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11
"야 일찍 온다며, 징어 오고 있겠다!"
"아씨, 미치겠네. 어, 여보세요? 자기야 언제와?
지금 오고 있어?! 어? 아니야. 어. 빨리와."
전화를 끊은 남편이 손톱을 깨물었고 경수가 느긋하게 말했다.
"같이 들어오겠네."
"말이 씨가 돼 인마!"
준면이 꼼지락 거리며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해봤지만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민석이 기지개를 키며 말했다.
"앞에서 만나든 여기서 만나든 깜짝 선물이지 뭐."
"새끼 느긋해 진 것 보소? 자기가 가장 초조해 했으면서."
"근데 하필 오늘 오냐."
"아는가보지. 오늘 엄마 기일인거."
경수의 말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피곤해서 감고 있던 눈을 뜬 경수가 덧붙였다.
"언제 적 일이냐고."
"어? 어어, 그렇짘ㅋㅋㅋㅋ"
슬쩍 웃은 경수가 곧 초인종 소리에 인터폰을 바라보았다.
제 13화
후회
19살. 죽음을 알긴엔, 감당하기엔 이른 나이였다.
"흐...아니야.. 아니지? 아닐 거야."
현실을 부정해봤자 잔인했던 언니의 말은 이미 내 심장을 후벼 파고 지나갔다. 뚫린 심장에 시린 바람이 들어와 헤집어 놓는 기분이었다.
그냥, 그냥 너무 아프다. 그리고 울음도 나오지 않을 만큼 정신이 없다.
"아빠한테 연락했어. 지금 아니면 볼 시간 없을 거야."
점점 담담해지는 언니의 목소리와 점점 이성의 잃어가는 내 정신. 핸드폰을 손에 꽉 쥔 채 거실로 나갔다.
나를 보고 있던 경수와 눈이 마주쳤다. 경수야, 너랑 나 어떡해? 어떡하지?
"미, 안. 나 잠깐.. 일이 생겨서."
"징어야. 종대,"
"미안. 종대야."
"어? 아냐, 급한 일인가보다. 빨리 가봐."
"어, 미안. 이따 전화 할게."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예의상이란 말이 맞겠지. 신발 끈을 묶었다. 손에 들어가는 힘을 조절할 수 없었다. 아주 꽉 조여 맸다.
머릿속에선 계속 아닐 거라고 하는데, 분명 난 느끼고 있다. 뻥 뚫려버린 가슴이, 신발 끈을 매는 것 마저 힘겨울 정도로 떨려오는 손이,
자꾸 올라오는 울음이 증명했다.
병실 503호. 그래도 한번 열어봤다고 잡는 것 까지는 쉬웠다. 그러나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이걸 열면, 계속 부정하던 감정이 터지겠지. 엄마가 떠난 게 맞다고 인정하며. 터지겠지.
손에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이 문을 여는 내내 내 머릿속은 미련하게도 이게 다 몰래카메라였으면 했다.
엄마가 아픈 것도, 먼저 떠났다고 말하던 연락도.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다며 환하게 웃는 엄마가 날 반겨줬으면 좋겠다.
간호사와 의사들이 주위에 서 있었다. 엄마의 발끝 밖에 보이지 않는 위치였는데, 그나마 발끝마저도 흰 천에 가려져 있었다.
그제야 울컥하며 울음이 올라왔다. 진짜다, 정말이다. 모든 게, 거짓이 아닌 진짜다.
"어, 징어왔어?"
무너지는 나를 잡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문고리를 잡은 채 미끄러져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왜, 왜 나중에 만나자면서 엄마를 찾아오지 않았을까?
왜, 먼저 전화 한통 걸지 않았을까?
왜, 어릴 때 매일 하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안 했을까..
"징어야, 징어야 괜찮아? 울지 마,"
내가 엄마의 딸이었다. 누가 봐도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엄마의 딸이었다. 누구도 언니에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고
모두가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왔다. 익숙한 간호사언니의 목소리, 의사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도저히 엄마의 곁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았다.
저 흰 천을 거두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정말, 내가 미칠 것 같았다.
"이거 마셔."
물병을 건네주는 언니. 아까 너무 울어서인지 힘이 없어 받지도 못하고 바라보았다.
언니가 내 손에 억지로 쥐어줬지만 난 분명 잡으려고 했는데 손에서 툭, 떨어졌다. 데굴데굴 구른 그것은 남자의 구두에 걸려 멈춰 섰다.
고개를 젖혀 그를 보았다. 경수네 아버지였다.
마음 같아선 모든 욕을 쏟아 붓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엄마가 살아날 것 같았냐고, 왜 수술을 하지 않은 거냐고.
그러나 그렇게 쏟아 붓기엔 아저씨의 얼굴이 잔뜩 망가져 있었다.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었다.
적어도 엄마는 사랑받았나 보다.
아저씨가 터덜터덜 걸어 엄마에게로 다가갔다. 흰 천 위로 쓰러지듯 무너졌고 곧 흐느끼는 소리가 병원을 가득 매웠다.
트라우마가 무섭다. 나도 엄마란 말만 들어도 숨을 쉬기 힘들던 시기가 있었으니까.
아저씨가 안보는 틈을 타 병실을 나왔다. 언니가 걱정을 하며 나를 봤지만 아저씨를 두고 나오진 않았다.
어지럽다. 많이 울어서인가. 병원 앞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맑았다.
위로를 받고 싶다. 내 비밀을 아는 게 누가 있을까? 경수? 미쳤다고 경수를 부를까.
종대? 글세,
그냥 비라도 쏟아지면 눈물이 아니라 빗물이라고 말할 텐데, 그럴 수도 없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문자가 두통이 연달아 왔다.
[종대 지금 간다]남편♥
[딸 어디야? 아빠 도착했는데]아빠
종대한테 '잘 가'라는 말도 못했는데, 아, 맞아. 아빠 오늘 귀국하지. 그래서 종대네 집에 있다가 종대 가는 거 알았는데,
누구한테 전화하지? 일단 가는 종대겠지..
종대쌤
-여보세요?
".....종대,"
-목소리 왜이래?
"잘, 다녀, 와."
-여보세요? 징어야 나 경수. 너 지금 어디야?
"잘, 다녀와 종대야. 흐.. 흐윽...경수야...어떡해..."
-어딘데? 빨리 말해. 너 지금 어디야?
-야 도경수! 니 전화 온다!! 누나래!!
준면이의 목소리가 저 건너편에서 들린다. 경수야.. 너 어뜩하냐..정말, 어떡할까..
가족에 관해서 말을 잘 안하던 너였는데, 항상 엄마 이야기는 자주 했었잖아.
내가 새엄마라는 사람들에게 질려서 너네 엄마 얘기해달라고 하면 잔뜩 미소를 지은 채 말해줬었잖아.
정말 이야기만 꺼내도 좋아하던 너였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곧 휴대폰은 종대에게 넘어간 듯 싶었다.
-어 징어야. 난데, 지금 어디야?
"종대야, 나, 나 어떡해..? 아니, 우리 경수는 어떡해..?"
-무슨 일인데..?
피아노를 배우러 간다는 너를 붙잡을 수 없었다.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잘 가.. 잘 다녀와.."
-어? 어, 그래. 말하기 싫은가 보다. 나 다녀오면 말해줘. 알았지?
"응.."
전화가 끊어지기 무섭게 김종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야!!! 니 어디야?! 지금 너 빼고 다모였어!!
"나, 오늘 많이 늦을 것 같은데, 미안하다고 전해줄래?"
-이게 또 이러네. 아오 진짜. 목소리는 또 왜 이런데.
"아무튼 전해줘."
전화를 끊었다. 병실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엄마...
한눈에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 검은색 차 한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멀어서 잘 안보였지만 뒷좌석에서 급하게 내린 것은 경수였다.
얼굴 가득 인상을 찡그린 그가 병원 안으로 달려갔다. 울음을 참기위한 경수 특유의 표정이었다.
나에겐 아주 어린 나이에 가난이 싫어서 도망간 엄마였다. 그래도 어릴 때 그 잠깐의 기억이 좋아서 좋은 감정도 있었지만 미운 감정도 더러 있었다.
경수는 낳을 때 돌아가신 친엄마에게는 고마움뿐이라고 말했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미소를 지은 채 지금의 엄마에게는 너무 많은 감정이 든다고 했었다.
미안함, 안쓰러움, 고마움, 사랑.
그런 우리의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
종대가 갔다. 마주보면서 인사해줄려고 했었는데, 후회스럽게도 전화로 인사한 게 다였다.
엄마도 갔다. 어렴풋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느꼈으면서, 후회스럽게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 해줬다.
장례식장. 아이들 틈에 껴서 찬열이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도저히 영정사진을 볼 수가 없었다.
절을 하러 신발을 벗고 올라가 옆을 보니 온통 검은 옷을 입은 경수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다.
곧 우리의 기척을 느낀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보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부어있는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른다.
그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떤 감정인지, 얼마나 많은 감정이 들어있는지 읽을 엄두조차 안 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인사드려."
한참의 눈맞춤 끝에 경수의 눈이 다른 아이들에게로 향해졌고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내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2번 절을 하고 반절을 한 뒤 경수에게도 절을 했다. 다리가 떨려온다. 그나마 찬열이에게 기대어 버틸 수 있었다.
"...너, 알고 있었어?"
처음 듣는 경수의 날카로운 말투가 나에게 향해졌다. 이미 단단히 마음먹고 왔지만 생각보다 더 아팠다.
"응."
"왜, 왜!! 왜 말 안했어?"
"미안. 경수 너 가족사이기도 했고,"
"내 가족이니까..!! 내 가족이니까 내가 알아야 될 거 아니야.."
찬열이가 내 손목을 붙잡아 자기 뒤로 감추며 말했다.
"너 힘든거 아는데, 얘도 힘들어. 알잖아."
울분을 토하듯 삼켰던 숨을 내쉰 경수가 곧 내 이름을 불렀다. 찬열이 옆으로 슬쩍 나왔다.
"내가 화나는 건, 박찬열 말대로 너도 힘들었잖아.. 근데 나한테 기대지도 않은 채 저번에 나한테 말해준 그게 다였어."
"미안.."
"너 사과 들으려고 말한 게 아니야! 내가 사과하려고 말 꺼낸 거야. 미안해. 그날 내가 섭섭한 감정이 들어서 과외 핑계 대며 먼저 나왔어.
너도 힘들 텐데, 내 감정에 휘둘려서 그런 널 두고 나왔어. 진짜, 미안.."
먹먹했다. 답답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와중에도 경수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어쩌면 처음 보는 경수의 우는 모습에 무엇도 못하고 있으니 민석이가 말했다.
"안 달래줘?"
그제야 난 정신을 차리고 경수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항상 경수가 해주던 대로 안아서 토닥였다.
내가 경수에게 위로받은 적은 많아도 이렇게 위로해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설펐다.
모든 것이 낮선 지금 상황에 코끝으로는 향냄새가 났고 당황스러워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보던 눈은 엄마의 영정사진에서 멈춰섰다.
흐느끼는 경수를 따라 나도 흐느꼈다. 사진속의 엄마는 내가 기억하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 암호닉 입니다. |
시카고걸/체리/크림치즈/버블티/매매/죽지마/규야/정동이/슈웹스/구금/안녕/크런키/눈누난나/세젤빛/뭉구/김종이 (오늘도 슬퍼서.. 사담은 다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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