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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촑글 고맙습니다!! 현생 힘드실텐데 다들 읽어주시고 챙겨봐주셔서 정말 늘 항상 감사드려요 ㅜㅜ 왜 이 마음을 뻔한 말로밖에는 더 표현할 수 없는걸까요..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아이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벽 너머 부엌에서 물소리가 울린다. 정신은 오래 전에 이미 들었음에도 나는 한참을 넌지시 눈 감은 채 돌아누워 있었다. 풀색 아침 볕살이 일렁이며 내 얼굴에 파도를 드리우고 아이는 ‘기계’ 적으로 내 팔뚝을 흔든다. 


 

“아저씨. 7시예요.” 


 

가만히 손짓을 했다. 아이는 방을 나갔다. 나는 창 쪽으로 뒤척여 돌아누웠다. 아이는 일상처럼 창을 열고 바닥을 닦더니 어제 밤에 베이킹소다물에 담가둔 오랜 그릇들을 씻는 모양이었다. 나는 좀 더 누워있기로 했다. 손발이 식어 몸을 옹크리다 아이가 한 말이 스쳐지나갔다. 


 

'너무 차가우면 낯설잖아요.' 


 

본능적으로 이불을 말고 귀를 덮었다. 스튜가 어렵잖게 떠올랐다. 자다깬 붉은 눈으로 나갈까요 하고 묻던, 너. 

아이가 오랜 시간 데운 탓인지 야채는 물러질대로 물러져 있었지만 따뜻했다. 감자에서 배어나온 전분이 스튜를 걸쭉하게 만들어 야참으론 부담없고 오히려 더 좋았다. 숟가락을 들고있던 얼마간 나는 아이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나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였다. 하지만 육즙이 다 새어나간 고기조각과 물렁해진 당근, 질겨진 양배추와 엉망으로 뭉개진 감자들을 입 안으로 밀어넣으면서 알 수 없게도 그것들은 다시 가라앉아버렸다. 엉망이군. 불을 끈 식탁에서 까맣고 빛나는 눈을 가진 너와 마주보며 식사를 하다가, 나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얼마 되지 않아 그릇을 헹구는 조그마한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 잠이 들었다. 


 

그런데 무엇이 이리도 내 마음을 잡아 찢는가. 


 

잠이 들때부터 깨고나서까지 이어지는 질문이었다. 

아른거리는 잔상이 있었다. 지우려 진땀을 빼다보니 어느새 30분이었다. 


 

마냥 밍기적거릴 순 없어 방을 나섰다. 설거지를 하던 아이가 기민하게 물을 끄고 뒤돌아본다. 


 

“일어나셨어요.”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시선을 피하고 식탁에 등을 지며 앉는다. 손에 남은 물기를 닦은 아이가 식탁 옆 바닥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며 묻는다. 나는 그럴때마다 저 아이가 사람인지, 기계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아침 뭐 해드릴까요?” 

“... 됐어.” 


 

쇄골 밑 언저리가 화닥거리다 따끔댄다. 컵에 물을 따른다. 


 

“아침 드셔야 하는데.” 

“부대껴. 부담스럽다.” 

“샌드위치 같은거라도 만들어드릴까요?” 


 

물을 한모금 삼키고 신문을 집어든다. 아이는 두번은 묻지 않는다. 신문을 읽던 날 가만히 올려다보다 마당으로 나간다. 시야에서 아이가 사라지고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쉰다. 

내 집 안에 나 아닌 다른 개체가 살아 숨쉰다. 알게 모르게 긴장한 몸이 욱신거린다. 이내 짜증스러워진다. 이름도 없는 기계 따위에게 쫄아서 몸부터가 난리다. 왼다리도 저리는 것이 오늘 중으로 병원에 한번 들러야겠다. 마당을 내다보면 아직은 투명한 햇살 속에서 아이가 팔랑거리며 화분을 옮긴다. 아침의 하늘색 볕이 춥지도 않은지 얇은 면 티와 바지 한 장씩만을 걸친 차림이다. 저럴때보면 인간 같다. 팔다리에 미세하게 나 있는 마디만 아니라면 정말 사람이래도 믿을 것이다. 나는 조금 모진 생각을 한다. 


 

정들기 전에, 

오늘은 정말 나가래야지. 


 

.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며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병원 오픈 시간에 맞춰 전화를 했는데도 예약은 오후때나 되어야 한다. 갑자기 붕 떠버린 오전 타임에 할 일이 없다. 책을 읽다가 심심해져 거실로 나와 앉았다. 다리는 여전히 저린다. 다 마른 빨래를 옮기던 아이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는다. 따뜻한 물수건이다. 


 

“이걸로 주무르시면 좀 나을거에요.” 


 

옮긴 빨래들을 가만히 개며 사족을 덧붙인다. 


 

“제가 해드리는게 가장 정확하지만 다리, 이야기에 조금 예민하신 것 같아서.” 


 

‘다리’에서 무릎처럼 문장이 꺾인다. 하얀 사기 그릇에 곱게 놓인 김 오르는 물수건. 알고리즘에 배려도 있었나. 너는 사람일까? 


 

“.. 고맙다.” 

“별 말씀을요.” 


 

빠르고 정확한 아이의 손짓에 깨끗한 빨래들이 보기좋게 쌓인다. 나는 물수건을 집어들어 다리를 감싼다.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던 종아리에 온기가 퍼진다. 평화로운 11시. 집 안에 고요가 감돈다. 


 

“힘들진 않니.” 

“아니오.” 


 

아이는 빨래를 개며 대답한다. 


 

“성격이 유별난 주인인데도?” 

“괜찮습니다. 주인이니까요.” 


 

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물끄러미 말간 얼굴을 쳐다보기만 한다. 가시라곤 돋치지 않은 순수한 어투. 다시 시간이 흐른다. 여유로운 공기 위로 가끔 새들이 스치고 간다. 


 

“병원 가실때,” 

“?” 

“꽃집도 가요.” 

“갑자기 꽃집은 왜?” 


 

빨래를 다 갠 아이가 고개를 든다. 


 

“이젠 다른 꽃도 사야죠.” 


 

아이는 꽃을 좋아하나보다. 


 

기기마다 성향은 다를 수 있다더니 이 아이는 그게 꽃인 모양이었다. 오전엔 맑던 날씨가 오후가 되니 다소 흐려졌다. 아이는 개의치 않고 넘실거리는 정수리로 꽃집에 들어갔다. 문이 열리고 닫히며 흔들거리는 줄기들과 머리카락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인공적인 날씨로 사계절 꽃을 한번에 틔울 수 있게 된 지도 오래, 아이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꽃 하나하나를 일일히 세심하게 들여다보았다. 


 

“히비스커스랑 백합 한 다발씩 주세요.” 

“가격대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요새 꽃값이 어떻게 되나요?” 


 

능숙한듯 다발을 골라 사는 아이의 뒤에서 계절별 섹션으로 나누어진 꽃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여름 꽃인 백합과 열대 지역에서 핀다는 히비스커스. 막상 보니 계속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 빨간 꽃을 히비스커스라고 부르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아 나는 못내 창피해졌다. 정신없이 꽃을 보는데 크래프트지로 감싼 다발 두개를 받아들고 아이가 나를 불렀다. 


 

“아저씨.” 

“..” 

“가요.” 


 

아이가 산뜻하게 길을 나섰다. 결제도 알아서 잘 마친 모양이었다. 날씨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20분 거리의 병원 가는 길이 눅눅해서 비린내가 났다. 


 

“저녁거린 제가 미리 주문해두었어요.” 

“아.” 

“그냥 집으로 가요. 장 볼 필요 없어요.” 

“…” 

“미트볼 스파게티 만들어드릴게요.” 


 

이럴땐 다시, 기계 같다. 입술을 꾹 다물고 5분 남짓 남은 거리를 마저 걸어가는데 기어코 빗방울이 이마를 때린다. 고개를 들면, 빗줄기가 아직은 얇다. 


 

“빨리 가자꾸나.” 

“네.” 

“너 우산 없지?” 

“네. 기상청을 너무 믿었네요.” 

“됐다. 곧 그치겠지.” 

"진료 보고 계세요. 우산 얼른 챙겨올게요." 

"집 갔다 오게?" 

"금방인걸요." 


 

아이가 손을 한번 꾹 쥐었다 놓는다. 돌아서서 뛰어가는 뒷통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병원으로 들어간다. 


 

"시프 잘해주셨네." 

"아." 

"가끔씩 저리고 그러면 이렇게 마사지만 잘해도 대강은 다 나아요. 별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 

"홈봇 들이셨다면서요?" 

"그게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났나요." 

"어머님께서 다 얘기해주시던걸, 뭐.” 


 

벌써 몇년째 가족들 주치의를 담당하고 계신지라 어머니는 선생님과 별의별 이야기를 다 나누신다. 어쩌면 아이를 들이기 전부터 이미 알고 계셨을지도. 나도 모르는 우리집의 변화를 선생님이 먼저 눈치채고 계셨을걸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서명호. 어머니는 선생님에게 ‘다리가 멀쩡했을’ 나를 투영하신다. 


 

“그런데 석민씨, 우리 본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데 말 대체 언제 놓으려구요.” 

“꼭 놔야 하나요.” 

“존대 쓰면 너무 정 없잖아. 이름 불러요, 동갑인데.” 

“괜찮습니다.” 

“딱딱하시긴. 혹시 모르니까 진통제 2주치 처방해드릴게요. 매일 먹지 말고. 뭐, 아시죠?” 

“네. 고맙습니다.” 


 

처방전을 받아들고 약국으로 내려오는 길에 창밖을 보니 빗줄기가 굵다. 곧 그칠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보다. 처방전을 제출하고 가만히 밖을 내다보는데 우산 없는 사람들이 비를 피해 들어오느라 약국이 슬슬 소란스러워진다. 


 

“죄송합니다. 오늘 예상에도 없던 비가 와서 갑자기 바빠지네. 잠시만요.” 


 

넉살좋은 약국 주인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에 가만히 손깍지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계속, 번거로운 한쪽 다리에 대해 생각한다. 순영이가 나를 놓지 못해 내 발 한쪽을 잡고 있는거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건 오작교가 되니까 생활에서의 불편함 정도야 참을 수 있었다. 그가 너무 보고 싶을땐 다리를 그러모아 껴안고 울었다. 거기에 정말 손길이 머물러 있다는듯. 하지만 사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퇴화한 근육이 말라붙어있는 뼈다귀뿐이었다. 문득 현실의 눈이 돌아올때면 나는 그 볼품없음이 꼴뵈기 싫어 방금 전까지만도 애지중지 껴안고 있던 것을 팩 뿌리쳐버리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누구는 우울증 어쩌구 하고 다른 누구는 조현병 어쩌구 했지만 사실 정답은 나만 알지. 그렇게 나는 비밀스럽게 순영이와 함께 했다. 그거 하나라도 아니면 내가 나를 버틸 수가 없어서. 


 

약이 나오는 시간이 늦어졌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건 알겠지만 30분 가량을 기다려도 내 이름이 불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짜증이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저기 저, 진통제 언제 나와요.” 

“아,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석민이오.” 

“이승민이오?” 

“이. 석. 민. 이오. 석관할때 그 석.” 

“아아, 잠시만요. 찾아봐드릴게요.” 


 

알바생의 얼굴이 앳되다. 이찬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사무보조인가. 아이와 비교해봐도 그보다 더 어린 얼굴인데, 고딩 정도. 


 

맞다. 

아이. 


 

그제서야 생각나 찬물을 뒤집어쓴듯 주위를 둘러봤다. 아이. 진료만 30분을 봤는데 1시간이 다 되도록 왜 아직 안 오지. 퍼득득 떨며 유리문을 열고 길 저 멀리를 내다보았다.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맵이 있으니 길을 잃었을 리도 없고. 거센 빗줄기 때문에 시야도 제대로 트이지 않았다.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스멀스멀 피어올라오는 것들을 무시하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데 소실점 언저리에서 누군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느리게 느리게 걸어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아이였다. 무슨 영문인지 오른쪽 속눈썹을 파리하게 떨고 있다. 정수리의 팬에서 틱틱거리는 소리가 나며 김이 피어오른다. 팔다리도 떨린다. 덜거덕 덜거덕 회로가 엉키며 억지로 손을 내밀어 우산을 건넨다. 


 

“아, 아저, 아저, 아저씨, 씨, 씨.” 

“... 뭐야.” 

“우, 우ㅅ, 우산, 우산, ㄱ, 가, 가져,” 

“뭐야. 너 왜 그래.” 

“아저, 아저씨, 아저씨, 씨, 비 맞, 맞지, ㅁ, 맞진, ㅇ, 않으, 않, 않으, 않으셨죠?”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그래.” 


 

“이석민 환자님, 어?” 


 

알바가 나를 부르지만 들리지 않는다. 처음 보는 아이의 상태에 일단 당황한다. 머리가 하얘진다. 갑자기 왜 이러지. 무슨 문제가 생긴거지. 외관상의 문제나 결함은 없어보인다. 타박상도 없는 것 같다. 내부 회로의 문제인가. 어떻게 고치지. 고칠 순 있는건가. 


 

“걔 혹시 비 맞았어요?” 


 

알바가 대뜸 묻는다. 아까 우산 가지러 갈때 비를 맞긴 했다. 대답도 하기 전에 알바가 눈치를 보더니 덧붙인다. 


 

“회로 삭았을 수 있어요. 요새 비가 어디 그냥 비던가요. 강산성 물질이 팬에 바로 맞았으면 삭았을 가능성 커요.” 

“그럼 뭐 어떻,” 

“AS 센터가 제일 정확하긴 한데 오래 걸려요. 집 가서 비누로 머리 한번 감기세요. 그래도 비가 막 들이부은 정도는 아니니 많이 삭진 않았을거에요. 요새 애들은 회로를 다 형상기억합금으로 만들어놔서 복구도 쉬워요. 중화만 한번 시켜주세요. 자기가 알아서 수리 다 해요.” 


 

알바가 진통제 봉투를 건넸다. 허둥지둥 계산을 하고 집에 돌아와 대뜸 아이를 화장실로 집어넣었다. 품에 끼듯 껴안고 머리를 물에 축였다. 비누를 찾자니 눈에 띄지 않아 마음이 급해졌다. 


 

‘아이씨.. 어디다 둔거야.’ 


 

온 집안을 뒤져 남아있던 비누 조각을 발견했다. 이미 다 말라 비틀어져 거품도 잘 나지 않았다. 아이의 머리를 감기는건지, 내가 땀으로 샤워하는건지 모를만치 힘겹게 비누칠을 했다. 정신이 아직 남아있는 아이가 자꾸 팔을 버둥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ㅇ, 아저, 아저씨, 저씨, 아저, 아저씨,” 

“말 하지마.” 

“ㄱ, 고, 고ㅁ,” 

“하, 씨.” 


 

경련하듯 다리를 떠는 모습에 자꾸 내가 생각나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문질렀다. 거품은 잘 나지 않아도 이만하면 비눗기 좀 먹었겠다 싶어 다시 물을 틀었다. 아내의 머리를 감겨주던 것이 떠올라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을 때마다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순영이. 나와 웃으며 떠들고 장난치느라 바쁘던 나의 순영이. 순영이 머리를 감겨주노라면 옆구리를 간질이고 거품을 묻히느라 항상 한번에 끝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입을 맞추고, 함께 바닥을 구르며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결국 나까지도 몸을 씻어야 할 지경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럴때면 순영이는 의기양양하게 자기가 이겼다는듯 나를 비웃었다. 그럼 나도 덩달아 웃었다. 순영이도 머릿결이 참 좋았는데. 미역같은 아이의 머리카락이 손 안에서 흐느적거리는걸 보니 한시름 놨다는 생각에 몸이 풀렸다. 그래도 할 일은 아직 많다. 아이를 화장실에서 끄집어내 거실 바닥에 눕혔다. 도무지 방까지 데리고 들어갈 기력이 없었다. 축축한 머리를 급한대로 바닥에 뉘어놓고 드라이기를 찾아 덜덜 떨며 코드를 꽂았다. 잠시 고민하다 버튼을 온풍으로 올렸다. 


 

아이의 머리를 무릎에 올리고 앞머리부터 슬슬 말리기 시작했다. 남의 머리를 만지는건 오랜만이라 손이 설익었다. 아이의 머릿결은 유독 고왔다. 탱글탱글하니 짧은 머리에도 윤기가 나도록 탄력이 살아있었다.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걸 보아하니 속눈썹도 그랬다. 속쌍커풀이라 눈을 떴을땐 잘 보이지 않다가 눈을 감으니 그 아름다운 곡선이 보였다. 가지런하고 가녀린 눈썹 가닥들. 


 

‘외형은 이렇게 신경쓰면서 왜 회로는 산성비 몇 방울에 녹게 만든거야.’ 


 

신경질을 부리는 사이 머리가 다 말랐다. 알바는 씻기고 나면 전원이 자동으로 꺼질테니 이름을 불러 켜주라 했다. 

난처해졌다. 아이의 이름은 지어주지 않았는데. 생각도 해놓지 않은걸 무슨 수로 불러야 하나. 일단 아이를 앉혀 얼굴을 마주보게 하고 팔뚝을 살짝 흔들었다. 미세하게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소리가 났다. 위이잉. 

아이가 눈을 떴다. 전원이 켜졌다는 붉은 불빛이 동공에서 두번 깜박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낯설었다. 가슴이 뛰었다. 순간 기다렸으나 기다리지 않았던 이름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순영아.” 


 

눈동자가 초록빛으로 빛났다. 


 

- 


 

한솔은 담배를 꺼내물었다. 골목 벽에 기대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뿌연 노을. 비가 오겠다. 빈 곽을 구겨 던지고 가방을 고쳐 멨다. 


 

“스읍- 후-“ 


 

아직은 겉담배가 더 편하다. 속담배는 목이 약해 기침을 토해내기 일쑤다. 목 약한걸 생각하면 애초에 담배를 피우면 안됐지만 이미 시작해버린걸 다시 끊자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솔은 그래도 연기를 직접 삼키진 않으니 괜찮을거라며 스스로 다독거렸다. 담배를 다 피워갈때쯤 점퍼 왼쪽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사장님이 바쁘시다고 일찍 부르셨어 ㅜㅜ 미안 오늘은 혼자 가라] 


 

찬이였다. 한솔은 인상을 한번 찌푸리더니 바이크에 올라탔다. 찬이 한솔의 동네 근처로 이사를 오면서 둘은 함께 등하교를 하곤 했다. 한솔은 공부는 잘했지만 선생님을 무시했고, 찬이는 인성은 바르지만 공부는 못했다. 기묘한 조합은 의외라는 소리도 많았지만 둘은 꽤 잘 어울렸고, 달라서 통했다. 그래서 한솔과 찬은 찬의 전학으로 처음 만나게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한 세트가 되었다. 


 

한솔은 초록색 별이 그려진 비행기를 한바퀴 크게 빙 둘러 해가 지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찬과 한솔은 그 비행기가 있는 공터에서 노는걸 좋아했다. 책가방이고 뭐고 다 냅다 던져버리고 비행기 안에 들어가 소리를 지르고 때론 기타를 치며 놀았다. 앰프를 가져가 틀어도 워낙 사람이 없는 공터라 잔소리하는 어른도 없었다. 때론 잠을 잤다. 아주 때때론, 입을 맞췄다. 별 생각 없었다. 


 

한솔은 오랜만에 찬과 함께하지 않는 하굣길이 좀 껄끄럽다고 생각했다. 경계가 희부연 노을빛이 자기를 째려보는 것 같아 부러 해를 등지며 공터를 한번 더 돌았다. 새끼. 그래도 같이 안 있으니 좀 그래. 내일 존나 갈궈야지. 하늘을 가르고 콧잔등을 빗방울이 내리찍었다. 한솔은 코를 한번 훌쩍이더니 상가 거리로 나섰다. 아무래도 녀석의 얼굴을 한번은 봐야할 성 싶었다. 빨리 보고 오지 뭐. 비 더 세지기 전에. 한솔은 빛바랜 초록색 바이크 속력을 높였다. 


 

. 


 

“아이씨, 뭐야..” 


 

야상 옷자락이 펄럭거리며 이끼색 바이크의 먼지를 뒤집어 썼다. 정한은 인상을 찌푸리고 옷자락을 털다가 주머니에 구멍이 뚫린 것을 발견했다. 어쩐지 주사위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싶었다. 어느메에 굴러갔을지. 

긴 앞머리를 한번 후 불어올린 정한은 다시 고글을 쓰고 야상 자락을 단단히 여몄다. 두통이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다. 비도 오는데 빨리 갔다 와야지. 정한은 바이크가 사라진 쪽을 따라 길을 계속 걸었다. 꽃다발 두 개를 안은 홈봇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오, 우리 회사거다.’ 


 

뒤를 돌아 동그랗고 까만 뒷통수를 오래 바라보다, 정한은 코를 훌쩍이며 다시 약국으로 향했다. 구름이 서서히 몰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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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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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다앙근
다들 현생이 너무 힘드신가봐요.. ^*^ 내 곁엔 호시부인님만이 ㅜㅜ
7년 전
독자2
작가님 기다렸어요ㅠㅠㅠ 잔잔하니 이런 분위기 너무 좋습니다,,♥ 다음화도 기대할게요!!
7년 전
다앙근
ㅠㅠㅠㅠ 독자님 보고 싶었어요 현생에 치일때마다 독자님 생각을 을매나 했는지 몰라.. 잊지 않고 기다려주셔서 고마워요!!
7년 전
독자3
생선입니당!.! 드디어 자까님 글을 다 읽었지만 다음 내용도 읽고 싶고 그렇습니다ㅠㅠㅠ 그나저나 석민이가 드디어 이름을 붙여줬네요 이제부터 그 아이의 이름은 순영이가 되는 거겠죠 한동안 석민이가 힘들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7년 전
다앙근
캬 예지력.. 이쯤하여 프롤로그에 나온 순영이의 기기 번호를 다시 봐주세요! 7 23 15 14로 나누어서 그 숫자번째 알파벳을 대입하시고 전체 알파벳을 봐주세요 저는 이미 스포를 하였답니다~
7년 전
비회원 댓글
자까님 제가 너무 좋아하는데 이마음을 정말 텍스트로 표현할 수 가 없어여...! 미친 글읽으면 무슨 물마시는 것마냥 호롤롤로 들어가서 흐앙 몰입력 짱인데 글이 반쨕반쨕 자가님 표현 왜 이렇게 건조한데 이쁘고 그러면 저 석순케미에 화학적 심쿵
아 안돼 이거 첫번쨰 댓글인데 작가님한테 밉보이는 거 아니겠, 겠,..
그래도 쟈가님 혼또니 럽야 글 진짜 애정해요 흐어
저 부농 새우에요... 기억해주새우 자까님 글에서 헤엄헤엄하니까여...

7년 전
다앙근
ㅅ.. 세상에.. 제가 독자님을 왜 미워합니까!!!!!!! 진짜 재밌게 읽어주셔서 세상 감사는 제가 다 할뿐 ㅠㅠㅠㅠㅠㅠㅠㅠ 고정닉 제가 혼또니 기억하겠습니다 부농새우부농새우부농새우부농새우 근데 사실 이거 아세요? 제가 글을 잘 쓰는게 아니라 석순이들 케미가 다한다는거☆★☆★ 그러니 이제 안심하시고 석순이들에게 빠져드시면 됩니다 최고되죠 우주대메이쟈 이석민x권순영 ㅠㅠㅠㅠㅠ 칭찬은 이 둘에게 모두 돌리겠습니다 우리 오래 봐요!
7년 전
독자4
가방이에요ㅜㅜㅜㅜ석민이가 드디어 이름을 불러주네요ㅠㅠㅠㅠ수녕ㅇ이라니ㅜㅠㅠㅠ하ㅠㅠㅠㅠ비맞으면서도 석민이 생각하며 걸었을 수녕이 생각하니 짠하고ㅠㅜ이와중에 찬이랑 솔이..깊은 사이가 될지 아니면 어린 날의 호기심이 될지 궁금해요ㅜㅠ진짜 앙근님 필력 최고되버렷 ㅠㅠㅠㅠㅠㅠㅠㅠㅠ
7년 전
다앙근
이 모든 공을 우리 액휘들에게 돌립니다 ㅎ 이름부터 석순 솔찬 케미 쩔지 않습니까? 후 (비속어) (심한 욕) (아주 심한 욕) 애들 상상하면서 쓰니까 심장 트질거 같아요 우 이석민 우수에 젖은 눈빛 미터따고요 ㅠㅠㅠㅠㅠㅠㅠ 나 오늘 빨리 6편 써야 되는데 언제 씻냐 애들 좋아서..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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