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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우가 돌아간 뒤의 일과는 매우 따분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 곳의 아버지를 만나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의금부에서 지사를 맡고 계시다는 아버지는 언뜻 보아도 차갑고 조용한 인상이었다. 심지어는 묻는 말에 대답을 조금 머뭇거리자 나를 꾸짖기까지 하였다. 권의적인 분위기를 몸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턱 밑까지 수염이 있고, 차림으로는 짙은 붉은색의 단령을 입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말투는 단어마다 끊김이 있어 딱딱하게 느껴졌다. 심히 가부장적인 모습에 실망스러우면서도 언성을 높이지는 않는 그가 문득 고마웠다. 작년까지 양천구에서 나를 키우던 아버지는 매번 화를 내고 술을 마셨다. 내가 그 집에서 나와 엄마에게로 향한 건 그 때문이었다. 나는, 폭력적인 아버지가 싫었다.
저녁 때가 되어 향단이 차려준 밥을 먹고 조금 이른 시각에 이불을 펴고 잠에 들 준비를 했다.
원래는 잠에 들기 직전의 느낌을 가장 싫어했다. 그 무렵이 되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무능력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온갖 사소한 후회스러운 일들이 멋대로 떠올려지고, 미래에 대한 막막함 때문에 제대로 눈을 감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캄캄한 방 안에 홀로 갇혀 때로는 울음을 토하고, 때때로는 그걸 꾹 참아 삼켰다. 그 가지런하지 못한 감정선은 나를 사춘기 때로 돌려놓았다. 숨 쉬는 것이 버거워 짜증이 나던 그 순간으로.
실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지만, 아무라도 좋으니 내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들으며 아무런 걱정 없이 편한 잠에 드는 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너무 엄청난 일을 겪어서 그런가. 아버지에 대한 혐오도 엄마에 대한 걱정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내일 눈을 뜨면, 다시 원래의 생활 속으로 돌아가는 것 아닐까?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생각 없이 웃고 떠들 수 있는 시간으로. 학교 기숙사에서 걸어서 금방인 편모의 집으로. 만일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이건 모두 뭐가 되는 걸까? 내 전생? 아니면 그냥 이상한 꿈? 모르겠다.
무력한 감정이 없어졌는데도 잠은 나를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여기는 조선. 모든 편리한 서비스들이 차단되어 있고 심지어는 통신 수단도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상황에 맞춰 어색한 미소를 짓는 게 전부이자 최선이다. 어쩌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영원히, 다시는 서울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필사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왜일까? 물론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걸 기를 써서 찾아내고 싶지는 않다.
"아씨,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안녕히 주무셔요. 밖에는 지원이 있으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라도 부르시길."
향단이 가벼운 입김으로 초를 껐다. 아직 적응이 덜 끝난 한적한 방 안으로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다. 향단이 나가고, 적막한 기운이 찾아오자 비로소 피곤한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눈을 감았고 오랜만에 긴 잠에 들었다.
꿈을 꿨다.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기에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로. 내가 다급하게 무어라 입을 열자 그는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쳤고 나는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번에는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다만, 눈물이 흐르기 직전의 커다란 슬픔을 목 끝에서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나를 깨우려는 향단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않았더라면,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으리라.
"아씨! 그만 일어나세요. 세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내가 벌떡 몸을 일으키자 향단이 가볍게 소리를 내어서 웃었다.
"찾아와주신 세자저하께 감사하네요. 그토록 아침에 눈을 못 뜨시던 아씨가 이렇게 일찍 잠에서 깨어나시다니."
"…세자? 그 분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고?
"예. 아직 묘시밖에 되지를 않아서 말씀도 없이 이렇게 일찍 어인 일로 오셨냐고 여쭸더니, 아씨가 보고 싶어 해가 뜰 기미가 보이는 순간에 바로 동궁에서 걸음을 옮기셨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정말이어요. 전해들은 바로는 예전에 세자께서 아씨와 어떤 약조를 하셨다는데요?"
"……."
"아씨, 이렇게 계실 시간이 없어요. 어서 단장을 하시고 나가셔야죠. 세자께서 얼마든지 기다리겠다고는 하셨으나, 정말로 그걸 따랐다간 미운 정을 살 수가 있지요."
눈을 뜨고 다시 한 번 상황을 정리해볼 틈도 없이 다짜고짜 향단한테서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세자가 왔다니? 그것도 이렇게 이른 새벽에 나를 보러?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향단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그녀는 품에서 따뜻하게 적신 손수건을 꺼내어 내 얼굴에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어쩐지 낯이 간지러워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향단은 내게 새 적삼을 입히고 농에서 맞춤한 한복을 꺼내었다. 거기까지 단 십 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속으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내 또래 정도로만 보이는데 어떻게 이렇게 능숙하고 노련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루 아침에 세자빈이 된 탓에 그녀의 사정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내가 문득 답답해졌다. 분명 향단에게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내 몸종 노릇이나 하고 있어야 할 안타까운 사연이 있을 것이다.
"아씨, 마님께서 오늘 문안은 생략하셔도 된다고 하셨으니 이제 그만 나가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원이는?"
"밖에서 아씨를 기다리고 있지요. 아씨, 저는 천하여 마당으로 딱 여섯 걸음만 아씨를 모셔드릴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지원이가 아씨 곁에 있을 거예요."
나는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아직 피곤함이 가시질 않은 게 고작 여섯 시간 정도 잠에 든 것 같다. 일어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사람, 그것도 세자를 만나야 한다니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한 편으로는 괜히 마음이 떨리기도 했다. 정말로 괜한 떨림이었다. 그는 내가 아닌 '세자빈'을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일부러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필요 없이 사람들에게 깊은 정을 주지 말자고 다짐했다.
향단은 미닫이 식의 문을 열고 내가 신을 잘 신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는 초석으로부터 조심히 나를 보살피며 발을 떼었다. 정말로 여섯 걸음만 걸을 작정이었는지 별당채에서 얼마 못 가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뒤를 돌아 사라졌을 때 쯤에 지원이 나타나 내 옆에 섰다.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딱딱하고 늘 근엄을 지키는 감정을 숨긴 얼굴. 뜬금 없는 세자의 행차에 마당엔 모든 머슴과 몸종들이 넙죽 절을 올리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 응. 너는?"
"밤이 지나도록 밖에서 아씨를 지켜야 하는데 그랬을 리가요."
그 말에 내가 살짝 표정을 어둡게 하자 지원이 별안간 눈을 접으며 웃었다. 나를 놀리는 게 여간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몇 걸음 쯤을 가니 대문이 나왔다. 지원이 예를 갖춰 문을 열겠다는 것을 알렸고 저 쪽에서도 대강 비슷한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들 까마득한 윗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억양에 존대가 스민 말투를 썼다. 문이 열리기 직전에 나는 바로 머리를 숙였다. 이 문 너머에 세자가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떨렸다.
"안녕하십니까, 세자빈."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슬쩍 고개를 드니 어제 그 사나운 인상의 남자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여전히 얼굴의 절반을 검은색 두건으로 가리고 있었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 밑으로 보이는 두 눈이 서늘했다. 그 눈을 물끄러미 마주하고 있자니, 왜인지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알게 모르게 지원을 바라보자 그는 영 상냥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자빈. 보고 싶었습니다. 별궁으로 돌아오실 날을 손으로 꼽아가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제 심경에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나비가 보고 싶어 무작정 걸음을 옮겼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나비란 건 대체……."
"참, 그대가 수줍음이 많다는 걸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미안합니다. 이건 우리 둘만 있을 때 내가 그대에게 쓰기로 한 별칭인데 내가 그만 실수를 했군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까지 대화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세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심하게 가슴이 뛰어대는 탓이다. 마주선 호위무사의 옆으로 길게 늘어진 연보라 빛깔의 도포가 보였으나 차마 그 위로는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오나 지금도 이 곳엔 두 분만 계시지를 않습니까?"
저와 준회는 영영 저하의 관심 밖에 있을 터이니 부디 신경을 거두시고 세자빈에게만 시선하시기를. 지원이 말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세자는 얇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뜻에 은근한 적의를 품은 것처럼 느껴지는 지원의 말투에 놀란 건 오로지 나 혼자였다. 자신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세자의 호위무사, 준회는 그저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무라는 뜻으로 지원을 바라봤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미동 없이 올곧은 눈으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고개를 올렸다. 가난한 선비로 위장한 복장 덕에 세자는 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얼떨결에 눈이 마주치자 세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작고 하얀 얼굴에 담긴 온화한 미소는 천연덕스러울 만큼의 귀태가 흘렀다. 느리고 조용한 어투는 너무나도 달콤해서 그만 귀가 녹아버리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세자가 손을 뻗었다. 어쩌다가 맞잡게 된 손은 포근했다. 방금 처음 만난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굳은 믿음과 애정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세자는 '세자빈'을 과연 어느 정도 사랑했을까? 감히 짐작이 되질 않아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라 '세자빈'이다. 그런 생각에 왠지 서러워져서 나는 잠시 바닥으로 시선을 두었다. 세자가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서자, 그 뒤를 그와 나의 호위무사 둘이 긴장감 있는 눈으로 바짝 따라왔다.
천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으므로 주변엔 아직 빛이 없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사람이 한적한 길을 걷노라니 괜히 마음이 뒤숭숭했다.
"별궁에는 언제 돌아오실 계획입니까? 혼례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재촉을 드릴 마음은 없습니다. 허나, 나비가 없는 궁은 적적해서 견디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셨습니까. 그럼, 하루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몸도 많이 나아졌으니."
"그게 정말입니까?"
세자는 아이처럼 기쁜 얼굴로 웃었다. 만일 내가 가짜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면, 이 사람은 그 때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왕족의 체통으로 밝을 수는 있어도 아마 나를 그녀로 믿고 있는 지금만큼은 못할 수준일 것이다.
시장에 다다르자 분주히 몸을 움직이는 상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진지한 얼굴로 고기를 썰거나 화려한 그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교과서에서 작은 참고 사진으로나 보았었던 풍경이 현실로 다가오니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꽃집을 지나칠 때에, 세자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집요한 시선으로 그 안을 훑어보더니, 그는 조용히 물어왔다.
"여기가, 나비와 절친이라던 정찬우 도령의 가게입니까?"
그 물음에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뒤에서 지원이 대신 그렇다는 대답을 올렸다. 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 집안이 아마, 이 근방에서 가장 재력이 있다는 가문이지요? 언제 한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 사업을 뻗으신다고."
세자를 통해 찬우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 세자가 알고 있을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뛰어난 재력가일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우리는 그냥 단순히 시장 안을 걸었다. 하나 둘 영업을 개시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세자는 내내 나와 손을 잡고 있다가, 딱 한 번 조심스럽게 손을 놓았다. 다른 곳보다 좀 더 일찍 일을 시작한 한 장신구 취급점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세자는 그 곳에서 작은 반지를 하나 사서 내게 주었다.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다시 손을 끌어당긴 후에 약지 안으로 끼워주었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고맙다며 인사를 하자 그는 다음에 더 좋은 걸 선물하겠다며 따뜻하게 웃었다.
세자는 나와 좀 더 시장 구경을 한 다음에 궁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전에 약조했던 게 갑자기 마음에 걸려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나비가, 저와 함께 꼭 시장을 둘러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억해주시고 약조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별궁에 돌아오실 때에 귀띔을 주시면,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시장이 끝나는 길목에서 세자가 고개를 숙였다. 지원은 어느 틈엔가 다시 내 옆으로 건너왔다. 준회는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세자는 그 길로 등을 돌려 나를 떠나갔다.
해는 이제 막 중턱에 올라와 있었다. 이제 아마 아침 쯤이 되었을 것이다. 지원이 다시 길을 돌아갈 요량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를 붙잡았다.
"혜민서에 좀 들리지 않을래?"
윤형이 생각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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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 조선의 사법기관.
*묘시: 오전 5시에서 7시.
*동궁: 세자가 머물며 지내는 곳.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조금 힘드네요!!
본문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세자는 진환이랍니다... ㅎ...
이제 한빈이와 동혁이만 나오면 되는 건가요???
사실 이 글에선 동혁이 캐릭터를 가장 좋아한답니다!!
빨리 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ㅋㅋㅋ
바나나킥 님
빈블리 님
김빱 님
외에도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