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외전에서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 곳에는 왕과 왕후를 비롯한 그의 자식 두 명과 비교적 권위가 높은 직책의 신하들이 모여 있었다. 왕은 여전히 병을 벗어나지 못하여 안색이 파리한 모습으로 외전을 둘러보았다. 신하들 모두가 홍포 대신에 예를 갖춘 검은색 상복을 입었다. 그 모습에 왕은 마음이 미어져 몇 번 헛기침을 해야 했다. 그에 그와 가장 가까이 있던 신하 하나가 화들짝 놀라 의원을 부르라 명했지만 외전의 끝에 송 주부가 앉아있었으므로 그 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은 아들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혼례를 겨우 여드레 남기고 이런 비참한 사건이 터지게 되다니, 세자가 가여워 그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왕의 병이 전염될 것을 우려하여 일부러 신하들과의 간격을 평소보다 넓혀두었다. 오직 왕후만이 그의 곁으로부터 가까이 앉아있었다.
이내 내신 중 하나가 종을 길게 두 번 울렸다. 회의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종 소리였다. 신하 모두가 깊게 고개를 숙였고 다 같이 합창하였다. 주상전하, 세자저하의 승하를 진심으로 애통하고 있나이다.
한빈은 왕 대신에 왕후의 모습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전해듣고 쓰러져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와 더불어 머릿속으로는 동혁을 몰아낼 온갖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한빈은 그녀의 근성을 잘 알았다. 그녀는 같은 피가 섞인 아들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고, 왕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모른 척할 터였다. 한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윤이 생각났다.
"전하, 송 주부를 불러 세자저하의 옥체를 살피라고 명한 바, 구체적인 사인이 드러났다고 하옵니다. 부디 그의 언질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과인의 이부가 편하지 않은 바, 그대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 이 점을 너그럽게 헤아려 주시오. 송 주부."
역시나 다른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상복을 입은 송 주부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세자의 사인을 명시한 병부를 꺼내었다. 모두의 눈과 귀가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오로지 한빈의 옆에 앉아있는 동혁만이 거기에서 제외였다. 동혁은 기가 꺾인 눈으로 멍하게 외전의 바닥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가는 여전히 빨갛게 어른거리고 있는 채였다.
검은색 상복 사이에서 짙은 청록색의 차림이 눈에 두드러졌다. 지원이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외전의 밖에서 마음이 불편할 준회를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기색으로 자꾸만 외전의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세자저하의 사인을 말씀에 올리겠습니다. 세자저하께서는 망혈과다로 승하하셨습니다. 황공하오나 상처가 너무 깊어 손을 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저하의 호위무관의 말을 따른 바, 신시 쯤에 도적 무리들로부터 습격을 받았고 저하를 향한 칼부림이 이어졌다고 하옵니다. 그들은 모두 검은색 옷을 갖춰 입었고……."
"여봐라! 지금 당장 내금위에 소속된 호위무관, 구준회를 외전 안으로 들여보내라!"
흰 수염이 돋아난 신하 한 명이 송 주부의 말을 끊고서 밖에 있을 궁녀들에게 소리쳤다. 송 주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끊긴 것에 대해 화가 나지는 않았다. 궁은 예전과 다를 것 없이 항상 소란스럽고 불필요한 적색의 기류가 흐른다. 그저 그것을 다시 한 번 더 느꼈을 뿐이었다. 그는 외전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누구 못지 않게 중상을 입은 그는 단지 세자를 호위한다는 낮은 신분을 가졌다는 것으로 몸을 회복할 시간도 없이 사건의 정황을 입에 올리고 끈질기고 집요한 조사를 받아야 한다. 송 주부는 문득 준회가 불쌍했다. 병부를 꽉 말아 쥐면서 그는 다시 자리로 가 앉았다.
문이 열리고 별기군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군관복으로 적송을 입고 있는 준회를 끌고 들어왔다. 그는 지금만큼은 검은색 두건을 벗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얼굴이 보통 때와는 다르게 훤하게 보였다. 지원은 천천히 신하들 사이를 걸어가는 그를 한 번 쳐다봤다. 그는 세자를 구하고자 도적들과 대적하다 옆구리에 큰 치명상을 입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항상 악착 같던 걸음걸이는 맥이 없었다. 그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왕의 앞에서 깊게 머리를 숙였다. 왕을 보는 표정이 차게 식어 있었다. 두 눈이 써늘했다.
"…전하. 송구스럽습니다. 죽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하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저에게 당장 처형을 내리셔도 좋습니다."
외전은 쥐가 죽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준회는 눈을 감고 제 할 말을 다 했다. 지원은 뒤에서 그를 초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왕은 조금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과인이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물어도 되겠는가?
"……."
"왜 어째서 오늘은 그대 혼자서만 세자의 호위를 도왔는가?"
그 말에 준회는 깊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금방 답을 내놓았다.
"오늘, 세자께서는 세자빈과 단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셨습니다. 때문에 단 한 명의 무사를 곁에 두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럼 세자는 그 한 명으로 왜 하필 그대를 대동하였는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준회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전할 수 있는 사실은 방금 말한 모든 것이 전부였다. 그의 발언에 외전은 단숨에 술렁거렸다. 지원은 질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준회는 죄가 없어도 죗값을 물게 될 것이다.
"전하! 저 자를 즉시 내금위 소속으로부터 그 자격을 박탈하고 옥에 넣어야 합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분개한 신하 한 명이 고함을 질렀다. 그 덕분에 외전은 단숨에 시끄러운 말들이 오고 갔다. 한빈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며 왕과 그 옆의 왕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할 것인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아까 준회를 데리고 들어왔던 별기군 두 명이 다시 준회를 붙잡아 외전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가 외전을 떴음에도 외전 안의 신하들은 조금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왕은 조금 노한 얼굴로 신하들을 쳐다봤다. 머리가 아팠다.
"…모두 닥치시오! 세자가 죽은 건 호위무관 때문이 아니오! 왜 그대들은 범인들을 모색할 방법은 찾지 않고 엄한 자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려고만 하는 것이오? 조선의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는 두령들이, 부끄럽지도 않소?"
왕의 분노에 신하들은 크게 동요했다. 모두가 이전처럼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왕은 핏줄이 서린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짐의 성체가 그리 좋지 못하오. 때문에 이번 세자의 죽음은 나라를 큰 슬픔에 잠기게 할 것이오. 나는 한 나라의 왕으로서, 백성들을 그런 혼란에 빠뜨리고 싶지 않소. 우리 왕실의 안정 또한 무너뜨리고 싶지 않소."
그는 다음 말을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모든 눈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대체 어떤 해결책이 나오게 될지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책봉식을 생략하고, 둘째 아들인 한빈이 세자의 지위를 물려받게 할 것이오. 그리고 새로운 세자에게 형사취수제를 적용하는 바, 여드레 후의 혼례는 그대로 진행할 것이오. 짐에겐 의금부 지사의 가문 역시 무너뜨릴 마음이 없소."
"…전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자. 체통을 지키시오."
"……저에겐 이미, 마음을 나눈 정인이 있지 않습니까!"
한빈은 크게 당황하여 그만 큰 소리를 내었다. 옆에 있는 동혁이 깜짝 놀라 그의 비단을 잡아당길 정도였다. 그건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때 늦은 형사취수제의 작용과 갑작스런 세자 책봉에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동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떤 감정이 치솟아서 가슴이 미어지기 시작했다. 울컥거리며 금방이라도 슬픔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가슴 정중앙에 날렵한 촉이 꽂힌 것처럼 그 곳이 욱신거렸다. 또 다시 감정을 죽여버리고 그 사체를 가슴에 묻어야 한단 말인가.
내내 말을 않고 있던 왕후가 한빈의 말에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감정이 거의 깃들지 않은 말투로 천천히 한빈에게 새로운 올가미를 선사하였다.
"세자. 그대에게서 윤을 빼앗자는 것이 아닙니다."
"……."
"또 그대에게는 이제 첩을 들일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습니까."
"…마마, 그래도 이것은 제게……."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
나라, 라는 말에 한빈은 침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신하 모두가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으나, 한빈에겐 그걸 알아차릴 여력이 없었다. 차라리 동혁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라고 말하고 싶었다. 간청하고 싶었다. 자신은 왕의 자리 따위 욕심을 낸 적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저 윤과 혼인하여 걱정 없이 살고 싶은 것이 그의 오랜 소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숨에 무너지고 말았다. 윤을 부인이 아닌 첩으로 들이라니,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면서. 왕후의 말에 한빈은 기가 막혀 그만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더군다나 형의 정인이었다. 한빈은 그녀를 사랑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세자빈의 호위무사는 들으시오! 내일 세자빈을 다시 별궁에 입궐하도록 도와 세자의 장례식에 참석시키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세자와 동혁은 당장 호위무사를 따라가시오."
"……."
"…가서, 모든 것을 언질하고 돌아오도록 하시오."
한빈은 따갑고 날카로운 현기증을 느꼈다. 입술을 깨물어버리는 것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지끈거림이었다. 송 주부는 그런 세자를 짐짓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새로운 조선의 태양이 떴다. 그는 그 태양이 부디 소멸되지 않고 오래 빛날 수 있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6
남자는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도 나의 새로운 세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부자연스러운 행동으로 그 둘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 둘은 그 인사를 가볍게 받으면서 안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급히 눈물을 훔치며 따라나서려는데 문득 어머니의 걱정이 담긴 눈빛이 보였다. 나는 그저 힘겹게 미소 짓는 것으로 그 걱정에 화답했다. 그녀가 진정으로 딸을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자빈'을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밝은 달이 떴다. 보름이 아닌데도 달은 동그랗고 몸체가 컸다. 나는 멍하게 그걸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봄의 밤 공기는 차가웠다.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시려울 정도였다.
단 하루도 아닌 반나절 안에 그를 만나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버린 내가 미웠다. 그의 따뜻한 미소에 넘어가 쉽게 마음을 내놓은 내가 후회스러웠다. 이제 그는 없다. 생전 처음 보는 차가운 표정의 남자가 이제는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나는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의미 없이 움직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가시기를."
그런 내 옆으로 지원이 다가왔다. 멀리 숨어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향단이 보였다. 남자는 나를 보며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면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떤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표정 하나만 그렇게 지었을 뿐인데 그가 너무나도 무섭게 느껴졌다. 왈칵 겁이 났다. 아까 안채에서와는 확연히 다른 남자의 태도에 의문이면서도 어느 정도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됐고, 이젠 나를 사랑해야만 했다. 그는 단순히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닐까.
남자는 내게 인사도 하지 않으며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홀로 마당을 걸어가, 몸종이 대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이 곳을 빠져나갔다.
내 앞에는 앳된 얼굴의 남자 한 명이 남았다. 그는 방금 이 곳을 빠져나간 남자를 따라갈 마음이 없는지, 그저 가만히 내 앞에 서 있기만 했다. 어둠 속에서 본 남자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그는 그 피곤함 위로 밝은 미소를 겹치면서 내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세자빈. 소인의 신분이 천하여, 세자저하의 곁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정식으로 인사를 올립니다."
갑작스럽게 내게 허리를 숙이는 남자의 행동에 나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말을 하는 모습이 차분하고, 미소가 온화해서 언뜻 그에게서 세자의 형상이 비춰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신분이 천하다니? 분명 아까 향단이 세자의 친족들이라고 칭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이 걸치고 있는 두루마기는 아까 남자가 입었던 옷과는 사뭇 다르다. 또 그는 쓰지 않았던 갓을 이 사람은 쓰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복잡한 머릿속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가 대뜸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내게 사과를 건네왔다.
"이제 몸은 괜찮아지신 겁니까?"
"…아, 예. 그럼요."
"고작 하루 안에 너무나 큰 일을 당하셨습니다. 당신이 크게 심란하실 것 같아, 마음이 저립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조금 아픈 사람처럼 웃었다. 이름을 묻고 싶었지만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아서 관두었다. 달빛이 어렴풋이 그의 얼굴을 담았다. 달빛을 받은 그는 한층 더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까 그 남자와는 아주 다른 판국이었다.
그는 말이 없는 나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한 번 미소를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이 곳을 빠져나갔다. 지원이 좀 더 내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숨 하나였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별당으로 들어가셔야지요. 내일 아침에 별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지원은 그 말을 남기고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먼저 등을 돌렸다. 나 혼자 남겨진 마당이 쓸쓸했다. 몇 분 정도를 마당에서 홀로 서 있었다. 달은 아까 그 자리 그대로 변함 없이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저렇게나 밝은 달은 여태까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서의 달은 항상 너무 멀고, 구름이나 건물의 불빛들에 가려져 신기루처럼 희미하기만 했었다.
달은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 누가 세자를 죽였는지, 또는 어떤 것을 목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고 싶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인정하기도 싫었다. 내가 이 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지원이나 향단, 혹은 윤형이나 찬우까지. 이 넷이 전부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 넷에게까지 몸을 맡길 수는 없다. 나는 이 나라의 세자빈이다. 좀 더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뒤에서 향단이 다가와 나는 별당채로 걸음을 옮겼다. 향단은 말 없이 이불을 깔아주고 조금 흐트러진 방 안을 정돈했다. 그녀가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열어 나가려고 할 때, 나는 향단을 붙잡았다. 그녀는 내 말에 몸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제와는 다르게 얼굴이 조금 수척했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이 엄청난 일을 받아들이고 나를 보살피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저기, 향단아. 아까 그 분은 왜 갓을 쓰고 오셨지?"
"예? 혹시 갓이라면, 동혁……. 그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 분은 아씨를 만날 때마다 항상 갓을 쓰고 오셨는데요. 아니, 굳이 아씨를 만나는 날이 아니어도 그 분은 언제나 갓을 쓰고 다니시지요. 신분이 그러하시니 어쩔 도리가 없으실 겁니다."
"…아, 참. 그랬었지. 내가 잠깐 착각을 했어."
"그 분 팔자도 조금 기구하십니다. 전하의 피를 받고도 하필이면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렇게 많은 수모를 겪으시고도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으시니."
향단이 조금 먼 곳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름이, 동혁이었구나. 반듯한 외모와 성품에 걸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향단은 어제처럼 입김으로 초를 껐다. 그러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문을 닫고 나갔다. 동혁은 첩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자와는 온전히 피가 섞이지는 않았다는 건가.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잠시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외적인 것으로 보거나 말투로 보거나, 확실히 닮은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좀처럼 잠은 찾아오질 않았다. 눈을 뜨면 천장에 세자가 그려지고, 눈을 감으면 그 어둠 속에서 세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빨리 잠으로 그를 잊어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잠을 조종할 수 있다면 벌써 백 번은 넘게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또 다시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실종 처리가 되었을까? 아니면 사고를 당해 뇌사 상태에 빠졌을까? 아니면, 또 다른 내가 멀쩡히 웃고 떠들며 평범하게 지내고 있을까? 이것도 아니라면……. 이미 죽었을까? 혹시 길고 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내 앞으로 갑자기 이 곳이 나타난 것처럼, 언젠가는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이 곳에서의 생활은 내게 너무 벅차고 버겁다. 내가 견딜 수 있을 법한 곳이 아니다.
편하지 못한 잠을 잤다. 나쁜 꿈을 꾸지는 않았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 왠지 불길하고 수상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밖에서부터 문을 통해 긴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침이었다. 향단이 깨우러 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눈이 뜨여서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의 일이 어지간히도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원래 나쁜 일을 당하고 나면, 깊게 잠을 자지 못하는 버릇이 있었다.
일어나서 빗접에 놓인 빗으로 긴 머리칼을 빗었다. 단 한 번도 이렇게 길게 머리카락을 길러본 적이 없었다. 불편하기도 하고, 어울리지도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까 썩 나쁘지는 않았다.
무심코 시야 안으로 윤형이 선물한 연고 통이 보였다. 나는 고민하다가 세자의 반지를 빼 그 옆에 올려두었다. 고작 하루를 지니고 다닌 것뿐인데도 반지가 없는 손가락이 허전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본다면, 분명 기분이 상할 것이다.
"아씨! 오늘은 해가 서에서 떠오를 모양이네요. 어째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향단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밝게 소리쳤다. 그러나 왜인지 부자연스러운 발랄함이었다.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나는 오늘 별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는 건 향단과 지원을 만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인 셈인 것이다.
문득 마음이 서글퍼졌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으며, 나는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며칠을 봤다고 이렇게 정이 들었는지, 나조차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어쩌면 내 꿈 속의 환영일지도 모르는데.
향단이 뜨거운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고 아침을 가지러 나가려고 했지만 말렸다.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배가 고프지 않은 게 아니다. 그냥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였다. 향단은 고개를 저었지만 그래도 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향단은 이내 포기하고선 농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느 깊숙한 곳에서 검은 비단 옷을 꺼냈다. 덕분에 기류가 조금 어색해졌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고자 입을 열었다. 농 안에는 아직도 많은 비단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향단아! 내 옷, 모두 네가 가지지 않을래?"
"예? 아씨, 무슨 소리세요! 제 주제에 어떻게 감히 아씨의 옷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네가 예쁘게 입어주는 게 버리는 것보단 낫지."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어요. 아씨의 옷을 어떻게 제가 대신 입는단 말입니까."
"그럼 저 많은 옷을 앞으론 어쩌게? 이제 필요도 없는데."
"……그래도."
"그러지 말고 받아. 항상 나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야. 받아줄 거지?"
향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나를 보내기가 힘든 걸까? 나와의 마지막이 그렇게 슬픈 걸까? 향단은 어떤 마음으로 '세자빈'을 보살펴 왔을까? 나는 '세자빈'이 아니기에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향단을 달래주지도 못한 채 바보처럼 서 있기만 했다. 향단은 어느 틈엔가 씩씩하게 울음을 그치고 내게 검정색 비단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예. 받겠습니다. 아씨처럼 고이 모셔서, 제가 죽을 때가 되었을 땐 모두 품에 안고 땅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이제 아씨가 제 옆에 없으시니, 저는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살아간단 말입니까. 태어나 지금까지 오직 아씨 곁에서만 숨을 쉬고 살아왔는데."
그녀의 슬픔에 내 마음까지 크게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웃으면서 내 고름을 여미고 있는 향단의 머리통을 살짝 쓰다듬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지금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마당으로 나가자 모두가 나와 있었다. 어머니가 있었고, 옆에는 검은색 상복을 입은 아버지가 있었다. 무심코 뒤를 돌자, 향단은 별당채 앞에서 깊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또 다시 터져버린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세자빈. 안녕히 가십시오. 이 어미가 언제나 기도하고 있겠습니다. 저하의 장례식에는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 대신에 세자빈의 부친이 따라갈 것입니다."
"…예."
"그럼, 혼례식 때 보겠습니다. 부디 별궁에서 무탈하시기를."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그게 실감이 되자 마음 끝에서부터 어떤 감정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향단을 볼 수 없었다. 그녀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터질 것이다.
지원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를 모시는 게 마지막인 것이 크게 슬프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 섭섭했지만,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그렇게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지원은 나를 보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마지막 인사였다. 별궁에서, 아마 그를 많이 그리워하게 될 것 같았다.
"…전하께서 선처하시어 이제는 준회가 아씨와 저하를 모시게 될 것입니다. 원래 그는 옥에 갇힐 위기에 처했으나, 좋게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방금 전갈을 들었습니다."
지원이 옆에서 속삭였다. 나는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대문 밖으로 나가자 커다란 말 몇 마리가 보였다. 그 중 가운데에는, 군관복을 입고 말의 고삐를 쥐고 있는 준회가 있었다. 준회는 가뿐히 말에서 내려와 내 앞으로 섰다. 거동이 조금 불편한지 다리를 살짝 절었다. 그는 검은색 두건을 살며시 내렸다. 움직임은 입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는 예의를 갖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제부터 다시 당신을 모시게 됐습니다. 궁에서 말을 보내시어 이렇게 왔습니다."
"……예."
"가시지요."
조금 머뭇거리자 그가 직접 손을 잡으며 말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도와주었다. 고삐를 잡았다. 말이 천천히 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득 뒤를 돌자, 나를 따라오고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가장 뒤에는 준회가 있었다. 이윽고 준회는 능숙하게 말을 몰며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자 시작이었다. 나는 어제 보았던, 딱딱하고 차가운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오늘마저도 내게 냉담할까. 조금이라도 친절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산 중턱 쯤에 걸쳐져 있는 태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외전: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를 만나는 곳.
*이부: 왕의 귀를 높여 이르는 말.
*망혈과다: 과다출혈.
*내금위: 왕의 측근에서 호위를 맡은 곳.
*호위무관: 호위무사의 다른 말.
다음 편부터는 조금 늦게 올리게 될 것 같아서 오늘 왔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이 아무래도 앞으로 한빈이를 싫어하실 것 같네요. ㅋㅋㅋㅋ
원래 조금 굵직한 에피소드를 짜놓고 글을 쓰는 편인데... 쓰면서도 저 혼자 부들부들했답니다 ^^......
바나나킥 님
빈블리 님
김빱 님
일이세개 님
뜨뚜 님
외에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