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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따로 올리기에는 구독료를 받기엔 너무 짧고 죄송스럽기 때문에 모아서 올려요!

레이첸 흥해라~

 


 

더보기 [레이첸] 나쁜사람

 

 

 

 

[레이첸] 나쁜사람 

 

 

W.실핀 

 

 

 

 

 

"....." 

 

 

 

도어락을 해제하고 들어선 집은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더듬 더듬,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불을 켠 레이가 소파 위에 고양이 마냥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첸을 발견하고는 작게 웃음지었다. 오른쪽 보조개가 깊이 파이며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매력적이면서도 담백한 미소였다. 

 

 

 

"밧줄은 이제 금방 푸네." 

 

 

 

선해 보이는 미소와는 사뭇 다른 날이선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악의감 없는 듯한 고운 목소리. 어딘가 어설픈 것 같기도 한 말은 한국어였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어를 뱉는 레이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소파 위에 앉아 있던 첸이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레이와 시선을 마주한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쁜 아저씨, 왔어요?" 

 

 

 

하고 말하는 첸의 입꼬리는 위를 향해 올라가 있었지만 그에 따라 호선을 그린 듯한 두 눈동자는 싸늘한 빛을 띄기만 했다. 뭐가 그리 우스운 지는 몰라도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던 첸이 소파위에서 가볍게 내려와 레이를 마주보고 섰다. 곧게 뻗어 고운 목덜미에 문신이라도 되는 마냥 자리를 잡고 있는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비틀비틀 걷는 첸의 모습을 더욱 아찔하게 보이게 했다. 레이는 손을 뻗어 첸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예쁘다, 이제는 가출도 안하고." 

 

 

 

마치 첸이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듯이 말을 뱉는 레이에 첸이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시 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나가던, 안이던 지옥은 마찬가지니까요." 

 

 

 

우리 나쁜 아저씨가 만들어준, 나의 지옥. 

 

울것 같은 표정으로 웃음짓는 첸을 보며 레이는 그 무엇보다도 선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 

 

 

 

 

중국 어느 곳에서나 레이는 성스러운 존재 처럼 여겨졌다. 날개 없는 천사. 대부분의 사람들이 레이를 칭하는 말이었다. 어릴적에는 아역 배우로, 커서는 배우를 더불어 뮤지션적인 모습까지. 활발한 활동들로 인해 얻는 인지도는 물론, 틈틈히 해오던 봉사활동과 바른 성품, 치솟는 인기에도 단한번도 부리지 않는 자만. 이 들을 비롯한 모든것들이 중국 전역, 아니 전세계적으로 레이를 유명인사, 세계적 스타의 자리로 가져다 주었다.  

 

 

 

"레이, 내일은 오후에 싸인회 한번 있으니까. 오늘은 들어가면 푹 쉬어." 

"네, 형. 형도 푹 쉬시고 내일 뵈요." 

"오냐-." 

 

 

 

꾸벅, 운전석의 매니저에게로 가볍게 인사한 레이가 자신의 벤에서 몸을 내렸다. 문을 밀어 닫고, 제 가방을 챙겨 멘 레이가 천천히 느긋하게 제 발걸음을 옮겨 저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을 확인하는 레이가 피로에 젖은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번 쓸었다. 손바닥으로 닿아오는 푸석한 피부의 느낌은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았다. 띵- 제 층에 도착하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레이가 힐끔, 엘리베이터 안을 돌아 보았다. 이제 막 문이 닫혀가는 엘리베이터는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집어 삼킬 듯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레이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현관을 향했다. 현관문 앞에 멈춰선 레이가 도어락을 풀기위해 손을 올렸다가 다시금 제 손을 끌어내렸다. 이유는 없었다. 레이가 멍하니 도어락을 바라보다가 한숨 쉬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상처받은 이가 저를 반길 것이었다. 아니, 반기는 척 할 테지. 

 

 

 

 

"하아-..." 

 

 

 

 

바람이 찼다. 입김을 불자, 허연 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져 내렸다. 레이는 잠시 손을 들어 제 머리를 짚었다. 감기 기운이 도는 듯 머리가 약간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아직은 차마 집안으로 발을 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레이는 문에 기대어 주저 앉았다. 하루가 '연기'로 이루워진 생활이었다. 무엇이 본래의 자신인지도 몰랐다. 어릴적부터 철저히 본성을 숨기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젠 무엇이 옳은 것인지 구분하지도 못하게 된 것 같다. 레이가 작게 기침을 토했다. 진짜 감기라도 걸리려나, 내일은 매니저형에게 약을 사와달라는 부탁을 해야 겠다는 시덥잖은 생각을 마지막으로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는 천천히 손을 뻗어 도어락을 풀었다. 집안은 평소와 같이 여전히 어두웠다. 저 어둠속에서 상처에 갇혀진 아름다운 생명체가 끝없이 레이를 혐오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레이는 제가 잘못 된 시작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끝내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그래서 점점 더 옭아매기만 할 뿐이었다. 옭아매고 옭아매면, 그 끝은 행복하게 끝이 날 것이라는 허황된 바램이 컸다.  

 

 

 

 

"나쁜아저씨, 왔어요?" 

 

 

 

 

웃음지은 얼굴에서는 따뜻함 따위 배어 나오지 않는다.  

 

 

 

 

"예쁘다, 이제는 가출도 안하고." 

 

 

 

 

그렇게 또 연기를 했다. 

 

 

 

 

"나가던, 안이던 지옥은 마찬가지니까요." 

 

 

 

 

우리 나쁜 아저씨가 만들어준, 나의 지옥. 

 

서로에게 낫지못할 상처를 남기면서도, 레이는 연기를 그만 둘 수 없었다. 

 

 

 

 

 

- 

 

 

 

 

 

첫 한국 방문은 성공적이었다. 레이는 홀로 갖게된 자유시간을 만끽 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이미 해가 진 거리는 어두웠지만 여전히 한국만의 생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레이는 그곳에서 그 어떤 조명들, 그리고 사람들 보다도 밝은 빛을 뿜어내는 듯한 첸을 보았다. 그순간, 마음 속 깊이 부터 끓어오른 알 수 없는 감각이 그동안 철저히 자신을 [겸손하고 성품이 고운 완벽한 연예인] 이라는 틀에 가두워 놓았던 레이를 자극했고, 레이는 처음으로 느낀 그 감정을 피하려 들지 않았다.  

 

 

 

 

"...루한, 나 좀 도와줘." 

-'레이? 네가 나한테 왠일로 먼저 연락을 다해?'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드디어, 미쳤구나." 

"난 진지해." 

-'그래그래, 하기사 너가 한순간도 진지하지 않았던 적은 없지. 그래서 누군데?' 

"몰라, 키는 아마 민석 정도 될꺼야. 귀여워, 밝아." 

-'야, 그렇게만 말해주면 내가 어떻게 찾아?' 

"중국어를 배웠나봐. 한국인인거 같은데, 친구들이 중국인이야.첸? 첸이래. 첸." 

-'너 지금 옅듣기라도 하고 있는거야?' 

"응." 

 

 

 

 

수화기 너머로 어이없다는 듯한 루한의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레이는 그런 루한의 비아냥 대는 웃음에도 기분 나빠 하기는 커녕 오히려 루한을 재촉할 뿐이었다. 루한, 어서. 급해. 나 내일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단 말이야. 데리고 가고 싶어. 레이의 말에 수화기 너머로 루한이 기다리라는 느긋한 답이 돌아왔다. 사람을 써서 네 집으로 이송할게. 댓가는? 

 

 

 

 

"5. 충분하지?" 

-'역시, 기부천사.' 

"결식 아동 기부금으로 보내려던 돈의 반이야. 별로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끊어. 며칠 뒤면 안전히 배송 될테니까.' 

"다치게 해선 안돼, 절대로." 

-'걱정마. 내 솜씨 몰라?' 

 

 

 

 

응, 몰라. 짧게 대답한 레이가 이내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미 제 친구들과 거리를 걷던 첸은 저멀리 사라져 가며 뒷모습만을 보일 뿐이었다. 얼굴을 더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레이가 입맛을 다셨다.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에 몸이 후끈 달아 오르는 기분이었다. 어서 품에 안아 보고 싶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기대는 곧 환희에서 절망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 

 

 

 

 

 

첸은 레이에게 독보적인 존재였다. 모두가 천사라 받드는 레이를 '나쁜사람'이라 일컷을 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레이를 혐오하고, 또 혐오했다. 레이는 그점이 가슴 아프면서도 좋다고 생각했다. 바램대로 첸은 자신에게 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과는 다르게 레이를 바라봐 주었다. 다만 그것이 혐오라는 것이란 점을 제외하고는. 레이는 사랑을 원했다. 감추고 바꿔온 자신을 되찾고 싶었다. 지금의 사회적 자리가 무너지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첸은 레이를 혐오했지만 첸은 레이에게 빛이었다. 빛. 감옥 속에서 맞이한 한줄기의 빛.  

 

 

 

 

"사랑해." 

"......" 

 

 

 

 

백번을, 천번을 말해주어도 모자란 말. 진심을 담아 전해도 진심으로 전해질 수 없는 말. 첸은 레이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 그저 제 아랫입술을 꽉 문체 말을 참을 뿐이었다. 레이는 첸의 마른 몸을 더욱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말랐어, 먹고 싶은건 먹고 가지고 싶은건 말해.  

 

 

 

 

"...난, 나가고 싶어요." 

"....." 

"부모님이 보고 싶고, 친구들이 보고 싶고, 학교에 다시 가고 싶어요." 

"..미안해, 미안해." 

 

 

 

 

하지만 제발 나를 떠나지말아줘. 나를 미워해도 좋아, 제발 곁에만 남아줘. 부탁이야, 첸. 제발. 

 

레이의 목소리 끝이 흔들렸다. 첸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레이가 첸의 몸 위로 제 몸을 겹쳐 쓰러졌다. 첸은 그저 눈을 지긋이 감았다. 제 볼가를 적시며 흐르는 물기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첸은 그저 제 옆의 레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기를 기다렸다. 자신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자가 잠들기 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어코, 레이가 잠이 들었을때, 첸은 제 윗몸을 일으켰다. 도망 가려고 시도 하지 않았다. 첸은 그저 자신이 누워 있던 자리의 옆에서 곤히 잠든 모두가 '천사'라고 일컫는 남자의 몸이 불덩이 같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약은 먹일 자신이 없어서 찾는 것을 포기한 첸이 하얀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 물기를 꼭 짜내고는 레이의 이마 위에 두었다. 답답해 하겠지만 목 끝까지 이불하게 덮여주고, 간혹 가다가 작게 끙끙 앓는 레이의 어깨께를 토닥이며 첸은 단 한순간도 레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미워할게요." 

"......" 

"끝까지, 미워하고 아저씨한테 상처 입힐께요." 

"......" 

"아저씨가 나를 이제 놓아줄때 까지. 그때까지만 참을게요." 

"......" 

"나를 사랑한다는 말," 

 

 

 

 

믿어줄게요. 

 

길고도 긴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단 한사람에게만 나쁜사람과 

그 사람의 빛이 된 사람. 

 

서로를 옭아매고 상처 주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 진심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모순되게 그들은 서로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쩌면 상처가 곪다 못해 감각까지 무뎌져 버린 걸까, 애증의 관계로 이어져 버린 사이에서 그들은 결국은 함께였다.


 

더보기 [레이첸] 1995년 6월 29일

 

 

 

 

[레이첸] 1995년 6월 29일 

 

 

W.실핀 

 

 

 

 

I never think that people die 

They just go to department stores. 

 

(나는 결코 사람들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백화점에 갈 뿐이다.) -앤디 워홀-

 

 

 

 

 

 

 

 

 

 

/녹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게는 18년이 지나도 버리지 못한 낡고 촌스러운 옷이 있습니다. 38살 이라는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옷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샘이 고장나기라도 한 듯이 주체없이 울기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번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얼룩이 진 옷은 이래뵈도 백화점에서 꽤나 잘 나가던 브랜드의 옷입니다. 아내도, 제 아이도 제가 그렇게나 그 옷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처음으로 이 옷에 관하여 말을 꺼내 보려고 합니다. 95년도 6월 29일 누군가들의 삶이 마침표를 찍던 날, 애처롭게 끝이 나버린 나의 첫사랑을 추억하면서. 

 

 

 

 

- 

 

 

 

 

먼저 제가 소개할 인물은 '그'로 칭하겠습니다. 1995년도 저의 나이는 고작 스물 이었고, 그는 저보다 한살 위인 스물 하나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특이하게도 중국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그는 의학을 공부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당시 줄곧 제가 다칠때면 언제나 그의 손을 거쳐 상처를 낫게 하곤 했으니까요. 그는 전체적으로 매우 잘생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당시의 유행과는 상관없이 멋없게 생머리로 내린 머리칼도, 하얗기만 한 피부도, 웃을때면 패여 들어가는 보조개도. 전부 그의 선한 인상을 만들어주는 일부분 이었습니다.  

 

 

나와는 확연히 다른 그의 모습에 나는 그를 꽤나 여러 의미로 동경했습니다. 아니, 18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솔직히 말하도록 해야 겠지요. 나는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역시 저를 매우 사랑했었습니다. 그래요, 그와 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대학교에서 만난 그와 나는 금새 서로의 마음을 깨닫고는 그 어떤 사랑 보다 뜨겁게, 그러면서도 순수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내나이, 스물. 첫사랑인 그는 내 인생의 전부였고, 그는 유일무이 하게 중국어에 능숙했던 나와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자신의 삶을 나로 채워 갔었던 듯 싶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괜시리 뿌듯하네요. 비록 그는 지금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가난했습니다. 물론 나도 형편은 좋지 않았죠. 우리는 서로서로를 도우며 사랑을 키워 갔습니다. 서로에게 큰 선물을 해주지 못하는 것을 가장 안타까워 하면서도 소소한 선물들을 나누면서 행복함에 웃는 것이 유일한 낙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유행에 따라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저절로 유행을 따라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서로면 행복하고 서로면 충분 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제가 후회하고 후회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겠다는 것을 차마 말리지 못했었습니다. 그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가 나의 선물을 사려고 했다는 것을 그당시에는 몰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위해 종종 그의 일을 도왔습니다. 그가 괜찮다고 해도 나는 그와 같이 있고 싶어 오히려 더 끈질기게 그의 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6월 29일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나와의 약속이 있기 전에 잠시 들릴 곳이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물론 언제든지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어코, 백화점을 갔습니다. 

 

 

다들 알고 계시죠. 

 

 

[삼풍 백화점] 

 

 

1995년 6월 29일. 수많은 사상자들을 낳았던 사건. 삼품백화점 붕괴 사건. 제가 이제까지 서술한 그는 삼풍 백화점 붕괴의 피해자 입니다. 네, 그는 그날 죽었습니다. 제게 줄 예정이었던 선물을 꼭 끌어 안은체로, 그렇게 그는 떠났습니다.  

 

 

아, 또 눈물이 나려 하네요. 도무지 그날의 그 모습은 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삼풍 백화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을 찾아 갔을때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습니다. 주변에는 마네킹같이 잘린 시체들이 늘어져 있고 하늘엔 방송국 헬기, 그리고 수많은 기자들. 그리고 그 정신 없는 상황에서도 구조를 해내어가는 소방대원들. 처음에 저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눈앞이 핑 도는 기분이 들었고 애써 정신을 차리려 해도 쉽지 않았습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가 그 건물 더미 밑에서 차게 식어가고 있을 것 같아서 다리에 힘이 풀렸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주변에는 저와 비슷한 처지 인듯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나도 그들도, 그저 진득히 쌓여 있는 돌덩어리들을 카트에 실어 나르는 일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가 살아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수많은 깔려 죽은 시체들을 눈으로 마주해도 그만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분명히 이 돌틈들 사이 어딘가에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있다가 구조대원들의 도움으로 밖으로 나와 나를 꼭 끌어 안고 우는 나를 어르고 달래줄 것이라고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래서 한 발자국도 사건현장을 벗어 날 수 없었습니다. 그를 한시빨리 찾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당시 사건현장은 상당히 복잡했습니다. 교통 정리는 제대로 되지 않아 차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서 생명이 위독한 사람들을 실은 구급차 마저 쉽게 병원으로 향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속에 죽어가는 그들을 보며 그를 떠올렸습니다. 그가 있었다면, 이들중에 몇몇은 더 목숨을 구했을 지도 몰랐을 터였기 때문에. 지하로 까지 내려가는 구조 작업은 쉽게 진행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구조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같은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스무살의 새내기 대학생이었고, 백화점 붕괴로 인해 묻혀 버린 사랑하는 연인을 찾아 헤매이는 사람이었을 뿐이니까요. 구조대원들이 위험하다 다가오지 말라 경고해도 나는 그들을 끝까지 따라 시신들을 확인했습니다.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시신들을 보며 그들이 좋은 곳으로 갔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시신들 중에 그가 없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얼마 안가 부서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를 찾았던 것이었죠. 그는 다른 시신들에 비해선 멀쩡한 편이었습니다. 사지가 절단된 것도 아니었고, 온몸을 철근이 뚫고 지나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는 몸을 웅크린체로 죽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품안에는, 의식을 잃은 작은 꼬마 아이와, 포장된 선물 봉투. 구조대원들은 죽은 그의 품속에 안전하게 기절해 있는 아이를 꺼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그의 시신을 옮기고 아이를 구출했습니다. 나는 밖으로 옮겨서 하얀 천이 덮히는 그의 모습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믿을 수 없었습니다. 구조대원이 그의 시신 곁에 그가 품고 있었던 선물 봉투를 내려놓고는 내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의 신분을 알고 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구조대원과 시선만 맞추다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곤 차오르는 절망감과 슬픔에 잘 나오지도 않는 말을 억지로 내뱉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이예요, 이름은 장이씽. 나이는 21. 중국 후난성 창사 출신, 유학생-'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지만 두서도 없이 단어들을 마구자비로 내뱉어 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나의 말에 구조대원은 내가 그의 유족자인것을 알고는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 주고는 다시 구조 현장으로 떠나갔습니다. 그후로 나는 아마 망연자실에서 울기만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핏기없이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타고 흐른 듯 싶은 핏자국이 미웠습니다.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어주어야 할 두 눈이 힘없이 감긴체 더이상 나를 마주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의 웃음과 웃을때면 파여 들어가는 보조개를 볼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딱딱하고 차갑게 굳은 그의 손을 감싸 쥐자 다시 한번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따뜻했던 손이, 얼음장 같이 차가워져 있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그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다행인 거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당시 사상자는 천명이 넘었었고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시신들은 더더욱 많았기때문에 나는 그나마 행운이었던 것입니다. 아, 하늘은 참 무심하시죠. 이런 행운을 주실 빠에는 그를 어떻게든 살려 두어서 나와 함께 있게 만들어 주시지.  

 

 

한참을 울다가 나는 그제서야 그가 꼭 안고 있었던 선물 봉지를 확인했습니다. 그가 흘린 피로 얼룩진 포장지 속에는 그의 피로 얼룩진 파아란 티셔츠와 끝이 약간 피에 젖은 하얀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습니다.  

 

 

[ 사랑하는 첸에게 

항상 잘해주지 못해도 

미워하기는 커녕 고맙다고 해주는 

첸이 있어서 나는 행복해 

사랑해 첸. 

정말로 많이 많이 사랑해 

-1995.6.29 레이-  ] 

 

 

그 편지 속 내용이 너무나도 평소의 그와 같아서 마음이 찢어 지는 것 같았습니다. 편지를 쥐어 들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추하게 울다가 나는 그가 나중에 남긴 듯한 작은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날려 쓴것 같아 보이는 작은 글씨였습니다. 

 

 

[ 천장이 무너졌어. 

기다리고 있을텐데 

어쩌면 못 갈수도 있겠다. 

첸은 약속 안지키는거 싫어하는데 

미안해, 이번 한번만 봐줘. 

사랑해 첸. 

내가 없어도 너는 잘살아야돼 

보고 있을 ] 

 

 

무거운 콘크리트가 짖누르는 상황에서도 저를 생각하면서 마지막 메모를 남겼을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을 주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상황을 이렇게 까지 끌고간 사람들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편지만 부여잡고 울었습니다. 차마 제대로 끝마치지도 못한 문장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마음이 미워지고 멍이 들어도 이렇게 까지 아프지는 않을텐데.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을텐데. 

 

 

 

 

 

- 

 

 

 

 

네, 이제 제 이야기는 끝입니다. 끝이 좀 어색한가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는 모든것이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죠. 이제는 저도 마음을 놓고 싶습니다. 18년 동안 잡은체 놓아주지 못했던 첫사랑을 이 녹음을 마지막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레이형." 

 

 

 

먼 훗날에 제가 형의 곁으로 돌아갈때까지, 하늘에서 저를 바라보며 기다려 주세요. 

 

 

 

/녹음이 종료 되었습니다. 

 

 

2013년의 어느날에, 첫사랑을 놓아주면서. 

 

-첸  

 

 

 

 

 

 

= 

소재는 1995년도 6월 29일날 발생했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이때는 태어나기도 전이라 알고 있는 지식이 부족해서 

이리 저리 찾아 보았지만 아무래도 지식이 부족한듯 싶어서 

꾸며낸 이야기가 많습니다. 

뭐 아무리 그래도 넣은 내용도 별것 없으니까. 

브금은 재생이 안되길래 넣는거 포기. 

설정은 현재(2013년)의 종대가(38살) 1995년도 당시의 

얘기를 녹음해 두는것. (첫사랑인 이씽을 놓아주기 위해) 

이씽은 종대보다 한살 위, 중국인 의학 유학생이었음. 

95년도 삼풍 백화점 붕괴로 인해 죽음 (종대의 선물을 사고 나오려다가 길을 잃은 아이를 도와주려다가 사고를 당함. 아이는 안전하게 보호했다고 함.) 

대충 이런 분위기 라고 한다. 

이번일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에 대해 찾아 보면서 

제발 다시는 이런 사건이 벌여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소소한 바램이 생겼다. 


 


 

더보기 [레이첸] 누구나 성장통을 겪는다.

 

 

 

 

[레이첸] 누구나 성장통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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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나에게 벌여진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시시한 악몽에 불과하다고 단정 지어 버리고 싶었다. 무심결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붉다. 분명히 어제까지는 푸르렀는데. 


나의 삶은 파괴되었다. 치료 받을 수 없다. 더럽혀진 몸은 깨끗해 질 수 없다. 붉어진 하늘에게 물었다. 왜 하필 나였는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예상 했었던 반응이지만 유난히도 하늘이 저주 스러웠다. 


왜 나의 하늘은 붉게 변하였는가. 이유는 내가 죽은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멍하니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어 서서 하늘만 올려다 보았다. 난 내가 저주 스러워.


그냥 죽어 버릴까? 순간적인 충동이 들었다. 두손을 들어 내 목을 압박했다. 간혈적인 기침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힘을 줄이진 않았다. 그냥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다.



"안돼요!"



누굴까. 생기 없이 식은 눈동자를 움직여 나를 부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얀 사람이구나.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는 다르겠지, 그의 하늘은 푸를 것이고 그는 깨끗하겠지. 죽어가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가고 입꼬리는 그것과 상반되게 위로 올라간다. 지금 내 모습 많이 추하겠지? 상관은 없다. 이대로 마지막을 맞이 한데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뭐하는 거예요!"



이제 들어보니 하얀 남자의 말이 어눌하다. 외국인이라도 되는가 보네, 그가 다가오는 것이 나쁘지 만은 않았다. 그는 나를 살리겠지? 아니 그가 나를 지금 이순간 구한다고 해도 나는 죽겠지만.



"이러시지 마요. 이러면 아파요. 목, 아파요"



그의 고운 손이 목을 압박하고 있는 내 손을 힘으로 떼어내었다. 우습게도 내 손은 그의 힘만으로도 내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럽게 숨이 쉬어진다. 기침이 튀어 나오고 목구멍이 따가웠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처음보는 남자의 어깨를 부여 잡고 기침을 토했다. 남자는 말없이 내게 어깨를 빌려 주었다.



"괜찮아요? 왜, 왜 그랬어요? 그건 나빠요."



말없이 그저 그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는 하얀 피부를 가진 만큼이나 순수함을 띄고 있었다. 쌍커풀도,보조개도. 그는 아름 다웠다. 그는 생기를 띄고 있었다. 그는 살아 있었다. 



"나는 죽어야 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예요."
"나는, 살아선 안되요."



그냥 그에게 그렇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더럽구요, 나의 하늘은 붉은 색이예요. 나는 죽은것이나 다름 없어요. 그에게 쏟아지듯이 말을 내뱉으면서 나는 그가 외국인이라 내 말을 못 알아 들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아무말 하지 않고 한참이나 나와 시선을 맞춘체로 내 말을 들어줄 뿐이었다.



"당신은 깨끗해요."
"....."
"이름이 뭐예요?"
"레이, 레이 이예요."
"레이. 나는 당신과는 다를꺼예요."
"당신은, 이름 무엇이예요?"
"김종대."
"종대, 종대는 다르지 않아요."



그의 눈빛은 강인하고 우직했다. 이래저래 내 이상향의 모습을 갖춘 그가 부러웠다. 더듬 더듬 서툴은 발음으로 말을 이어 가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내 마음을 흔들어 버릴 것 같아 불안했다.



"나는 종대가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이들은 나를 더럽다 생각해요."
"종대는 더럽지않아요."
"레이는 나에 대해서 몰라요."



그가 불현듯 말을 멈추었다. 나도 그를 따라 입을 다물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볼께를 쓸어 내렸다. 물기가 그의 손을 적셨다. 나는 그제서야 아직까지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종대 잘 몰라요."
"....."
"하지만 종대는 더럽지 않아요."
"....."
"내가 보기에는 종대는 아주 좋은 사람이예요."
"..레이,"
"그러니까 죽지마요."



그가 나의 몸을 꼭 안아 주었다. 나는 반항 없이 그의 품 안에 안겼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려 보냈다. 그는 어깨가 젖어 감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작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고마워요, 레이. 


가로등 빛이 켜졌다. 어둠이 가라 앉았기 때문일까. 그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 내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붉은 하늘이다. 여전히 붉은 하늘.


근데 어째선가, 가로등 빛 때문일까?


나는 붉은 하늘 저 멀리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안좋은 일을 당해 삶의 의욕을 잃고 죽고 싶어 하는 종대를 작게 나마 위로해 준 레이.

 

 


 

더보기 [레이첸] 사랑하는 방법은 원래 차이가 있는 법이다.

 

 

 

 

[레이첸] 사랑하는 방법은 원래 차이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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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는 해가 중천에 뜰 쯔음에, 그제서야 잠에서 깼다. 나른하게 기지개를 편 C가 힘없는 몸을 침대에서 일으켜 바로 섰다. 지난밤 레포트를 작성하다가 피곤해서 그만 곯아 떨어졌던 것 같았는데, 왜 자신이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지 머리를 긁적인 C가 타오르는 듯한 갈증에 문을 열었다. 물을 마시기 위함이었다. 혼자살기에는 조금 넓은 감이 없지 않는 집의 거실을 터벅터벅 가로 지른 C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끓여서 식혀둔 보리차를 마시는 C가 문 듯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부엌에 고개를 갸웃했다. 다 마신 물병을 싱크대에 내려둔 C가 이내 식탁 위에 한가득 차려져 있는 진수성찬들을 보고는 놀라 멍을 때렸다.

 


"우리집에 우렁각시라도 사는거야, 뭐야-."

 

 
 아직 졸음이 완전히 가시지는 못한 듯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웅얼댄 C가 그러던 말건 제 배가 고파옴을 느끼고는 엎어져 있는 밥공기를 들어 밥솥의 밥을 푹, 퍼서 가득 담았다. 그리곤 홀로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음식들을 먹어 가기 시작했다. C의 식사는 꽤나 오랫동안 진행 되었다. C가 느긋한 식사를 즐기는 타입이기 때문이었다. 밥 공기의 마지막 쌀 한톨 까지도 남김없이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 입안으로 우겨넣은 C가 입속에 가득찬 음식들을 우물거리며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내려오신거면 미리 연락을 했을 터였다. 무엇보다 이곳은 외국이니까. C는 뭔가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잔뜩 미간을 좁혔다. 기분이 이상했다.

 


 C는 자신이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 했다. 미지근한 물에 체 C의 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자잘한 음식물 쓰레기들이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C가 거실에서 울리는 정각을 알리는 시계 소리에 깜짝 놀라 그만 들고 있던 접시를 놓쳤다. 애처롭게도 C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간 그릇은 곧바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쳤고 산산 조각이 나 버리고 말았다. C는 제 발등께에도 약간씩 흩뿌려진 유리접시 조각에 울쌍을 지었다. 조심조심 발을 떼어내고 발등에 흩뿌려진 유리 조각들을 털어내자 그제서야 C의 눈에 처참해진 부엌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C는 자신이 유리 조각을 피하느라 물 조차 끄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더이상 씻을 그릇들이 남아있지 않는 싱크대를 향해 물은 폭포 처럼 쏴아아 하고 쏟아져 내리고만 있었다. C는 우선 제가 손에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어 던졌다. 우선 유리 조각들을 처리하는게 먼저였다. C는 다급히 청소기를 가지고 오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읍, 쓰-..."

 


 발바닥에 자잘한 유리조각이 박힌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린 C가 결국 청소기를 가져오는 것을 포기하고는 우선 제 발을 치료하기 위해 다친 발을 질질 끌며 제 방안으로 들어갔다. 손톱깎이 사이에 들어있던 집게를 꺼내들어 조심스럽게 박힌 유리조각을 빼낸 C가 응급치료통에 들어있던 소독약을 솜에 적셔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는 약을 진득하게 짜서 최대한 듬뿍 발랐다. 그리고 난 다음에 약을 바른 부분을 붕대로 칭칭 감고 나서야 끝난 치료에 C가 폭,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 청소기를 찾으러 가야할 터였다. C는 혹여나 또다시 발에 유리조각이 박힐까봐 옷장 깊숙히 있던 구두를 꺼내들었다. 사실상 사놓고 한번도 신은적 없는 것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샀었는지는 몰라도 C의 사이즈 보다 약간 널널한 구두였다. C는 한쪽 발을 절뚝 거리면서 우선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다친 발 때문에 걷는 속도가 배로 느려진 탓에 걸음을 옮기는 C의 모습이 거북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

 


 얼마나 현장이 처참할까를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었는데 부엌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깔끔했다. C는 대체 이게 무슨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다가 부엌 한쪽 귀퉁이에 세워진 청소기를 보곤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대체 누가 또 자신을 대신해서 일을 한 것이란 말인가? C는 혼동 속에 빠졌다.

 

 

 

-

 

 

 

 L은 지독하게도 착한 성격이다. L의 하루는 아침 일찍 시작 되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아직까지 잠을 더 필요로 할 이를 위해 조용히 방 문을 나서 부엌으로 향한다. 자신의 아침 식사로는 간단하게 구운 빵에 잼을 발라 먹고는 누군가를 위한 점심 식사를 준비한다. L은 뛰어난 요리 실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일찍히 점심을 준비한다고 해도 항상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추고는 했다. L은 보글보글 잘 끓어가는 물에 멸치 몇마리와 썰은 무, 파를 집어넣었다. 국물이 잘 우러나오기를 기다리며 L은 쌀을 씻었다.

 


 점심시간을 조금 넘긴 시간. L은 말없이 텅 비어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문을 넘어 잠에서 깬 다른이가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안심하며 L은 자신의 핸드폰을 만진다. 그가 주로 하는 것은 다음날에 무엇을 만들지에 대해서 메뉴를 검색해 보는 일이다. L은 한참동안이나 여러가지 요리들의 재료법들을 메모장으로 옮겨두다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듣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쳤으면 어떡하지. 마음은 벌써 소리가 난 곳에 달려간지 오래였다. L은 다른이가 방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소리를 듣고 곧장 방문 밖으로 나와 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향했다. 그리곤 유리 조각들이 잔뜩 흩어져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급하게 청소기를 가져와 유리조각들을 말끔하게 치우기 시작했다. 계속 해서 틀어져 있던 물도 꼼꼼하게 잠그고 다시 청소기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려던 L은 다른이가 밖으로 나오는 소리를 듣고는 다급하게 청소기를 세워 두고는 자리를 옮겼다.

 

 

"어?"

 

 

 L은 다른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숨을 죽였다. 부디 C가 자신이 있다는 것을 몰라 주기를 바라면서 L은 몸을 더 움츠렸다. L은 지독하게 착했다.

 

 

 

-

 

 

 

 C는 병원에 다녀왔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의사는 C에게 교통사고 후유증은 없냐고 물었다. C는 당연하다는 듯이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의사는 C에게 그럼 몸 조리 잘하며 쉬라는 말대신 다른 말을 전했다. C는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의사의 말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첸군, 요세들어서 뭔가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들거나 그런적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첸군이 멀쩡하신것 같아 이런말씀들이긴 묘하지만, 첸군의 뇌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네?"
"첸군은 아마 지금 가장 소중한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잃으셨을거예요."

 

 

 C는 그다음에 의사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C는 입고나갔던 외투도 벗지 않은체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쇼파 위에 쭈그리고 앉아 몸을 웅크리곤 생각에 빠졌다. 내가 잊고 있다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C는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체 자신이 잊고 있는 것은 얼마나 소중 한 것일까. 내게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C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런 가정을 세워냈다. 자신의 집에서 우렁각시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무언가 일 것이다. 라고. C는 곧장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쇼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집안에 있을 터이니 끝까지 찾아보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C는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한쪽 발을 절뚝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여기에 있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C는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아마도 사람일 것이다.)가 자신을 피한다거나 아니면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고는 방안을 샅샅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옷장의 문들을 모두 활짝 열어 뒤적여도 보고 혹시나 싶어서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올려 그 밑을 확인하기도 했다. C는 방안에서는 찾지 못한 소중한 무언가에 방안을 빠져나와 다른 방으로 발을 옮겼다. 방문을 벌컥 열고 이리저리 찾아보고 뒤져 보면서 C는 자신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들을 발견했다. 자신과 누군가가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라던가, 사이즈가 조금 다른 커플링, 처음보는 피아노 악보들. C는 사진 속의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에 웃음짓고 있는 얼굴에는 보조개가 깊이 파여 있었다. C는 이사람이 자신에게 소중했던 무언가 였겠구나 했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C는 사진속의 남자를 찾기 위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어쩌면 남자가 자신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딨어요, 제발 나와요!"

 

 

 C는 집안을 온통 뒤져도 도저히 나타나지않는 사진 속 남자에 벌컥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소리침은 집안에 울려퍼지기만 할뿐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대답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C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발이 너무 아파 더이상 서있는 것도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발 좀, 나와봐요.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랬어요. 나한테 소중한 사람을 기억 못한다는게 말이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좀 나와줘요.."

 

 

 C는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더라도 왠지모르게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C는 숨을 죽이고 끌어 안은 다리에 얼굴을 뭍고 울었다. 제발 나와 줘요. 기억 할 수 있게 해줘요. 애처롭게 흩어지는 C의 목소리의 끝이 흔들렸다.

 

 

"나는 기억하고 싶어요, 나한테 소중했던 사람을, 보고 싶을 뿐이라구요."

 

 

 C는 소리쳤다. 얼굴은 이미 눈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C는 자신의 뒤로 누군가가 다가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C는 등 뒤로 부터 자신을 꼭 품에 가두는 누군가에 완전히 울음을 터뜨렸다. 숨도 죽이지 않았고 그저 목 놓아 엉엉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품에 안은 사람에게서는 차가운 밤 바람의 냄새와 섞인 부드러운 향이 났다. C는 왠지모르게 그 향기가 그리웠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C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이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

 

 

 

 L는 자신의 애인의 변화를 눈치 채고 나서 부터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이 모습을 보여 보았자 자신의 애인은 저를 알아 보지 못할 것이었고 그로 인해 상처 받는 것은 자신이 될 것 이라는 것을 L은 예상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L은 자신의 애인이 병원에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간 틈을 타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자신의 애인보다 늦게 들어오게 된다면 잠이 들때 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갈 셈이였다. L은 오랜만의 외출에 자유롭게 거리를 돌아 다니면서도 자신의 애인에게 필요하거나 어울릴 것만 같은 물건들을 보면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의외로 바람이 꽤나 차가움에 병원에 간 자신의 애인이 혹여 추워 감기가 걸리진 않을까 걱정한 L이 어느센가 어둑해져 가는 하늘에 발걸음을 서둘러 집으로 돌렸다.

 

 

'제발 좀-..... 소중한 ......-'

 


 L은 현관문 앞에 서서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집안에서는 작게 목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저의 애인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었다. L은 걱정 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멋대로 자신의 존재를 비출 수는 없었다. 자신의 애인은 저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L은 잠시동안이라도 애인이 방안으로 들어갈때까지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찬 바람이 코트 속을 무자비하게 파고 들어도 L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L은 소리치는 제 애인의 목소리가 완전히 줄어 들자, 그가 방안으로 들어갔나 보다 싶어서 조심스럽게 그제서야 문을 열고 몸을 들였다. 하지만 곧이어 제 애인이 거실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과 집안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놀라고 말았다. 무슨 상황인지 묻고는 싶었지만 그럴 수 조차 없으니 L도 답답한 심정이었다. L은 제 애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씁쓸해 지는 것을 참아내야만 했다. 저 안쓰럽게 마른 등을 꼭 껴안아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참아내야만 했다.

 

 


"나는 기억하고 싶어요, 나한테 소중했던 사람을, 보고 싶을 뿐이라구요."

 

 

 L은 당황했다. 하지만 얼마 안있어 제 애인이 그토록 찾는 이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자 마자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달려 나갔다. L이 머릿속의 정리를 끝냈을 때에는 이미 L은 제 애인 C를 품안에 껴안은체 눈물 흘리는 C를 달래주고 있었다. L은 오랜만에 안아 보는 C의 몸이 예전보다 더 마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아이같이 체온이 높은 C의 몸을 들어올린 L이 조심스럽게 C를 침대 위로 눕혔다. 약간 미열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L은 잔뜩 물기젖은 C의 얼굴을 닦아 주면서 다정히 웃음 지어주었다. C는 L의 옷자락을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나한테 소중한 사람 맞죠? 맞는거죠?"
"응, 첸. 내가 맞아."
"당신은 나한테 무슨 존재였어요?"
"너를 매우 사랑하던 사람. 그리고 너가 가장 하던 사람. 난 그런 사람이야."
"이름, 이름 알려줘요."
"레이야. 내이름은."
"레이...레이, 보고 싶었어요."

 

 


 L. 아니, 레이는 그런 첸의 말에 다정히 열오른 이마 위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레이의 말에 옷가지를 쥔 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미안해요, 기억하지 못해서. 레이는 괜찮다는 듯이 첸의 마른 등허리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나는.

 

 


"기억하려고 노력할게요."
"고마워, 첸."
"내 곁을 떠나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사랑하니까, 떠날 수 없었어."
"..나도, 나도 사랑해요. 레이"

 

 


 첸은 슬금슬금 침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레이가 누울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레이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제 옆자리를 팡팡 손으로 치는 첸의 모습에 레이가 작게 웃으면서 제 외투를 벗어 바닥에 놓았다. 곧장 첸의 옆자리에 누운 레이가 어두운 방안임에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첸의 얼굴을 마주하며 웃었다. 첸도 레이를 따라 웃으며 레이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레이는 그런 첸의 등을 토닥이면서 첸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더보기 [레이첸] 백색미(白色美)

 

 

 

 

 

[레이첸] 백색미 (白色美)

 

 

W.실핀

 

 

 

 

나는 흑(黑)색인데. 내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도 다 흑(黑)색인데. 어째서 당신만 백(白)색 인거예요? 

 

 

 

 흑(黑)색의 눈이 하늘에서 흩날리던 흑(黑)색의 겨울날, 나는 어떤 색(色)들 보다도 아름다운 백색(白色)을 보았다.

 

 

 

 

 

-

 

 

 

 

 

 날씨가 너무 춥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아무것도 구분이 되지 않으니 막막한 마음에 눈에 보이는데로 걸쳐 입고 둘러 매고 나왔다. 나는 모르더라도 우스운 복장일지도 모르는 터였다. 왠지모르게 의기소침해져 둘러쓴 모자의 앞챙을 조금더 내려 내 얼굴을 가렸다. 손끝이 아렸다. 그러고 보니 흔한 장갑하나 뒤져서 끼지 못하고 나왔었다. 빨갛게 부어 있으려나. 두손을 가지런히 모아 얼굴께로 가져와 입김을 불었다. 따뜻한 입김이 아지랑이 처럼 하얀 연기를 내며 흩어졌다. 이미 추위에 단단히 얼어 버린 손끝은 미동 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손을 녹이기 위해 팔짱을 껴 두손을 숨겼다. 추워. 그리고 무서워.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만 점점 더 급해져 갔다.

 

 

 

 

 적어도 내 눈에만은 흑(黑)색인 눈이 흩날리고 있어서 일까, 거리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자세히는 보지 못하였다지만 그들이 다정한 연인들이나 가족들이라는 것 쯔음은 뻔한 것 이었다. 왠지모르게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흑(黑)빛 바탕의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보며 나의 부모님은 이 하늘 어디 쯤에 계실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등을 대고 섰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은 무슨 색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이들에게는 흑(黑)색이 아니겠지? 왠지 모르게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어버린 손끝을 모아 깍지를 꼈다. 나도 이들 틈에 섞여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내게도 흑(黑)이 아닌 백(白)이 존재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씁쓸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보같은 공상에 빠질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오늘은 내게 새로운 봉사자가 생기는 날이니까, 적어도 시간은 맞춰 집에 돌아가 준비를 마쳐야만 했다. 흑(黑)색으로 뒤덮힌 대형마트는 두려움을 주지만 피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당당히 마트 안의 식품 코너를 돌아다니며 요깃거리가 될 간식들과 더불어 간편한 요리 재료들을 카트에 담았다. 사실은 내가 담은 파프리카의 색이 빨간색인지, 노란색인지 조차 알지 못하지만.

 

 

 

 계산기에 내가 담아 넣은 물건들의 값을 찍어내는 직원의 재빠른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지막 물건의 값이 찍히는 것을 보고는 다급히 말을 전했다. 200ml 재활용 봉투 하나만 주세요. 나의 말에 직원이 알았다며 봉투 하나까지 건내 주었다. 나는 뒷 사람에 피해가 가지 않기위해 봉투에 바로 짐을 넣지 않고 카트에 다시 담은체로 뒤로 물러났다. 봉투를 손에서 놓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잡아 벌린 다음에 천천히 내가 계산한 짐들을 담기 시작했다.

 

 

 

"아-."

 

 

 

 부딫혀 버렸다. 역시 인적이 많은 곳에서 서서 물건들을 담는 다는 것 자체가 민폐적인 행동이긴 했었나 보다. 부딫힌 몸때문에 캔 음식이 봉지에서 미끄러져 떠러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사과도 제대로 못하고 캔 음식을 줍고 있는데 고운 손이 불쑥 눈앞에 내밀어졌다.

 

 

 

"여기, 이것도 떨어뜨렸어요."

"아... 감사합니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부딫혔어요. 죄송해요."

"제가 주위를 신경 못 쓴게 잘못인걸요."

 

 

 

 도움을 받아 금새 떨어뜨린 짐들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키자 고운 손의 주인공 역시 몸을 일으켜 섰다. 순간적으로 마주 닿는 시선을 물흐르듯 흘려보내려 자연스럽게 시선을 다시 미처 아직 다 정리 못한 짐에 두었다가 문 듯 드는 생각에 다시 훽하고 고개를 돌렸건만, 고운 손의 주인공은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나는 멍하니 남은 짐들을 챙겨 넣고 묵직한 봉지를 들어올렸다. 늦겠다.

 

 

 

 근데 방금 전의 남자가 흑색(黑色)이 아닌 백색(白色)으로 보인 것 같은건 왜일까.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저 부디 내가 먼저 집에 도착하길 바라며 서둘러서 집을 향하여 걸음을 바삐 옮겼을 뿐이었다.

 

 

 

 

 

-

 

 

 

 

 

 다행스럽게도 집앞에는 나를 기다리는 이가 서있지 않았다. 급한 손길로 도어락을 해제하고 집안으로 들어서 사온 짐들을 정리했다. 새로 올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저번 처럼 나를 멸시하지만 않아 주었으면 하는데. 문 듯 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었다. 입안 한구석이 텁텁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친척들 중 유일하게 저를 아끼는 외숙모께서 저번 봉사자의 만행을 아시지 못하셨었더라면 저는 흑색(黑色)의 두려움 속에서 아직까지 덜덜 떨고만 있었을 것이었다. 후우-. 가볍게 숨을 골랐다. 코 끝이 시큰 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을 애써 떨쳐 내었다. 이번에는 외숙모께서 봉사자를 구하셨다고 하셨으니까. 안심해도 될 것이다. 라는 말로 나를 다독였다.

 

 

 

 마지막으로 크게 산 음료수 병을 냉장고에 넣고는 문을 닫았다. 집으로 돌아온지 20분은 넘었을 텐데, 아직까지 현관문은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나는 오히려 그게 다행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찾아내린 정적에 나는 말없이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저 쉬고 싶은 마음에 쇼파에 엉덩이를 붙여 앉으려다가 텔레비전 하나 없는 벽면을 가득 메운 액자들에게로 시선이 꽂혔다. 용기를 내어 사진들의 앞으로 걸어가 섰다. 꽤나 오랜만에 자세히 보는 사진들 속 나는 하나같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때의 나는 뭐가 그리 행복 했었던 걸까? 사진 속 나를 향해 물었다. 너는 어쨰서 그렇게 행복한 것이니? 사진 속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어린 나의 옆에는 항상 나를 위로하고 다독여 주던 부모님이 계셨었으니까. 마른 세수를 하면서 눈물이 차오르려는 눈가를 가렸다. 바깥에는 눈이 내려서, 그래서 감수성이 풍부해 진 것일 뿐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속였다. 다행히게도 눈물을 추하게 볼을 타고 흘러 내리지 않았다.

 

 

 

 홀로 부풀은 감정을 내리 누르고 있자, 드디어 현관문에 소식이 들려왔다. 가벼운 초인종 소리에 저절로 몸이 일으켜 졌다. 이 문 밖엔 새로운 나를 위한 봉사자가 있을 터이다. 후우,후우-. 두어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땀이찬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고 현관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레이 입니다. 중국, 왔어요. 아니아니, 중국에서 왔어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시선을 들으니 마트에서 부딫혔던 고운 손을 가진 남자였다. 내가 아무말 없이 바라만 보고 있자 남자, 아니 레이라는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냐며 미소 지었다.

 

 

 

"..아, 네. 들어오세요."

 

 

 

 백색(白色)이었다. 눈이 부실 만큼이나 새하얀 색깔. 그의 뒤로 펼쳐진 풍경은 여전히 변함없는 흑색(黑色)이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럴리가 없을 텐데. 부정하고 부정해도 다시 돌아보면 빛을 내듯이 백색(白色)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에 할말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어디 아파요?"

"..아니예요." 

"얼굴이 안좋아요. 아파보여요." 

"그런거 아니예요.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저가 불편해요?"
 

"초면이라,서..." 

"우리 아까 마트에서 봤어요. 처음 보는거 아닌데," 

 

 

 

 혼돈스러웠다. 선천적으로 색맹이라 세상이 온통 흑색(黑色)인 나에게 새하얀 색이 보이다니. 무엇보다도 내가 보고 있는 색이 하얀 색이 맞는지도 나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하얀색 인것 같았다. 눈이 부시게 밝은 깨끗한 색이 바로 하얀색이라던 엄마의 말씀이 무의식 적으로 떠올라서 그렇게 느낀 것일 지도 모른다. 그저 멍했다. 무엇이라 표현 하지 못할 만큼으로 그는 백색(白色)이었으니까.  

 

 

 

"종대, 정말 잘 부탁해요." 

"아.. 제 이름 아시네요?" 

"네, 이건 기본 이예요." 

"저도.. 잘 부탁해요. 레이씨" 

"그냥 레이라고 불러요." 

"그럴게요, 레이." 

"나 여기 오기 전에 많이 들었어요. 종대에 대해." 

"저에 대한거요?" 

"노래 부르는거 좋아해요, 그리고 혼자 인거 싫어해요." 

"....." 

"나 피아노 잘쳐요, 그리고 내가 이제 옆에 있어줄게요." 

 

 

 

 멋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부모님이 되살아 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확실히 달랐다. 그가 웃음지으면 그의 하얀 얼굴에 보조개가 파였다. 흑색빛이 아닌 그는 너무나도 아름 다웠다.  

 

 

 

"그리고 나 기다리는거 잘해요." 

"....." 

"그러니까 내가 편해지고, 좋아지면 웃어줘요." 

"..네?" 

"나 봤어요. 어렷을때 웃는 사진. 종대는 웃으면 예뻐요. 반짝 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왠지 모르게 마음 한켠이 따뜻하게 달구어 지는 듯한 느낌이였다. 추위에 얼어있던 몸이 따뜻한 열기에 녹아 찌르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시선을 옮겨 그와 완전히 눈을 마주했다. 그는 유일한 백색이었다. 

 

 

 

"고마워요, 레이." 

 

 

 

놓치고 싶지 않은, 밝음이었다. 

 

 

 

 

 

= 

 

 

그러니까 이글은 색맹이라 온통 세상이 흑색인 종대가(다른 의미로 종대의 상황이 그다지 밝지 못하고 외롭다는 것을 의미) 

유일하게 백색인 레이를 만나는 얘기. 레이는 종대의 외숙모가 구하신 종대를 위한 봉사자. 

 

 


 

더보기 [레이첸] 당신이 있어 참 좋은 하루

 

 

 

[레이첸] 당신이 있어 참 좋은 하루 

 

 

 

W.실핀 

 

 

 

어느 순간 부터인가 눈을 뜨고 나면 내 옆자리에 곤히 잠든 당신의 존재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겨 버렸어요. 어째서일까, 당신이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요. 눈을 떴을때 당신이 평소와 같은 선한 표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을 확인하면 그제서야 나의 하루는 시작해요. 한참 뒤에야 잠에서 깰 당신을 위해 토스트를 굽고 손수 커피를 내려요. 당신은 항상 커피 향기가 부엌을 거의 가득 메울 때에서야 눈을 떠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와요. 나는 자연스럽게 당신을 위해 준비한 커피와 구운 토스트를 내어 줘요. 당신은 언제나 그렇듯이  

 

 

 

고마워, 첸.  

 

 

 

하는 말과 함께 내가 내어준 커피와 토스트를 단숨에 먹어 치워요. 나는 그런 당신의 모습을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요. 당신은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아요. 나는 매일매일 보는 당신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요. 선한 눈매에 어울리는 쌍커풀을 바라보고, 부드럽게 내리 앉은 속눈썹을 바라보다, 반듯한 콧대를 타고 시선을 내려 당신의 부드러운 입술을 바라봐요. 그리고 언제나 마지막은 배불리 먹고 난 뒤 내게 방긋 웃어 주는 당신의 얼굴에 깊이 패이는 보조개를 보는 것으로 나는 당신을 관찰 하던 것을 멈추죠.  

 

 

 

설거지는 내가 할게. 

 

 

 

항상 같아요. 나는 당신 보다 일찍 눈을 떠 당신을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당신은 나를 위해 설거지를 맡아해줘요. 나는 싱크대에서 바삐 움직이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지어요.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다가가 끌어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건 쑥스러우니까 하지 않을 꺼예요. 당신은 간단한 설거지를 깔끔하게 끝내고 물기어린 손을 닦으며 뒤를 돌아서요. 나는 항상 당신을 바라보지 않은척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은 핸드폰 화면을 급히 바라보며 화면을 두드려요. 당신은 그런 나의 뒤로 와 나를 끌어 안아요. 나는 당신이 이렇게 나를 끌어 안아 줄때가 가장 좋아요. 당신의 품은 따뜻해서 안기면 마음까지 따뜻해 지는 기분이예요.  

 

 

 

사랑해, 첸. 

 

 

 

나도 사랑해요. 귓가에 속삭여 지는 잔잔한 사랑 고백은 언제 듣더라도 가슴 깊숙한 곳을 간지럽히는 듯이 나를 설레게 만들어요. 나는 애써 붉어진 귀를 감추고 당신에게 대답하죠. 당신은 나의 대답에 언제나 웃음으로 응답하며 붉어진 귓망울을 약하게 물었다가 놓아줘요. 나는 하지 말라며 신경질을 부리지만 사실은 전혀 싫지 않아요. 당신은 이제 회사로 출근을 해야 해서 나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요. 나는 그럴 때가 가장 싫어요. 당신과 떨어져 있는 다는 것은 너무 나도 나를 외롭게 해요.  

 

 

 

다녀올게. 

 

 

 

다정스레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는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좋아요. 그저 웃음으로 응하니 당신은 이내 신발을 마저 갖춰 신고는 현관문을 벗어나요. 나는 곧바로 베란다로 달려가 당신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차에 오르는 모습, 그리고 차가 아파트를 빠져 나가는 모습을 꼼꼼히 바라보아요. 당신을 따라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나는 너무 슬퍼요.  

 

 

 

/시스템 점검 중 입니다./ 

 

 

 

당신이 떠나고 나서 나는 우선 깨끗히 씻어요. 이 작업이 다 끝이나면 나는 당신이 돌아 올때까지 집안을 정리하고, 당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책을 읽고, 당신이 따뜻한 밥을 곧바로 먹을 수 있게 저녁밥을 준비해요. 나는 당신의 사랑을 받아서 여태까지 한번도 아픈적이 없어요. 이게 다 모두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예요. 나는 항상 그점에 감사해요.  

 

 

 

/시스템 점검이 끝났습니다. 정상 가동 합니다./ 

 

 

 

당신이 먼 훗날 아리따운 아가씨와 결혼을 해 더이상 나를 사랑 하지 않는다면 나는 슬플꺼예요. 하지만 나는 울지 않을 꺼예요. 나는 당신의 행복을 축하해 주고 싶어요. 한낱 사람을 흉내낸 고철에 불과한 나를 사랑해준 당신이 더이상 나를 돌보지 않는 다고 해도, 나는 당신의 옆에 남고 싶어요. 내가 아닌 당신의 아내가 당신에게 아침으로 토스트와 커피를 차려준다고 해도, 나는 괜찮아요. 나는 당신의 옆에만 있을 수 만 있으면 되요. 그러니까 레이,  

 

 

 

당신이 있어 오늘도 참 좋은 하루예요. 

 

 

 

당신은 나의 하늘이니까요. 

 

 

 

 

 

= 

해석 첸은 로봇(연애용이라고 생각해도 됨. 로봇이지만 자신만의 의사를 지님) 

그리고 로봇 주인 레이. 

 

 

더보기 [레이첸] November

 

 

 

 

[레이첸] November 

 

 

W.실핀 

 

 

 

 

가을의 끝자락, 그리고 찾아올 겨울.











 

 손끝이 아릿하다. 변한것은 없었다. 단지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이씽이 멍하니 건반위에 올려 놓고만 있던 희고 가는 제 손가락을 끌어 내렸다. 습관적으로 겉옷의 주머니 속을 찾아 들어간 손은 익숙한 듯 주머니 속에서 하얀 곽을 꺼내 든다. 자잘히 꽂혀있는 하얗고 긴 막대들 중에 하나를 빼어내 입에 물자 그제서야 라이터를 차안에 두고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짜피 습관적인 행동 중의 한 패턴이었을 뿐 아직까지 텁텁히 마른 입술에 물고만 있을 뿐인 막대에 불을 붙이고 싶은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아서. 이씽은 손을 들어 올려 입술에 아슬하게 물린 막대를 빼어내어 다시 하얀 곽 속 안으로 집어 넣었다. 원래의 자리인 주머니 속으로 홱하니 하얀 곽이 사라지고, 이씽은 그제서야 앉아있던 낡은 피아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낡은 나무 의자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방바닥을 밀어내며 방향을 틀었다. 정말로 사람이 살기는 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폐허가 된 이 학원은 이제 다시 이씽의 소유가 될 예정이었다. 실내 곳곳 자욱히 쌓인 먼지들은 이씽이 지나갈때 마다 뿌옇게 흩어지며 이씽을 맞이했다.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환영에 이씽은 자연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 엄마가, 미안해. 

- ...... 

 

 

 

 이씽이 16살이 되던 해에, 이씽의 어머니는 불현듯 이씽의 곁을 떠났다. 일을 하러 나가 집을 비운 상태인 이씽의 아버지에게는 일체 한마디도 없이 일방적인 통보형 이별을 남기고 떠나버린 이씽의 어머니는 이곳. 베이징에서 작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시며 생계를 유지 하셨었다고 한다. 이씽은 자신이 지금의 나이인 33살이 되는 해까지 어머니의 소식을 한번도 접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떠나면서 부터 이씽은 자연스럽게 피아노에서 손을 놓았다. 아주 어릴적부터 손에서 한번 놓아 본적도 없던 피아노를, 이씽은 그렇게 16살의 가을의 끝자락에서 놓아주어 버렸다.  

 

 

후우-. 

 

 

 이씽이 작게 숨을 골랐다. 숨을 쉴때마다 기관지로 텁텁한 공기와 함께 먼지들이 들어왔지만 이씽은 아직까지 이 장소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17년이나 지난 지금, 이제는 죽어 한줌의 재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옛 흔적을 찾아온 이씽은 깨친 유리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가볍게 기침했다. 얄팍하게 입은 것은 아니다만 왠지 모르게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 

 

 

 이씽은 밀려오는 추위에 몸을 움츠리다가도 이내 겉옷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밍기적, 밍기적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전화를 받았다. 달팽이관을 울리는 익숙한 낮은 목소리에 여보세요, 라는 형식적인 대답 대신 짜증어린 물음이 나갔다. 또 뭡니까, 크리스. 

 

 

 

 

'밀기니 조직에서 대량 마약 거래를 요구했어, 레이.' 

"마약? 페이는." 

'kg당 2500' 

"나쁘진 않겠네, 루한한테 연락 걸어서 밀기니 조직이 현지 경찰과 연동 되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 작업 부터 거친 다음에 거래를 수락해도 충분 할 것 같-." 

'레이?' 

"..먼저 끊도록 하지." 

 

 

 

 

  천천히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낸 이씽이 허둥지둥 내부로 들어오다가 이씽과 마주쳐 깜짝 놀라 굳어 있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른 체구와 딱히 어려보인다거나 늙어보인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생기 가득한 얼굴.

 

 

 

 

"누구시죠?" 

"..어, 그러시는 댁은 누구신가요? 무단 가택 침입 죄로-.." 

"무단 가택 침입이라뇨, 이곳은 저희 어머니가 예전에 운영하셨던 학원입니다만."
"선생님 아들...?"
 

"학원생이셨나 보네요." 

"아, 네 뭐 그렇죠. 학원에 다니면서 선생님께 도움 받은게 참 많으니까요, 저희 엄마같은 분이시기도 했고. 그래도 아들이 계시는 줄은 몰랐는데," 

"저도 17년 만에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이씽이 아무렇지 않은척 내부 벽에 기대서서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 보았다. 실시간으로 루한이 보내주는 밀기니 조직과 연동된 기업이라던가 사업가, 등등을 꼼꼼히 살펴 보던 이씽이 더이상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딱 보기에도 이씽은 별 감정없이 툭 뱉은 말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꽤나 우스워서 그냥 그대로 둘까 싶었지만 그것도 이래저래 방해만 될 것 같아 이씽이 잠시 핸드폰은 제 주머니 속에 집어 넣고는 남자를 불렀다. 동그란 머리통이 고개를 들어올리며 선한 강아지상의 얼굴을 드러냈다.  

 

 

 

 

"볼일이 없으시면 가주셨으면 합니다만." 

"아, 저는 선생님의 물건들을 정리 하러 온거였어요. 아드님도..?" 

"아니요, 그냥 저는 이곳의 관리에 대해 생각하고자. 온거죠." 

"아아-.. 그래도, 17,17년만에 선생님에 관한걸 들으셨는데.., 저랑 같이 선생님 물건 정리 하실래요?"
"아-. 그건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래도, 17년 간 선생님에 대한 것들을 아실 수 있으시게 제가 도울게요. 아차, 저는 30살. 첸이라고 합니다. 한국인이예요." 

"..하, 33살 장이씽입니다. 후난성 창사 출신 이예요. 베이징은 두번째 방문입니다." 

"타지역에서 직장을 다니시나 보네요. 저는 베이징 이 근방의 경찰서의 강력반 형사예요." 

"아-.. 강력반, 형사. 시구나." 

"네, 이씽씨..아니, 나이도 알았으니까. 이씽형은요?" 

"..뭐, 저는 그냥 직장 다닙니다. 근데, 혹시 불 있으신가요?" 

"라이터요? 있어요. 여기." 

 

 

 

 

 주절 주절, 이씽에게 말을 걸면서 자연스럽게 학원 내부의 방안의 문고리를 잡아돌리던 첸이 자신의 주머니 안쪽에서 라이터를 꺼내 이씽에게 건내 주었다. 이씽은 첸이 이곳에 오기전에 피아노가 있던 방에서 그랬던 것 처럼, 겉옷 주머니에서 하얀 곽을 꺼내 그 속을 채우고 있는 막대들 중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하얗게 퍼져 나가는 연기들에 그제서야 이씽이 껌뻑 껌뻑, 피곤한 눈을 깜빡였다. 어제 한숨도 자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네? 그게 무슨-." 

"담배 같은거, 손도 대시지 않으실 것 처럼 생기셨거든요." 

"..그런가요, 뭐 첸씨도 그다지 형사일을 하실 것 처럼 생기시지는 않으셔서." 

"무슨 소리세요! 저 요새 큰 일 하나 제가 맡게 된 거 모르시죠? 제가 이것만 잘 해결하면 그 못된 마약 밀수자들을 뿌리까지 뽑아서 모조리 쳐넣을 수 있다구요!" 

"...마약, 이요?" 

"이씽형 같이 일반인은 중국에서 얼마나 마약 거래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지 모르시겠지만, 이 근방에 마약 밀거래 판매 거대 조직이 곧 대량의 마약을 거래 할 거라는 얘기가 들어와서 지금 위에서 얼마나 벼르고 있는지. 나, 참나 원" 

"아.. 그렇군요. 무섭네요, 세상은" 

 

 

 

 

 이씽이 첸의 말에 어색하게 답변하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이내 연기를 뱉어냈다. 매캐한 담배 향기가 기관지를 괴롭힐 테인데도 첸은 익숙하기만 한지 멀뚱히 이씽에게 자신의 고달픔을 털어 놓을 뿐이었다. 이 근방의 마약 밀거래 판매 거대 조직, 곧 대량의 마약 거래 예정. 아무래도 답이 떨어지는 첸의 말에 이씽이 아무것도 아닌척 하며 주머니 속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마터면 밀기니 조직으로 인해 뿌리가 뽑힐뻔 했군. 첸이 모르게 속으로만 작게 중얼거린 이씽이 한손으로 메세지를 쳐 전송했다.  

 

 

[ 밀기니 조직과의 거래 금지, 경찰 쪽에서 우리 조직을 노리고 있음. ] 

 

 

 조직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단정 짓냐며 따져올 크리스의 비서 타오의 모습이 눈앞에 훤했지만 이씽은 목숨을 걸고서 마약 거래를 성사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첸은 이씽이 그런 일을 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이곳이 이씽의 어머니가 되는 선생님이 쓰시던 방이라며 이씽을 안내 했다. 조심 조심 물건들을 가방 안에 쌓아 넣으면서 첸은 쉴새없이 이씽에게 어머니에 관한 모든 것들을 들려 주었다.

 

 

 

 

"선생님은, 지금 이맘때 쯤을 가장 싫어하셨어요. 늦가을, 그리고 초겨울." 

"...어머니가요?" 

"왜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싫어하셨던 것만 기억에 남아요." 

"그렇군요." 

"이씽형은 이맘때 쯤이 좋아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질문이예요." 

"그냥, 물어 보고 싶었어요." 

"흠... 그냥, 정말 싫어요. 어머니가 저를 떠나셨던 때도 이맘떄 쯤이고 제가 피아노를 그만 둔 것도 이맘떄 쯤이니까요." 

 

 

 

 

 그리고, 마약 밀거래 조직원이 된 것도 이맘때 쯤이었구요. 이씽은 차마 뒷말은 꺼내지 못하고 삼켜 내며 첸에게 웃어보였다. 오른쪽 볼에 깊이 패이는 보조개에 첸도 제 올라간 입꼬리를 올리며 마주 웃어 주었다. 더이상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첸은 마저 물건들을 가방 속에 넣으며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저는 이맘때 쯤이 좋아요." 

"...왜요?" 

"저는 이맘때 쯤에 항상 좋은 인연들을 만났거든요. 이맘때 쯔음에, 선생님을 만나고, 이맘때 쯔음에 좋은 선배 형사님들을 만나고, 그리고. 지금 이씽형을 만나고." 

"나요?" 

"네. 이씽형 굉장히 좋은 사람 같아요,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여요." 

"신기하네요, 첸은." 

"그런가요, 그나저나 이씽형 이제 이곳을 어떻게 할 예정이예요?" 

"...이곳이요? 글세요, 개조해서 그냥 제가 집처럼 쓸까 생각 중이긴 해요." 

"그럼, 제가 종종 찾아 와도 될까요?" 

"첸이요?" 

"네." 

"...상관없어요." 

"고마워요, 아. 형 저는 이제 일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교대 시간이 다가와서, 가볼게요!" 

"...그래요, 잘가요 첸" 

 

 

 

 

 이씽이 멀어져 가는 첸의 뒷모습에 작게 손을 흔들었다. 형사인 친구도 사귀어 놓는거 그닥 나쁘지 만은 않겠지.  

 

늦가을, 초겨울 

 

 처음 만난 그날은너무나도 추웠고 우리 둘은 서로의 반대되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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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 대박 저 실핀님''''사랑해도될까여ㅠㅠㅠㅠㅠㅠㅠㅠ레이체뉴ㅠㅠㅠㅠㅠㅠㅠㅠ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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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핀
사랑해주시면 저는 부끄럽게 감사히 마음을 받겠어요♡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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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사탕입니다! 흐어 다 금같은 글이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두번째 읽다 폭풍눈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ㅍㅍ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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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핀
사탕님 반가워요! 금같은 글이라뇨 ㅠㅠ 부족하디 부족해서 길게 쓰진 못하겠고 어쩡쩡한 길이의 단편들인걸요 ㅠㅠ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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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하나같이아련터져요ㅜㅜㅜㅜㅜㅜㅜ삼풍ㅠㅠㅠㅠㅠㅠ진짜ㅠㅠㅠㅠㅠ금손이세요ㅠ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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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핀
금손이라 말씀해 주셔서 저는 부끄러울 따름이예요 ㅜㅜ 정말로 감사합니다!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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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
크리스마스의 선물같은 글들이네요... 하나같이 둘에 딱 맞게 몰입되는... 잘봤습니다!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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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핀
제 글이 크리스마스 선물같이 느껴지셨다면 감사해요... 이렇게 저는 글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포장하고...ㅋㅋㅋㅋ 감사합니다!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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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5
ㅠㅠㅠㅠ무상구독 날이라 아무 생각없이 눌렀는데ㅠㅜㅜㅜ진짜 하나같이 보석같은 글들이네요ㅠㅠㅠ하나하나 여운이 길어서 다 읽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어요ㅋㅋㅋㅋㅋ
분위기도 하나같이 짱짱이구요ㅠㅠㅠㅠ좋은글들 너무 잘읽고가요ㅠㅠ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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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핀
무상구독의 날 정말 좋은거 같아요. 독자 분들은 부담없이 글을 읽으실 수 있고 글을 쓰는 작가들은 글을 쓴 댓가의 포인트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단편 모음 글을 보석같다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운이 남는다니.. 다행이예요 ㅜㅜ 열심히 쓴 만큼 예쁘게 봐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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