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일곱 명의 무한지구대 이야기
<응답하라112>
- 미스터몽룡
*
60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희끗희끗한 회색 머리의 교수가, 두 팔을 널찍이 벌려 강단을 붙잡은 채 수강생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하겠어요."
그 말에 강의실 분위기는 곧바로 어수선해졌다. 교수가 출결에서 깐깐할 것 같다느니, 소문에는 학점을 잘 준다더라, 선배가 알려준 바로는 시험이 어렵더라는 둥 갖가지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강의실을 메운다. 강단에 서있는 교수의 귀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말이다. 간혹 가다 그 틈 사이로 필통 혹은 가방 지퍼가 여닫히는 요란한 소리도 섞여서 들려온다.
이 때 옆자리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책상을 툭툭 치면서 물어온다.
"우리 공강 시간에 뭐하냐?"
오리엔테이션이 일찍 끝나서 꽤나 신났는지 눈빛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친구를 뒤로 한 채, '딸칵'하고 볼펜 뒤꽁무니를 눌러 심을 집어넣는 우현이었다. 지금의 기분 같아서는 썩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대답을 하더라도 말이 곱게 나갈지는 미지수였다. 기분을 숨겨가면서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은 자신에게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판단을 마친 우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교수에게 A4 용지로 배부 받은 2학기 강의 계획서와 함께 볼펜을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지퍼를 닫았다. 지퍼가 맞물리면서 형언할 수 없는 이중 화음을 냈다.
우현이 자리에 앉아서 가방을 매고 난 뒤에 일어서자,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친구는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짐을 부랴부랴 챙기며 따라 일어섰다.
"야, 임마. 나 아직 다 안 챙겼잖아!"
친구의 볼멘소리를 들은 우현이 한숨을 쉬면서 눈알을 반 바퀴 굴렸다. 쟤는 눈치도 없지….
"수강 신청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해서 지금 몹시 우울하다…. 아~ 존나 공강이고 뭐고 닥치고 혼자 있고 싶다. 오후에 보자."
뭐? 오후에 보자고? 뜬금없이 날아온 일방적인 통보에 기가 막혀서 한마디 하려고 입을 뻥끗하던 친구는, 우현이 고개를 돌려 외면함으로써 발언권을 박탈당했다.
"즈른 쓱을 늠을 브읐느…."
그의 행동에 울컥해서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는 친구였다.
*
고작 오리엔테이션 하나 했을 뿐인데, 교수가 2학기 동안 어떤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해 나갈지 눈에 훤히 보인다. 옘병…. 짜증이 솟구친 우현의 미간 폭이 잔뜩 좁아졌다. 교수가 띄워놓은 강의 계획서 좀 꼼꼼히 훑어보고 수강 신청할 걸….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속으로 한 번 후회해본다. 으아아아!!!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수강 신청이 열리기 15분 전부터 홈페이지에 로그인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9시 '땡' 치자마자 수강 신청을 했던 우현이었다. 결과는 대실패. 손목에 차고 있던 전자시계가 삐빅 거림과 동시에 날렵하게 신청 버튼을 눌렀으나, 화면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하얗게…. 아주 하얗게…. 눈앞에 보이는 하얀 화면이 현실을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 '홈페이지 서버 폭주ㅋ'라고….
그렇게 그대로 우현은 새하얗게 타버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머리를 빠릿빠릿 돌려서 사태 파악을 끝낸 우현은 큰일 났다며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하지만 건너편에서 돌아온 대답은 '어? 마침 나도 너한테 전화 걸려고 했는데!'였다. 아이고, 머리야…. 그렇게 그 친구와 통화를 이어가며 부랴부랴 신청한 것 중 하나가 방금 전에 들은 강의였다. 홈페이지 폭주로 패닉이 된 사이에 B급 강좌들도 이미 정원이 다 차버린 상태에서, C급 강좌를 찾아 간신히 신청한 것이었다. 사실 친구가 괜찮을 것 같다고 해서 그 말만 믿고 아무 생각 없이 신청한 거였는데, 막상 오리엔테이션을 해보니까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류거남, 너를 믿은 내가 병신이지.
하아…. 아무래도 공강 시간동안 나의 2학기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이런 식의 강의들이라면 정정 기간 동안 대체 몇 과목이나 다른 걸로 바꿔야하는 것일까…. 생각을 마치자, 머리가 지끈거림과 동시에 눈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아무래도 피로가 눈 쪽으로 쏠린 듯 했다.
우현은 피곤에 절은 눈가를 한손으로 지긋이 쓸어내리며 카페가 있는 정문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쿵.
운전석 문을 닫은 뒤 손잡이에 있는 잠금 버튼을 누른 성규는 통화하던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기 건너편이 한양대학교 정문인가? 성규의 휴대폰 속 액정에는 '아빠'라는 이름과 함께 통화 시간이 1초씩 더해가고 있었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나오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정문이 맞는 것 같다. 확신을 얻은 성규는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대고 한쪽 어깨로 고정시켰다.
"분수대 있는 곳이 정문 맞지?"
[그래, 옳게 찾아왔구나.]
휴대폰 건너편에서 껄껄 웃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이 정문 맞으니까, 횡단보도 건너서 들어오거라. 누런색 서류 봉투를 뒤적거리며 알았다고 대답한 성규는 여러 종이들 중에서 한 장을 반쯤 뽑아들었다. 사람 이름들이 빽빽하게 쓰여 있었다.
"서류 봉투 안에 있는 거 학생 명단 아니야?"
[응. 개강 첫날이라 그런지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했지 뭐냐.]
그 말에 성규는 왼손에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바라본다. 시계는 12시를 향해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아빠 강의 시간 언젠데?"
[이미 끝났다. 명단이 없으니 출석을 부를 수가 있어야지…. 할 수 없이 이름 쓰라고 종이 돌렸지.]
"에이~ 나 오늘 휴가라서 여유로웠는데…. 진작 좀 부르지."
반쯤 뽑아든 종이를 서류 봉투에 도로 넣으며 횡단보도 앞으로 걸어가는 성규였다.
[같이 살지 않으니 아들 녀석이 언제 휴가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참나~ 됐네요, 됐어! 나가서 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아빠가 다시 한 번 껄껄 웃자 성규의 입가에도 잔잔히 미소가 번진다. 참 못 말리는 사람이다. 출퇴근하는데 애먹지 말라고 근무지랑 최대한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준 게 바로 아빤데 말이다. 그 순간, 옆에 서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다. 고개를 들어 신호등을 바라보니 초록불이 켜져 있었다.
"어어, 초록불이다! 금방 갈게! 끊어!"
서둘러 통화를 마친 성규는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꽂으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맞은편에서 건너오는 사람들 중 유난히 걸음이 빠른 여자가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그의 옆을 휙 스쳐지나갔다. 우와…. 난 아직 횡단보도 중간도 건너지 못했는데…. 놀라움에 젖은 성규가 뒤를 힐끗 돌아봤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부지런히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또각또각 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하이힐 신었는데, 뭔 걸음이 운동화 신은 것 마냥 저리 빠르대…. 그리고 뭐가 그리도 바쁜 걸까.
혀를 내두르고는 가던 길을 마저 가기 위해 앞을 보는 순간이었다.
으아니!!! 쟤가 왜 저기 있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어디론가 숨으려고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성규였지만, 숨을 곳 없는 횡단보도 한 가운데서 무엇을 바라겠는가. 맞은편에서 오던 우현의 레이더망에 딱 걸리고 말았다.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는 이상, 숨을 곳이 전혀 없었다. 허둥지둥 거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자동차로 되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는 성규였다. 그런 그의 등에 꽂히는 한마디.
"성규썸써이씨!!!!!!!!!!!!!!!!"
이크…. 아무래도 그를 피하는 건 무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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