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 피.."
"왜그래? 다쳤어? 뭐하다가?"
"앰플 따다가 미끄러졌어요."
"으이구, 찢어진 것 같은데.."
피가 퐁퐁 솟아나는 손가락을 지혈해주던 수쌤이 내 손을 이끌었다. 쌤, 어디가세요? 반창고 저기 있는데..라며 말끝을 흐리는 내게 그게 반창고로 되겠느냐며 쌤은 마구마구 화를 내셨다. 급 쫄보가 된 나는 묵묵히 쌤을 쫓아 응급실까지 왔다.
앰플 따다 찢어졌대, 내 상태를 인턴쌤한테 전하는 수쌤의 옷자락을 톡톡 잡아당겼다. 쌤이 입모양으로 왜? 라고 물었고 내가 조용히 백현이 불러주세요, 하자 쌤이 못말린다는 듯 웃으셨다. 인턴한테 봉합받아도 되겠어?하고 웃는 수쌤을 보고 속으로 대학시절 엘리트였던 변백현에게 억지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 잘 해주겠지..
"변백현 인턴쌤 좀 불러주시겠어요? 둘이 동창이거든."
"아, 그 인턴 지금 잠깐 나갔는데. 저도 아는사이에요. 제가 할게요."
"어? 둘이 어떻게 알아요?"
"같은 대학 나왔거든요, 제가 1년 선배. 동아리도 같이했었는데."
준면 오빠구나, 목소리를 듣고 내가 커튼 뒤로 빼꼼 얼굴을 내밀자 오빠가 손을 슥슥 흔들어 보였다. 대학 때 꽤 친하게 지냈던 오빠였는데, 사실 봉사동아리 같이하면서 무진장 친해졌었고 변백현이 많이 아니꼬워했던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다쳤어? 마취하고 해야겠지?"
"그럼 생살을 바느질하려구요?"
"말하는 것 하고는..아이구, 많이 찢겼는데?"
"응, 피나는 거 봐. 근데 변백현은요?"
"아까 나갔는데, 웬 간호사랑 갔다길래 넌 줄 알았더니."
"아아, 그 작고 앞머리 없는애?"
"얼굴은 못봤고. 일단 손 부터 봐."
응급실은 정신없이 바빴고, 마취될 때까지 기다리라며 날 배드위에 앉혀놓은 오빠는 응급환자를 보러 떠나버렸다. 내가 유독 바늘로 찌르는 모든 것을 싫어해서 다른 인턴 부르지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놨더니 정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빠가 많이 바쁜가,3분 정도 흘렀을까, 커텐을 걷어 젖히는 소리에 오빠가 왔나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변백현이 서있었다. 한 쪽에는 잔뜩 울상인 이지은을 매단채로.
"또 다쳤어, 또 덤벙댔지. 내가 너 때문에 진짜..일단 어디 봐. 마취 한거야?"
"보긴 뭘 봐. 김준면 불러."
"형 바쁘잖아, 아 좀 줘봐! 봐야 뭘 어쩌든지 할 거 아니야!"
지 친구는 다쳐서 있는데 기껏 찾으니까 여자랑 놀러나가? 괜한 오기가 생겨 변백현을 죽일듯이 째려봤다. 사실 여자랑 놀러나갔다는 것 보다는 내가 그렇게 얄미워하는 이지은이랑 나갔다는게 제일 화가 났다. 초딩도 아니고, 친구 뺏긴거에 질투를 느끼는 내가 우스웠지만 부글부글 끓는 속내를 숨길 수 없었고 변백현은 제 말을 듣지 않는 나를 답답해하며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어떡하지, 응급쌤 안계셔요? 제가 나가서.."
"뭘 불러, 얘 어차피 나 아니면 못해."
이지은이 그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변백현을 강아지처럼 쳐다봤고 변백현 얼굴에는 이미 짜증이 가득했다. 뭐 때문에 짜증이 난건데, 내가 짜증을 내야지 왜 니가 짜증을 내고 앉아있어. 나도 괜한 오기를 부리며 끝까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결국 변백현이 내 손목을 거머쥐었고 나는 피범벅인 손으로 변백현의 얼굴을 쓸어버렸다.
"야, 손!!"
"..아파, 짜증나."
아, 엄청 아프네. 마취를 했는데도 쓸려버린 상처는 심각하게 따가웠고 한 쪽 볼에 핏물을 묻힌 변백현은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마취를 한거야, 안 한거야. 괜히 김준면을 씹으며 배드에서 내려와 방심하고 있는 변백현의 손을 내팽겨치고 김준면을 찾았다.
"김준면!"
"어, 어?너 왜 그러고있어?"
"오빠가 변백현 불렀어?"
"어, 니가 백현이 찾길래.."
"근무시간도 아닌 애를 왜 부르고 그래."
"알겠어, 알겠어. 손 움직이지말고, 여기 앉아봐."
순식간에 얼굴이 피범벅 된 변백현은 단단히 뚜껑이 열렸는지 씩씩대며 내 뒤를 쫓아와 손목을 낚아챘다. 형, 제가 해요. 짜증스럽게 말하는 변백현에게 오빠는 조용히 나가라고 말했다. 낮은 목소리에 변백현이 움찔하는가 싶더니 아, 시발. 조용히 욕을 내뱉으며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저 새끼 진짜 욕하는 거 한 번 잡아서 선생질을 하든지 해야지.
미친듯이 엄살을 부리며 봉합을 마친 후 손에 붕대를 둘둘 감고 응급실을 나왔다. 드레싱하러 내일 또 외래에 들르라는 오빠의 당부를 예, 예. 하며 건성으로 대답하곤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손이 불편해 한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려니 그것도 불편해 짜증이 더욱 치솟았다.
부재중 전화 5통과 수없이 밀려있는 카톡을 확인하니 죄다 변백현이다. 카톡에 1이 없어지자마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왜?"
"너 지금 어디야?"
"병원."
"잠깐 나 좀 봐."
"올라가야해."
"할 말 있어.."
"나 근무중이야."
"잠깐이면 돼, 정문 앞으로 와."
뭔데 자꾸 오라가라야. 옷자락에 묻은 핏자국을 손으로 문지르며 정문 앞에 도착하니 변백현이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본다. 뭐, 어쩌려고, 하는 눈빛으로 대꾸하면서 변백현 정강이를 퍽 차니 내 손목을 잡아 이리저리 돌린다. 붕대때문에 보이지도 않는데 뭘 본다고.
"김준면이랑 말도 섞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왜 또 그러는데? 오빠가 너한테 뭐 잘못한거 있어?"
"김준면 쫓아다니는 거 싫다며?"
"그게 뭐,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 오빠밖에 더 있어?"
"그래서 연애라도 하시게요?"
"어. 그러려고."
"미쳤어? 너 의사랑 연애 안한다며."
"이거 말하려고 불렀어? 힘이 남아도세요?"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다시 들어가려는 나를 변백현이 급하게 돌려 세웠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다 내가 다시 들어가려하자 재빨리 입을 뗀다.
"나, 이지은이랑 나가서 밥먹고왔어."
"알아."
"걔가, 날 좋아한다고 그랬어."
"만나든지."
나를 보며 조심스레 말한 변백현의 얼굴이 묘한 표정으로 물들어 간다. 진짜 여우같은 년, 결국 변백현 채가려고 작정했구나. 고개를 떨구고 뒷통수를 벅벅 긁던 변백현이 순식간에 내 손을 잡아 끌어 품에 넣고 내 정수리에 턱을 갖다 대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변백현을 밀어냈지만 변백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아."
"..."
"이제 모르는 척 좀 그만 해."
"..."
"몇 년째 이러고 있는거야, 내가 의사라서 그래?"
변백현이 피곤에 절은 목소리로 나긋나긋 하게 말해왔다. 변백현이 나를 더이상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몇 달 전 부터 눈치챘었는데. 나는 모른 척을 했다. 그게 편했으니까. 나는 끝까지 친구라는 벽을 내세워 변백현과 나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냥,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 10년 가까이 공들인 사이가 무너져버릴까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다고 변명하자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변백현 입에서 나온 몇 년이라는 말이 머리를 세게 치고 지나가 버렸다. 몇 달 간 니가 나를 더이상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은 알았지만, 몇 년 동안 니가 날 마음에 담아두었던건 몰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