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소년 이제노
take.1
내 2n년 연구소 인생을 걸고 살다살다 이런 일은 처음 마주하네.
연구소에서 나고 자라서 별 거 다 보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연구소 주변 정찰 나갔다가 주워온 이 놈 때문에 그 얄팍한 생각은 다 접어 버렸습니다.
"사람은 맞아요. 근데 늑대무리 같은 곳에서 살다가 낙오된 것 같고... 몸상태는..."
팀원의 입에서 줄줄 쏟아지는 말은 그저 쟤가 송중기는 아니지만 늑대소년이라는 뜻밖에 안 돼서. 아, 물론 진짜 그런 늑대소년이 아니라 그 습성을 가지고 있는. 그럼 사람이라는 소리인데 뭔 마취총을 쐈대. 무서운 새끼들.
"그럼 선배님 담당이니까 착오 없이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왜 날 담당으로 선택했대... 왜 그래... 내가 생명과 이것저것을 담당하는 건 맞지만 저런 남자애를 나한테 맡기면 어쩌니 이 사람들아.
처음 주워왔을 때는 거지꼴도 그런 거지꼴이 없더니 씻기고 다듬었더니 아까랑은 다르게 멀끔한 모습이더라고. 그렇게 새근새근 자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거 있지. 검사할 게 한두 개가 아니라 계속 잠만 자면 안 되는데.
그리고 그 생각은 일주일만에 개박살 났습니다. 그냥 잠만 재우면 안 될까. 내가 자장가 마스터 해볼게.
"제노야, 그거 씹으면 안 돼 이리 와."
제노(무슨 피씨방 이름보고 소장님이 지어줌)는 말을 안듣는데 잘 듣는 스타일임. 그러니까 일은 치는데 그만 하라고 하면 안 해. 쟤가 씹어서 버린 볼펜만 몇 개인지. 볼펜값 때문에 연구소 망할 수도 있겠다 미친.
그리고 나랑 너무 붙어있으려고 하는 게 문제. 사실 그게 제일 큰 문제인데 뭘 해도 나랑 열 걸음 안쪽으로 붙어있으려고 해서 사람이 미쳐돌아. 지금처럼 이렇게 부르면 쪼르르 와서 아무 것도 못 하게 안긴다고요. 일을 못해. 안 하는게 아니라 못 하는 거임 진심임. 등 토닥여주기 전까지 안 간다니까.
"볼펜은 씹으면 안 돼, 알겠어?"
...모르는구나 그래... 차차 알아가면 되지. 일단은 입에 넣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가르쳐야 되나. 내 팔자에 육아는 없었는데 어떻게 사람 인생이 부침개처럼 뒤집어지지요.
take.2
"이제노 그만."
내가 제노와 상당히 오랜 시간을 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옴과 동시에 할 일이 많아졌음. 말도 가르쳐야 하고 행동습성 같은 것도 최대한 사람과 비슷하게 돌려놔야 하고 또... 이제 볼펜은 안 씹지만 손톱을 자꾸 물어뜯어서 그 버릇도 고쳐놔야 되고, 편식하는 것도... 이거 너무 육아 아니냐.
아, 그리고.
"그만하라는 말이 와서 안기라는 뜻이 아니라니까."
시도때도 없이 와서 끌어안는 버릇도 고쳐야 해. 내가 너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하루 빨리... 근데, 전부 완벽해지면 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선배를 엄마로 인식한 거 아니에요?"
"무슨."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잖아요."
원래 동물들은 처음 본 사람을 엄마라고... 웃겨. 그럼 내가 아니라 소장님을 그렇게 봐야지. 소장님만 보면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무슨. 이름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제노는 이상하리만치 소장님만 보면 으르렁 거렸다. 말리는 나도 등에 소름이 돋을 정도니까 뭐 그 위협성에 대해서는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이유는 대충 알지. 이제노 모든 행동의 근원은 아이가 '늑대' 무리에서 자랐기 때문.
'선배가 소장님이랑 자주 붙어있잖아요.'
'그게 뭐?'
'같이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체취가 몸에 배이고, 제노는 후각이 발달했으니까 그걸 잘 맡을 거고...'
'뭐야, 정리해서 얘기해.'
'자기 사람한테서 다른 놈 냄새나니까 예민하게 구는 거라구요. 왜, 강아지들도 그러잖아요.'
...그 말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난 강아지 키워본 적도 없어서 모른단 말이야.
아무튼 그런 제노에게 말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흘렀고. 중요한 건 진전이 없어...
"오늘도 아니야?"
"전혀요. 선배 오기 전까지는 꿈쩍도 안 해요."
매일이 그냥 연필로 책상만 긁는 이제노와 그걸 지켜보고 있는 후배의 열렬한 기싸움이랄까. 이러다 쟤가 때려치겠다고 하면 어쩌지 그럼 내가 이 지옥같은 스케줄 가운데 제노 글 공부 시간을 마련해야 하는데. 제노야 일시적 보호자에게 효도 좀 해. 더이상 바빠지면 나는 살 수가 없단다.
"방법 좀 더 생각해 봐."
"저 진짜 별 짓 다 하고 있는데, 선배 아니면 근처에도 못 가게 하는 애를 제가 무슨 수로 내 말을 듣게 해요."
과연 제노는 완벽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 번 왜 나는 담당이 되었는가...
"제노야."
그래도 예쁜 건 이름 부르는 걸 딱딱 잘 알아듣고 쳐다봄. 그것만 잘 해. 물론 이거라도 잘 해서 다행이지. 그렇고 말고.
"나랑 공부할까?"
그럼 또 그냥 웃으면서 어깨에 머리 부비는게 제노가 하는 전부라서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죄책감이... 그래... 서두르지 말자... 엄마가 미안하다...
take.3
"따라해봐, 기역."
"기..."
"...역."
"역."
"그렇지, 잘 했어."
결국 제노의 한글공부가 내 차지가 된 이후로 나는 좀 더 제노와 붙어있을 시간이 많아졌고 좀 더 제노가 예뻐졌습니다. 아니 우리 애가 천재인가봐요.
그리고 제노에게 특이점이 왔는데...
"이제노 이름 세 번 쓰고 놀자 우리."
그럼 꼭 고개를 도리도리 하거든요. 우리 제노가 이제 의사전달도 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고 예쁜얼굴로 모든 표현을 다 해... 이러니 내가 천재라고 안 할 수가 있겠어?
"이거 다하면 제노 토닥토닥 해줄게."
보통 이런 거 가르칠 땐 채찍과 당근이 중요하다고 그러더라고요 책에서. 요즘 제가 육아부터 시작해서 사육까지 온갖 서적을 다 읽어보고 있습니다... 바쁜데 시간을 또 쪼개야만 했어 내새끼를 위해.
그래서 내가 찾은 방법은 토닥토닥. 나한테 안기는 걸 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것만큼 좋아하는 제노를 위한 머리 좀 쓰는 못난 어미의 협상...흡. 하지만 공부는 해야하니까 어쩔 수 X. 그리고 효과는 기립박수 감으로 좋았다.
처음에 한두 번은 못 알아 듣는 것 같더니 이제는 귀신처럼 먼저 알아듣기도 하고 지금처럼 뭔가를 하고 얻어야 할 때는 시무룩 하기도 했으며 그래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점점 완벽한 사람에 가까워져 기뻐요. 주절주절 말도 많네 나. 주책이야.
"다 했어?"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며 폭 안기는게 제노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 거야. 이제노 이름은 저렇게 삐뚤하게 적어놓고 이래도 돼? 정말이지 살 수가 없어.
사실 내가 제노보다 키가 작아서 안는 건지 안기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안아주는 것도 꽤나 요령이 필요한 일이라 제노에게 완급조절을 가르쳤다지... 사람은 세게 안으면 갈비뼈가 으스러진단다 *^^*(주륵)
"우리 제노 오늘도 수고했어."
안고 부둥부둥 하면 행복한게 아무래도 제노 천사인가봐... 반박은 안 받을게요.
take.4
그 왜 놀이가 최고의 교육이라고 하길래, 내가 그걸 시도를 좀 해봤는데. 애가 너무 습득력이 빠르기도 하고 이러다가 나보다 똑똑해지는 건 시간 문제 같아서 걱정 되는데 이럴 때는 어쩌죠. 책에 안 나와있어.
"아, 또..."
그리고 제노는 체스를 진짜 잘 해. 원래 똑똑한 사람들이 체스 잘 하는 거잖아요. 맞지 우리 애 천재라니까. 근데 내가 왜 걱정을 하냐면.
"음... 이번 판은 무승부인 것 같은데?"
더 가면 내가 질 것 같아서 저렇게 거짓말을 좀 하면
금방 눈치를 채버리거든요. 그 시간이 점점 단축 돼. 내가 말 꺼내기도 전에 이겨버린 적도 있고 뭐.
"우리 제노가 근데 왜 말만 한 마디도 못 할까."
진심이었음. 이제 글씨도 또박또박 적는데 말을 한 마디도 못 해. 아니 안 하는 거에 더 가까운가.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몇 번 있긴 한데, 제노가 하는 말이라곤
"제노야, 내 이름이 뭐였지? 기억이 안 나네."
"성이름."
뭐, 지금은 이거면 되려나.
take.5
"그러게 내가 그만 놀자고 했잖아."
잔뜩 열이 올라 시무룩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보호자 마음에 상처가 다 날 지경.
인공으로 눈을 만들어둔 방이 있는데 거길 어떻게 찾았는지 나를 꼬셔서 한 시간 넘게 놀다 오더니 홀랑 열감기에 걸려 버렸습니다. 그러게 내가 이제 가자고 가자고 해도 듣는 척도 안 하더라니.
"많이 아파?"
뜨끈한 손을 붙잡아 문질러주자 힘 없이 고개만 젓는데 너 되게 아파보여 제노야.
아무리 효과좋은 약을 먹인다고 해도 꼬박 하루는 앓아야 하는 게 수순이라서 뭘 더이상 해줄 수도 없고, 그냥 약만 제 때 잘 먹여주는 것밖에 없어서 더 답답하다 이겁니다.
까무룩 잠이 든 얼굴을 보고 있자니 처음 보던 날이 생각나서 한참을 그것만 보고 있다가도 잔뜩 쌓인 일이 생각나면 어쩔 수 없이 아쉬운 걸음을 떼는 게 굴 따러 가는 엄마의 마음인가. 아 밤새 돌보고 싶다.... 나도 의료진 할래...
땀 때문에 불편할까 앞머리만 몇 번 정리해주고 나가려는데
"성이름."
난 살면서 내가 내 귀를 의심해본 적이 없어.
"이름아."
근데 너무 생생하잖아 어떡해. 제새끼가 지금 스스로 제 이름을 부른 게 맞나요. 본인 의지로요? 세상에 시바신이시어...
"가지 마."
...일은 내일 어떻게든 다 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