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글"김간, 투약 오더 바뀐 거 알죠?"
"네, 차트만 정리하면.."
"빨리 하고 보내줘요."
"네."
내가 고등학교때부터 꿈꿔왔던 간호사는 이렇게 막노동을 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투약시간 맞춰 투약하고 차트정리하고 의사쌤들 회진도는거 쫓아다녀야하는 노동직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백현이는 나와 같은 해에 의예과에 합격했고 나는 간호학과에 합격했으며, 4년뒤 바로 취직했던 나와는 달리 6년동안 수련의 과정을 거친 변백현은 드디어 인턴이 되어 의사쌤들 쫄따구 노릇을 하고있었다. 사실 병원생활을 더 오래한 사람은 나인데, 내가 변백현 오더에 따라야하는 건 항상 억울한 일 중 하나였다.
"그런데..김간, 오늘 퇴근하고 시간있어요? 데이트할까?"
"찝적대지 마세요, 제발."
"..김간..?"
"오늘 당직이신 주제에 말이 많으세요, 변선생님?"
"아 진짜 변선생님 하지 말라고,"
"그럼?"
"백현이 선생님."
오늘도 내 퇴근시간이 가까워오자 데스크에 와서 조잘조잘거리는 변백을 보고 옆에 있는 간호사들이 피식거렸다. 백현이 선생님, 아니..변백현 선생님도 괜찮고. 하며 혼자 김칫국을 후루룩 말아드시는 변백현은 한 쪽 손으로 턱을 괴고 예쁘게 웃어보였다. 어제 새로들어온 신입도 있는데 이게 무슨 개쪽이야. 백혀나.가라? 입을 꽉 다물고 조용히 얘기하자 그제서야 변백현이 허리를 세우곤 어깨를 살살 돌려 풀며 차트를 집어든다.
"퇴근하고 밥 같이먹어. 나 오늘 수제비 완전 삘이야."
"나 연속으로 나이트 두탕뛰었는데 좀 쉬면 안되겠니?"
"나 병원밥 질린단 말야."
알겠다알겠어..대충 대답을 해주곤 마지막 차트까지 정리해서 샌드시켜 놓곤 뭉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더니 눈도 충혈되는 것 같고...이게 꽃다운 이십대에 해야 할 일인가..부서질 듯한 다리를 이끌고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까만색 머리망으로 묶어놓았던 머리도 풀었더니 구불구불 머릿자국이 남았고. 한줄로 다시 묶은 뒤 가방을 챙겨들고 변백현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끝났어?"
"응, 셋 셀 동안 안 오면 그냥 집으로 간,"
-뚝,
그렇게 전화는 뚝 끊겼다. 나는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집어 누르며 삼분만에 도착할 변백현을 기다렸다.
-
데스크 앞에 서있는 날 보자마자 우다다다 달려오는 변백현을 보니 모르는 척을 하고 싶어졌다. 저러다 치프쌤한테 걸리면 또 까이지 또..
"너는 의사라는 게, 뛰다가 또 걸리려고."
"바빠, 지금 몰래 빠져나왔어. 얼른!"
정말로 바쁜 건지 내 어깨를 감싸안고 빠르게 걷는 변백현을 따라 병원을 나섰다.
오늘은 정말 피곤해서 쉬고싶은데..병원밥이 질린다는 변백현의 말에 마음이 약해져 결국 오늘도 지고 말았다. 부모님이 지방에 사시는 바람에 혼자 원룸을 얻어서 살고있는 변백현은 늘 내게 동정심유발 작전을 펼치곤 했다. 딱히 동정심유발을 하지않아도 아침일찍 당직실에서 나와 까치집을 지은채로 날 보는 변백현을 보면 절로 동정심이 치솟았지만. 집도 가까운게 왜 허구한 날 당직실에서 자냐? 집가서 편하게자지.하는 나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당직실이나 집이나 사람없는 건 똑같잖아. 차라리 당직실은 따듯하기라도하지- 라며 받아쳤던 변백현이 그렇게 안쓰러워 보일 수 없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점심 못 먹었어?"
"점심 먹으려고 컵라면 물 딱, 부었는데 응급떠서 오늘 아무 것도 못 먹었어."
"아침은?"
"안 먹었지. 오늘도 못 일어나서 세훈이가 깨우러왔었는데."
"또 혼났어?"
"으응. 뭐 한두번이야? 이젠 그러려니 하고 듣지."
아침 잠이 유독 많아 늘 아침마다 괴로워하던 변백현은 고등학생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그때도 변백현네 엄마가 일 나가시고 변백현은 늦잠자고 있으면 우리엄마가 직접 깨워서 학교에 보내곤 했었는데, 그 때는 옆집에 살았으니 부모님끼리도 친했으니까. 무튼 변백현네 아버지 사업이 안좋아지시는 바람에 변백네 가족들은 지방으로 내려가시고 변백현은 고3때부터 그렇게 자취를 시작했다.
며칠 굶은사람처럼 수제비를 흡입하는 변백현을 쳐다보고 있는데 변백현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아, 병원호출은 아니었음 좋겠다. 애 한창 먹고있는데. 내 바람과는 달리 변백현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아 우리 김간 밥 혼자먹으면 안되는데, 호출이다. 미안해."
"병원을 폭파시키든지 해야지."
"쇠뿔도 단김에 빼라던데, 오늘 폭탄 설치할까?"
"쓸데없는 소리말고 얼른 가. 당직실에 샌드위치 넣어놓을 테니까 내일 아침에 먹고, 수고요."
어, 장모님한테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끝까지 드립을 놓지않고 뛰어가는 변백현 뒤를 살짝 흘겼다. 누가 지 장모님이야? 병원근무하면서 의사남편은 절대 안만날거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는데.
피곤한 몸을 이끌고 택시를 잡았다. 오늘은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아 도저히 버스는 안되겠다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집이 가까운 덕에 금방 도착했고 아파트 정문 앞에 서서 고민하다가 마트로 향했다. 변백현이 자꾸 눈에 밟혀 이대로 집으로 가봤자 마음만 불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트에서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사서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변백현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날씨도 쌀쌀해지는데 난방이라도 돌려놔야 집에 왔을 때 따듯하게 잘테니.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자취방에 들어서니 언제 오고 안왔던 건지 냉기가 훅 끼쳐왔다. 이러니 매일 당직실에서 자는구나. 숨이 턱 막혀오는 냉기에 보일러를 틀어놓고 냉장고에 이것저것 채워 넣었다. 냉장고 옆에 수북히 쌓여있는 컵라면을 봉투에 쓸어담아 두번을 돌려묶었다. 컵라면 좀 그만 먹으라니까 말을 안들어. 봉지 채 간호사 스테이션에 가져다 놓을 심산이었다. 집에서 사라진 컵라면을 확인하고선 노발대발할 변백의 얼굴이 선했지만, 다 저 몸생각해서 그러는 건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