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중궁궐 06
w. Cecilia
1
태형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거울을 보니 영락없는 사내의 꼴이다. 생전 얼굴에 분칠 한번 해본적 없던 터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일단은 나비가 빌려준 분첩으로 살짝 살짝 양 볼에 찍어 발라보았다. 금새 얼굴이 환해지는 모양을 보며 태형은 마냥 신기해한다.
"이 분첩이라는 것이 굉장하구나. 얼굴에 흠 하나 보이지 않아..!"
"운화님 다 되셨습니까?"
밖에서 나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태형은 분첩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불편한 자세로 앉아있던 터라 일어나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다리 한 쪽에는 쥐가 난듯 태형은 절뚝거리며 문지방에 다다랐다. 살짝 문을 밀어 얼굴만 빼꼼히 내놓는다.
"예, 곧 준비하여 나가겠습니다."
"흑운 도련님들이 지금 도착하셨다합니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나비님은 먼저 가 계세요."
흑운 도련님들이라니... 태형은 문득 손님들이 도착했다는 소리에 긴장이 된 듯 했다. 혹시 기방에 오자마자 남자임을 들켜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궐 안에 출입하기는 커녕 창피하여 이 땅 조선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어머니의 얼굴을 볼 용기도 안 나겠지... 태형은 문을 닫고 목을 가다듬는다. 워낙에 굵고 낮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기에 여인의 목소리를 흉내내기란 굉장히 어려웠다. 최대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긴 하지만 물어오는 질문에 답을 안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아..! 아! 아!!"
곱고 높은 목소리를 뽑아내려 태형은 목을 풀어본다. 그리고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사뿐 사뿐 걷는 연습을 했다. 사내 놈들 앞에서 이 꼴로 넘어지기는 죽어도 싫었기 때문이다.
태형은 문 밖에 놓여진 꽃신을 신었다. 기생으로서의 첫 날 밤이다.
2
기방은 어느덧 손님들의 출입으로 시끌시끌했다. 부엌에서는 기름진 음식의 냄새가 풍겨왔고, 꺼져 있던 방들이 모두 환하게 켜졌다. 태형은 한참을 두리번대다 나비를 찾고는 그 곳으로 걸어갔다.
"운화님 나오셨습니까?"
"예. 전 이제 무엇을 하면 됩니까?"
"흑운 도련님들은 술자리에 여자를 들이지 않습니다."
"들이지 않다뇨?"
"저희 기생년들은 그저 방 안에 음식과 술을 가져다 놓을 뿐, 그 곳에 머물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기방은 왜 찾아온것이요?"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기생들에게는 인기가 많은걸요. 그래서 방 안에 술을 가져다 놓을 때 어찌나 끼를 부리던지요. 물론 도련님들은 눈길 하나 주지 않으시지만요."
나비의 말에 태형은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옆에 앉아 술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니. 오늘 일은 수월하게 넘어가고 일찍 잠을 청할 수 있겠구나.
"저는 부엌에 가서 상을 내올테니 운화님께서는 탁상을 좀 가져다 놓아주세요."
나비는 태형에게 들고 있던 작은 앉은뱅이 탁상을 건네었다. 꽤나 묵직하다. 이걸 들고 방 안에 들어가서 피면 되는 것인가.. 태형은 그 탁상을 들고 흑운 도련님들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뭍 기생들이라면 하나 하나 옮겼겠지만 태형에게 두개의 탁자를 양 손에 드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뭐 귀찮게 두 번 왔다갔다 하나.."
태형은 두 탁자를 양손으로 번쩍 들었다. 그리고 발 끝으로 문 끝을 살짝 밀쳐내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흑운 도련님들이라는 자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뭐 그렇게 얼굴을 가렸는지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고, 옷들도 시꺼먼 색을 입고 있었다. 태형은 속으로 그들이 흑운 도련님이 아니라 저승 사자 도련님들 같다고 생각했다.
문이 갑자기 발칵 열리자 일제히 흑운 도련들의 시선이 태형에게 꽂혔다. 태형은 순간 당황했다. 이내 꽃신을 벗고 탁자를 위로 올리었다. 여인이 두 탁자를 양손에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광경이 신기한듯 그들의 시선은 태형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태형은 심장이 더 떨려옴을 느꼈다. 분명,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태형은 조용히 탁자를 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뒷걸음질치며 방을 나가려 하는 찰나, 오른발이 태형의 긴 치마에 걸리었다. 태형은 중심을 잃었고, 휘청이다 결국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태형이 정신을 차렸을 때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천장 위에 달려있는 등불이었다. 태형은 왜 자신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지 고민하다 넘어져 지금 바닥에 누워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바닥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
"괜찮느냐?"
태형의 귀가 쫑긋 선다. 어디선가 이 목소리로 괜찮느냐는 물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송구합니다."
태형은 민망하여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연신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하였다. 첫 날부터 이런 대형사고라니.. 기방에서 쫓겨나면 안된다는 생각에 태형은 빌고 또 빌었다.
"무얼 그리 송구하다 하느냐. 괜찮다. 오히려 네가 넘어질 때에 잡아주지 못하여 미안하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
굉장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천둥이 치던 태형의 마음이 한순간에 누그러지고 잠잠해졌다. 태형은 숙였던 고개를 사알짝 들어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그 남자는 정국이었다.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렸지만 태형은 알 수 있었다. 시장에서 자신을 일으켜세우며 괜찮냐고 물어보던 그 목소리였다. 지긋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이었다. 천에 가리웠지만 분명 보이는 오똑한 코였다. 태형은 소스라치게 놀라 성급하게 뒤를 돌았다. 손님에게 뒷모습을 보이는 것은 예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 방을 나가는데... 태형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국님에게 지금의 모습을 보이기는 죽음만큼이나 싫었다. 그리고 정국님이 무슨 용건으로 이들과 기방을 방문했는지도 궁금했다. 일개 비단 장수라는 사람이 이 늦은 새벽에 수상한 자들과 함께라니...
꽤나 오랜 시간 태형은 그 자리에서 얼어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 때, 다른 기생이 상을 들고 들어왔다.
"운화야 네 거기서 뭐하느냐? 어서 내려와서 돕지 않고?"
"예? 예.. 지금 당장 나가겠습니다!"
이때다. 태형은 치마자락을 부여잡고는 미친듯한 속도로 그 방을 뛰쳐나갔다. 뒤에서 정국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정국님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지만, 지금 이 꼴로 이 장소에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정국님이 흑운이라는 조직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흑운이라는 조직은 당췌 어떤 자들의 모임인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이 그 때는 아니다.
4
태형이 나가고 진이 상을 들고 온 기생에게 물었다.
"저 자는 오늘 처음 들어온 기생인가?"
"예 그렇습니다. 많이 서툴러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아니다. 보아하니 많이 놀란 것 같은데 가서 다독여주도록 해라."
그 기생은 정국을 보더니 눈웃음을 지으며 그 앞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안녕하세요, 새로오신 도련님이신가봅니다."
정국은 당황하며 검은 천을 더 위로 올렸다.
"그렇소."
"아까 운화 계집이 도련님에게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들었사옵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소인 섭섭하게 굉장히 대답을 짧게 하시옵니다."
"..."
정국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그 기생은 무안한듯 헛기침을 하더니 자리에 일어나 방을 나갔다.
"보기 드문 기생입니다 그려."
진 옆에 앉아 있던 자가 말을 꺼낸다.
"그렇게 말입니다. 저는 탁자 두개를 한번에 들고 올 때부터 웃음이 나오는걸 참았지 뭡니까."
"천월님은 괜찮으십니까? 꽤나 무거워보이던데..."
"아 예. 괜찮습니다."
정국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을 문지방 너머 밖을 바라보았다. 그 놀란듯한 표정을 어디에선가 본 듯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기생과 연이 있을리가 없었다. 닮은 사람이겠거니...하고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5
"저는 들어가지 않으면 안됩니까?"
"운화님, 왜 이러십니까. 혹 아까 실수 때문에 그러십니까?"
태형은 차마 정국이 있는 그 방에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나 정국이 자신을 눈치채면 어떡하지.. 그 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리고 왠지 정국도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닦달하는 기방 주인의 눈초리에 태형은 포기한듯 술상을 넘겨 받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태형의 등장에 방 안 사내들의 시선이 또 집중되었다. 스믈스믈 입꼬리가 올라가는 꼴을 보아하니 아까 자신의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나보다.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태형은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정국님이 앉아있는 곳으로는 일절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닥만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긴장을 많이 했던 터라 술상이 바들바들 떨려 그릇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었다.
'하..제발..'
태형은 조심스레 무릎을 꿇어 앉아 술상을 내려놓았다. 다 되었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된다. 태형은 한시라도 이 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술상 다리 하나가 태형의 치마자락을 잡고 있었음을 모른채 태형은 그대로 일어났다. 당연히 술상은 엎어졌고, 태형은 그 술상을 엎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재빨리 허리를 굽혀 술상을 잡으려 했으나...
이미 술상은 뒤집어졌고 그 위에 태형이 고꾸라지는 요상한 모양새만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태형의 머리 장식이 벗겨졌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사내놈이라는 것을 들키기까지는 시간 문제였다. 태형은 이렇게 기방에서 쫓겨나게되는구나 생각하며 그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애초에 사내놈이 기생 흉내를 내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냥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나중에 들킬 것, 지금 빨리 들키고 다른 방도를 찾아보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태형의 예상대로라면 지금 분명 떠들석한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방 안은 굉장히 조용했다. 태형은 한 쪽 눈을 살짝 떴다. 분명 천장이 보여야 할 터인데 눈 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까만 풍경이었다. 그 까만 풍경이 흑운 도련들 중 하나의 옷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태형은 어쩔줄 몰라 침만 꼴깍 삼켰다. 그 사내는 두 팔로 바닥을 지탱한채 고꾸라져 누워있는 태형을 가렸주었다. 그 자는 태형에게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어서 머리 장신구를 고쳐 다시 쓰거라. 지금 몰골이 장난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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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신청은 항상 받고 있습니다. 차후에 완결됬을 때에 책으로 만들어 선물을 드릴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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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잔 뭔가 단어하나에 너무 집착하는경향 있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