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먼저 들어가. 교문 앞에서 선 내가 백현에게 눈짓했지만 백현은 왜 그러냐는 듯 오히려 궁금한 눈빛을 보내 왔다.
"화장실."
"같이 가! 기다려 줄께."
됐어. 억지로 나를 따라 오려고 내 팔목을 붙드는 백현을 힘들게 떼어 내고 화장실로 걸음을 향했다. 괜히 같이 교실에 들어가면 의심만 받을게 뻔하잖아…. 괜히 볼 일도 없으면서 들어온 화장실에서 나는 잠자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데, 입은 웃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누구한테서 분명히 본 표정이었는데…. 그러나 생각이 날 듯 말 듯 머리가 아파와 곧 생각을 관두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교실로 들어서자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던 종인과 눈이 마주쳤다. 급하게 눈을 피하고 내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필통과 책을 꺼냈다. 아직까지는 별 반응이 없는 종인에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안심을 해서는 안됐다. 종인은 쉽게 포기할 인물이 못됐다. 분명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 날 괴롭히려 들 것이다. 대체 내게 왜 그러는 걸까. 처음엔 차라리 종인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편할 것이란 생각에 미워하지 않으려 해 봤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니었다.
"백현아, 나 이것 좀 도와줘."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종인의 목소리에 살짝 몸이 반응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일부로 날 자극하려는 게 틀림 없었다. 백현이 종인에게 다가가는 듯 발소리가 들렸다. 뭔데…? 백현이 묻자 종인이 대답했다.
"아까부터 이게 잘 안 잘려. 좀 잘라줘…."
뭘 잘라달라는 걸까.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궁금해져 뒤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종인이 원하던 바대로 행동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꾹 참았다. 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가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스윽, 스윽, 스윽…. 반복해서 종이 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백현의 작은 탄성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바닥에 무언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 백현아. 괜찮아…? 미안. 피, 피 나네…? 어떡해?"
피? 나는 피라는 말에 얼른 뒤를 돌아 백현을 바라 보았다. 책상에는 책이 한 권과 종이 몇 장이 올려져 있었고, 백현은 검지 손가락을 손에 쥔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칼이 뒹굴고 있었다.
"미안. 필통 주으려다가 실수로 너 어깨 건드려서…."
"……괜찮아."
보건실 가면 되지, 뭐. 별로 안 다쳤어. 백현이 떨어진 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백현이 칼을 주으려 몸을 숙인 순간 종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띄었다. 분명히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그 쪽에서 고개를 완전히 돌려 버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이거, 나를 향한 경고인 거야…? 그 때 종인과 백현이 교실에서 일어서더니 나란히 밖으로 나갔다. 보건실을 가는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며칠 간은 잠잠한 듯 했다. 나는 예전처럼 있는듯 없는듯 지냈고 가끔 백현이 와서 거는 장난에 그저 살짝 맞장구만 쳐 주는 정도였다. 사건은 체육시간에 벌어졌다. 짝수, 홀수로 나눠 축구 경기를 진행한다는 체육 선생님에 말에 모두 한 줄로 줄을 섰다. 백현과 내가 짝수팀, 종인은 홀수팀이었다. 또래 아이들과는 다르게 축구라던지, 각종 운동이나 몸을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기 때문에 체육 선생님께 가서 오늘 몸이 안좋아서 못 하겠다고 말씀을 드려 보았으나, 힘들면 천천히 뛰라고 말씀해 주셨을 뿐이었다. 불공평했다. 이미 스탠드에 끼리끼리 자리해 웃고 떠드는 여자 아이들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그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어이, 사포."
"……."
"너 나랑 같은 팀이야. 패스 잘 해라?"
변백현이었다. 나에게 씩 웃어 보이고는 운동장 가운데로 먼저 뛰어갔다. 뭐해, 안 오고! 백현이 뒤돌아 내게 손짓했다. 나도 쭈뼛쭈뼛 운동장 가운데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홀수팀 짝수팀끼리 작전회의를 하는지 쪼그려 앉아 운동장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여기는 현우가 맡아. 아니, 준태야. 너는 여기에 있는게 더 편하지 않겠어? 평소 축구를 잘 하는 모양인지 백현이 아이들에게 둘러 쌓여 이리저리 포지션을 정해 주고 있는듯 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그저 멀뚱멀뚱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도경수?"
"……어, 어?"
"너는 왼쪽 측면 수비해라. 홀수팀의 성재를 마크하는게 좋겠다."
"츠, 측면…수비…?"
측면 수비가 뭔지는 잘 몰랐지만,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상대팀의 김성재를 막으라는 뜻 같은데…. 내 되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다른 아이들의 포지션을 일일히 정해주는 백현의 모습은 가히 열정적이었다. 지금까지 본 백현의 모습 중 가장 진지했다. 이 까짓 게 뭐라고 저렇게 진지한 걸까…. 기억을 더듬어 김성재라는 아이에 대해 생각해 냈다. 우리 반에서 조금 까부는 녀석들 중 하나였는데, 키는 조금 컸으나 깡말라 별 실속이 없는 아이었다. 잘 됐다. 대충 졸졸 쫓아다니다가 공이나 뺏으면 되는 거 아닌가…. 백현이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이상 불만 있는 애들 없지? 응! 아이들이 대답하자 백현이 박수를 두 어번 치더니 화이팅! 하고 외쳤다. 그들과 조금 떨어져 괜히 뻘쭘하게 서있던 나는 체육 선생님이 부는 호루라기 소리에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너 저 쪽에 가서 스면 되."
백현이 내게 다가와 나에게 위치를 손짓해 줬다. 어…, 응. 새삼 백현이 조금 달라보였다. 백현이 알려준 곳으로 가서 섰다. 공이 이 쪽, 저 쪽으로 오고 갔다. 뭘 해야할지 몰라 그저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내 앞으로 상대편 팀의 한 아이가 공을 몰고 다가 왔다.
"도경수! 막아!"
백현이 소리를 지르며 그 아이를 쫓아왔다. 나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아이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그 아이가 공을 바로 옆 사람에게 패스해 버렸다. 아이, 씨! 백현이 이번에는 그 아이를 쫓아 달려갔다. 괜히 내가 공을 뺏긴 것만 같아 미안해졌다. 그러나 백현이 곧 그 공을 빼앗아 상대팀 골문으로 빠르게 밀고 들어갔다. 어어…! 어? 백현의 양 옆으로 덩치 좋은 녀석들이 들러 붙었다. 그러나 백현이 빨랐다. 백현이 발을 들어 올려 공을 골문으로 뻥 찼다.
"아…!"
아쉽게도 공이 골대를 맞고 튕겨져 나갔다. 상태편 팀의 골키퍼도 놀란 모양인지 백현에게 엄지 손을 치켜 올려 보였다. 백현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백현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시 공이 운동장으로 던져지고, 아이들이 공을 따라 이 쪽으로, 저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나도 조금은 익숙해져 공이 내 쪽으로 오면 나름 열심히 뛰었다. - 삐익…. 체육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쉬는 시간 10분!"
연속으로 2시간 체육이 붙어 있어 다음 시간도 체육시간이었다. 0:0으로 전반전이 끝났다. 땀에 젖은 아이들이 수돗가로 몰려가 세수를 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내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재밌나 봐?"
종인이었다. 내가 대꾸를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자 종인이 그런 나를 내려다 보며 씨익 웃었다. 언제 보아도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너 김성재 마크한다며…. 잘 해봐."
그 말을 남기곤 다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내가 김성재 마크하는 것은 또 어디서 안 거지…? 라는 생각도 잠시, 수돗가에서 아이들과 물을 뿌리고 놀았는지 물에 빠진 생쥐같이 젖어버린 채 내게로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이는 백현을 보고는 그새 그 생각은 지워버렸다.
곧이어 다시 시작된 후반전 경기에 아이들은 골 하나는 꼭 넣자! 하며 서로 기합을 넣었다. 아까보다 더 치열해지는 공 뺏기에 가끔 몸싸움도 오고갔다. 다행히 내 쪽으로는 공이 많이 오지 않아 눈으로 경기 상황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 때, 백현이 몰고가던 공을 종인이 태클을 검과 동시에 백현이 앞으로 넘어졌고 공은 김성재에게로 굴러갔다. 종인이 쓰러진 백현에게 손을 내밀며 뭐라고 말하는 듯 했다. 거리가 조금 멀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네는 모양이었다.
"도경수…! 김성재 막아!"
우리 팀의 한 아이가 내게로 소리를 질렀다. 백현과 종인을 보고 있던 내가 시선을 돌려 앞을 보니 김성재가 공을 몰고 내게로 달려 오고 있었다. 당황한 내가 김성재에게로 뛰어 갔다. 김성재의 옆에는 아무도 따라 붙는 아이가 없었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공을 뺏어서 팀에 도움이 되야겠다, 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