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그러니까 그 애.
그러니까 김민규를 처음 만난건 딱 한달 전 일이다
나는 뭐 늘 그렇듯이 학교를 가려고 버스에 탔고, 거기에 김민규가 있었다
마침 자리는 김민규 옆자리 밖에 없었던 터라 나는 자연스레 그 자리에 앉았고
김민규랑 눈이 마주쳤었다
뭐 그때 김민규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던걸 본것도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으니.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그 애를 또 만났다
학교 갈때는 몰랐는데 키가 엄청 큰 애였다
적어도 180은 넘는 것 같았다. 여자만 바글바글한 여고에서 보지 못했던 큰 키였다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뭐, 이렇게 키 큰 애를 처음 봐서 그런거겠지
그 때도 또 눈이 마주쳤었다
사실, 그땐 김민규의 얼굴보단 명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워낙 큰 키라 가슴팍에 있는 명찰이 내 눈높이에 맞아서 그런걸지도.
흰 색 명찰에 검은 색으로 정갈하게
'김민규' 라고 쓰여있었다.
성수남고 흰색 명찰은 나와 같은 학년인 2학년이다.
너 이 자식, 나랑 동갑인데 뭘 먹고 이렇게 큰거야
어색한 공기만 흐르는 버스정류장에서 숨막히는 몇 분이 지나고 (몇 시간 같았다)
드디어 내가. 아니, 우리가 타야하는 17번 버스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차례로 오르고 김민규 뒤에 내가 섰다
뒤에서 보니까 진짜 크다. 아니 키만 큰게 아니라 비율도 좋다. 아니 뭐 다 가졌네.
"삐빅, 잔액이 부족합니다"
카드를 집은 김민규의 손이 옅게 떨리고 눈동자는 강하게 흔들렸다
김민규는 그걸 부정하고 싶었는지, 재차 태그했지만.
"삐빅, 잔액이 부족합니다"
김민규는 뒤에 있는 나를 배려한건지, 가방에서 돈을 찾으려고 한건지는 모르나 살짝 옆으로 비껴났다.
그리고, 난 결단을 내렸다. 불쌍하니까 도와줘야지.
"학생 두명이요"
잔액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보다 더. 김민규의 눈동자가 강하게 흔들렸다
김민규의 눈을 마주보고 살짝 눈썹을 까딱인 다음 자리로 가서 앉았다
버스가 출발할때 까지 멍하니 서있던 김민규가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 내 옆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앉았다
"고마워 친구야"
그게 니가 나한테 해준 첫번째 말이었다
++++
뭐, 그 사건 이후로 김민규랑 나는 조금은 요상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김민규의 이름을 알지만, 김민규는 내 이름을 모르고 (아마도)
어디 사는지, 전화번호는 뭔지, SNS는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늘 같은 시간에 17 번 버스를 타면 정확히 버스 오른편 5번째 좌석에 김민규가 앉아있고,
내가 버스에 오르면 밝게 웃으며 옆자리를 팡팡 친다는것 정도.
그러면 나는 계속 그 이상한 감정이 든다는 것도,
김민규는 날 항상 '친구야' 라고 부른다.
오늘도 그랬다
"친구야, 오늘 몇교시해?"
"오늘 단축해서 4교시"
"우와, 나도 4교시하는데"
"음, 그렇구나"
"음, 그럼 친구야."
"응?"
"나랑 영화보러 갈래?"
뜬금없었다. 서로 친하...긴 하지만 친하진 않은데
갑자기 왠 영화람. 게다가 남자랑 영화보는건 처음이다. (아빠랑은 몇 번 봤었다)
"영화?"
"어. 갑자기 표가 두장 생겼거든. 근데 시커먼 남자애들이랑 보긴 좀 아까워서"
너도 시커매 민규야.
"음, 뭐 볼건데?"
"친구야, 너 로맨틱 코미디 좋아해?"
"음...좋아하긴 하는데. 나 애니메이션 더 좋아해"
"진짜?"
"어"
"나도 애니메이션 엄청 좋아해!! 맨날 다른 애들이랑 보러갈려하면 유치하다고 까였었는데!"
"우와 나도!"
뭐 이렇게 김민규랑 나랑 조금은 공통점이 생긴듯 했다
김민규 눈이 엄청 반짝였다
아니, 얘가 이렇게 잘 생겼었나.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지브리 다 좋아해?"
"지브리는 좀 내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다 좋아해"
"우와 친구야. 너.."
김민규는 꽤 감동받은 것처럼 보였다.
뭐, 같이 애니메이션 볼 친구 생긴거니까 좋은 건가?
++++
그리고 학교가 끝났다
그리고 난 무언가를 깨달았다
김민규가 나랑 동갑이고 성수남고에 다닌다는 것만 빼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였다.
전화번호는 몇번이고 몇반이고 정문으로 나오는지 후문으로 나오는지 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럼...
결론적으로 난 망했다.
머리를 헤집으며 후문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간만에 생긴 약속인데..
이제 어쩌지.
그때, 들리는.
"친구야!"
후문 앞 나무에 기대어 날 보며 손을 흔드는 김민규.
"야- "
"친구야, 너 연락 안될까봐 걱정했지?"
"응"
"그래서 내가 일찍 끝내고 이리로 뛰어왔어"
"내가 정문으로 나오는지 후문으로 나오는지 어떻게 알았는데?"
"너는 모르겠지만, 나 너 들어가는거 보고 학교 가. 친구야"
"응?"
갑자기 쏟아진 폭탄 같은 발언.
내가 들어가는 걸 봤다고? 잠시만,
"너도 진짜 바보다"
"?"
갑자기 들이닥친 김민규의 폭탄같은 발언들에 머리가 하얘졌다
"아니, 여고다녀서 그런건가? 아니야, 승관이 전여친은 애를 막 갖고 놀았었다던데.."
혼자서 중얼거리는 김민규에,
"아니....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야.."
"나 사실 아침 잠 많아. 근데 너 볼려고 맨날 일찍 일어나서 같은 시간에 버스 타"
"......"
"그리고 니 이름도 알아. 김세봉. 김세봉 맞지?"
"어...맞아"
"근데 이름 부르는게 싫었어. 뭔가 그냥, 신비롭지 않아진다고 해야하나?"
"음, 그랬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사실.."
"......?"
" 너 좋아..해. 이것도 몰랐지?"
"으..응"
"근데 괜찮아. 이제 알면 되지. 니가 그때 내 옆에 앉았을 때부터 그랬어...
그래서 그랬던거야. 근데 니가 니 이름도 안 가르쳐주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궁금했는데.
전화번호 따기도 좀 그렇고. 어휴, 진짜 심장 쿵쾅대서 죽는 줄 알았네"
"........."
"아 창피하니까 내 눈 보지마아.."
이거 아주 덩치는 산만한데 하는 짓을 꼭 아기 같다
"........영화는?"
"사실 영화 예매안했어. 그냥 고백할 타이밍을 좀 잡고 싶어서..
뭐, 지금 당장 받아달라는 건 아냐. 그냥 알아줬으면 해"
그리곤 뭐가 그리도 좋은지 계속 입꼬리를 씰룩대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물론 중간에 계속 뒤돌아보면서 재촉하는것도 잊지않고.
그래도 그 전과 달라진게 있다면
이젠 "친구야" 가 아닌 "세봉아" 가 되었다는 거.
그리고, 그 이상한 감정이 뭔지 나도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