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세현씨? "
" 말 놓죠. 동갑인거 다 아는데. "
한 방 먹었다. 두 방 돌려줘야 하는데.
" 그래. 용건만 간단히 하자. "
" 커피는? "
" 니 앞에 물 있네. 물 마셔. "
" 사준다며. "
" 돈 없니? "
어금니를 악 하고 무는 여우의 입가가 너의 입가의 미소를 띄게 만들었어.
한 방은 먹였다.
" 그래서, 용건이 뭔데. "
" 너 이홍빈이랑 잤다며. "
" ㅁ, 뭐? "
" 잤다며. 이홍빈이랑. "
" 누가 그래? 내가 걔랑 잤다고? 우린 그냥 평범한 "
" 그래서, 안 잤니? "
" 당연하지. 누가 그런 유언비어를 퍼트려? "
" 쇼했구나. 이홍빈 가지고. "
" 주어 동사 목적어를 확실 "
" 이홍빈이 그러더라. 너랑 잔 것 같다고. 모텔에서 니가 울고 있었다고 이제 어떻게 하냐고. "
" 뭐? 홍빈이가? "
" 내 말 아직 안끝났는데. "
" ……. "
" 넌 사람 발목을 그딴식으로 잡는구나. "
" 누가보면 둘이 사귀는줄 알겠다? "
" 적어도 너랑 걔 사이보단 깊지. "
" 니가 뭔데? "
" 글쎄, 그래도 내가 너보단 나은 사람 아닐까. "
" 이홍빈이 시켰니? 헤어지고 싶으니까 좀 떼달라고? "
" 이홍빈 마음약해서 그런거 못시켜.
오죽하면 그렇게 여자친구가 많았어도 지가 찬 건 1번 밖에 없을까. "
" 그럼 니가 지금 내 앞에서 나서는 이유가 뭔데? "
" 오랜 친구로써. 이홍빈이 너-무 답답해서. 됐니? "
" ……. "
휴지를 찢어질 듯이 쎄게 움켜 잡는 여우의 표정에서 넌 이제 가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지금쯤 치고 빠져야 저 여우가 더 약이 오르지.
" 아무튼, 더 이상 이홍빈 발목 잡지 마. 그새끼한테 지금까지 어떤걸 뜯어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 대단한 위인 나셨다 "
" 박세현. 너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 "
" 내가 왜? 그래, 뭐 그까짓 남자야 걔 말고도 많은데. 걔 보면 전해 줘. 너 차였다고. "
" 니가 차인거라곤 절대 생각 안하는구나. 꼴에 자존심은. "
마지막 멘트가 너무 쎘나, 자존심은 건들지 말 걸 그랬나.
넌 나가면서도 계속 걱정을 해.
혹시 저 여우년이 뒤에서 뒷통수라도 때리면 어떡하나.
그렇게 당당한 척 카페를 나오니 긴장감이 싹 풀리면서 몸이 더 노곤노곤해지는게, 그만 힐 신은 발이 살짝 꺾여버렸어.
" 아, 썅. "
엄마가 혼자 있을때 말 하는거 애정결핍이라 그랬는데,
. 나도 애정이 부족한건가. 난 지금 이홍빈 하나때문에, 걔가 뭐라고 여기까지 나온건가.
온갖 잡생각이 다들어서 겨우겨우 아픈 발을 질질 끌고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은 너야.
눈이 오려는건가 아님 스모그인가
하늘도 우중충하고. 덩달아 기분도 우중충해져서는 잘 듣지도 않는 이어폰을 꺼내 발라드를 틀어.
" 야. "
" 악!! "
" 니 여기서 뭐해. "
" 이홍빈? "
안그래도 박효신 노래때문에 더 우울해져 있는데, 이홍빈이 떡하니 나타났어
.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 버스타려고? "
" 차 있어? "
" 병신. 아까 너 내려줬잖아. "
" 아, 맞다. 그럼 빨리 가자! 아, "
" 왜 그래? 다쳤어? "
" 아니? 다치긴 개뿔. 나 존나 튼튼해! "
" 하긴, 고딩때 우유를 그렇게 쳐먹더니. "
" 차는. "
" 저기. "
" 니 요즘 좋은거 먹냐? 엉덩이가 토실토실- "
" 디질래. 손 떼라 니. "
" 얼씨구. 누나가 궁디 좀 만지는데 너 "
" 타. "
" 옙썰. "
조수석에 올라탄 너도 여자니까, 속으로 내심 이홍빈이 안전벨트를 매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매너는 개뿔. 에라이 개새끼
" 뒤에. "
" 어? 뭐. "
" 뒤에 봉지. "
" 이거? 뭐가 이렇게 무거워? "
개새끼라 그런거, 매너 없다 그런거 다 취소.
봉지를 열어보니 구겨질까봐 예쁘게 넣어둔 네 운동화가 널 반기고 있어.
" 올. 감동? "
" 니 힐이 니 몸무게를 감당하겠냐. "
" 개새끼야 52키로거든!! 니 자꾸 돼지돼지할래 개새야!! "
" 전화나 받아. "
" 호모개새... "
왜 항상 중요한 상황에는 전화가 오는건지,
혹여나 또 상혁이가 아닐까 하는 괜한 마음에 넌 조심조심 핸드폰 발신자창을 봤는데.
- 너 이새끼 오빠님 오시는데 집에 안쳐박혀있고 어디야!!
" 어? 아. 왔냐? 벌써? "
- 그래 이새끼야. 빨리 들어와 치맥땡기자.
" 치맥? 에이, 소주도 사갈께. "
- 그래 끊자.
" 콩, 오빠 왔나봐. 치킨 샀다는데 너도 먹을래? "
" 야 니 오빠면 내 형이고 우리 누나면 니네 누나야. 뭘 새삼스럽게. "
그렇게 넌 다시 운동화로 신발을 갈아신고, 이홍빈과 끊임없이 투닥거리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
치느님의 향기가 온 집안을 은혜롭게 감싸고 있고, 오빠새끼는 언제나 그랬듯이 변함없는 잉여자세로 둘을 반겨기고 있지.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하루, 그리고 어느덧 저녁.
그러나 아직 하루는 저물지 않았어.
그리고 원래, 밤은 낮보다 뜨거운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