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니 원우야? 나는 원래부터 목이 안 좋았어. 이 분야 사람들이라면 으레 고질병 두어개는 가지고 다닌다지만 안그래도 곧잘 결리곤 하는 덜미에 사무직이 겹치니까 이건 뭐 답이 없더라. 의사 선생님이시야 속편하게 체조나 하라고 하시지만 너도 알잖아, 그러기 쉽지 않은거. 꾸역꾸역 참으며 일하다보니 어느날 고개가 돌아가질 않는거 있지. 엑스레인지, MRI인지, 별의별걸 다 찍고 난리법석을 떨고나니 덜컥 겁이 났어. 아 진짜 이러다 훅 가겠다.
그래서 스쿼시를 등록했지. 집 근처겠다, 저녁반 다양하겠다, 딱이지 뭐. 안그래도 운동이 필요하긴 했었어. 뱃살을 애써 무시하며 미루고 미루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고 나서야 드디어 시작하게 된거야. 라켓이며, 운동복이며, 사는 것까진 신났어. 역시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돈 쓰는거. 그런데 재밌는건 딱 거기까지더라고. 와, 운동량 많다는 소리야 하루 이틀 들어온게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역시 말로만 듣는거랑 직접 해보는건 천지차이였어. 공은 쉴틈없이 튀고, 눈으로도 못 쫓아가는걸 손으로 반응해 되받아 쳐내려니 정신이 쏙 빠지더라구. 드라마에서 보던 호쾌한 그 탕탕 소리는 역시 꿈이었나봐. 1시간이 길긴 어쩜 이리도 기니.
어떻게 어떻게 첫 타임이 끝났어. 끝나긴 했어. 웃긴거 있지, 나 딱 1시간밖에 더 안 했는데 벌써 포기하고 싶었어. 진짜로. 팔이랑 다리가 너무너무 아픈데 모레 이거 하러 또 나와야 돼. 맙소사.. 하늘이 무너지는거야. 그 날 내가 이를 갈며 잠들었다. 사람 하루 아침에 바뀌는거 아니라고, 운동은 나랑 진짜 안 맞는다고 그렇게 궁시렁거리면서 있잖아. 하하.
그 다음 시간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버티니까 또 버텨지더라. 진짜 제일 짜증나는거야. 차라리 아파서 쓰러지기라도 했으면 몰라, 쓰러지지도 않아. 이두 삼두 할 것 없이 비명을 질러대는데 힘은 또 나와. 아.. 나 너무 싫다. 그런데 안 쓰던 근육을 이틀 차로 그렇게 혹사를 시키니까 이게 멀쩡할 리가 있나. 그 날도 이를 득득 갈면서 잤거든? 자긴 잤어. 그런데 일어나는데 거짓말 안 하고, 팔이 안 들리는거야. 팔뚝이 정말 찢어질 것처럼 아픈거 있지. 비명 지르면서 아침에 파스 붙이고 난리 피우다가 결국 팀장님께 연락드리고 병원 갔어. 그러면서도 내심 다음날 스쿼시 안 갈 생각에 기분이 좋더라. 철 덜 들었지.
주말까지 끼워서 내리 근 일주일을 쉬고 나니까 아물긴 하더라. 그래도 신기한건 그 이틀 한 것도 운동이라고 훨씬 아침에 일어나는게 가뿐해진거야. 몸이 좀 가벼워진 느낌? 딱 오더라고. 바로 느낌 왔어. 그래서 여전히 궁시렁거리면서도 라켓 챙겨서 또 센터를 갔지. 저번 주에 못한거 보강 해주신대서 월요일부터 딱 갔어.
선생님을 딱 기다리는데, 오늘따라 좀 늦으시더라고. 천천히 오시라고 카톡해놓고 옆 방 소리에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는데 이건 뭐, 벽을 부술 기세더라. 탕탕 하는 소리가 아니라 꽝꽝하는 소리야, 아주. 무서울 정도로 세게 치는거야. 근데 세게 치면 공이 더 빨리 돌아오잖아. 그걸 또 다 받아내. 선생님 기다리는 10분 동안 한번을 안 끊기고 악착같이 다 쳐내는거야. 소리 듣기만 하는데도 땀범벅이 되는 느낌인데, 와 저 사람은 누굴까 싶어서 너무 신기했어.
"죄송해요! 잠시 요 앞에 서류 하나 떼고 오느라."
늦으신 선생님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오셨어. 웃긴게 나 혼자 할때는 모르다가 옆 방 소리 그거 하나 들었다고 경쟁 심리가 생기는거야. 그 한 시간 나도 모르게 엄청 뛰었나보더라고. 다리가 아파서 질질 끌면서 락커룸으로 들어가는데 옆 방도 따라서 마쳤나봐. 땀투성이가 돼선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면서 따라 나오다 나랑 눈이 마주쳤어. 왜 그, 내가 좋아하는 실눈 있잖아. 옆으로 긴 눈. 아, 이제 와서 얘기하는거지만 진짜 섹시하더라.
"아,"
"?"
그게 우리의 첫인사였지.
내 꼴도 얼마나 누추했을까 생각하면 그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는데. 근데도 그때의 네 눈은 잊어지지가 않아. 정말 완벽한 내 이상형 그 자체였거든. 그때 우리가 나눈 말이야 고작 안녕하세요가 다라지만 앞뒤 재고 있을 여력이 없었어. 나는 당장 카운터로 가서 월수금반으로 바꿔달라고 했지.
정말 반하는건 순식간이더라. 나는 내심 반을 합쳐주길 기대하고 있었어. 너는 항상 수업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와서 몸을 푸는 것 같더라고. 언제 한번 퇴근하고 곧장 들렀을때 너와 한번 더 인사를 나눈 후로 나는 집이 아닌 센터로 퇴근을 하기 시작했어. 회사 나오기 전에 괜히 한번 더 화장 고치고. 스쿼시 선생님께 죄송하긴 했어도 내 목적은 운동이 아니었으니까.
내 몸이 굼뜨다는게 이리도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내가 너에게 처음으로 인사 아닌 말을 걸던 역사적인 순간.
"저기,"
"?"
"그쪽도 월수금 7시 반타임이시죠?"
"아, 네."
"와, 저번에 보니까 진짜 잘 치시던데."
"감사합니다."
"저는 왜 그, 백 스트로크라고 하나요? 그게 왜 이렇게 어렵죠."
"밀어낸다는 느낌으로 치세요."
"혹시 안 바쁘시면 보여주실 수 있나요?"
"그 정돈 아닌데, 뭐 정 필요하시다면."
네가 라켓을 들고 우아하게 팔을 휘저었지. 라떼 거품을 섞는듯한 몸짓이었어. 거짓말 아냐.
"와. 정말로, 잘 치시네요."
"뭐, 자주 자주 치니까요."
"어, 근처에 칠만한 곳 따로 아시나요? 주말에 센터 닫았을때."
"여기 근처에요?"
"굳이 센터 근처 아니라도 뭐, 자주 가시는 곳도 좋구."
"저는 뭐, 대로변에 있는 데 잘 가서요. 여기야 집이랑 가까워서 다닌다지만 주말에 문 닫고 그러면 아무래도."
"오. 이 근처 사세요?"
"아. 그쪽도?"
가까이 산다는게 네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네 눈이 빛났지. 그도 그럴 것이 센터 근처 주거 지구라 해봤자 아파트촌 하나가 고작이었으니까.
"저 108동 살아요!"
"아, 저는 111동."
"우와, 이웃 주민이었잖아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러게요. 이렇게 보니 반갑고 그러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전원우라고 합니다. 올해로 서른."
"어, 저도 서른. 동갑이네요!"
나는 일부러 속임수가 다 보이게 손을 내밀었어. 운동을 갓 마친 상태에서 스킨십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너는 의중이 읽히지 않는 표정으로 악수를 받았지.
"말 놓죠,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럴까요?"
"앗, 존대가 편하신가?"
"차차 놓을게요. 낯을 좀 가려서 말 놓는게 마냥 쉽진 않네요."
"아, 제가 오버했네요. 부끄러워라."
머쓱한듯 웃으며 널 쳐다보자 미세하게 표정이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갔어. 나는 그걸 웃음이라고 부르기로 마음 먹었지.
너와는 달리 낯을 가리지 않는 내 성격 덕에 나는 너에게 꽤 빨리 꽤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어. 그렇게 철벽을 치는 너에게 다가가 한 달만에 미묘해질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뭐. 나는 첫 달을 꼬박 꼬박 센터로 퇴근해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네 말에 웃어줬어. 이목구비가 굳은건가 싶게 웃음에 짜던 너는 슬금슬금 아닌척 벽을 허물더라. 그게 너무 재밌는거 있지. 그러다 둘째 달, 나는 시간표를 원래대로 화목으로 바꾸었어. 물론, 너에게는 이야기하지 않고 말이야.
한 둘째주 됐나, 이제 어느 정도 몸에 익어 팔을 가볍게 주무르며 락커룸으로 들어가려는데 네가 서 있었지. 땀을 흘린 것 같지는 않았어. 이제 막 운동하러 나온 느낌?
"어? 원우씨."
"아."
"오랜만이다. 웬일이야?"
"요일을 옮긴 거구만."
"무슨 말이야?"
네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지. 한 마디만 뱉고 반대편 남자 락커룸으로 쓱쓱 들어가버렸어.
"안 보이길래."
너 그때 그런 말은 어떻게 생각해낸거야? 설레서 그 날 잠도 못 잤어, 나.
어쨌거나 그날 부로 나는 이게 썸이 아닐 리 없다는 확신이 생겼지. 일이 즐겁더라. 스쿼시도 꼬박꼬박 잘 나갔고. 너도 어느새 화목반으로 바꿨더라고. 당연히 그러겠지, 내가 있는데. 셋째달에는 선생님께 반을 합쳐달라고 말씀드렸어. 친구라고 같이 듣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해서 인사를 나눈지 두달이 지나고 우리는 드디어 한 공간에서 만나게 되었지. 아, 난 이제 와서 말하는거지만 즐거워 죽을뻔했어. 뭐? 야, 너같으면 안 즐겁겠어?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1시간이 일주일에 두번이야. 내 눈썰미 알지? 가끔 곁눈질 해보면 네 그 팽팽한 승모근이며, 견갑골이며.. 아, 너무 변태같구나. 하여튼 우린 같은 반도 됐겠다, 수업이 끝나면 맥주 한잔씩을 사먹을 정도로까지 가까워졌지. 미묘함? 아니. 이건 확신이야.
그 후로는 달 수를 잘 안 셌는데 그렇게 운동으로든 운동 아닌걸로든 서로를 의식하며 매 주 두시간씩을 함께 보낸지도 조금 되었던 걸로 기억해. 나는 일부러 서두르지 않았어. 네 성격에 도망갈걸 다 알면서 왜 서둘러? 어쨌거나 그 날도 여느때처럼 스쿼시가 끝나고 동네 호프집에서 맥주를 들던 차였지.
"넌 결혼 안 하냐."
"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집안 어르신들만 난리인데 난 생각 없어."
"왜?"
"갑갑하잖아. 너무 안정적이게 되어버리는 관계, 별로야."
"너답다. 거기서도 재미타령이니."
"재미 없으면 사람이 살 수가 있나."
티비에서는 지루한 축구 경기를 하고 있었어. K 리그는 처음이라 정말 눈에 설익었지.
"지루해. 우리 채널 돌리면 안돼?"
"다른 분들도 보시잖아."
"아무도 안 보시는데?"
갑자기 네가 괴고 있던 턱을 떼서 나를 보았지.
"아 그래?"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 마치 원래 그러기라도 했다는듯 키스를 했어. 가볍고, 질량이 없는 키스였지. 나는 곧장 맥주를 다시 털어넣었어.
"뭐해, 너?"
"싫어?"
"취했어. 무슨 맥주를 먹고 취해?"
"그러니까. 무슨 맥주를 먹고 취해, 내가?"
설핏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널 봤어. 너는 예전의 그 미묘한 것 말고 다른 웃음을 짓고 있었지. 다시 턱을 괴고, 느긋하게 날 쳐다보면서.
"티비 아무도 안 본다니까 얜 뭐라는거야."
"아, 난 우리 말하는줄 알았지."
"얼레? 너무 당당하다?"
"나이 서른 먹고 당당 못할건 또 뭐 있어."
네가 몸을 굽혀 내 코앞에서 멈추었지. 그 상태로 손으로 무언가를 꼼지락 거리더니 반 정도 남아있는 내 맥주잔에 떨어트리고 잔 입구를 막았어. 땡그랑 소리가 났지. 난 고개를 살짝 비틀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어. 귀엽잖아, 너?
"지금은 또 뭐해?"
"내 머릿속의 지우개 알지."
"너 뭐하냐구."
넌 잔을 밀어 내 곁에 가져다놓았어. 천천히 얼굴을 스쳐 내 귓가에 속삭였지.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거다."
나는 맥주잔을 입에 가져다 댈듯 물어보았어.
"안 마시면?"
너는 눈웃음을 지으며 다음 대사를 읊었지.
"볼 일 없는거지. 죽을때까지."
단숨에 들이켰어. 이빨 사이로 무언가 부딪혔지.
맥주를 채 다 삼키지도 않은 채 킥킥거리며 네 손을 붙잡고 뛰어나와 호프집 뒷켠으로 들어섰어. 어두컴컴하고, 내가 네 목에 팔을 두르기 딱 좋은 그 곳.
"이렇게 주는게 어딨어."
"그러면."
"네가 직접 끼워야지."
급히 턱을 당겨 입을 맞추었지. 알싸한 맥주 냄새가 갓 샤워를 마친 네 스킨 향과 뒤범벅이 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고백을 이렇게 하나 싶어 얼떨떨하다가도 첫사랑마냥 손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좋아서 나는 네 손을 잡고 취기에 퐁당 빠졌어.
이제 잠 좀 깨, 자기야? 우리 둘 다 뭐에 홀렸는지 어젠 진짜.. 겨우 실반지 하나 가지고. 킥킥. 어우, 허리야.
일어나. 이제 양치하러 가자.
아니, 이불 덮지 말고, 나 끌어들이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