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은 아버지가 가끔씩 궁으로 호출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궁과 관련된 일에 연루되는 것을 꺼렸다. 관청에 소속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본래 궁의 사람들과는 접촉이 얼마 없어 윤형은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직감이지만, 윤형은 아버지가 궁을 피하는 것엔 아무래도 떳떳하지 못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아버지는 궁을 싫어했다. 그 날도 그랬다. 세자가 이유 모를 습격을 받아 죽어버렸던 날, 그 날도 아버지는 내금위 소속의 사내 두 명과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토록 단호하고 분노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실로 오랜만이라서 윤형은 마당을 정돈하던 것을 멈추고 조금 멍하게 그 장면을 쳐다보아야 했다.
사내들은 아버지에게 지금 당장 입궐해 세자의 옥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심경이 찾아오는 순간에 그런 명을 받은 것이 반갑지 않은지 아버지는 쉽게 물러서지 않으려고 했다. 윤형은 빼꼼 고개를 치켜들어 그 모습을 빠짐 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던 와중에 윤형의 귀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세자가 살해 당했다. 사내 두 명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윤형의 머릿속으로 무심코 세자빈의 얼굴이 지나갔다. 그녀도 지금 이 소식을 들었을까?
세자가 살해 당했다! 조선의 태양이 저물었다!
마당 밖으로, 그런 어처구니 없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윤형은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침착해야 했다. 지금은 그녀에게로 가야 한다. 가서, 어떤 말이라도 건네어 그녀를 안심시켜야 했다. 그녀가 슬픔에 빠지는 걸 마냥 지켜볼 수는 없다. 왜인지 그런 의무감이 불쑥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윤형은 냉큼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가 나갈 채비를 했다. 캄캄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여전히 마당에선 별 소득 없는 실랑이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았고 그건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내의원에 명의가 널리고 널렸을 거라는 아버지의 말에, 사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들은 시체를 감별할 줄 모릅니다. 흑립을 고쳐 쓰는 윤형의 가슴이 순간 철렁했다. 그들은 지금 세자를 살리려는 부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사인을 알아낼 목적으로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윽고 윤형은 아버지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의 깊고 단단한 눈이 윤형의 차림을 한 번 훑었다. 심경에 어딜 가냐는 형식적인 물음에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죽은 사람도 살리는 것이 바로 조선의 의원이라고, 그렇게 제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
"지금 입궐하시지 않으면, 그 죽음의 여파로 눈물을 흘릴 사람이 있습니다. 부디 궁의 명을 받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답을 듣지는 않았다. 윤형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가옥을 나오고 인적이 드문 골목을 벗어났다. 아버지가 부디 궁으로 걸음을 옮기기를 그는 속으로 간절히 소원했다. 세자가 죽었다. 그걸 듣고도 놀랍도록 차분한 자신이 신기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의학을 배우며 사람의 죽음을 관여하던 터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윤형은 언젠가 한 번 거닐었던 적이 있는 어귀로 방향을 틀었다. 몇 걸음만 옮기면 세자빈의 가옥이 나온다. 그녀는 눈물 흘리고 있을까? 윤형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물이 젖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바램은 곧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의 별당채 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앉은지 얼마 되지 않아 세자빈은 울었다. 그녀의 손이 가련하게 떨리고 있었다. 윤형은 그 손을 잡아줄 수 없고, 얼굴에 흐른 눈물을 닦아줄 수 없음에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세자는 죽었지만, 그렇지 않으리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렇게나 슬프게 울었다. 윤형은 차라리 거짓을 들키고 싶었다. 그녀의 슬픔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윤형은 그녀를 그 곳에 두고 돌아서며, 마당에 있는 낯선 남자 둘을 잠시 시선했다. 한 명은 표정이 없고 한 명은 갓으로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윤형은 이윽고 그 둘의 정체를 눈치챘다. 세자의 죽음을 전하러 온 친족 혹은 측근일 것이다. 지원의 바로 옆에 서 있는 남자의 검게 반짝이는 비단이 그렇게 암시했다.
돌아가는 걸음은 느렸다. 생각이 많아진 탓이었다. 윤형은 밝게 떠오른 달이 비추는 어둠을 걸으며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쯤이면 모든 것을 알았으리라. 그는 잠시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소식을 접한 그녀를 상상할 수 없었다. 상상의 시도조차 윤형의 마음을 아프고 들끓게 했다.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쓸쓸하고 공허한 마당을 가로질러 윤형은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복잡했다. 결국 입궐을 위해 궁으로 걸음을 한 아버지가 다행이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윤형은 아버지가 의원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이유를 알고 있다. 기억도 못할 어린 시절에 그만 죽어버린 어머니를 위해서였다. 약재 몇 가지를 쓰면 금방 호전될 수 있는 병이었지만 원체 면역이 약했던 윤형의 어머니는 고열에 시달리다 결국 약을 달이던 아버지 옆에서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때부터 사람을 고치는 것을 평생의 일로 삼았다. 모든 환자들을 아내라고 생각하며 치료했다. 어떤 것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사명감 같은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의학의 범위에서 마다할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아버지가 궁을 기피하는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윤형은 확신했다. 언젠가는 진상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궁금증을 파묻고 살아갈 수는 없다.
윤형은 그 날 아버지를 기다리다 홀로 잠에 들었다.
며칠 동안 윤형은 평소처럼 지냈다. 혜민서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집에선 아버지의 밥을 지었다. 적적할 땐 혜민서의 의원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고 어쩌다가 마주치는 마을 꼬마들에게는 뺨을 쓰다듬으며 귀엽다고 말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세자빈을 생각했다. 그 날 이후 한 번을 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자의 죽음을 알게 되었으니, 장례식에 참석하러 본래 있던 자리, 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영영. 보통 세자가 죽으면 세자빈은 궁에 홀로 남게 되고 재혼이 금지되니까. 윤형은 문득 이런 현실이 야속하고 모질게 느껴졌다. 어째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지, 의외로 자신에게 둔한 그는 알지 못했다. 그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게 길지 않은 날을 살아오며 타인에게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윤형은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완연한 봄의 마지막 쯤이었다. 혜민서의 개업을 준비하던 윤형은 마당에 펼쳐둔 약재들을 잠시 살피다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왕실의 호위무사, 준회였다. 여태까지 아버지로부터 말로만 그에 대해 전해들은 게 있을 뿐, 이렇게 얼굴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윤형이 그를 준회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검은색 두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지금 세자와 세자빈의 호위를 맡고 있다. 윤형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태연해야 한다. 괜한 일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때 늦은 감기 기승이 시작되었으므로 그는 건조시킨 생강과 각종 약재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이 정도 양이면, 이틀은 충분히 약을 달일 수 있겠다고 윤형은 가늠했다.
"길을 비키시지요."
"……여길 찾으신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윤형은 그를 쳐다도 보지 않으며 물었다. 약재를 손으로 옮기는 모습이 분주했다.
"송 주부를 만나러 왔습니다. 저번에 상처를 입은 곳이 덧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째서 궁의 사람이 내의원을 두고 혜민서를 찾으신단 말입니까."
"저를 아십니까?"
"……."
"아아, 그 쪽의 아버지가 벌써 언질을 하신 모양이로군요."
"…이 곳을 찾으신 이유를 물었습니다."
"저번에 제 상태를 보아주신 것이 이 곳의 송 주부입니다."
"……아버지는 지금 혜민서에 부재 중이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대신 그대의 몸을 봐드리겠습니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지지 않으며 말하는 윤형을 준회는 살짝 강압적인 눈으로 쳐다봤다. 그 눈빛을 받아내며 윤형은 그를 혜민서로 들여서는 안 되리라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세한 설명 없이, 이제부터 궁의 사람을 함부로 혜민서 안에 들이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가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가벼운 비웃음이 들려왔다. 준회의 것이었다. 그 소리는 짧았으나 명확했고, 곧 그쳤으나 여운이 길었다. 윤형은 운검을 뽑아드는 준회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딱히 망설임 같은 감정이 보이지는 않았다.
"길을 비키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비켜서지 않으면 칼을 치겠습니다."
"…그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혜민서의 의원입니다. 단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목숨들을 살리고 있습니다. 설령 지금 당장 그대의 칼에 팔뚝이 찔린다고 하여도, 의원인 제가, 제 몸 하나 꿰매지 못하겠습니까?"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
"지금 저는 그대의 팔뚝 따위가 아니라, 심장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
"모르시겠습니까?"
준회의 운검이 천천히 윤형의 목 끝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의 칼날은 윤형의 숨통을 끊어내기 좋은 위치에 도달했고, 윤형은 느리게 시선을 움직여 그것을 쳐다봤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목을 베인다. 준회는 운검을 쥔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벼락 같은 끈질김이었다. 이내 윤형은 그 곳으로부터 시선을 떼어 준회를 보았다. 무표정이 지독했다.
"지금 무얼 하십니까."
"과연 송 주부의 자제는 다르십니다. 영특하신 줄로만 알았더니, 영악하셔서 다행입니다."
윤형은 드물게 차게 식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이다.
준회가 천천히 칼을 내렸다.
"곧 세자빈이 같은 부탁을 하러 이 곳에 올 겁니다."
"……."
"그 때도, 그런 얼굴을 하신다면 정말로 칼을 치겠습니다. 우린 당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훌륭한 명의가 필요한 것뿐입니다. 명의가 필요한데, 하필이면 그것이 당신의 아버지일 뿐이라는 겁니다. 제 말. 명심하시기를."
윤형이 무어라 되묻기도 전에 준회는 뒤를 돌았다. 그는 걸음을 걸으며 아주 살짝 다리를 절었다. 상처가 덧났다는 그의 말이 비단 거짓만은 아닌지 간혹 옆구리에 손을 가져가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윤형은 보았다. 처음으로 환자를 거부했다. 그것을 자각함과 동시에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불쑥 그를 찾아왔다. 아버지와 세자빈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윤형은 그의 칼날이 닿았던 목선을 잠시 쓰다듬었다. 자신도 알지 못할 어떤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9
시간은 평범하게 흘렀다. 세자는 나를 보러 걸음을 옮길 생각은 전혀 없는지 장례식 이후 단 한 번도 마주치질 못했다. 처음 며칠은 일부러 준회에게 떼를 써서 후원으로 가 산책을 했다. 당연하게도 세자는 그 곳에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그를 싫어하는 마음과 그래도 그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램이 동시에 공존했다. 모순된 감정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별궁 안에서는 워낙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동혁을 기다리게 됐다. 동혁은 칼 같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서 보통 아침을 먹고 경대를 쳐다보고 있으면 금방 내 앞으로 나타났다. 그런 그가 꼭 선물처럼 느껴졌다. 아니다. 그는 선물이 맞았다. 그는 적당히 진지하면서도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서, 같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내 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선물이라서 매일 나를 설레이게 했다. 어색할 것도 없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한자를 다정하게 알려주고, 내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하면 다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럴 때에도 귀찮을 법도 한데 아무런 기색을 하지 않았다. 어제는 직접 궁의 모든 통로를 알려주었다. 그는 그렇게 길을 안내하다가 자신에게 허리를 숙이는 내신 혹은 궁녀들이 보이면 그들보다도 더, 예의를 차려 인사를 건넸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 내가 자신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까? 그는 내가 어떤 말을 꺼내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면서도, 정작 자신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책에 쓰인 한자를 손수 짚어가며 내게 그 뜻을 알려주고 있던 그에게 나는 대뜸 재밌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는 내 말에 잠시 움찔했다. 그리고 바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거절의 뜻이 담긴 난감의 표시였다.
"워낙 글만 읽고 자라왔기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대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일부러 표정을 딱딱하게 하고 그를 쳐다봤다. 그는 또 다시 움찔했다. 내 반응에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그가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에겐 재밌어도 그대에겐 분명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잔뜩 토라진 척을 하고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엎드렸다. 옆에서 당황에 젖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동혁이 머릿속으로 그려져 웃음이 났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옆에서 갑자기 수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냉큼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구석에서 거문고를 가져와 줄을 튕기고 있었다. 음을 내는 손가락이 아름다웠다. 한 손으로는 술대를 잡았고 다른 손으로는 줄을 잡으며 음을 맞췄다. 그가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재밌는 이야기 말고, 소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악기까지 다룰 줄 안다니 모든 방면에서 능통한 사람이었다.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조금 수줍게 웃으면서 다시 줄을 튕겼다. 이내 아름다운 연주가 시작됐다. 정확히 무엇이 아름다웠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가 연주하고 있는 음악이, 그가 쥐고 있는 거문고가, 그가 진지하게 줄을 튕기고 있는 모습이, 아니면 그 자체가. 나는 반한 얼굴로 그 모든 걸 지켜봤다. 참을 수 없게 아름다워서 보는 사람마저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내 연주가 끝이 나고 내가 활짝 웃으며 박수를 몇 번 치자 그는 다시 거문고를 구석에 가져다 놓았다.
"들려드릴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좋은 것을 들려주시어 감사합니다."
아까처럼 내 옆에 앉는 동혁의 귓바퀴가 어쩐지 조금 붉었다.
"괜히 이상한 고집을 부려서 죄송합니다. 이젠 착하게 그대의 가르침을 받겠습……."
책장을 넘기는데, 바로 옆으로 갑자기 그의 고개가 틀어져서 나타났다. 뚫어져라 나를 응시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눈에는 어떤 것도 담겨 있지 않았고, 그래서 목적을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그의 숨결이 곧장 내게로 닿았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왜 그러냐는 물음도, 저리 가라는 명령도 선뜻 건넬 수 없었다. 그의 눈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이내 내게로부터 시선을 떼어냈다. 그 시선에 그만 질식할 뻔했던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나는 어느 틈엔가 계속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보고 싶어서 봤습니다."
"……."
동혁의 변명은 간결했다. 나는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에 펼쳐진 책 위로 아무렇게나 손가락을 뻗었다.
"…이, 이 글자를 아무리 봐도 모르겠습니다. 그대께서 가르쳐주시겠습니까?"
다행히도 내가 짚은 글자는 그가 이제까지 나에게 가르친 적이 없는 글자였다. 그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고민이 있는 것만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매끄럽던 목소리가 지금만큼은 탁하고 낮았다.
"전전불매."
"……."
"…요즘 그대 때문에 매일 밤, 잠을 뒤척이고 있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전전불매. 그가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누워 구른다는 전과, 부정의 뜻인 불, 그리고 잠을 칭하는 매를 써서 만든 성어입니다.
전전불매. 그렇게 말하던 동혁의 표정이 순간 침울해진 것 같아서 나는 그만 그게 진짜냐고 되물을 뻔했다. 나에게 고백하는 줄로만 알았다. 나를 두고 향하는 말인 줄 알았다. 나를, 나 때문에, 잠을 뒤척인다는 줄 알았다. 나는 잠깐 침묵했다.
"세자빈께 어울리는 성어입니다. 형님, 아니, 세자저하 덕분에 계속 전전불매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
"저하는 좋은 분입니다. 알고 계시지요? 분명 저하께서도 세자빈의 생각으로 전전불매를 이루고 계실 것입니다."
동혁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면서 평화로운 미소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 미소에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내내 차가운 얼음 같은 냉철한 태도의 세자가 떠올랐다. 그가 나 때문에 잠에 들 수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한 번 생각해봤다. 그가 만일 불면하고 있다면 아마도 다가오는 혼례가 그 원인일 것이었다. 그가 내 생각 같은 걸 할 리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가능하지 못한 일이었다. 차라리, 그 상대가 윤이라면 모를까.
내게서 이상한 기류를 눈치챘는지 동혁이 서둘러 다른 글자를 가리켰다.
"이것은 읽으실 수 있겠습니까? 전에 한 번 가르쳐드린 적이 있는 글자이온데……."
"저, 죄송하지만 오늘 공부는 이 쯤에서 끝내도 되겠습니까? 머리가 좀 아파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게 죄송을 느끼실 필요 없으십니다."
이러는 나를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세자, 그 사람 하나 때문에 이렇게 감정에 기복이 찾아오고 마음이 무거워질 수 있단 말인가. 괜히 나 때문에 동혁이 항상 해를 입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는 책을 챙기다 말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한 번 바라봤다. 무어라 입을 열어 말을 전하려는 것 같더니, 그 속에서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동혁은 내 글 선생이기 이전에 세자와 피가 섞인 동생이다. 그는 어떤 날이 와도 이런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동혁이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마침 문 밖에서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흔들림 없이 차분한 어조였다.
"방금 대전에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급히 조사를 받으러 걸음을 옮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특별한 주어를 띄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건 동혁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대전에서 동혁을 필요로 하고 있다니. 그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곧 알았다는 대답을 올렸다.
"…저, 조사라니요?"
"모르셨습니까? 승하하신 형님의 심장을 찌른 것이 누구인지, 그 날부터 계속 궁에서 용의자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왜 그대가……."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 물은 말이었다. 세자가 죽은 것과 동혁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저하의 사인은 심장이 관통해 숨이 멎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치명상을 입힐 정도의 사람이라면, 살면서 한 번 쯤은 칼을 다뤘을 것이라는 게 궁의 입장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첩의 자식이 아닙니까. 오해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게다가 어렸을 적, 궁 안에서 무예와 검술을 익힌 적이 있으니 제가 범인으로 지명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
"세자빈의 호위무관도 아마 그 날부터 매일 조사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가 세자빈께는 언질하지 않은 모양이지요?"
막힘 없이 나오는 말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가 왕족으로부터 박대를 당한다는 것이 차차 실감났다. 나라면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정말 단순히 첩의 자식이라는 것 하나로 이렇게나 많은 불행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한다니. 동혁이 안쓰러웠다.
동혁에게 배웅을 해주겠다고 했더니 그가 손사래를 치며 확고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를 따라나섰다. 계속 별궁 안에서만 있었던 터라 답답하기도 했고, 방금 전 동혁의 표정을 보니 그냥 문득 그렇게 하고 싶었다.
별궁을 나서니 언제나처럼 가만히 서 있는 준회가 보였다. 그는 내 옆에 있는 동혁을 한 번 쳐다보고, 다음으로는 내게로 시선을 옮겨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동혁도 그런 그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그는 내게 전할 말이 있는지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세자빈, 소인에게 대전에 부르심이 내려져 잠시 그대를 봐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후원에서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가보시지요."
아주 잠시지만 그 말에 동혁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준회가 동혁과 함께 내게로부터 등을 돌려 사라졌다. 나는 그 곳에 홀로 남았다. 세자를 만나야 한다. 세자가 나를 만나러 왔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상하게 목이 탔다. 손이 떨렸다. 잠시 치맛단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럼에도 그 떨림은 좀처럼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