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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니/온유] 오직 그대 때문이죠_시골 비슷한 서울남녀_SSUL 上 | 인스티즈

 

 

 

BGM. 옥상달빛 - 정말 고마워서 만든 노래

 

 

   오직 그대 때문이죠

                       W. 별여울

 

    Tape 1_

 사고를 쳤다. 맙소사. 연이어 밀려오는 일정에 제 몸 하나 관리하지 못하던 나였다. 비타민 챙기랴, 감기약 챙기랴, 멀미약 챙기랴.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 약과 링거를 달고 다니기에 급급하던 일상을 보내다 결국 일을 치고 말았다. 작은 일이면 몰라, 커서 큰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주신 이름처럼 일도 거하게 쳐버렸다. 참 나다워서 참다못해 피식피식 코웃음이 새어난다. 그래. 예전부터 신문사에서 노리고 있던 중요한 아이템이 있었다. 중간에 터트려도 될 것을 타이밍을 봐야한다며 뒤로 미룬 것이 사건의 시초였지만, 후에 더해져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한 것은. 당시 해당 인터뷰의 담당이 우리 부서였고, 그 날 타임이 비는 사람은 나 뿐만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머피의 법칙이라고 들어봤는가? 등교를 해야하는 이른 아침, 토스트기로 바싹바싹 구워진 식빵 조각 위로 진득하게 발려진 잼은 주 사람들의 주식으로 알려져있다. 막 입에 넣으려는 순간 운이 없게도 부엌의 문턱에 걸린다던가, 의자에서부터 굴러떨어진 가방 끈이 발목을 휘어감는다던가의 일이 일어나 그 것이 떨어졌을 때. 기껏 공들여 잼을 바른 부분이 바닥과 맞닿아 짙게 제 흔적을 남기는.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은 날에 소나기가 쏟아진다는. 혹은 마트에서 선 제 줄만이 줄어들지 않고 나머지 줄들만 빠르게 줄어든다던가의. 그런 사소하고도, 일상에서 각자의 기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들.

 그리고 그 날도. 머피의 법칙은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왜 병원에 가 있었는가. 왜 상부에서 떨어진 지시를 받지 못했는가. 왜 핸드폰 배터리가 빗물에 나갔어야만 했는가. 그래. 그 날, 조금이라도 변수가 생겼더라면 나는 이렇게 좋고 상쾌한 공기도 마실 수 없었을 것이고. 덩달아 인심좋은 시골사람들의 대접을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에게 좋은 일이 찾아온다고 했으니까. 딱딱하게 굳어진 입꼬리를 당겨 환히 웃었다. 거울 앞에 마주 선 나의 얼굴은 서비스직에 막 취직한 새내기 알바생과 별 다름이 없어보였다.

 나는 시골로 발령이 났다.

 

 

 

    Tape 2_

 우선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이름만 여관이지 실제로는 마음씨 좋으신 동네 아주머니가 운영하시는 작은 고시원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뭐. 나름 공기도 좋고, 물도 좋고. 내 입장에서는 월급도 꼬박꼬박 받아가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니 별 다른 손해는 없는 입장이었다. 시골로 내려가 머리 좀 식히고 돌아오라며 기차표를 건네시던 팀장님의 얼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했다. 곱게 다려진 넥타이와, 그 아래로 진 음영이 어지러이 흔들리던 것도. 경직된 입꼬리가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것도. 모두 어제 일어난 일이었던 것처럼 생생하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지금의 내가 시골행을 치가 떨리도록 수치스럽게 느끼는 이유는 그깟, 고까운 자존심 때문이었다. 내가 내 입으로 말하긴 그래도 나름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살아오던 삶이었다. 이십대 후반에 들어섰을 때, 이제 결혼을 해야하지 않겠냐는 지인들의 권유에도 자존심 때문에 맞선은 커녕 소개팅조차 퇴짜를 놓던 나였다. 남들보다 일찍이 취업해 회사 내에서도 또래에 비해선 제법 높은 위치였고, 나름대로 대박을 친 기사들도 많았다.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제법 안면있는, 실력있는 커리어우먼. 그 것이 나였고,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지금. 발령이 났다. 그 것도, 듣도보도 못했던 산중 어딘가의 시골로!

 

 

 

    Tape 3_

 오늘은 아주머니께서 미역국을 해주셨다. 막내딸이 이번으로 열여섯번째 생일을 맞았단다. 시골아이답지 않게 하얀 얼굴로 웃는 것이 제법 풋풋하고 귀여워서 대충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침에 다같이 모여 밥상을 드는데 제법 간이 잘 들었는지 왠만한 3분 조리 미역국보다 훨 나은 맛이었다. 대체로 그 것에 대해 저를 위안하며 멸치반찬을 떠먹는데 귀하신 막내딸분께서 입술을 삐죽이신다.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추고, 각자의 눈이 휘둥그레해진다. 좀처럼 싫은 티를 내지 않던 아이가 그러니 더 그런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나도 그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나중에 알고보니 아이는 케이크가 없었던 것에 불만이 있었던 듯 했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는 옆집 혜은이는 엄마가 케이크 해주셨다는데 나는 왜 안 줘? 하고 투정을 부리는데 그 모습이 열여섯치고는 제법 귀엽더라. 동네를 둘러보고 오던 길에 몇번 마주했던 얼굴이 이제 다시 보니 제법 말갛고 고왔다. 서울가면 인기 많겠다, 싶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엉뚱한 데 시선이 꽂힌다. 삐죽 튀어나온 입매가 불퉁허니 보이기도 했으나 찡그려진 눈썹은 하얀 아이의 얼굴을 더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생긴 게 꼭 찹살떡같다, 따위의 생각을 하며 멍하니 그 시선을 받아주니 애가 헤실헤실 웃는다. 언니이.

 

" 응? "

" 지은이 케이크 사주면 안돼요? "

 

 그렇게 웃는다고 내가 사줄 것 같으냐, 하고 묵묵히 대꾸해주려고 했으나 바로 앞에 선 주인집 아주머니 때문에 애써 웃었다. 네에? 말꼬리를 늘리며 묻는 모습에 피실 웃었다. 내가 그런다고 네 케이크를 사줄 것 같아? 하고 속으로 물으니 답하라는 지은이 대신 내 심장이 대답한다. 응. 밥상 위로 쓸쓸한 정적이 흘렀다. 나를 향한 모두의 시선에 조심스럽게 밥 숟가락을 내려두고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 솔직히 서른이 되니 이 맘 때 애들이 너무 귀여워보인다.

 

 그래도 나름 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돈이 없다고 어떻게 돌아가야 하냐며 아무도 없던 길에 찡찡거리던. 서른넘은 골칫덩어리를 묵묵히 데려와준 아이다. 최소한의 예의라도,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아 질질 슬리퍼를 끌고 시장에 나갔더니 이게 뭐야. 바지주머니에서 꺼낸 지갑에 허옇게 빛이 여린다. 철근같이 두꺼워 제법 무게를 자랑할 것이라 생각했던 나와는 달리 지갑의 사정은 제법 심각했나보다. 닳고 닳아 얇아진 지갑 바닥이 훤히 아래를 비추고 있었다. 가벼워진 지갑과 함께, 덩달아 나의 마음도 날아갈 듯 했다. 바람에 종잇장처럼 날아갈 듯한 그 것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한 혼령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난 진짜 운이 없다는 소리다.

 

 

 

    Tape 4_

 얼마 전, 요 앞에 비디오점이 생겼다. 조금 쌀쌀해진 날씨에 평소 즐겨입던 박스 티셔츠 위로 두터운 가디건 한장을 걸친 채, 낡아빠진 여관 슬리퍼를 질질 끌어다가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골치고는 간판도 제법 반질반질하고 안도 무언가 번쩍번쩍해보여 신기한 듯 두 눈을 뜬 채로 불구경하듯 바라보는데 뒤에서 무언가가 다가와 나의 어깨를 턱 붙잡는다. 그리고는 들려오는 목소리.

 

" 뭐 빌리러 오셨어요? "

" 예? "

" 빌리러 오셨나고요. "

 

 갑작스런 대화에 놀라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니 잔뜩 되바라진 차림을 한 남자아이 하나가 피실피실 웃고 있었다. 왁스로 칠해 올린 머리와 그 아래로 훤히 드러난 이마가 잘생기기도 했다. 지금 이 당돌한 꼬맹이가 나보고 뭐라는 건가 싶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어깨 위로 얹혀져 있던 손길이 떨어져나가더니 도톰한 입술 새로 불퉁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아니. 빌리러 오신거 아니면 여기 계시지 말라고요. 제법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하는 것에 녀석의 상태를 짐작했다. 옳다구나. 이 녀석은 지금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청소년기의 아이인가보구나! 녀석을 바라보던 눈빛을 달리한 채 비디오 대여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가 닦은건지 유리문이 참 깨끗하다 생각했는데, 묻기도 전에 녀석이 대답을 해온다. 제가 닦았는데, 잘 닦은 거 같죠.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위협적으로 -제 딴에는- 말하는 모습과는 상반되게 지금의 녀석은 순해보였다. 강아지같다고 생각하던 찰나 안으로 밀어넣은 녀석이 소리내어 웃는다. 첫손님이니까 온 김에 저 도와주실거죠?

 제 귓가에 쏙쏙 박히는 목소리에 진심으로 묻고 싶어졌다. 이 시골은 당당하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게 컨셉이니?

 

 

 

    Tape_5

 첫만남부터 대놓고 노동을 요구했던 꼬맹이는 대여점 부부의 막내 아들이라 했다.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부모님이 어화둥둥 키운 자식이란다. 가만보니 위로 하나있는 누나와도 친한 듯 보였다. 가끔씩 대여점에 얼굴을 비추는 여자아이는 막 대학에 입학한 듯 보였다. 나중에 듣고보니 공부를 잘해 수시로 인 서울에 성공했다던데, 참 대단한 것 같았다. 왁스로 앞머리를 걷어올린 채 자리에 앉아 말린 오징어를 질겅질겅 맛깔나게도 씹어대는 그 꼬맹이의 얼굴에 대고 누나가 참 대단하다며 몇마디 던졌더니 입꼬리가 자꾸 올라간다. 하, 그렇죠? 우리 누나가 좀 대단하죠, 로 시작된 녀석의 자랑은 끝을 볼 기미를 보이지 않아 결국 먼저 내가 끊고 말았다. 야. 그만해. 꼬맹아. 인상을 찌푸린 채 비디오를 책장에 집어넣는데 뒤에서 녀석이 떽떽 소리를 지른다. 아, 진짜! 김종현이라니까요!

 맞다. 녀석의 이름은 김종현이었다. 처음 비디오점에 들렸던 그 날, 여관에 돌아가 아껴둔 케이크를 몰래몰래 꺼내먹던 지은이에게 물으니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었다. 아. 걔요? 우리 학년인데, 완전 누나바보에요. 누나바보. 얼마나 심하면 애들이 그렇게 부르겠어요. 근데 별 신경쓰실 필요는 없으실텐데.. 혹시 걔 만나셨어요? 그 물음에 나는 그냥 어색히 웃기만 했다. 아... 그렇구나. 지금 내가 생각해도 참 어색한 리액션이었다.

 

 

 

   Tape_6

 두 팔을 걷어내고 걸레를 빨아 나르던 그 날의 기억은 팔뚝에 고통이 되어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었다. 아직까지도 저릿저릿한 것이 정말 녀석이 날 단단히 고생시켰다, 싶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첫 손님이라는 명목으로 오픈한지 일주일이 지나는 지금까지 나를 골려먹고 있다. 저건 나를 정말 알바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말해서 월급이 들어오는 것만 제외한다면. 남들이 보기엔 정말 시골에 틀어박혀 할 일 없이 사는 백수로 보일 법도 했다. 조금 더 나가면 공무원 준비생 정도? 하긴, 예전에 공무원을 준비했던 적도 있으니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기도 하다. 손에 들려있던 비디오를 카운터에 올려둔 뒤, 안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해대는 녀석에게 물었다. 넌 내가 뭐로 보이냐? 그러니 나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 할 일 없는 아줌마요. "

 얘 정신머리를 똑똑히 고쳐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Tape_7

 우울한 날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녀석의 얼굴에 대고 차마 나 그래도 서른이거든! 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작년에는 나름 이십대여서, 나 스물 아홉밖에 안 됐거든! 하고 소리칠 수 있었는데. 내가 서른이라니. 정말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느꼈던 허탈감과 박탈감과 맞먹는 정도의 심정이 몰려왔다. 진짜 짜증난다. 야. 어른한테 버르장머리가 그게 뭐야. 하고 소리치니 녀석이 대뜸 발끈하며 물어왔다. 아니, 그러면 나이가 얼마이길래 그러시는거에요? 그 목소리에 제법 불쾌한 감이 묻어있기도 했고, 하는 말이 나에게 너가 뭐냐고 묻는 듯 해서 뭐라고 더 대꾸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서른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 같아서 입을 뗄 수가 없었던 거다.

 스물 아홉과 서른의 차이는 숫자 하나 차이인데. 스물 아홉살과 서른살의 차이는 이토록 크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작년에 이십대를 더 즐겨둘 걸 그랬나. 미세하게 하강곡선을 그리던 기분이 나락으로 추락해버린 순간이었다.

 

 

 

   Tape_8

 오늘이었나 어제였나. 비디오 대여점에 앉아 할 일 없이 종현이와 수다를 떠는 것이 거의 일상이 된 지금. 나는 그 날도 어김없이 발걸음을 옮겨 대여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적비적 문을 열고 들어가 익숙한 카운터 자리에 앉는데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귓가를 때렸다. 누나. 나 이번 판만 끝내고 갈 때니까 카운터 좀 봐줘요. 잘 모르는 서른먹은 아줌마에게 대답하는 꼴이 참 대단도 해보였다. 녀석과 나 사이에 나이 대란이 일어났던 그 날, 아닌 척 했지만 사실 나도 많이 꽁해져있던 모양이었다. 안방에 앉아 게임을 하는 소리를 듣자하니 뿅뿅 거리는 것이 머리를 복잡하게 어지럽힌다. 멍하니 앉아 그 소리를 듣고 있는데 중간중간 녀석의 비명과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애가 입도 참 걸걸하다, 싶어 인상이 찌푸려졌다. 욕하는 버릇은 별로 좋지 않은 버릇인데.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기다리는 것이 조금씩 지루해지며 녀석이 정말 한 판만 하고있나, 의구심이 들 즈음. 대뜸 문이 열리더니 멀쑥한 차림의 남자아이 하나가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햇빛이 안으로 들이비춰져 눈을 찌푸렸는데 문이 닫혀도 눈가를 어지럽히는 것을 보니 햇빛이나 조명 때문은 아닌 듯 했다. 자세를 고쳐잡고 아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드는데 그 때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아이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오. 맙소사. 시골에 이렇게 잘 생긴 아이가 있다니? 텔레비전에서나 볼 법한 외모에 짧게 자른 머리가 잘 어울리던 그 남자아이는 주변을 몇번 살피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커다란 키와 넓다란 어깨가 얼굴과는 달리 성인남자의 것이라서 내심 놀랍기도 했다. 서울가면 애들이 아주 좋아할 스타일이군, 하며 속으로 생각하는데 저음의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저기, 여기 종현이네 비디오점 아닌가요? "

" ...아, 걔 저기 있는데.. "

" 야. 최민호. 왜 이렇게 늦게 왔냐! "

 

안방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잠시나마 나를 향해 있던 시선이 바쁘게 분산된다. 게임과의 사투를 벌이던 종현이는 승리를 거뒀는지 껄껄껄 웃어대며 호탕하게 바닥을 내리치고 있었다. 멍하니 그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바지를 질질 끌어 문 앞으로 다가온 종현이가 나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웃었다. 누나. 얘 내 친구에요. 최민호. 키만 멀대같이 큰 앤데 성격은 착하고. 음. 야. 넌 처음보지? 이지은네 하숙집에 머무는 누나래. 직업은 기자.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아낸걸까.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당혹스러움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나 이렇게 멀쑥한 사람들은 잘 상대 못하는데. 커다란 눈을 들어 나를 내려다보는 아이를 향해 한 번 시선을 준 뒤 얕게 숨을 내뱉었다. 카운터 어딘가에 올려져 있던 옛날 로맨스 영화를 집어들었다. 내가 해주지도 않은 신상정보를 줄줄 읊어대는 종현이를 향해 대충 비디오 판대기를 던져 입을 막아준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운터를 가로막고 있는 아이를 지나 문 앞에 서니 나를 향한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야. 간다. 문고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준 채 안쪽으로 당기니 소리없이 열린 문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흘러들더라. 으. 추워라. 조금 더 가디건 사이로 옷깃을 여민 뒤 발걸음을 내딛었다. 벌써 코트를 꺼내야 할 계절이 온 것 같았다.

 

 

 

   Tape_9

 할 일 없어 들렸던 비디오점에서 나는 우연찮게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휴지 속에 파묻혀 콧김을 쐬는 종현이의 모습은 나를 조금 식겁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이내 내 존재를 눈치챈 녀석은 두 무릎으로 방바닥을 기어 나에게로 다가왔다. 누나. 흡. 휴지를 들어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내는 모습이 제법 감성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멍하니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데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손이 처절하게 아래로 끌려내리며 나를 힘들게 만든다. 아이고, 이 녀석이 또 왜 이러실까. 허리를 숙여 녀석의 주변을 가득 메운 휴지를 휴지통에 쏟아낸 다음, 녀석의 옆에 대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왜 그래? 내뱉는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 그저께 누나가 나한테 던져줬던 그 영화.. "

" ..무슨 영화? "

" 그거 너무 슬퍼요.. 진짜, 최민호랑 같이 봤는데.. 하... 정말... 그 남자 주인공은 대체 왜 그런 거래요? "

 

 눈물콧물. 거의 일년치를 다 쏟아내는 것 같은 모습에 물러나려다 내뻗은 손에 잡히는 비디오 하나를 집어들었다. 서로 등을 기댄 채로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 아래로 진 석양빛이 참 아름다운 표지였다. 그 위로 적혀진 영화 제목이 이제보니 제법 유명했던 고전 로맨스다. 아, 내가 그제 이걸 던졌었나. 점점 가물가물해져가는 기억에 묘하게 인상을 찌푸리다 안기다시피 내게로 다가와 울어대는 종현이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이제보니 이 녀석 왁스도 안 발랐다.

 

" 여자 주인공도 불쌍하고.. 남자 주인공도 그렇고.. "

" 아. 민호랑 본거야? "

" 네. 아.. 진짜.. 그 녀석 앞에서 울기 조금 그래서.. 진짜.. "

 

 언제 봤다고 벌써 민호라고 부르는 내 모습이 조금 낯설기도 했지만 내 품에 안긴 이 초대형 빅사이즈 강아지는 나를 더 당황케 만들고 있었다. 품에 안겨 눈물이고 콧물이고 제 몸에 있는 수분이란 수분은 다 짜내는 것 같은 종현이를 달래는 것이 말쑥한 정장입은 사내들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았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어이구, 그랬어? 하고 들어주는데 녀석의 눈물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제서야 나는 또 깨닫고 만다. 아, 이 녀석 질풍노도의 시기였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은 그 것이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상관치 않고 누구나 감성적으로 변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지금이겠지. 조금 더 파고들며 감상문을 읽어내려가는 종현이의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그래, 눈물 좀 그치자. 녀석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위로 해주는 와중에도 나는 점점 젖어가는 티셔츠 탓에 인근 세탁소의 위치를 떠올려야만 했다.

 

 

 

    Tape_10

 잠시 내가 없던 사이에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 나와 똑같이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급하게 봐야 할 일이 있다며 나가버렸는지 아직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는 걸 보면 제법 괜찮은 청년인 듯 보였다. 아니, 그 아이가 얼굴도 실하고 하는 것도 성실하더라니깐! 내 팔뚝을 찰싹찰싹 내려가며 말씀하시는 아주머니께 애써 웃음을 보이며 슬슬 걸음을 옮겼다. 내 발밑으로 질질 끌려가는 실내용 슬피러를 내려다보는데 순간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건 실내는 실외는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예전에 서울에 있을 때에는 하이힐을 신고 다니느라 발이 성할 날이 없었는데. 직업의 특성 상 뛰어다님과 동시에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상대해야 할 일이 종종 있어 운동화를 신기에도 마땅치 못했던 현장이었다. 한번 현장을 뛰고 나면 늘 발 볼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발은 깨끗하기만 했다. 나중에 돌아가면 운동화를 더 사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Tape_11

 오늘은 늦은 아침을 먹었다. 어젯밤 잠이 오지 않은 탓에 늦은 시각에 잠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일찍 일찍 자고 다니라는 아주머니께 죄송하다며 웃은 뒤, 머쓱하게 뒷머리를 매만지기도 했다. 그래도 아주머니께서 주시는 반찬과 국은 따뜻하고 인심이 느껴져서 내심 행복한 밥상이었던 것 같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뜨는데 저 멀리서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한차례 들리더니 지은이와 함께 맡이가 함께 복도를 가르고 뛰어오기 시작한다. 어쩐지 계단이 쿵쿵 거린다 싶더라니. 눈을 슬핏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식탁으로 달려와 의자를 빼낸 아이들이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에게 말을 붙였다.

 

" 언니! "

" 왜, 또? "

" 오늘 어디가요? "

 

 그러고는 대뜸 물어오는 질문이 쌩뚱맞은 것이라서 놀랐다. 시골에서 이런 말을 듣는 건 쉽지 않았는데. 뭐, 나라고 해봐야 대여점 가서 이야기하고 일하거나 여관에서 일을 돕는 게 일과의 다 인데 어디 갈 곳이 있을리가. 바쁘게 움직이던 젓가락을 잠시 멈춘 채 생각에 빠졌다. 허공에 멈춘 손가락이 약간 아려오기도 했지만 오늘 있을 일들을 하나하나 되집다보니 별다른 일정은 없는 것 같았다. 뭐. 한번 즈음은 애들 데리고 어디 나가주는 것도 좋겠지. 우물우물. 입 안에 집어넣은 나물반찬의 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내저으니 아이들의 낯빛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그럼요. 언니.

 

 " 우리 다같이 야시장가요! "

 

 

 

    Tape_11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찾아온 시장은 나름대로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는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오. 제법인데. 가디건 주머니에 꽂아넣은 손이 차가워진 밤공기에 어느 새 언 것도 같았지만 신경은 쓰지 않았다. 차를 타고 지나오는 길에 들렸던 문구점에서 두둑히 실려있는 핫팩을 보았기 때문에 가을밤을 나는 것에도 걱정이 없는 것이다. 시골은 시장에만 와도 없는 게 없어서 참 편하네. 줄줄이 꼬마조명을 매달아놓고 반딧불이가 길 만드듯 이어진 시장 길은 제법 운치있고 산 경치와 어울리는 곳이었다. 이제 좀 즐겨볼까, 싶어 질질 슬리퍼를 신고 어딘가로 빠지려는데 갑작스럽게 목덜미 위로 차가운 손가락이 와닿아 소름이 돋는다.

 

" 언니. 우리 금붕어 뜨러가요! "

" 그래. 금붕어! 나 이거 하고 싶었어. 막 애니메이션 보면 나오지 않아? "

" 어디? 난 안 보이는데? "

" 야. 바보야. 저기 있잖아. 넌 그 것도 모르냐. 이거 완전 헛똑똑이네. "

 

 동네에서 기쎄기로 유명한 세 자매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대화에 철저히 내가 배제되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나는 결국 너희들이 지갑이구나.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득히 먼 언젠가의 기억을 꺼내던 것도 잠시 억센 아이들의 손길에 이끌려 수많은 인파를 가르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까 저기 너머로 언뜻언뜻 금붕어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이들의 손에 쥐여져 있던 옷자락을 끌어내 훔친 뒤, 아이들을 데리고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혹여나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애들이 길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Tape_11-2

  금붕어 뜨랴. 물 풍선 터트리랴. 다꼬야끼 사주랴. 슬러시 사주랴. 쉴새없이 늘어나는 아이들의 주문량에 순간 홈쇼핑 판매 관리자들이 주문량가 치솟을 때에 느꼈을 피곤함 섞인 익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또 공감대가 형성되는구나. 골머리가 징징 울려대는 것을 느끼며 순순히 지갑에서 만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이번에는 여관 공주님 지은양의 성스러운 달고나 의식이 치뤄지고 있었다. 오. 오오. 오오오..! 지은이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우리 세 사람은 점점 녹여져 들어가는 소다섞인 가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능숙한 솜씨가 정말 처음해보는 것이 맞는가,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달고나를 하나씩 입에 물고 갈 때 나의 지갑은 점차 얇아져 가고 있었다.

 전에 먹었던 것보다 훨씬 맛있다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 아이들의 머리를 한번씩 쓰다듬어준 뒤, 지갑을 열었다. 처음 시장에 도착했을 때에 비해 확연히 줄어든 두께에 한숨부터 나왔지만 일주일만 기다리면 기다리던 월급이 들어온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위로하며 손을 들어 지갑 아래로 쑥 집어넣었다. 손 안에 잡히는 지폐의 수가 네배는 줄어든 것 같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장님의 시선이 너무도 적나라해서 한숨부터 나왔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손에 쥐여진 만원짜리 지폐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갑자기 두터운 손 하나가 들어오더니 내 지갑 속에 들려있던 손가락을 가져간 뒤 지폐를 내놓으라는 듯 까닥까닥 손짓을 한다.

 

" 만원입니다. "

 

 결제를 유도하는 듯한 목소리가 몸에 베인 듯 아름답고 고왔다. 서비스직은 어디든 무서워. 저 웃고 있는 얼굴 뒤에선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차마 넘길 수 없는 지폐자락에 손가락을 덜덜 떨고 있는데 순간 뒤가 시끄러워지는 듯 하더니 그 사이로 뭉툭한 손가락 하나가 우리를 가르고 들어온다. 아, 제가 낼게요.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익숙한 손길로 제 앞의 빳빳한 지폐를 집어넣는. 못마땅한 표정의 아주머니를 바라보는데 뒤에서 아이들이 다닥다닥 달라붙는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이번에는 저거 하러가요! 나 저거! 나 저거 할래! 꼭 유원지에 처음 온 어린 아이들처럼 아우성을 치는데 차마 고개가 떨어지질 않았다. 이미 사장님은 저만큼이나 떨어졌는데. 옷깃을 잡아당긴 채 무자비하게 나를 끌고가려고 하는 아이들 때문에 신겨진 슬리퍼 위로 모래알갱이가 그대로 들려왔다. 걸러지지 않고 곧바로 발바닥을 거치는 것에 아앗, 하고 소리를 내니 또 다시 위에서 담백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그래. 가자. 잠깐만 이것만 놓고 갑시다. 허공에서 내려온 목소리가 나의 어깨 위에서 통통 튀겨 부서지는 것 같았다. 내 옷자락을 쥐여잡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떼어낸 남자가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있던 것도 잠시 얼굴이 마주치자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물들었다. 어. 밀려오는 감정의 수례에 놀라 눈만 꿈벅이는데 이미 저만치 가버린 아이들이 나와 남자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언니, 오빠! 빨리!

 내가 예전에 이야기했던가? 말쑥한 차림의, 혹은 그런 행색의 사람들을 보면 당황하고 잘 대하지를 못한다고. 지금의 당황스러움과 그로 인한 홍조는 분명 그 것 때문임이 불편했다. 나를 향한 그 눈동자가 너무 직선적이어서 마음 속에 자리하던 당황스러움에 빠른 속도로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 것은 이내 심장 깊숙한 곳 어딘가에 묻힌 그 것을 따라 빠르게 불길이 번지더니 꽝, 하고 방울이 펑펑펑 터지기 시작한다. 남자를 향한 불쾌감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Tape_11-3

 한차례 시장을 휩쓴 아이들은 좀처럼 나와 남자를 놓아줄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저만큼이나 멀어진 아이들이 폴짝폴짝 뛰어대며 트램폴린 위를 활보하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어느 새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환히 웃더니 내게 말을 붙였다. 애들 참 귀엽지 않아요? 언제 한번 만난 적이나 있다는 듯이 다가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순간 거부감이 들었다. 아. 나 진짜 이런 사람들 상대 못하는데. 순간적으로 가슴에 불을 붙인 듯 거세게 요동쳐오는 고동에 놀라 심호흡을 하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반응에도 남자는 기분이 상하지 않은 건지 묵묵히 아이들을 바라보다 가끔 둘째가 바깥으로 나갈 것 같을 때마다 우려의 목소리를 낼 뿐, 별 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곧바로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발등이 시려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연고를 사는 등의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여관에 돌아가면 잔뜩 터 있을려나. 순간적으로 드는 의문점에 문득 고개를 내려 발등을 살피는데 바닥에 진 내 그림자 위에 얹혀져 있던 짙은 그림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잠깐. 아니. 이건.

 

" 어. 발등.. "

" …아, 하. "

 

 웃는 것도, 그렇다고 웃는 것도 아닌 뭐한 리액션에 남자가 당황한 듯 보였지만 트램폴린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발랄하게만 보였다. 점점 다가온 남자의 따뜻한 두 손이 내 양쪽 어깨를 살짝 건드리더니 이내 떨어져나갔다. 지은이가 덤블링을 하며 위 아래로 능수능란하게 뛰어대는데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불안감에 쿵쾅쿵쾅 뛰어대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해야하지. 빨리 고개를 들어서 지은이한테 잘했다고 박수를 쳐줘야 하는데. 그래야하는데. 왜. 고개가 안 들어지는거지? 순간적인 당혹스러움에 얼굴 낯빛이 새파래짐을 느꼈다. 빨리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말 하나 붙이는 것도 어려워하는 것이 나였다. 화제를 바꾸는 건 고사하고 말부터 붙일 수 있을지 그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멍하니 서서 멍청하게 아래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멀어진 듯 달큰하게 코 끝을 맴돌던 단내가 떨어져나갔다. 남자도 나의 반응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더 이상 무어라 말을 붙여오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다시 돌아와 트램폴린에 대한 기분을 표현할 때에도, 버스를 타고 돌아갈 때에도, 남자와 나 사이를 맴도는 이 묘한 기류는 좀처럼 깨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Tape_12

 남자의 이름은 이진기라했다. 남자는 제 이름을 소개한 뒤, 서울에 살다가 글을 쓰기 위해 시골로 내려왔다며 제 직업을 추가로 설명했다. 가만히 앉아 듣자하니 남자는 이번에 새로 데뷔하게 된 신예작가였다. 청소년 문학이라던가 뭐라던가 하는 말을 흘려듣다 순간 친숙한 아이들의 얼굴이 뇌리를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요즘 나는 청소년이라는 단어랑 왜 이렇게 부딪힐 일이 많을까. 순간 질풍노도의 시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김 모씨의 얼굴이 강렬하게 직인이 되어 나의 뇌리에 새겨진 것 같았다.

남자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앉은 여관 식구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친화력이 좋은지 이미 아주머니와 세 자매, 그리고 원년멤버였다던 공무원 준비생 청년과 말을 튼 상태인 듯 보였다. 아직 아주버님은 뵙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 이 남자가 말하는 것을 보아선, 그는 글만 써진다면 곧장이라도 서울로 올라갈 듯 보였다. 한 마디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나랑은 다르다는 이야기다. 나는 발령이 나서 위에서 불러줄 때까지 이 곳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 그리고 저 남자는 언제든지 올라갈 수 있는, 능동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있는 남자. 그 것을 나 혼자 생각하고 마음 속 귀퉁이에 혼자 끄적끄적 적어놓았다는 것이. 나를 스스로 비참하게 만든느 것 처럼 느껴졌다. 아마 나는 조금 굳어진 얼굴로 남자를 응시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새식구가 들어올 때마다 간헐적으로 개최되는 가족 설명회는 유익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남에게 화살이 되어 가슴을 파고들 때고 있었다. 가령 예를 들자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하는 지금이라던가 혹은 예전에 뼈저리게 아픈 사유를 설명해야 했던 나의 과거라던가. 둥글게 모여앉은 식구들 사이에는 커다란 원형 원목 테이블이 놓여져 있다. 그 아래로 놓여진 손가락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심정이 점차 복잡해지고 있었다. 곧게 내려져 있던 마음의 끈들이 복잡하게 얽혀 본 모양을 잃은 채 어지러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남자를 바라보지 못한 눈이 어색하지 않도록 무던히도 노력하며 바쁘게 시선을 옮겨가고 있었다. 아, 아마 저는 길면 육개월 정도 머물 것 같고…. 줄곧 이어지는 남자의 목소리는 내 귓가에 놓여진 배경음악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점차 숨이 느려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짐이 느껴졌다. ...아, 머리 아파. 강한 현기증이 나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Tape_13

 종현이를 만났다. 별 생각없이 버릇처럼 들렸던 비디오 대여점에는 종현이가 잔뜩 벼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누나, 하고 불러오는 것이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것이라서 멈칫하기도 했지만 이내 녀석의 손에 들려있는 종전의 영화를 보고는 얕게 숨을 내뱉었다. 녀석의 손에 들려있던 비디오는 전에 내가 던지 듯 추천해주었던 비디오였다. 녀석이 슬프다며 눈물, 콧물할 것 없이 얼룩진 얼굴로 감상문을 읊어대던.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감상문을 백일장서 독서록 부분에 넣는다면 거뜬히 도 대회에서 대상은 타올 수 있을 듯 했다. 종현이가 도 대회 대상타면 내가 기사 써줄 수 있는데. 순간저긍로 스쳐지나가는 우스은 생각에 스스로를 비웃으며 카운터 안쪽을 비집고 들어갔다. 녀석은 그런 내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대응하며 다른 의자 하나를 가져다주고는 앉으라며 고갯짓했다.

 

" 누나. "

" 왜. "

" …. "

" 뭐. "

" ..나 영화 좀 추천해줘요. "

 

 나름 분위기잡고 비장하게 말해오길래 또 엄청난 걸 줄 알았더니 별 걸 다 부탁해온다. 허탈함에 코웃음을 치니 녀석이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처음이었어요. 그런 거는 처음이었다고요. 다른 것도 추천해주실 수 없어요? 담담한 듯 매섭게 따박따박 대꾸해오던 목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부드러워져 평소 저답지 않게 간곡하게 부탁해온다. 그 모습에 피실피실 웃음이 나다가도 약간씩 거슬리는 말들에 인상이 찌푸려진다. 기나긴 연장선상을 지나 막 영화 찬양론이 도입하려는 종현이의 입을 손을 들어 막은 다음, 입을 열었다. 종현아. 늬예? (예?) 누나가 부탁 하나 좀 하자. 문대요? (뭔데요?)

 

" 어른한테 말 좀 가려서 해. 인석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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