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집안은 분주했다. 모두들 재환의 남은 짐을 옮기기에 바빴고, 남은 가구들은 재환이 다시 올 때를 대비해 남겨둔다고 했다. 이대감댁 장남이 담양으로 갑작스레 떠난다는 소리에 동네 사람들 모두가 집주변으로 몰려들어서 재환은 꼼짝없이 사이에 갇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중이였다. " 학연아! 큰도련님 이제 가신다! 이리 나와! " 원식의 우렁찬 목소리는 멀리 떨어진 재환의 방에서도 너무나 크게 들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실감나지않던 이별. 그이별이 이제 코앞까지 덮쳐온다. " 안녕히 다녀오세요 큰도련님. " 21년동안 정이 든 집안 사람들 모두와 인사를 나누는 짧은 줄의 끝에는 학연이 서있다. " 조심히, 다녀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 학연의 목소리가 먹먹해진다. 아무렇지 않은듯 재환또한 웃으며 그동안 고마웠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나눴지만, 그 속엔 둘만 알고 있을 아린 눈빛이 담겨있었고, 따스한 온기가 서려있었다. " 얼른 들어가보세요. 저는 이제 가겠습니다. 홍빈이 너도 아버님 어머님께 더 잘하고. " " 그래. 다치지말고 조심해서 지내거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연락하고. " " 예. " " 몸 건강히 푹 쉬세요 형님. " 홍빈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후 인사를 끝마친 재환이 가마에 올라탔다. 이제 정말, 이별이었다. { 무소식이 희소식 입니다. 아버님께서 구해주신 이곳도 무척이나 넓고 좋습니다. 이곳에 있으면 정말 아무 것도 안하고 숨만 들이쉬어도 달콤한 공기가 코를 간지럽힙니다. 아들걱정은 마시고 언젠가 돌아올 터이니 기다리지도 마세요. 보고싶습니다. } 어느새 눈은 녹고 벚꽃이 피는 봄이다. 재환없이 맞이하는 첫번째 봄. 그것은 그 의미도, 아픔도 남달랐다. " 나 오늘 아파서 그런데, 큰도련님방 청소 좀. 대충 걸레질만 하면 돼. " " 응. 쉬어. " 참 오랜만에 걷는 길이였다. 재환이 떠나간 뒤, 일부러 재환을 더 잊으려 재환과 함께하였던 그 모든 것들은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던 학연이였다. " 오랜만. 이네요. " " 얼른 연아- 하고 부르셔야지요. " 사람의 손길이 끊겨 재환의 익숙한 향기를 아직 갖고있는 방은 숨을 들이쉴때마다 재환을 불러온다. 겨우 마음을 돌려 다시 바닥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을때였다. 재환이 가져가지않은 병풍 뒤로 까만것이 눈에 들어온다. 먼지겠거니 하고 나가려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꼭 저런걸 놔두면 두고두고 후회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는 순간. 잊고있었다. 재환이 했었던 말을. 이내 달려간 병풍 뒷편에는 고이 접어둔 종이와 함께 뽀얀 먼지가 앉은 돌멩이가 있었다. 재환이 주었던 돌이였다.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던 그 돌은 그곳에 예쁘게 앉아있다. 툭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애써 끕끕거리며 눈물을 참고 종이를 열어보았다. { 연이 보거라. 네가 이걸 언제쯤 볼 지 모르겠어서 글을 못 쓰겠구나. 벚꽃 만발한 봄일지, 소화가 피는 여름일지, 낙엽이 지는 가을일지, 아님 눈오는 겨울일지. 나는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너보다 편하게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을 먹고. 그렇게 살겠지. 소식이 없다고 죽은건 아닐터이니 또 질질짜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거라. 곧 갈테니. 어디선가 이런 말을 본 적이 있어. 인간이 잊지 못할 슬픔은 없다. 인간이 견디지 못할 아픔은 없다. 그러니 미련도 슬픔도 가질 것이 없다. 그런데 난, 지금도 네가 너무 보고싶다. 그래서 자꾸만 아프다. 이걸 쓰는 내내 웃는 니얼굴, 우는 니얼굴, 빨개진 니얼굴, 살이 쪽 빠진 니얼굴. 온통 네 얼굴만을 상상하며 편지를 쓴다. 같이 벚꽃보기로 했는데. 못보네. 연아. 보고싶어. 사랑해. } 학연의 눈가에 촉촉히 눈물이 맺혔다. 너무도 시린 사랑은, 그렇게 자꾸만 떨어진 둘 사이를 찌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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