 한 번씩 쿡쿡 찔러야 재밌다니까? 나는 크게 웃어댔고 귀에선 나를 욕하는 김성규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성규랑 있으면 계속 웃음이 난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김성규랑 같이 통화하면 다른 사람과 통화하는 것 보다 훨 배 더 신나고 재미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음, 이건 뭔가 생물학적 부분과 관련 있는 거 같다. 김성규랑 통화하면 막 엔돌핀이 쏟아 오르는 것 같으니까, 음.
또 깊은 고민에 빠지려고 하던 참에 김성규랑 통화 많이 해야 된다는 본능적인 생각이 갑작스럽게 들어 잡생각도 멈추고 정신을 차렸다.
“알겠어, 보고 전화할까 아님 문자 줄까?”
「둘 다 하지 마. 그냥 보기만 해.」
“큽, 그럼 뭐 하러 전화해서 알려준 거야? 크흡.”
「짜증나니까 그렇지! 그리고 웃으려면 그냥 마음껏 웃어. 이상하게 웃지 말고.」
나는 김성규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남우현이라 김성규의 말에 따라 또 크게 시원하게 웃었다. 결국 수화기 너머로 김성규의 한숨소리까지 들었다. 그리곤 전화가 끊켰다. 김성규가 결국 끊었던 거다. 나는 수화기를 귀에서 떼놓고 계속 실실 웃다가 김성규의 말대로 바로 트리클로버에 접속했다. 직찍방에 들어가니 맨 위에 성규가 말한 제목의 게시글이 있어 클릭하고 바로 댓글창으로 스크롤바를 내렸다.
보니까 내가 아침부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가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성 댓글이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 어제 김성규랑 내가 같이 다니는 걸 본 팬이 우리 둘이 매우 친한 친구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재밌게 놀아서 내가 기분이 좋았다고 추측한 댓글이 있었다. 아무래도 김성규가 보라고 한 건 이거 같다. 근데 여기서 도대체 뭐가 김성규를 짜증나게 만든 걸까? 김성규가 처음으로 나한테 먼저 전화하게 만들 정도로 김성규의 성질을 건드릴만한 단어가 여기 어디에? ……설마 친한 친구? 진짜로?
“나 참.”
이게 뭐라고. 그냥 수많은 추측의 하나일 뿐인 이 댓글이 대체 뭐라고. 아, 너는 내 안티인데, 니가 나의 친한 친구로 인식돼서 그렇게 기분 나빴구나? 억울함이 울컥,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니가 처음으로 먼저 전화했다고 순수하게 기뻐하던 나한테, 너는 이러면 안 되지 김성규. 아직도 내가 그렇게 싫어? 그러면 만났을 때 나한테 잘해주지나 말지. 싫다고 그냥 계속 쌀쌀맞게 대하지. 이제 와서, 왜.
처음에 너를 싫어하던 마음을 다 씻어 내리고 너에게 활짝 팔 벌리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내가 널 아직도 싫어하고 있어, 라고 굳이 말해주고 싶었나? 니가 그렇게 나빴었나? 뒤통수를 맞은 기분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습게도 김성규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나의 안티일 뿐인 그 녀석에게. 김성규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전화 하지 말라고 했지? 왜 전화해!」
“나랑 친한 친구로 되어버리는게 그렇게 기분 나빴어?”
「어?」
“너 아직도 내가 그렇게 싫냐? 그걸 굳이 꼭, 나에게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난 어제 만남이후로 니가 내 안티짓도 접고, 나는 너랑 좀 친구하고 싶은 마음 들었는데.”
「야, 남우현. 왜그래.」
“……나 상처받았어, 성규야.”
내 깊은 한숨을 마지막으로 전화기 사이로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래, 얘는 이유 없이 그냥 내 존재만으로도 내가 싫은 내 안티인데 뭘 기대한 거지? 내가 바보였다. 그래도 전화까지해서 기분 나쁜거, 굳이 알려줄 필요 없지 않았나. 내가 얼마나 자기한테 잘해줬는데. 나쁜 김성규.
괜히 둘 다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아서 그냥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근데 그 때 김성규가 말을 했다.
「미안해.」
“…….”
「……오해야, 남우현.」
“뭐가.”
「아, 진짜……왜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 내가 너한테 그 댓글 보라고 한 의도는 - .」
우물쭈물하며 말을 잘 못하는 성규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김성규가 지금 머리를 긁적이며 어찌할줄을 몰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운함에 꽁해져 있던 마음이 그 모습을 상상하자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말도 안돼, 이렇게 쉽게 녹아내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김성규에게 받은 상처를 다시금 되뇌어 보는데도 입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간다. 아씨. 망했다.
「너랑 나랑 같이 있는 거 본 사람 있잖아……. 아, 나는, 그게 좀 그래. 뭔가 부담스럽고 그런거뿐이야. 아, 왜 실망하고 그래. 남우현, 듣고 있어?」
“…….”
「미, 미안해! 니가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어. 절대 그런 의도로 너한테 보라고 한거 아니야. 그냥, 그냥……우리 둘이 같이 있는 거 본 사람이 있다고 말하려던거뿐이야. 나는 일반인이라 너랑 같이 있는 거 때문에 얼굴 팔리면 귀찮아 진단 말이야 - .」
“…….”
「그럼 나 너 이제 안티질 안 할게. 그러니까 상처받지 말고, 응? 우현아,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아? 아씨, 미안해. 미안하다고. 야아 - 대답 좀 해봐.」
“큽, ……푸하하하!!”
「……」
아, 나한테 쩔쩔매는 김성규라니! 너무 귀엽다! 횡설수설하는게 막 애기같고, 아우, 그냥 귀여워 미치겠다! 그리고 처음으로 김성규가 나에게 다정했다! 우현아, 라니. 웬일이야, 진짜. 감동의 눈물이 흐를 지경이다. 누나, 나 안 울어요? 하고 은하누나를 향해 고개를 위로 꺾자 은하누나는 뭐 이런 병신이 있나,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미안 누나. 내가 너무 흥분했어. 하지만 이건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흥분이야.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붕붕. 나는 지금 하늘을 날고 있다.
가슴께가 간질간질거리는 걸 어떻게 해결해야 되지? 긁어야 하나? 으익, 이렇게 귀여운 성규를 어떡해. 앞으로 자주 실망한 척 해야지. 으헝, 너무 간지러워.
“니가 너무 귀여워서 나 삐졌던거 다 풀렸어! 으하하하하, 앞으로 자주 서운해야지. 아 전화 녹음해둘걸. 아, 멍청해!”
「…….」
“젠장, 너무 귀여워, 귀여워, 귀여워!! 으악! 미치겠다!!”
「…….」
“와, 다정한 김성규라니. 나 꿈꾸고 있는거야? 아니지? 성규야 한번만 더 내 화 풀어줘!”
「야!!!!!!」
결국 김성규는 나에게 낚였다는 생각이든건지 크게 죽여 버린다던지, 씨발이라던지, 듣도 보도 못한 욕들을 수화기 너머에 있는 나를 향해 날렸는데 나는 거기다 대고 발끈하는 성규가 귀여워서 크게 웃었다. 다 녹았다. 꽁해있던 마음이 흐물흐물. 이렇게 되면 내가 아무리 화가 나도 성규한테는 이제 아무 말 못할 것 같은데. 끙. 심각하다. 이제 김성규면 껌뻑 죽는 남우현이 되는거 아냐? 이미 그렇게 된 것 같은건 나만의 착각이다. ……분명.
“야, 전화 끊어. 지금 올라가야해.”
은하누나가 고데기를 정리하고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벌써? 나 성규랑 더 통화하고 싶은데……. 아쉽다. 정말 끊어? 라고 누나한테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헝. 이제 성규에게 전화를 끊자고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끊기 싫어! 몇 분 남았는데? 하니까 닥치고 빨리 끊으란다. 그래도 끈질기게 내가 빨리 안 끊자 은하누나가 얼른 끊으라며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아 나, 끊는다고. 끊으면 되잖아! 손도 매우면서 때리고 난리야.
“성규야.”
「뭐!! 개자식, 나 가지고 노니까 재밌냐? 아오, 이제 너 또 다시 실망했다 어쨌다 해봐, 진짜 죽 - .」
“나 이제 무대 올라가는데, 잘하라고 응원 한 번 해주라.”
「내가 왜! 니가 뭐가 예쁘다고!」
“나는 좀 멋있지. 그래도 해줘.”
「닥쳐. 끊어 그냥. 화나 죽어버릴거 같아.」
“니가 응원해주면 더 잘 할 것 같은데. 한 번만 해주라, 응?”
「싫어, 싫어. 무대에서 콱 엎어져 버려라.」
“아 왜, 해줘! 나 진짜 아까 실망했거든?”
「몰라! 그 얘길 왜 꺼내!」
“해주라, 성규야. 응? 파이팅 한번만.”
「절대 안 해.」
“그럼 나 가사에 니이름 섞어서 부를 거야. 김성규, 내꺼하자. 어제 나랑 파라다이스 카페에서 같이 커피마신 너를 지켜봐 왔잖아,니 사랑을~”
「음에 맞지도 않는걸, 무슨.」
“그래도 할건데? 아, 한번만! 딱 한번만 우현아, 파이팅, 해줘!”
「아오, 진짜!!」
“얼른!”
「……파, 파이팅. 됐지?」
“우현아는 왜 빼?”
「아씨! 우현아 파이팅!! 남우현 파이팅!! 됐냐, 됐어?!」
“응. 닥본사 알지? 오빠 이만 전화 끊을게.”
「아오, 내가 어쩌다가 저딴 #$%$#% - .」
재빨리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매니저 형에게 주었다. 형의 시선이 꺼림칙하다. 아, 맞다. 형은 아직도 내가 게이라는 의혹을 떨쳐내지 못했지. 웃기다. 내가 게이라니. 근데 김성규랑 나의 통화는 좀 닭살스럽긴 했다. 그건 인정!
“성규씨야?”
“응!”
“…….”
“형, 있잖아.”
“야, 너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
“김성규는 너무 귀여워. 졸귀야.”
“헐.”
그렇게 나는 웃음과 함께 형에게 그 말을 남기고 무대를 향해 종종 걸음을 쳤다.
“아씨, 내가 왜 봐야 돼…….”
그리고 그 시각 성규는 옆으로 던져버린 핸드폰을 노려보며 한 숨과 함께 리모컨으로 티비 전원을 켰다. 내가 왜 남우현이 나오는 음악프로를 챙겨보고 있어야 하지? 알 수가 없다. 뇌에선 채널을 돌리지 말라고 명령하는데 손가락의 운동신경은 제멋대로 남우현을 찾아 채널을 돌린다. 나는 사이보그인가? 왜 내 몸이 내 맘대로 조절이 안되지? 짜증나는 남우현. 남우현의 저주가 분명해. 결국 TV화면에 남우현의 모습이 비춰졌다. 에휴, 하는 수 없이 보는거다. 진짜로, 손가락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남우현의 무대를 챙겨보는거다. 그래, 정말 그 뿐이다. th l 바.
*
“아, 더워.”
“수고했어.”
“다음 스케줄 뭐야?”
“토크쇼 있어.”
“알았어. 아, 핸드폰 좀 줘봐.”
하고 손부채질을 하던 손으로 핸드폰 받으려고 손을 형에게 건네는데 빨리 내 손 위로 올려지는 둔탁한 물체가 없다. 뭐야? 하고 형을 바라보자 형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려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왜 그래? 의아해서 멀뚱멀뚱 형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그 때 섬광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내가 무대로 가기 전에 했던 그 말 때문에? 장난도 못 치나. 아나, 진짜. 형이 언제부터 장난과 진담을 구분 못하는 재미없는 사람이었다고. 나는 일단 형에게 얼른 차 에어컨을 틀으라고 했다. 형은 차 에어컨을 틀더니 한숨과 함께 나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진지하게 말해. 너랑 성규씨랑 무슨 사이야?”
“친구.”
“진짜로?”
“그래, 그러니깐 빨리 핸드폰 줘.”
“아니면 어떡할 거야?”
“아씨, 가수 은퇴할게! 됐어? 빨리 줘.”
“……여기.”
“이상.”
“뭐?”
“친구 이상.”
“뭐??”
“구라야. 그만 좀 놀래.”
“야, 이 - .”
“김성규가 좀 더 예뻐지면 생각해 볼거야. 아직은 내가 너무 아까워. 그러니까 그만 좀 놀래. 이젠 재미도 없다.”
나는 얼른 최근 통화목록으로 들어가 맨 위에 있는 김성규를 클릭해 다시 전화 걸었다. 누나들은 이제야 벤에 주섬주섬 옷을 던져두었다. 형의 화난 표정을 애써 외면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얼른 성규가 전화 받기를 기다렸다. 무대에서 완전 열심히, 김성규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힘이 불끈불끈 나서 춤도 격하게 추고 카메라에 대고 팬서비스도 엄청 하고 그랬다. 김성규는 봤을까? 보고 당연히 감동받았겠지? 눈치가 아예 없지않은 이상, 내가 누굴 향해 그런 팬서비스를 했는지는 알 수 있을거다. 안티질 그만 둔다면서. 그럼 이제 내 팬이 될 차례군. 으하하, 깊이 헤어 나올 수 없는 나의 매력에 빠질 시간이야. 으웩. 내가 말했지만 이번건 좀 오글거렸다.
…… 어? 전화 받았다!
「아, 또 왜!!」
“봤어? 오늘 무대 멋있었지? 내가 너 본다고 좀 더 멋지게 했어.”
「안 봤어.」
“뭐?? 안 봤어?!!”
「응. 내가 왜 봐.」
“내가 보라고 했잖아! 약속 한건데, 왜 맘대로 약속 안 지켜?!”
「그게 왜 약속이야? 일방적이었잖아!」
“흑흑, 김성규 나빠. 내가 얼마나 열심히 춤추고 그랬는데에 - . 나 지금 골반 뼈가 나갈 것 같아, 으헝.”
「……야야, 웬 우는 척이야. 소름 돋으니까 그만해.」
“흐흡, 김성규 미워. 막 내가 마지막에 하트도 너를 위해 하고 그랬다? 근데 넌 안 봤네? 으허허허허헝, 나 울거야.”
「남우현……이러지마.」
“하, 힘 빠져. 나 오늘 또 사석나무 되면 너 때문이야.”
「또 삐졌냐…….」
“야, 김성규. 이제 내가 나오면 무조건 닥본사 한다고 약속해. 그럼 나 그만 울게.”
「내가 왜? 나 너 안티야.」
“너 방금 전에 이제 안티질 안 한다며.”
「……진짜 내가 무슨 말을 못해.」
“얼른!”
「아 알겠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괴롭혀! 오늘 몇 번째 통화하는 거야, 날도 더운데 핸드폰 너무 뜨겁잖아!」
“자, 약속한거다?”
「그래, 좀 끊어. 제발.」
“응응. 끊을 게. 귀염둥이 성규야.”
「저게 끝까지!」
오, 멋진 마무리였어, 남우현. 큭큭. 잔상처럼 김성규의 마지막 외침이 아직 내 귀에 남아있었다. 나는 얼른 카카오톡에 들어가 김성규와의 1:1 채팅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진첨부를 눌러 스케줄 표를 성규에게 전송했다. 근데 우리 카카오톡 친구인데 왜 어제 저녁에 김성규가 문자를 했을까? 알 수가 없다.
[이거 보고 이제 꼭 닥본사해]
대화 옆에 있던 1 이 사라졌다. 김성규가 봤다는 거다. 나는 계속 뚫어져라 핸드폰 화면을 보며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김성규는 씹을 모양이다.
[자기야 씹지마 ~.~]
저렇게 보냈어도 김성규는 결국 저것마저 다 씹었다. 부끄러운 가 보다. 하긴, 김성규가 보기와 다르게 부끄럼을 잘 타지. 나는 몽글몽글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무언가를 느끼며 손을 깍지 껴 머리 뒤로 넘겼다. 김성규, 튕기긴. 헹. 하, 기분 좋게 잠보충이나 해볼까. 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