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두화] 무정(heartlessness) 08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8/7/9/8798f25c9a7d5a6e2a8193bfe806dcb6.png)
| 무정 08 |
간만에 본가에서 호출이 들어왔다. 바쁘지 않으면 집으로 와달라는 말. 분명 아버지는 달리 할 말이 있으신게 분명했다. 좋은 일이지 않은 건 확실하고. 아버지는 확실히 고위직 공무원이였기 때문에 평소 생활이라던지, 평소 하던 말투에서 사무적인 분위기가 드문드문 묻어났다. 제 아들에겐 한없이 다정하신 분이지만, 좋지 않은 일에는 분명히 옳고 그름을 제시하는 분. 어렸을 적 용화는 그런 아버지가 멋있었다. 10년 전, 두준과의 관계를 알아 차리고 헤어지라 단언했지만 듣지 않았었다. 떠난 건 두준이여서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었지만. 기껏 용화를 부르며 한다는 말은 예상대로 좋은 말은 아니였다. “학교, 그만 두거라.” “아버지!!” “선생질 하라고 피아노 배우라는 거 아니였다. 게다가, 그 학교.” “…” “윤두준? 그래, 윤두준이구나.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 했다. 무튼 그 녀석과 같은 학교더군.” “… 아버지, 두준이는 왜 끌어들이시는데요.” “주현 양하고 헤어졌다면서, 그것도 그 학교로 부임받은 이후로 말이야.” “…” “이유가 자연스레 성립하구나, 아들.” 아버지,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말아주세요. 다정한 말투와는 다르게 논리적이고 예리한 말들에 용화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0년 전에도 이와 똑같은 억양과 똑같은 말투로 제게 말했었다. 그 때의 악몽이 또 다시 떠오르는 듯 했다. 결국 10년이 지나도 결과는 같게 되는 걸까? 눈을 질끈 감으며 아무래도 방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가 하는 말들을 결코 흘려보내지는 못할 것만 같아서.. “주현 양 아버지께서, 음악 쪽에서 꽤 유명하다더구나.” “이제 끝난 일 가지고 왜 이러세요.” “끝난 일이야 다시 잇으면 되는 거고, 다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릴 때가 되었고.” “그만 하세요, 제 일은 제가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더 이상 제게 강요하지 마세요.” “… 용화야.” “제발, 제발 그만 하세요. 제 고집 꺾기는 힘드실 거에요.” 용화는 집에서 뛰쳐나왔다. 간만에 본가로 부른 이유가 고작 '학교를 그만 두라는 일'과 '두준을 만나지 말라는 일'이였던 걸까, 또 하마터면 자제력을 잃고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어떻게 다시 시작한 사랑인데, 여전히 반대 세력이 많은 것 같다. 더불어, 요즘 두준의 태도가 이상하다. 만남의 횟수와 더불어 연락하는 횟수가 반 이상 줄어들었다. 체육대회가 가까이 다가와 체육 담당이라 바쁜지는 몰라도 제게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두준이 제 눈에서 멀어지면 불안하다. 금방 떠날 것 같은 사람처럼 요즘따라 낯설게 대한다. 두준의 행동과 아버지의 말, 둘 다 용화를 힘들게 만드는 것 같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도 잠잠한 휴대폰을 보며 용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야속하고 야속하다. 제 마음을 먼저 흔든 건 윤두준인데, 왜 점점 내가 더 많이 좋아하는 느낌이 드는 걸까.. 갓길에 차를 세우고 운전대에 엎드려 눈을 질끈 감았다. 라디오에서 타고 흐르는 노래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윤두준, 미워도 너무 밉다... 요즘따라. * * * 두준은 오늘도 출근하지 않았다. 3일 전, 교감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일주일 동안 병가를 냈다고 했다. 그 만큼 아픈가? 생전 아픈 적 없던 두준이 병가를 낼 정도면 그건 엄청 아픈 건데. 괜시리 걱정이 되었다. 그동안 무리했던게 한꺼번에 몸살이 난 건지, 걱정이 일었다. 두준이 아프다는 사실을 교감 선생님께 알 정도로 연락이 닿지 않은 걸 보면. 생각보다 두준과 저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용화 자신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달리 부정할 수가 없었다. 주현과 헤어졌다는 사실도, 아버지의 강요를 거절했다는 사실도 말하지 못했는데.. 용화는 간호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아 마트에서 장을 봐 두준의 집으로 향했다. 비밀번호야 어렵지 않았다. 0622, 그것은 용화의 생일. 때문에 밝은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무척이나 어두웠다. 혹시 아무도 없나 싶어서 두준을 부르자 안방에서 스르륵 나왔다. 확실히 아팠던 모양인지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두준은 아무 말 없이 무기력한 표정으로 용화를 응시했다. 어디 열 있냐며 이마를 짚으려던 용화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용화는 당황하다 이내 봉지를 내려 놓으며 애써 괜찮다는 듯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했어야지, 바보야. 죽 끓여줄게.” “됐어.” “너 아프면 꼭 그러더라? 죽이라도 먹어야 약을 먹지.” “… 정용화.” “왜, 보고 싶었어?” “우리, 그만하자.” 재료를 식탁 위에 내려놓던 용화의 손이 그쳤다. 끝내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두준은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무미건조한 말투와 표정, 용화는 점점 무서워졌다. 이 말이 진심으로 뱉은 말일까봐, 혹여나 정말일까봐..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듯 두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 그만, 하자니?” “솔직히 너한테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닌데, 생각보다 너무 잘 넘어오더라. 여자친구 생겼다길래 안 넘어올 줄 알았는데, 의외더라.” “… 윤두준?” “연락 안 했으면 어느 정도 눈치는 깠어야지, 생각보다 멍청하더라. 둔하고 눈치도 더럽게 없고.” “… 두준아,” “너랑 결혼할 여자라는 그 서주현이라는 사람이 불쌍해. 너는 결혼하고도 나 좋아서 사족을 못 썼을 거 아니야.” “윤두준.” “양심에 안 찔리냐? 같은 거 달린 새끼 좋다고 몇 년을 기다린 년 버리니까.” “… 그만,” 제발 그만 해, 이거 꿈이지? 그래, 꿈이야. 용화는 웅웅거리는 두준의 말을 애써 막아보려고 두 귀를 손으로 막으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두준의 독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말이 두 손으로 간단히 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생각보다 두 손은 나약했다. 두준의 나른한 목소리가 용화의 청각 구석구석까지 닿을 정도로 너무나 잘 들렸기 때문에. “현실을 직시해, 아직도 네가 날 좋아했다는 그런 상상 하면 치가 떨린다.” “…” “편안하게 여자 만나서 결혼하게 살게 해줘, 더 이상 내 인생에 관여하지 마.” “…” “정용화, 너는 내 인생의 얼룩이야.” “…” “알아 먹었으면 좀 꺼져라. 얼굴 마주하기도 엿 같으니까.” “뭐?” “더럽다고. 너와 내가 한때나마 사랑했다는 게.” 두준이 말이 끝나고 알 수 없는 정적에 휩싸였다. 너무나도 충격을 받으면 사실상 감정이 없어진다. 눈물도 나오지 않고, 화도 나지 않는다. 단지 몸 전체가 점점 반응을 보일 뿐이지, 용화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떨어지지 않던 입을 겨우 달싹이며 무척이나 흔들리는 눈빛으로 힘없이 뱉었다. “너,” “…” “방금 실수한 거야. 나한테.” “…”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나한테.” “…” “그래, 네가 말하는 그 '더럽다'는 연애해서 미안하다, 따지자면 너도 똑같은 놈이야. '더러운' 나와 연애를 한 '더러운' 너.” “…” “적어도,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 진심에 대한 매도야, 짓밟고 짓밟은 최악의 행동이고.” “…” “잘 지내라, 윤두준.” 터벅터벅, 용화는 힘 없는 발걸음으로 신발을 구겨신고 두준의 집을 나왔다. 쾅, 안과 다르게 밖에선 후덥지근한 바람이 용화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진기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을 수 없었다. 아니, 받을 기력 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두준이 뱉은 독설에 제 기를 다 뺏긴 기분이였다. 신발을 채 다 신지 못해서 결국 길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뒤늦게서야, 이제 와서야...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결국 진기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용화는 다음 날 휴직계를 냈다. 기한은 2개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었다. 신나는 노래를 들어도, 재밌는 영화를 봐도 무용지물이였다. 감각이 무뎌져가는 것만 같았다. 밥도 먹지 않고 그렇게 하루 종일 울다 심지어 탈수 증세까지 와서 링겔까지 맞았다. 이러다 정말 죽을 거냐면서 진기는 용화에게 다그쳤지만 용화는 그저 창 밖을 바라볼 뿐이였다. 이별의 온도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다만,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기절 직전까지 울고, 몸무게가 부쩍 많이 줄었다. 하지만 두준에 대한 제 사랑의 무게는 줄지 않았다. 되려 늘어나는 기분이였다. * * “… 여기구나.” 진기는 굳은 결심을 했다는 듯 두준의 집 앞에 섰다. 저번에 용화가 주저앉아 울고 있던 터라 수월하게 찾아올 수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용화를 두번이나 버린 개새끼가 바로 너구나? 그 모습은 꼴에 너무나도 초췌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기도 전에 두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진기 자신도 너무나 놀랄 정도의 힘으로 두준이 나뒹굴 정도로 주먹을 날렸다. 옆에 있던 준형이 진기를 겨우 말렸다. “정용화를 두번 병신 만든 개새끼가 누군가 했더니,” “…” “꼴에 힘들어? 좋아해주는 새끼 없으니까 죽겠냐?” “… 저기요, 좀 진정하시고.” “당신은 빠져, 진정하게 생겼어??? 지금???? 윤두준 개새끼야, 너 진짜 실수한 거야. 누구 때문에 서주현하고 헤어졌는데.” “잠깐, 방금 뭐라고..” “설마 몰랐던 건 아니지? 서주현하고 헤어졌다는 거.” 지금 누가 누구랑 헤어졌다고? 두준은 재차 진기에게 물었다. 누가 누구랑 헤어져? 정용화가, 헤어졌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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