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조선시대에 대해 잘 모릅니다. 물론 사극도 잘 안 봐서 말투도 몰라요.
그래도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으니 지르고 봅니다.
악토버 - Romance
수도의 중앙에서 조금 빗나간 외곽쪽에 자리한 한 거리는, 낮에는 본연의 색을 감추고 있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차츰 내려올 즈음에야 화려한 색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 거리의 색은 그 어느 거리보다 더 화려함을 내뿜었고, 보는 이의 마음을 현혹시켜 끌어들인다 했다.
그 거리의 중심에는 거대한 기루가 존재했다. 가장 붉고, 가장 화려한. 일반 평민은 들어갔다가 그 집안의 자산을 모두 탕진하고도 그 붉은 빛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다는 그 곳은 뭇 사내들의 마음을 불태웠다. 그 곳의 기생들은 모두 꽃내음을 머금었으며, 그 향이 비록 양귀비와 같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들이켜 숨을 멎을거라는 사내들이 줄을 섰다.
사람들은 그 거리를 홍등가라 불렀으며, 그 중심의 자리한 기루는 홍루라 칭했다.
물론 화려함이란 언제나 또 다른 이면을 끌어안고 가는 존재였다. 윤기는 그 다른 이면에 철저하게 녹아있는 일꾼이었다. 어미는 아마도 홍루의 어느 기생. 사실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어린 아이였을 때는 기생들이 예뻐해줘서 배를 곪는 일이 없었지만 홍등가에서 태어난 아이의 길은 다 비슷했다. 여자아이는 기생으로, 혹은 그 밑의 심부름꾼으로. 남자아이는 막노동꾼으로, 혹은 길거리의 방랑자로. 여자로 태어났으면 그 누구도 홀렸을거라며 아쉽다는 듯 탄식을 뱉어내는 홍루의 어머니라 불리는 여자에게 거두어져 홍루에서 몇 없는 남자일꾼이 된 것은 윤기의 입장에는 참으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랬기에 항상 철저하게 홍루의 붉은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녹아들어 살았다. 그런 저를 끄집어내는 이를 만나기 전까지.
"윤기야, 윤기야. 이 비단 참으로 곱지 아니하니? 상선 나으리가 내가 어여쁘다 하여 주고 갔단다."
"누님이랑 잘 어울려요."
"네 살결도 참으로 하얗고 고우니, 언제 한 번 몰래 비단을 두르고 같이 일하지 않을래?"
"위에서 크게 화를 내실겁니다. 자, 여기요. 다 고쳤습니다."
전모를 받아든 여인은 고운 얼굴에 걸맞는 간드러지는 웃음을 흘리며 새것마냥 고쳐진 전모를 머리에 얹었다. 얼마든지 새 것을 살 여유가 있다지만 홍루에 몇 없는 말벗을 찾아올 기회를 제 손으로 차버리기 싫었다. 윤기의 존재는 참으로 묘했다. 홍루의 남자일꾼은 대부분 그 존재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바깥은 어떨지라도 홍루에서는 가장 많은 사내, 손님을 이끄는 것이 최고였으니까. 윤기는 그런 분위기 속에 묵묵히 녹아들어왔다. 무뚝뚝하면서도 세심하게 홍루의 일원들을 챙겼고, 이렇게 망가진 물품을 수리하기도 했으며,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기생들의 조잘거림을 들어주곤 했다.
헛된 웃음을 짓지 않아도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라서 그런걸까. 아니면 그 담담한 눈빛에 어떠한 애욕도 들지 않아 담백한 진심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까. 윤기는 다른 남자일꾼보다 기생들의 신뢰를 많이 받는 편이었다. 윤기는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사라지는 기생의 뒷모습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묵묵히 고치느라 썼던 도구들을 챙겨 구석에 밀어놓고 짚신을 꺼내어 신었다. 오늘은 사올 물품들이 많다. 이것들을 사오고 또 내각쪽의 청소를 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벌써 봄이로구나."
품에 한 아름 물건을 품은 채 걸음을 옮기다 홍루 뒷문으로 통하는 오솔길에 들어서니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윤기의 시선을 빼앗았다. 바람이 불 때면 그 꽃잎들이 서로 부딪쳐 이내 땅으로 흩날리는 것은 가히 절경이었다. 윤기는 봄이 되면 항상 보는 풍경이었지만 이 풍경의 시간이 길지 않음을 알아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잠시, 쉬었다 가도 괜찮지 않을까. 휴식의 유혹은 늘 달콤했으며 오늘 내내 부지런히 움직인 윤기에게는 그 유혹을 거부할 힘이 남아있을리 없었다.
사람의 발자국으로 만들어진 오솔길에서 빠져나가 나무들 틈새로 들어간 윤기의 몸은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벚꽃 나무들을 따라 산길을 걷다보면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오솔길을 대신하곤 했다. 그리고 그 꽃잎의 끝에는, 조용한 계곡물의 한 줄기가 흐르는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유일한 윤기의 휴식처였다.
"아, 죽겠다."
널찍한 바위 위로 품에 안고 있던 물품을 내려놓은 윤기는 바로 짚신을 벗고 바짓단을 끌어올려 얕은 계곡물에 발을 담구었다. 산길을 오르느라 후끈하게 달아올랐던 발이 차가운 물에 식혀지는 느낌에 작게 어깨를 떨었다.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른 곳에서는 보기가 힘든 벚꽃나무가 유독 이 근처에는 많은 편이었다. 윤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끔가다 자갈돌이 발바닥을 아프게 찔러올리면 미간을 찡그리기도 하면서.
"책 읽고 싶다... 노래도 불러보고 싶다. 근데 난 그렇게 높은 노래는 부르지 못 하니까 안 되려나."
어린 기생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는 교방은 윤기에게도 금지된 구역이었다. 이따끔 그 근처를 지나갈 때 들리는 노랫소리만이 윤기의 귀를 간질일 뿐이었다. 책은 홍루에서는 아예 찾기가 힘든 것이었다. 문란한 그림이 판을 치는 책들이 그나마 있다면 있달까. 책방에 안 간지도 오래된터라 윤기는 머릿속으로 내일 일정을 떠올리며 책방에 갈 틈을 열심히 짜내보았다. 윤기는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올려 제 뺨을 연신 스쳐지나가는 하얀 꽃잎을 올려보았다. 계곡물에는 꽃잎이 두둥실 떠다녔다. 어찌 너희들은 이 붉은 홍등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빛을 띄고 있구나.
윤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하얀 꽃잎에 따라 자신도 하얗게 물드는 것 같아, 한참을 기분 좋은 햇빛과 더불어 기분 좋은 계곡물의 시원함을, 약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즐겼다. 그리고 하늘이 조금 붉은 빛을 내보일 즈음 윤기는 급하게 덜 마른 발로 짚신을 찾아 신고 바위 위에 있는 물품을 다시 챙겨 안았다. 그리고 바삐 걸어내려 가는 윤기의 모습이 사라질 즈음 또 다른 이가 조용히 그 곳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음에는 일찍 오거라."
"예. 알겠습니다."
"그래. 물러가거라."
결국 불려가 혼이 났다. 윤기가 혼이 나는 경우는 흔치가 않아 창호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기생들은 윤기가 고개를 숙이고 나와 복도의 한 켠을 걸어가자 쪼르르 그 뒤를 따랐다. 재잘거리는 그 목소리는 퍽이나 고와 윤기는 딱히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그녀들을 내치지도 않았다. 다만 마루의 한 켠으로 붙들려 가 그녀들의 인형놀이마냥 앉아서 고운 비단들을 두르며 그녀들의 농담과 이야기를 듣고, 시간이 조금 지날 즈음에는 값비싼 주전부리를 같이 즐길 뿐이었다. 혼나느라 저녁을 굶은 윤기를 위한 그녀들의 작은 배려였다.
하룻밤이 그렇게 지나고 나자 조금 색다른 아침이 윤기를 반겼다. 궁에서 큰 연회가 열려 수도에서도 내노라하는 기생들이 많은 홍루의 기생 대부분이 연회의 흥을 돋우러 홍루를 비우게 되어 윤기도 시간이 널널해졌다. 궁에서 연회 좀 자주 해줬으면 좋겠다는 다른 일꾼의 말에 속으로 동감을 표한 윤기는 들뜬 마음을 안고 홍루의 뒷방 구석, 한 켠에 마련된 제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 해놓아야 하는 일은 일찍이 끝내놓았다. 이제는 온전한 윤기의 시간들 뿐이었다.
"녀석, 요즘 왜 안 오나 했다. 그 허연 얼굴은 어째 더 허옇게 질린 것이, 기생들의 분이라도 뺏어 바른 것이냐?"
"그럼 할배는 볼에 연지를 바르셨나, 어찌 전에 뵈었을 때 보다 더 붉어진 것 같습니다."
'예끼. 이 놈이 담뱃대로 한 대 맞아볼테야?"
윤기는 조용히 책을 내밀었다. 책방 영감은 그 무뚝뚝한 행동에 혀를 차며 참 재미없는 친구라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윤기에게 책값을 받아 주름이 잔뜩 진 손으로 헤아린 뒤 손을 휘저었다. 윤기는 책을 조심히 품에 감싸 안고는 얼른 홍루 뒷편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아직 날이 밝다. 도중에 걸음을 바꿔 어제의 산행을 다시 행했다. 어제의 물품들보다 책이 더 가벼워서 그런건지, 윤기의 마음이 들떠서 힘든 것도 모르는 건지. 윤기는 보다 가뿐하게 산행을 마쳤다. 여전히 하얀 꽃잎을 싣고 흘러가는 계곡물은 계절보다 조금 이른 청량함을 내뿜었다.
짚신을 벗고 물에 발을 담그고 있자니 투명한 물 아래로 작은 돌들이 보이고, 물 위로는 햇빛이 비추어 꽃잎과 함께 햇빛을 비추었다. 다른 손에 짚신을 들어올린 윤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계곡물 바로 옆에 솟아있는 바위 근처로 가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참으로 좋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은 저절로 윤기의 입꼬리를 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자리의 주인이 되십니까."
햇빛을 벗삼아 천천히 책장을 넘기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윤기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도포를 두른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천민인 윤기가 딱 봐도 양반으로 보이는 이의 등장은 놀라움, 그리고 약간의 제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짜증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민이 무어라 하겠는가. 양반이 당장 꺼지라 하면 허리를 숙이며 사라져야 하는 것이 제 신분이었다. 윤기는 얼른 맨발로 계곡물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남자는 난처한 듯 뺨을 긁적이다가 다시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윤기를 감쌌다.
"자리를 뺏고자 함이 아닙니다."
남자의 말에 윤기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올려 남자와 마주보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양반을 모욕하냐며 호통을 칠 장면이었지만 남자는 그저 드러난 윤기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씩 웃어보일 뿐이었다. 특이한 양반일세. 윤기는 다시 바위 위에 앉았다. 제게 용건이 없다면 자신도 더 할 말이 없다. 윤기는 책을 다시 펼쳐들었다.
"매일 여기에 오십니까?"
"말을 낮추십시요. 저는 그저 천한 천민일 뿐입니다."
"이 말투가 더 편해서 그러니 괘의치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제 질문에 아직 어떠한 답도 내놓지 않아주셨습니다."
"... 매일 오는 건 아니옵고, 이 자리의 주인은 더더욱 아닙니다."
"어제도 그대의 모습을 아주 짧게나마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왔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왜 이 미천한 자를 기다리십니까?"
"그대의 말투는 신기하네요. 사내의 말투치고는 참으로 어투가 고우십니다."
이 양반 나으리는 도대체 무슨 일로 나를 이리 귀찮게 만드는 것일까. 윤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보다 더 큰 몸을 우겨 제 옆에 앉는가 싶더니 이제는 바위 위에 엎드려 소매깃을 걷어올리고 손으로 계곡물을 저어댄다. 간혹 꽃잎을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다시 흘려보낸다. 그러면서도 말은 끊임없이 걸어오는 모양새가 윤기의 입장으로는 퍽이나 귀찮았다. 오늘 여기서 이 책을 다 읽고 내려가려 했것만, 이 뜬금없는 자의 훼방에 다 망쳐버렸다.
윤기는 입술을 꾹 깨물며 책을 덮어버렸다. 오늘 아니면 언제 또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역시 잠을 조금 더 줄여야 하는 수 밖에 없을까. 새벽에 별빛과 달빛을 벗삼으면 그리 어둡지도 않으니 괜찮을 것 같다. 윤기는 홀로 머릿속에 바삐 생각을 하느라 어느새 남자의 시선이 제 입술에 닿는 것도 몰랐다. 입술에 갑자기 무언가 닿았다고 느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렸다. 남자의 엄지가 제 아랫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고개를 조금 뒤로 빼내었다.
"입술을 그리 깨물면 흉이 집니다."
"사내의 입술에 흉은 흉도 아니지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윤기는 바위 위에서 내려와 짚신을 챙겨신었다. 그러자 남자가 윤기를 목소리로 붙잡았다.
"가시는 겁니까? 오늘은 날도 좋은데 어찌 더 이 절경을 취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
이제는 저 목소리가 그저 정중하고 듣기가 좋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가 미친 것일테지. 윤기는 새어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뒤를 돌아봤다. 갓을 살짝 들어올린 얼굴은 확실히 홍루의 기생들이 모두 호감을 표할 정도로 단정한 미남인지라, 윤기는 저보다 짙은 색을 띄는 건강한 피부색까지 비교되는 것 같아 괜히 하얗기만 한 제 손을 소매 끝으로 감추었다.
"너무 취하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할 일을 놓고 왔으니 이만 돌아갈까 합니다."
"내일도 이 곳에 오면 그대를 볼 수 있는겁니까?"
"절경에 취하러 오십시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취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것이라면 어찌합니까. 그래서 묻는 것이니 너무 경계하지 말아주십시오."
"욕심이 많으시다는 소리, 듣지 않으십니까."
"처음 듣습니다."
남자의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라가 품고 있는 풍경과 참으로 어울렸다. 다만 윤기는 제가 왜 여기서 입씨름을 해야하는지 몰라 품에 안은 책만을 더 꼭 끌어안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왜 말을 붙인 것인지조차 모르겠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남자와의 담소를 이어갈바에야 홍루의 기생들의 가벼운 농담을 듣는 것이 더 편했다. 그녀들은 고개 끄덕임 몇 번과 짧은 대답에 만족했으니까.
윤기가 잠시 말을 멈추자 남자도 바위 위에서 내려와 윤기의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뭔가 고민하는지 제 턱을 쓸어만지다 뒷짐을 지었다. 그리고 느긋히 윤기의 옆에 섰다.
"책을 좋아하십니까?"
"... 예."
"그러면 좋아하는 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 경전과도 같은 것이 아니라면 다 좋아합니다."
윤기의 단호한 말에 남자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암요, 그건 저도 싫어합니다. 지긋지긋하거든요. 남자의 활기찬 맞장구에 윤기는 도리어 천민이 책을 읽는다고 비웃음을 사지 않은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어느새 남자와 윤기는 같은 걸음걸이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지만 윤기는 그것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쓰지 못 했다. 남자의 호탕하면서도 예의있고, 다정한 화법은 기생들의 화려하고 조잘거리는 화법에 익숙해진 윤기에게 있어서 낯선 부드러움이었다. 그렇기에 어느새 오솔길이 드러나고 나서야 이 남자와 기어코 같이 산을 내려왔음을 깨달았다.
"내일 그대가 좋아할 법한 책을 가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서재에 가득 있으나 누구 하나 읽는 이가 없어 쓸쓸함을 보이는 책들이니, 그대가 즐거이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내일 만나는 겁니까?"
"그러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책으로 저를 꼬드기는 것이 꼭 당과로 어린 아이를 꼬드기는 것과 똑 닮아있어 윤기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책만 받고 내려오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살며시 고개를 드는 건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라, 윤기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제 이름 석 자조차 알리지 않고 그대를 대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천민에게 그리 예를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차리고 싶어서 그러합니다. 저는 김씨 가문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준이라고 합니다."
"... 윤기라고 합니다."
당신과 같은 성은 없는. 윤기는 뒷말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남자는 윤기의 이름을 외우듯 몇 번 중얼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의 어깨를 그러쥐고 항상 걸어들어가던 홍루의 후문으로 윤기를 돌려세웠다. 남자의 손길에 그대로 몸이 돌려진 윤기는 고개만을 돌려 남자의, 그러니까 남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일, 잊지 말아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남준은 미련없이 몸을 돌려 그 몸에 꼭 어울리는 청색의 도포를 흩날리며 점차 작아졌다. 중간에 고개를 홱 돌려 윤기와 눈이 마주치고는 씩 웃어보였다. 윤기는 그 웃음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려 홍루의 후문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남준은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윤기가 사라진 곳을 빤히 바라보다가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른 어깨를 그러쥐었던 제 손을 천천히 그러쥐었다가, 펴내보였다.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햇빛을 머금어 하얗게 빛나는 모습에 모든 시선을 빼앗겼다고 하면, 믿어주실지 모르겠습니다.
답지 않은 행동을 했던 남자는 길가에 서서 마른 세수를 하염없이 하고, 후문으로 들어가 방에 도착한 사내는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뒤로 매일같이 산행을 감행한 두 사내가 처음으로 서책이나 주전부리따위가 아닌 마음을 나누기까지는 벚꽃이 지고, 녹음을 건너 낙엽이 물들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다시 홍등가 후문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 홍루의 기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다니다 조용히 가라앉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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