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mond Dust
부제 - 네 ; 시
- 4AM
* 다이아몬드 더스트 : 얼음의 미세한 결정이 공중에 무수히 부유하는 현상. 본체는 바늘, 각기둥, 평판 등의 모양을 한 미세한 얼음이다.
- 과학백과사전 中
*
"나 집 나갈거야!"
"나가. 기지배야."
어릴 적부터 엄마와 다툴 때면, 습관처럼 뱉는 말이었다. 나 집 나갈거야. 그럼 엄마는 그때마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나가라는 말을 남겼다. 어릴 때는 그 말에 상처를 받아 두 번 다시 집에 안 들어가겠다고 다짐했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다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집이 최고인데, 어디를 가. 요즘의 내가 하는 가출 선언은 정말로 집을 나가겠다는 것이 아닌, 나 화났어!를 알리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유치하게도.
가출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하고 겉옷을 챙겨 나오면, 언제나 현관문 앞 아니면 놀이터 오른쪽 그네 그것도 아니면 비상구 계단에는 김태형이 서 있었다. 7살 때 우리 옆집으로 이사를 온 김태형은 이사를 온 날을 기점으로 나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둘이 친해진 계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내가 김태형을 울렸고. 김태형은 그런 내게 짝꿍이 되어주지 않으면 엄마에게 다 이를거라며 어린 나이치고 똑똑하게 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시작으로 짝꿍이라는 이름의 단짝. 친구가 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나보다 작았던 김태형은 가출을 하는 나를 보며, 제 작은 손으로 내 소매를 잡아채고 말했다.
"우리 엄마가 가출은 나쁜 형누나들이 하는 거랬어. 너뚜 나쁜 형 할거야? "
"내가 왜 형아야? 나는 여자잖아!"
"... 너는 형아야."
그때의 나는 나를 자꾸만 형이라고 부르는 김태형을 집앞 계단에 앉히고는, 두 시간 가량 내가 누나인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고는 했다. 나는 머리도 길고 예쁘자나! 하면서. 그럼 김태형은 특히나 '예쁘다.'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고서는 거짓말쟁이.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를 가리키며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얘는 거짓말쟁이래요! 하면서.
"또 나가냐?"
"신경 쓰지 말아주라."
"저러다 한 번 어디가서 양아치들한테 맞고 와야, 정신 차리지. 저거."
중학교때의 김태형은 솔직하게 재수없었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맨날 노는 것 같은데 성적도 늘 나보다 좋았고, 햄버거랑 피자를 같이 먹으면서도 본인은 살 하나 찌지 않았다. 심지어 애기 때는 생기다 만 것 같았던 얼굴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 여자 아이들에게도 꽤 인기가 많았다. 그래도 가끔 여자 애들이 선물해준 먹을 거를 나눠줘서, 그건 좀 좋기도 했다.
교복을 입기 시작한 우리에게는 위에 내용처럼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 속에서 변하지 않았던 딱 하나는, 김태형의 귀신 같은 촉이었다. 김태형은 내가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우리 엄마에게 그리고 나에게 전해 듣지 않아도, 나의 행동과 말투 만으로 알아챘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든지 나를 제 옆에 끼고 있다가, 뒷덜미를 잡아 그대로 집까지 함께 갔다. 엄마는 늘상 김태형에게 잡혀오는 나를 보며, 태형이의 라이더에 또 걸려왔냐며 혀를 찼다. 나는 그때마다 김태형이 조금씩 더 미워졌다. 차라리 어디 양아치들이 때릴 때 때리더라도, 김태형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들어가라."
"... 아. 깜짝이야."
현재의 김태형은 더 재수없다. 나랑 같은 고삼 수험생인 주제에 엄청나게 어른인 척 또 선생님인 척 행동한다. 그래서 내가 '집 나갈거야!'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이미 우리 집 앞 현관에서 귀찮다는 듯이 집안으로 턱짓을 하며 말했다. 들어가라. 나는 그때마다 예고없는 녀석의 등장에 뒤로 넘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김태형은 그런 나를 잡아주기는 커녕 휴대전화로 몇 번이고 찍으며 그 다음날 등교길에서 놀리기 바빴다. 재수없게.
**
벌써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나는 반팔, 반바지 차림 그대로 집을 나온 내 자신을 원망하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오늘 하루의 상황이 슬로우모션처럼 스쳐지나갔다. 다른 때보다 모의고사를 더욱 망친 탓에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우울하고 우울했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내 속도 모르고 김태형의 성적을 들먹이며, 이러쿵 저러쿵 가시 같은 말들을 내뱉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시 같은 말까지는 아니었는데, 내 기분이 납작하고 날카로워서 그렇게 받아드렸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찌됐든 이번에는 엄마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정말 정말로 집에 안 들어갈거야.
휴대전화로는 우리 엄마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 같은 김태형에게 전화가 밀려왔다. 전화 틈틈이 문자로 협박이었다가 걱정이었다가 또 다시 협박인 문자가 날아왔다. 물론 김태형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김태형 탓이었다. 이번만큼은 결코 김태형에게 들키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학교 뒷산 입구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머지 않아 김태형이 학교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곳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뒷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몇 번 가봤던 곳이라 익숙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
"... 완전 망했다."
새벽에 산길을 능숙하게 찾아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돌아가려 했지만, 내려가는 길이 어딘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이 자리에서 울어버릴까. 그럼 아무나 와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언젠가 봤던 동물농장 속 늑대울음 소리가 사람울음 소리와 비슷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생각은 늑대가 나한테 오면 안 되잖아. 까지 이어졌고, 결국 지금은 그냥 바닥에 앉아서 아랫입술을 문 채로 히끅거리며 눈물을 참아내고 있었다. 휴대전화는 산이라 잘 터지지도 않는건지 계속해서 수신상태가 불량했고, 여름임에도 날이 이상하게도 겨울밤마냥 추워져서 파리하게 몸이 떨려왔다. 되는 일이 하나가 없었다. 제대로 된 가출은 처음이라, 가출이 이렇게 어려운 건지도 몰랐다.
그러던 중, 시간을 보기 위해 꺼낸 휴대전화의 수신막대가 갑자기 풀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익숙한 이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태. 한글자였지만, 이토록 마음이 놓일 수는 없었다.
"김태형! 살려줘! 여기 산 뒤! 아니, 학교 뒤에 산!"
나는 혹시라도 통화 중 전화가 끊길까, 내 위치를 먼저 외쳤다. 그러자 김태형은 가쁜 숨을 몰아내쉬더니, 짐짓 화가 난 목소리를 꾹 눌러담으며 답했다. 죽일거야. 너 진짜.
"죽여. 죽여도 되니까, 빨리 ㅇ,"
결국 불안불안 하더니 끊겨버린 전화였다. 나는 제발 김태형이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이곳으로 와주기를 바랐다. 가능하면 따뜻한 옷도 같이 가지고. 날이 정말 이상하리만큼, 추웠다. 아무리 새벽이라도. 시간은 벌써, 세 시 오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그렇게 오 분쯤 지났을까. 김태형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용케 알아듣고 찾아온 것인지, 김태형은 계속해서 내 이름을 외쳤다. 어딨어! 있으면 대답해! 나는 김태형의 목소리에 바닥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 몸에서 나올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를 짜내 답했다. 여기! 사실 여기라는 말만 듣고 오기에는 산길이 지나치게 어두웠지만, 김태형은 제 친구와 함께 학교 내 동아리를 '산악 동아리'로 들어서 무려 이 년이나 활동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여간 또라이 같은 게 아니지만, 어느날 갑자기 다람쥐에 빠져가지고 다람쥐를 볼 수 있는 산을 타겠다며, 심지어 제가 산악 동아리를 만들었다. 그러니 나보다는 산길에 훨씬, 능했다.
"... 너 진짜 디질래."
"야아. 나 진짜 무서웠어! 춥ㄱ,"
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김태형이 제자리에 앉아, 무릎에 손을 얹고는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나는 그런 김태형을 보고는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시간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들어보라며, 이제 막 칭얼거리기 시작했는데. 김태형은 제가 입고 있던 야상을 벗어 내 어깨에 덮어주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옷은 고마운데, 품까지는 필요없는데.
"... 야."
"몸 차잖아. 진짜. 집 못 나가서 죽은 귀신 붙었냐?"
"뭐?"
"어렸을 때는 사탕 안 사준다고 집 나가, 다 커서는 어머니가 좀 뭐라고 했다고 집 나가. 이게 말이나 되냐고."
"야. 엄마가 좀 뭐라고 한 수준이 아니거든?"
"아니긴. 가만히 좀 있어. 몸 좀 녹이게. 너."
"됐어. 안지마. 가. 저기로 가. 너랑 안으면 몸에 두드러기 나."
"좀 나. 그럼."
나를 다그치는 듯한 말투에 심술이 나, 김태형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마른 주제에 저도 남자라고 쉽게 밀려나지 않는 아이였다. 그래서 두드러기가 난다는 말과 함께 아이의 정강이를 걷어 찼는데, 내가 걷어차기 전에 빠르게 다리 한쪽을 피한 김태형이 그럼 두드러기 좀 그냥 나라며 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십몇년 정강이 좀 맞더니, 이제는 피할 줄도 아네.
"야. 근데 여기 되게 춥지."
"당연하지. 바로 앞에 호수잖아. 안 춥겠냐."
"호수였어? 저거?"
"그럼 호수지 뭐야."
"야. 아까 내가 저기 휴대폰 플래쉬로 비춰봤는데, 완전 꽝꽝 얼어있던데? 그냥 땅처럼."
"말 같은 소리를 좀 해라. 여름인데, 무슨. 너 드디어 머리도 맛 갔냐. 예전부터 좀 가기는 갔었는ㄷ,"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 와서 근처를 살필 때, 무슨 호수가 이렇게나 꽝꽝 얼어있나 싶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자세히 비춰봤지만, 그래도 여전히 얼어있는 공간에 '아. 호수가 아니고 그냥 땅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산을 잘 아는 김태형이 호수라니, 다시금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드디어 머리도 맛이 갔냐는 김태형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얼어붙은 호수로 향했다. 이번에는 피하지 못한 김태형이 제 다리 한 쪽을 부여잡으며, 외발로 나를 따랐다. 저거 힘만 남아 돌아가지고.
"야! 봐봐. 다 얼었지?"
정말로 얼었다니까. 김태형은 제 휴대폰으로 호수를 비춰보더니, 정말로 얼음으로 뒤덮인 호수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짜라니까.
"... 말이 되냐? 아무리 그래도 지금 여름인데?"
"내가 말했잖아! 나도 그래서 이상하다고. 근데 여기 엄청 춥지. 겨울보다 추워."
"... 그런 것 같네."
김태형은 그제서야 이곳의 추위를 알아챈 건지, 반팔 아래로 드러난 제 팔뚝을 쓸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제 휴대전화로 이곳의 기온을 확인했다.
[ 영하 14도]
"... 핸드폰 망가졌나봐. 여기 영하 십사 도라는데?"
"... 진짜로?"
나는 김태형의 말에 그럴리가 없다 싶으면서도, 정말 그만큼 추운 날씨에 어느정도 납득이 되었다. 이거 꿈 아니야?
' 네 시! '
그 순간, 휴대전화 속 시간을 알리는 여자아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시! 어느덧 하늘에 제법 푸른 빛이 돌았다. 김태형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이곳을 훑고 있었다. 나도 그런 김태형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작스레 환한 빛이 호수 정중앙으로 떠올랐다. 김태형과 내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호수 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니,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눈이, 흩어지고 있었다.
(지금 태형이와 함께 보는 풍경이라고 생각하고 봐주세요! 지금 꼭! 보셔야 해요! 글 다 읽고 보시면, 몰입이 떨어지실 수도 있으니까. 제발... 꼭! 지금 봐주세요 ㅜ_ㅜ 급하신 분들은 1분 30초부터 봐주셔도 됩니다! 예쁜 영상이에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김태형은 나를 제쪽으로 끌어당기고는 물었다. 저거 보여? 나는 그런 김태형의 팔을 잡아채고는 기이하면서도 미치도록 아름다운 풍경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태형은 그 찬란의 끝을 달리는 것에서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거 꿈인 것 같지. 나는 그런 김태형의 말에 그래. 이게 꿈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싶어 '응.'이라는 짧은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몇 초사이에. 아주 순식간에.
김태형이 입을 맞춰왔다. 나는 내게 입을 맞춘 김태형에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그러자 김태형이 내게서 멀어지며, 내 눈가를 검지 손가락으로 툭하고 쳤다.
"너는 꿈에서도 무드가 없냐. 속눈썹 간지러워."
"... 야, 너, 뭐ㅎ,"
"눈 감자."
김태형의 큰 손이 내 눈가를 가림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누군가 첫키스를 하면 종소리가 들린다던데. 나는 왜 쪽쪽거리는 우리의 입맞춤 소리밖에 안 들리지.
그렇게 얼마쯤 입을 맞췄을까. 김태형이 멀어졌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내 눈앞의 사람은 김태형이었다. 나 정말 김태형이랑 꿈에서 키스했나봐. 이거 어디서부터가 꿈이야? 김태형은 생각에 잠긴 나를 보고서는 실소를 터트리더니 내 코끝을 아프지 않게 깨물고는 말했다.
좋아하고 있어.
꿈에서 하는 키스에서도 가슴이 터질 만큼.
**
下 예고
"태형이랑 있었던 거야? 왜 연락이 안 됐어! 엄마 걱정하게!"
"...?"
"아니야. 됐어. 들어왔으니까 됐어.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 엄마 이거 꿈 아니ㅈ,"
"졸려? 하긴 아침이 다 돼서 들어왔는데, 졸리겠다. 좀 자. 어차피 토요일인데."
"이거 꿈 아니야? 진짜로?"
"충격이 컸나보네. 우리 딸... 엄마가 정말 미ㅇ,"
아. 개망했다.
**
겨울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네시라는 곡을 듣자마자 떠오른 영상이 있어서, 그 영상을 보며 쓴 작품이에요...! 아이들이 여름 속에서 겨울을 만난 건, 일종의 판타지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아이들의 일은 전부 다 꿈이 아니었고, 다이아몬드 더스트 (세빙)은 쉽게 말하면 아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도와준거죠. ㅎㅎ (이런 판타지 어렸을 때, 하나씩들 있자나여?) (나만 있었다구 한다...) ㅎㅎ 하편은 감당이 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좋아해주신다면... 네. 그때 보아요.
+ 저 영상 꼭! 꼭! 봐주셔야 이번 작품이 더욱 깊숙이 닿으실 거예요. 여러분이 태형이와 함께 본 풍경이라고 생각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