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이 내 앞에 내 놓은 전복죽의 맛은 실로 처참했다. 소금을 얼마나 많이 들이 부은건지 혀가 얼얼해 질 정도로 느껴지는 짠 맛에 절로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맛…. 없지."
자신 없어하는 백현의 눈빛에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실망한 듯한 표정의 백현이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쥐며 "망했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더 이상 먹는 것은 무리일 것만 같아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백현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거실에서 기다려. 라면 끓여줄테니까…."
백현이 라면도 제가 끓이겠다며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지만 내가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라며 살짝 밀쳐내자 그제야 백현이 부엌에서 나갔다. 라면 두 봉지를 꺼내 냄비에 물을 부은 뒤, 가스레인지 위에 물을 올렸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고 접시도 꺼내고 젓가락도 준비했다. 항상 이 시간에는 혼자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오늘은 둘이다. 라면도 두 봉지, 젓가락도 둘, 접시도 둘. 거실에서 흘러 나오는 티비 소리와 보글보글 끓는 물 소리가 어우러져 사람 사는 집 같다고 느껴졌다. 혼자 있을 땐 티비도 잘 보지 않아서 집 안은 언제나 고요하기만 했는데 중간 중간 들려오는 백현의 웃음 소리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냥, 그냥 혼자가 아니란 것이 좋았다.
라면에 계란까지 풀어 넣고 거의 다 끓었다 싶을 즈음 백현을 불렀다. 백현이 금새 달려와 먼저 식탁에 앉아 나를 보챘다.
"얼른 줘! 배고파 뒤지겠어!"
냄비를 들어 식탁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라면이 눈 앞에 나타났다. 와, 냄새 죽인다! 백현이 젓가락을 빼 들고는 크게 한 젓가락을 자기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는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흡입하다시피 먹었다.
"야, 좀 천천히 먹어…."
"야. 너 라면 진짜 잘 끓인다. 최고, 최고."
"……."
"너 나중에 라면 가게나 차려라. 아! 아니다. 같이 차릴래? 6:4로 동업하자. 어때? 특별히 너 6 줄게."
혼자 앞서나가는 백현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어? 진심인데? 나 장난치는 거 아냐…! 백현이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라면 불기 전에 다 먹어."
"야. 진짜 약속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진짜 같이 라면 장사 해야 된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라면을 한 젓가락 덜었다. 매일같이 먹으니까 당연히 잘 끓일 수 밖에 없지. 그러나 오늘 따라 라면이 다른 날 보다 조금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
"안돼 잠은 너희 집에 가서 자야지."
"야, 치사하게! 지금 11시야. 이 시간에 나 혼자 집에 보내겠다고? 나 납치 당해!"
쇼파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백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
"같이 등교하지, 뭐! 좋네. 나 교복도 있고 저기 가방도 있는데 뭐가 문제야?"
마치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인냥 이리저리 티비 채널을 돌리던 백현은 흥미가 떨어졌는지 티비를 확 꺼 버리더니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자."
"……ㅁ, 뭐?"
갑작스러운 백현의 말에 당황한 내가 말을 더듬자 백현이 그런 나를 보고 푸하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어이, 사포. 혼자 무슨 변태 같은 생각 하는 거야? 난 그냥 자자는 뜻인데…. 슬-리-입! 고우-투-베드!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그, 그런거 아냐! 괜히 부정해 봤지만 백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쇼파에서 일어나 내게 점점 다가왔다.
"뭐, 뭐야…."
"무슨 생각 했어, 도경수…?"
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자, 백현도 그에 맞춰 내게 다가왔다.
"자, 장난 치지마!"
"장난 아닌데? 우리 아까 옥상에서 하던거 지금 마저 해볼까?"
"…신고할꺼야! 가까이 오지마!"
"아깐 너가 먼저 키스해 달라고 했잖아."
그, 그거야….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거야 뭐? 나를 놀리는데 재미가 들렸는지 아직도 얼굴엔 한가득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피곤하다! 진짜 자자."
이내 백현이 내 팔목을 붙잡고는 나를 내 방으로 끌고 갔다. 야, 그래도 씻고 자야지…!
...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준 츄리닝 바지와 티셔츠로 갈아 입은 백현은 내 옆에서 코를 색색 골며 이미 잠에 빠져 버린듯 했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등을 맞대고 자는 것도 실로 오랜만의 일이였다. 괜히 긴장이 되 잠도 오지 않았다. 오늘 밤은 이렇게 설칠듯 싶었다. 내가 어쩌다가 얘랑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만큼 허물없는 사이까지 된 거지. 사람에게 잘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나 자신에게 의문을 품었다. 오늘 종인이 내게 건넸던 말들이 귓가에서 울렸다.
'보내줄게, 변백현. 우리 세훈이 있는 곳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자 몰려오는 어둠이 너무나 무서워 다시 눈을 떠 버렸다. 심장이 떨려 왔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또 다시 백현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무섭고 온 몸이 떨려왔다. 바르르 떠는 내 손 위로 따듯한 온도가 느껴졌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백현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왜 그렇게 떨어…. 무서운 꿈 꿨어…?"
나긋한 목소리로 백현이 내게 물어왔다. 자상함이 묻어나는 백현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악몽이야…. 평생 잊혀지지 않을. 차마 대답을 할 순 없었지만 백현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내 옆으로 몸을 붙여왔다. 바로 옆에서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내가 옆에 있을께. 이제 그만 코 자자. 아이를 재우듯이 내 등을 두 어번 토닥였다. 그런 백현에게 조금 더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품에 파고들자 거의 백현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확실히 아까보단 마음이 진정되는 듯했다.
지금 난 너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 그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너를 곁에 두려 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이번만은 반드시 잃지 않을 것이다. 예전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눈을 떠 보니 백현은 아직 옆에서 자고 있었다. 전날 밤 뒤척이며 잠을 설치긴 했지만,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대충 씻고 부엌으로 가 식빵과 계란을 꺼냈다. 엄마가 그랬듯이 토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반숙을 좋아하는지, 완숙을 좋아하는지 알 길이 없어 계란은 그냥 자신의 취향에 맞게 완전히 익혔다.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자 백현이 잠에서 깼는지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굿모닝-."
나와 눈이 마주친 백현이 푸스스 웃으며 부엌에 들어왔다. 내 뒤에 서서 식빵을 굽는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왠지 이러고 서 있으니까 신혼 부부 같다라는 생각이 들자 화들짝 놀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도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랐다. 아직 잠이 덜 깼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백현이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 이상하게도 계속 백현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이 미안함 때문일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그래, 미안함 때문이야. 앞으로 종인에게 시달리게 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화장실에서 나온 백현이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식탁 앞에 앉았다. 제 앞에 놓인 토스트를 한 입 덥썩 베어 물더니만 내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려 보였다.
"야. 작전 변경. 라면 앤드 토스트집이야."
어느새 토스트를 2개나 해치워 버린 백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배를 통통 쳐 보였다.
"으아- 배불러. 근데 도경수같은 아내 있으면 진짜 좋겠다. 요리도 잘 하고, 집안 살림도 잘 할 것 같아."
백현의 실 없는 농담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딱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부끄러웠다.
방에 들어와 교복으로 갈아 입고 학교에 갈 채비를 마쳤다. 거실에 나와보니 백현도 준비를 다 끝마친 채로 가방을 메고 거울 앞에서 한참이나 제 얼굴을 쳐다 보고 있었다.
"야, 사포야. 진짜 큰일이다."
"……."
"나 왜 이렇게 잘 생긴거냐."
후…. 백현의 말에 대답을 않고 신발장으로 가서 신발을 꾸겨 신고 먼저 집에서 나와버렸다. 야아! 같이 가…! 집 안에서 백현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변백현과 결혼할 미래의 신부는 골머리 좀 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