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우는 조금 초조한 것처럼 마당을 거닐었다. 몸종에게 세자빈의 집으로 전갈을 보내라고 시킨 뒤 약 세 시간이 흘렀다. 몸종은 찬우의 편지를 그 곳으로 전하고 금방 돌아왔다. 찬우는 어린 몸종에게 세자빈의 안색을 물었으나, 몸종은, 향단이 대신 그 편지를 받았고 그녀가 그 즉시에 가옥의 문을 닫아버렸으므로 그걸 살필 여력은 없었다고 미안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몸종에게 찬우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할 필요 없다. 몸종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곧 부엌으로 사라졌고 찬우는 그 때부터 내내 마당에서 세자빈의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속이 복잡한 게, 단순한 배탈 같기도 했고 그녀에 대한 걱정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집과 이 곳의 거리를 생각하면, 그녀가 붓을 잡는 것이 유난스럽게 더디더라도 최소 한 시간 안에는 충분히 편지를 받아볼 수 있으리라고 그는 스스로 추측했다. 그러나 그 추측은 틀렸다. 세 시간이 지나가도 세자빈의 답장은 도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직접 이 곳을 찾을 리는 없었고, 여태 그랬던 것처럼 아마 향단 혹은 지원이 그 전갈을 대신 전하러 문을 두드릴 것이었다. 찬우는 캄캄해진 마당에서 홀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녀에 대한 걱정과 근심으로 뺨이 붉게 얼어버리는 것도 몰랐다. 봄의 추위는 따뜻한 만큼 거셌다.
세자가 죽었다. 그녀가 사랑하던 그가 죽어버린 것이었다. 엄청난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세자의 사인은 망혈과다였다. 습격을 받은 것이다. 찬우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렇게나 허무한 죽음을 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찬우는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고, 이제 그녀는 궁에 갇혀 홀로 쓸쓸한 여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찬우는 그 생각을 하며 무심코 전에 없던 표정을 했다. 거칠고 상심이 담긴 표정이었다.
몇 해 전에 세자, 진환이 책봉식을 끝내고 입학례를 하러 성균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성균관에 막 입학을 허가 받았던 찬우에겐 그를 가까이서 마주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동재 언저리 쯤에서야 조선의 고귀한 태양을 지켜볼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키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그 때의 찬우는 까치발을 들어가며 세자의 입학례를 감상했다. 후일에 그가 그녀의 남편이 될 것도 모르는 채로 찬우는 세자의 입학례에 잔잔한 기쁨을 느꼈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지금은 세상에 없는 조선의 태양이었다.
찬우는 떠오르는 잡념을 물리치려고 고개를 저었다. 마당 곳곳에 뿌리를 박은 향나무들이 보였다. 그 몇 그루의 나무들은 찬우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 곳에 있었다. 누군가에게 물어 확인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하나 같이 몸체들이 거대한 게 그냥 그렇게 보였다. 아마 백 년은 족히 살지 않았을까. 언젠가 찬우는 아버지에게 다른 무엇도 아닌, 굳이 향나무를 고집하여 이 곳에 심은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향은 모든 걸 감출 수 있다. 아버지는 그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었다.
찬우는 자정이 되었을 때 그녀의 답장을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직접 가옥을 찾아갈 갈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예민하게 변해 있을 그녀의 심기를 그보다 더 낮출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관두었다.
그의 입 속을 빠져나오는 한숨이 짙었다. 입김을 불어 방 안을 밝히던 초를 끄고, 찬우는 목 끝까지 이불을 올려 덮었다. 당연하게도 잠은 쉽게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유도 없이 막연하게 그녀가 걱정됐다. 꼭 급체를 한 것처럼 편도 언저리가 따갑고 쓰렸다. 그는 이게 뜻하는 것이 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낙망, 그건 낙망이었다.
억지로 눈을 감았다. 찬우는 검은 시야 속에서 막을 틈도 없이 피어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지우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녀가 전갈에 대해 답장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한 번 생각했다. 혹시, 전갈이 그녀에게 닿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 원인이라면 찬우는 어느 정도 그 이유를 너그럽게 헤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전갈을 읽고도 답장이 없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차라리 그 전갈이 그녀에게 닿지 않았던 것이라면 그는 긴 기다림과 그에 맞서느라 얻어낸 약간의 감기 기운을 모두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답장은 며칠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으므로 그는 일종의 한탄 같던 바램이 현실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녀는 전갈을 끝내 받지 못한 것이리라.
삼 일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성균관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찬우는 두꺼운 책을 고쳐 쥐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듣게 됐다. 같이 명륜당에서 글을 배우는 유생 몇 명이 궁으로부터 퍼진 소문에 대해 속삭이고 있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궁은 그녀에게 형사취수제를 적용한다고 했다. 그걸 머릿속으로 집어넣고 이해하는 동안 찬우는 잠시 현기증이 찾아오는 걸 느꼈다. 책을 쥔 손가락이 당혹스럽도록 떨려왔다.
그는 곧장 세자빈의 가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다채롭게 무르익었던 여러 꽃들이 색을 잃어갔다. 지원은 마당에서 그걸 나사가 좀 빠진 눈으로 쳐다보며 늘어지는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요즘 같은 일상이 너무도 무료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내내 곁에서 보필하던 세자빈이 사라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세자빈의 호위 대신에 그녀의 모친 혹은 부친의 잡다한 심부름을 도맡거나 남자 머슴들에게 검술을 알려주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시간은 야속할 것도 없이 순탄하게 흘렀다. 다만 그게 조금 심심할 정도로 재미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지원은 뜻 모를 인기척을 느끼고 냉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같이 몸을 부비며 잠을 자던 머슴인 줄로만 알고 바보처럼 눈을 접으며 웃었다가 괜한 낭패를 봤다. 거기엔 향단이 작은 접시를 하나 들고 수줍다고 할 수 있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지원은 약간 낯이 간지러워져서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는 곧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왔고, 향단은 그 옆에 살며시 무릎을 굽혔다. 지원은 그런 향단을 약간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봤다.
"지원아, 감자가 맛있게 익었는데 좀 먹을래?"
"됐어."
"…그러지 말구. 진짜 맛있는데. 내가 직접 쪘단 말이야."
"됐다니까."
계속되는 거절에 향단은 약간 풀이 죽은 얼굴을 했다. 지원은 금방 자리를 뜰 줄 알았던 그녀가 한참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자, 그 이유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느닷 없는 시무룩함이 보였다. 그 얼굴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찝찝해졌다. 지원은 귀찮다는 기색으로 그녀가 들고 있는 접시 위에서 감자를 집어 한 입을 긁어 먹었다. 소금으로 간을 한 따뜻한 감자는 생각 외로 맛있었다. 지원은 말도 없이 감자 한 알을 먹어치우고 향단을 쳐다봤다. 먹어줬으니 이만 다른 곳으로 가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향단은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난생 처음 보는 기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원은 미간을 좁혔다.
"어때?"
"맛있어."
"그게 다야?"
"그럼. 뭘 바라는데?"
"아냐! 아냐, 아냐!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향단은 총총 걸음을 옮기며 사라졌다. 지원은 다시 형형색색의 식물들과 의미 없는 눈 싸움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고 누군가가 가옥의 문을 두드렸다. 서둘러 일어난 지원이 문을 열어주었고, 찬우는 다급하게 그 안으로 들어서며 지금 세자빈이 이 곳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에 지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찬우의 얼굴에 비치는 실망감이 역력했다.
"…세자빈께, 형사취수제가 적용되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
찬우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답장에 대해선 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못마땅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말이나 됩니까? 원칙적으로, 세자가 돌아가시면 세자빈의 재혼은 금기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예, 도련님 말씀처럼 원칙적으로는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은 원칙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무심한 어투에 찬우는 머리가 어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상황을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그가 그저 대단할 뿐이었다.
"……그럼, 혼례도 예정대로 진행됩니까."
"예."
"그렇다면……."
마당에 잠시 적막함이 감돌았다. 눈을 굴려가며 날짜를 가늠하는 찬우에게 지원은 간결히 고했다.
"이틀 후입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찬우는 지니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마른 주먹을 쥐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녀도. 그도. 자기 자신도. 모두가.
10
준회와 동혁이 멀어졌다. 후원으로 바로 걸음을 옮길 생각은 없어서, 아주 잠깐 그 둘의 뒷모습을 쳐다보기로 했다. 그 둘은 조금 거리를 두고 걸었다. 가벼운 담소도 나누지 않았다. 분명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 텐데도 그랬다.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살가움도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는 동혁의 처지에 대해 한 번 생각했다. 그리고 세자의 호위무사였으며 지금 역시 그러한 준회의 입장도 한 번 새삼스럽게 떠올려봤다. 그 둘이 유순한 관계에 놓이는 건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몰랐다.
나는 깊은 숨을 한 번 내쉬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한숨은 아니었다. 그냥 몇 분 후에 마주치게 될 세자의 얼굴 때문에, 나도 모르게 흩어진 걱정이 쌓이고 모인 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그 숨 덩어리는 아주 미약한 입김으로 이내 자취를 감췄다. 뜬금 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맑았다.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일말의 영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틈만 나면 준회에게 후원으로 산책을 가자고 어리광을 부렸기 때문에, 별궁에서 후원으로 가는 길목은 이젠 익숙했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단지 옆에 준회가 없을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곁에서 조금씩 보이던 궁녀들마저 사라지고, 후원에 다다르기까지 나는 완전한 혼자였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그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그의 말에는 어떤 목소리로 대답을 해야 할지. 그런 복잡한 것들만이 아주 잠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나는 그를 만났던 어느 때보다 깔끔하고 한산한 정신 상태로 후원의 입구까지 걸음을 옮겼다.
혹시 이번에도 그의 곁에 윤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무색하도록 그는 화사한 꽃밭 사이에 홀로 서 있었다. 나는 입술을 몇 번 깨물으면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준회 없이 그를 만나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았다. 준회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자꾸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
그는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가슴팍에는 사조룡이 새겨진 채였다. 역시 바로 그를 쳐다보는 건 무리였다. 나는 그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의 곤룡포에 새겨진 용 넷을 바보처럼 쳐다보기만 했다. 조금 시선을 올리면 세자의 말끔한 턱선이 보였다. 거기서 더 고개를 들면 분명 그의 온전한 얼굴이 나타날 것이었다. 그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떤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겁부터 먹고 있는 내게 이상한 연민을 느낀 건지 그는 잠시 알맹이 없는 지푸라기 인형처럼 웃었다. 선명하게 낮은 음색이었다.
"제가 그렇게도 무섭습니까."
"……."
"…저번에는 제가 무례했습니다. 소식을 들었을 윤이 걱정되어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그만 그대 앞에서 철부지 같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용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놀라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가 내게 처음으로 꺼낸 말은 그 무엇도 아닌 사과였다. 사죄를 구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서 한참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도리어 입 안에서 쓴 맛이 났다. 그는 그걸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이내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차분하고 부드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준회를 찾으려고 뒤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며칠 전에 그대의 집으로 납채를 보냈고, 어제는 혼인서를 되받아 납징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급하게 치뤄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영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서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똑바르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시선이 왜인지 조금 부담스러워 나는 슬쩍 고개를 내려 꽃밭을 쳐다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땐 화사하고 예쁘기만 하던 꽃들이 가까이에서는 모두 시들어 너저분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무심코 이 곳의 봄이 끝나가고 있음을 자각했다.
"이제, 이틀 후면 그대는 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때문에, 그의 고백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죽어버린 꽃들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는 그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았기에 어쩐지 갑작스런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혼자서 아름답고 혼자서 빛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향했을 고백은 그저 그런 그의 혼잣말 같았다. 나는 지워낼 수 없는 낯선 공기의 흐름에 역한 구역질이 목을 건드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윤을 잊겠습니다. 그러니 그대께서도 그대의 사랑을 난도하여 주시겠습니까. 그대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이제 누구도 아닌 제가 되어도 되겠습니까."
"……."
"오로지 저만을 사랑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가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꽃들을 움큼씩 쥐어 짓이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선뜻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그의 태도가 혼란스러웠다. 그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고 그러므로 나를 쳐다보는 걸 포기했다. 나는 그에게 윤이 어떤 존재였을지에 대해 짐작했다. 윤은 그저 절친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세자와의 사이를 소개했지만 그게 사실일 리 없었다. 그 때 그의 그 표정이 그렇다고 말했다. 그건 사랑을 대하고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표정이었고, 내겐 거짓으로라도 지어주지 않던 얼굴이었다.
그랬던 그가 나에게 윤을 포기하겠다고 하고 있다.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에게 그 이유를 물을 용기가 생겨나진 않았다. 윤 대신에 나를 선택한 이유는 단지 나라에 대한 책임감일까. 나는 그에게 긍정도 부정도 보이지 않았고 세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내 답을 들을 때까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그의 자세에서부터 보였다.
나는 반지가 끼워져 있던 손가락을 한 번 주무르면서 입을 열었다. 그의 무감각한 고백에,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어서였다.
"…송구하오나 반대로 저하께 묻겠습니다."
"……."
"정말, 윤을 잊을 수 있으십니까?"
세자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나는 또렷하게 그를 응시하며 그에 대한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거짓된 고백에 넘어가서 괜한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겁쟁이 같은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보처럼 그에게 속아서 아무 말하지 못할 내 모습이 더 구차하게 다가왔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조금도 입을 달싹이지 않았다. 그는 이내 내게로부터 등을 돌려버렸고, 성큼성큼 걸으며 내 시야를 반 쯤 벗어나고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그는 어렵다. 그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그의 말에는 어떤 목소리로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해봐도 소용이 없다. 그는 미지수다. 어려운 미지수다. 그에겐 윤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평범한 공식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내게 어려운 존재였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었다. 나는 잠시 혼자 꽃밭에 서 있다가 별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세상에서 가장 느리다고 생각되는 움직임이었다.
익숙한 길목을 지나면서부터 갑자기 하늘에 어둠이 찾아왔다. 소나기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잠시 걸음을 멈추는데 완연한 어둠으로 번지고 있는 하늘, 그게 보였고 그건 한낱 칙칙한 소나기 따위가 아니었다. 밤보다도 어두운 색깔이 하늘에 범벅되었다. 하늘은 사방으로 빠르게 먹색으로 번져버렸다.
아까 동혁에게 괜한 핑계를 대며 공부를 일찍 끝냈으니 아직 저녁이 찾아오려면 네 시간은 족히 남았을 것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내 눈 앞에 나타난 현상이 단순한 밤의 암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늘엔 해도, 달도, 별도, 구름도 보이지 않았다. 이내 어둠은 어둠보다 훨씬 캄캄해져서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 무엇도 보이는 게 없었다. 걸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칠흑 같은 어둠이 전부였다. 준회를 부르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준회를 부른다고 해서 그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별궁까지 단 몇 걸음이 남았을까. 잠시 그걸 헤아리다가,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는 그만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그 인기척은 다급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병적으로 손이 떨려왔다.
곧 어떤 손이 내 눈 위를 덮었다. 괴한인 줄 알고 냉큼 소리를 지르려다가, 이내 그 정체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일식인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그에게서 아까 그 썩어 문드러진 꽃 향기가 느껴졌다.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지금 어둠으로부터 내 눈을 가리고 와락 몸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은 세자였다. 예고 없는 밀착에 숨이 멈췄다. 그는 나를 끌어안고, 내 눈꺼풀 위에 손을 얹고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그건 주위가 환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퍽 조심스럽게 내게로부터 손을 떼어냈다. 조금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나는 세상이 아까처럼 다시 밝아졌음을 깨달았고 동시에 세자가 살짝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는 우연히 내게로 걸음을 옮겼다거나, 우연히 내 두 눈을 가리게 됐다거나, 정말 우연히 나를 끌어안았다거나, 하는 변명 같은 건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멀뚱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까처럼.
먼저 무시해놓고 얼마 못가 다시 내게로 달려온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조금 당돌하게 그의 눈빛을 받아냈다.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고 두려움에 찬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사소한 반항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제게 윤을 잊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까."
"……."
"아마 잊지 못할 겁니다. 오랫동안 다듬어진 사랑을 무슨 수로 잊는단 말입니까."
"……."
"하지만……. 그대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그런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그대 앞에서 윤에 대한 어떤 것도 입에 담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에게, 어떤 상처도 생기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러니 그대께서도, 제 앞에서 다른 사람을 떠올리지 마십시오. 거짓이라도 좋습니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칭하고 있는 타인이 누구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등을 돌렸다. 뒤도 쳐다보지 않았다. 길목을 벗어나 별궁이 보이기 시작하던 순간에, 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준회가 아주 살짝 내 눈에 담겨지던 때에 나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준회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그로부터 당한 수치를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웃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바로 별궁 안으로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계속.
"요즘 부쩍 달이 조선의 태양을 가리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도 짧은 일식이 일어났는데, 혹시 세자빈께서도 그걸 경험하셨는지요."
"……."
"……세자빈, 제 말이 들리십니까?"
"……."
그는 이기적이다. 자신의 사랑을 잊지 않겠다고 하고, 그게 내키지 않으면 나도 그렇게 하라고 한다. 사랑을 숨기고 서로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을 척을 하자고 한다. 그는 나에게서 윤을 보려고 하면서 나에게는 그를 떠올리지 말라고 한다. 이기적이다. 그가 밉다. 향단을 만나서 펑펑 울음을 터뜨리고, 모든 설움을 털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의 회복이 불가할 정도로 기분은 바닥을 쳤다.
별안간 거친 손이 나타나 허공을 휘저었다. 나는 그 움직임에 화들짝 놀라며 준회를 쳐다봤다. 준회는 곧 흔들던 손을 멈췄고, 지그시 나를 쳐다봤다. 별궁 바로 앞, 그 곳을 지나치는 궁녀들이 나와 준회를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저하께, 무슨 말씀을 들으신 겁니까. 왜 가까이 있는 제 음성도 듣지를 못하십니까."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고……."
"……."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준회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괜히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 같아 나는 아무 말이나 꺼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 저, 너는 왜 항상 내 옆에만 있어?"
"예?"
"그러니까, 내 말은……. 왜 너는 저하의 곁에는 가지를 않는 거야? 네가 계속 내 옆에만 있다가 저하께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시면 안 되잖아."
내가 뱉은 말에, 나도 놀랐다. 왜 하필이면 마구잡이로 꺼낸 이야기가 그에 관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저하께선 제가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께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검을 뽑고 피를 흘릴 것입니다. 이를 테면, 바로 당신 같은."
준회는 그런 말을 하면서 눈을 번뜩였다. 나는 그게 어쩐지 물에 사는 사람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준회는 볼 때마다 깊은 수심에 빠져 있는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막 강가를 헤엄쳐 나온 어류처럼 싱싱하게 팔딱이다가도 어쩔 때는 대책 없이 무겁게 해저 안으로 가라앉기도 했다. 그는 지금 어떤 노기를 띄우고 막심한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있는 중이었다. 준회는 그 물결 안에서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았고 대신에 나를 위해 검을 뽑겠다고 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딱히 대꾸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별궁 근처에 심어진 푸르른 나무 몇 그루 위에 새들이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올망졸망한 모습이 귀여워서, 무심코 준회에게 저것 좀 보라고 어깨를 몇 번 흔들었다가 이윽고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준회가 한껏 얼굴을 찌푸린 채 옆구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묻질 못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어디 보자. 어디가 아픈 건데?"
"…아닙니다."
준회는 잠시 비틀하다가 내가 손을 뻗는 모양을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억지로 옆구리로부터 손을 떼어내고 고개를 숙였다. 이만 별궁 안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였다. 내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은 것 같았다. 나는 그 바램을 따라주고 싶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아픔을 참아내는 모습에 선뜻 뒤를 돌아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준회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나를 한 번 바라보고, 아까보다 깊이 허리를 숙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별궁 앞에 두고 뒤를 돌았다. 다시 답답한 별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지겨움보다 여태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짜증스러웠다.
무심코, 세자가 죽은 날이 떠올랐다. 그 날, 세자의 호위무관 또한 많이 다쳤다는 것을 들었었다. 그건 준회였다. 이 곳에 적응을 하느라고 지금까지 그에게 무신경했던 나를 질책하고 싶었다. 세자가 죽었으니 그를 지켜야 할 호위무관 역시 죽음을 겨우 비껴간 상해를 입었을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사실을 이제껏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싫었다. 준회는 그 때 결코 가벼운 상처를 입지 않았다. 내 앞에서 그걸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애썼을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방 안으로 들어와 궁녀들이 옷을 갈아입힐 때도 근심은 사라지질 않았다. 나 때문에 모든 게 틀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을 걸렀다. 저녁을 거르고, 나는 내 앞으로 나타난 모든 불편한 상황들을 되새김질했다. 나는 갑자기 조선으로 왔고 이 나라의 세자와 결혼을 약속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는 만나고 얼마 되지도 않아 그만 죽어버렸고, 그의 동생이 새로운 세자가 되어 그를 대신해 나와 혼인해야 했다. 그게 당장 이틀 후였고 야속하게도 새로운 세자는 나를 미워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며칠 안에는, 깊은 사이도 아닌 윤형에게 궁으로 아버지를 모시는 게 좋겠다는 거북한 부탁을 해야 한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여태까지 쌓아온 심란함이 오늘은 유독 배가 되는 것 같았다.
내일이 지나면 나는 그와 혼인해야 한다. 내일은 동혁으로부터 글과 서학을 가르침 받는 마지막 날이다. 어쩌면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내일이 끝일 터였다. 내일 하루만이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부디 내일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그 소원은 몇 번이고 계속 혓바닥을 칭칭 감았다.
/
*성균관: 양반의 자제들 혹은 생원시, 진원시에 합격한 유생들만 입학이 가능했던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
*입학례: 세자가 책봉식 후에 성균관으로 가 교수관에게 제자의 예를 보이는 것으로 실제로 입학하지는 않는다. 그저 세자가 유학도임을 선언하기 위해서 행하는 하나의 절차이다.
*동재: 성균관의 유생들이 머무는 기숙사로 금녀의 공간이다.
*명륜당: 성균관 유생들이 모여 공부를 하는 강당.
*사조룡: 곤룡포에 새겨진 네 마리의 용을 뜻함.
여러분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습니다...... ㅠㅠ
너무 오랜만이라서 혹시 잊으신 건 아닌지... 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오늘 1차적으로 시험이 끝났는데요...
음... ^^...
(말을 아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괜찮아요 다음에 더 잘 보면 되니까...
아 근데 왜 갑자기 눈물이... ㅎ
저번 편에 댓글로 찬우와 지원이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여럿 계셔서!!!
앞쪽에 조금 넣어봤는데... 독자 분들이 읽으시기에는 어떠셨을지... 잘 모르겠네요......★
사실 찬우는 제가 생각해도 너무 심각한 분량리스라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넣을 수밖에 없었어요!! ㅋㅋㅋㅋㅋ
아무래도 향단이가 지원이를 좋아하나봐요...
좋아하면 안 되는데...
바나나킥 님
빈블리 님
김빱 님
일이세개 님
뜨뚜 님
뿌요뿌요 님
한빈아춤추자 님
또또 님
슬기 님
동동동 님
총총총 님
꾸준해 님
꾸주네 님
김한빈김지원 님
꾸욥 님
헤헷 님
외에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글이 너~~~무 너무 넘ㄴㄴㄴ너눔너눔너무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큰일이네요... 눙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한빈아 너 왜 그래...... ㅋㅋㅋㅋ
혹시나 암호닉 신청하셨는데 빠지신 분들은 댓글에다 살포시 알려주시면 바로 추가해드리겠습니다!
언제나 감사해요!!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