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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갑작스럽게 세자의 자리에 올랐고, 또 너무 갑작스럽게, 많은 것들을 짊어져야 할 상황에 갇히게 됐다. 혼란스러울 그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최대한 그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행동하겠노라고 속으로 다짐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형을 잃은 그가 너무 불쌍해지니까. '세자빈'인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때문에 그가 너무 가여워지니까. 사랑 받을 만큼 내가 사랑스럽게 행동하지 않으면. 그는 정말로 나를 내내 그런 차가운 눈으로만 볼 테니까. 나는 그에게서 사랑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와 내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예감했다. 그는 그렇게 나쁘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며, 못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이 틀렸다. 그는, 새로운 세자는 그렇게나 나쁘고, 차갑고, 못됐다. 그렇지 않고서야 형의 장례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그런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을 리 없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려왔다. 화가 났다. 이제 그에게서 사랑 받을 이유가 사라졌다. 그에겐 내가 사랑하던 세자의 자격이 없다.
흑룡포를 입은 그가 과연 그 곳에 있던 나를 봤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대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걷기만 했으니 알 길이 없었다. 돌아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뒤에서 준회의 다급하면서도 감정이 부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충분히 나를 따라잡을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말로만 계속 나를 다그치고 있을 뿐이었다. 삐죽 솟아난 나무 뿌리에 발을 잘못 디뎌 몸을 한 번 크게 휘청이자, 나도 모르게 비명 비슷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창피함 같기도 했고, 이유 모를 수치심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내 옆으로 그림자가 졌다. 준회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를 쳐다볼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괜히 잘못도 없는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게 될 것만 같아서였다.
"…저하께선 아직 어리십니다. 세자빈과 고작, 이 년의 나이 차가 있을 뿐입니다. 저하께선 아직 모든 것을 분별할 힘이 부족하십니다."
"……."
"세자빈께서도 들으셨을 겁니다. 저하께는 다른 정인이 있습니다."
"……."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만큼은 근본적으로 궁의 출입을 제한하려고 했습니다만, 판서의 어명으로 그만 착오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는 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며 자꾸만 말을 더듬었다. 몸에 힘이 풀렸다. 주저앉고 싶었다. 우리 둘은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준회는 내게 길을 재촉하지도, 그렇게 하라는 무언의 압박도 주지 않았다. 그냥 내 옆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아마도 내가 마음을 추스릴 때까지 기다리려는 작정인 것 같았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현기증이 돌고, 버티기 힘든 오한이 느껴졌다. 그런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다. 세자는 여태 자신의 형만을 믿고, 그가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것으로만 알고 아무런 대책 없이 왕족으로서의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세자의 자리는 이미 형에게 있으니 세자빈을 간택할 의무도, 훗날 한 나라를 책임해야 한다는 중후한 책임 의식도 없이 살아왔을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아마 조금 전의 그녀가 바로 그 정인이리라. 모든 것이 차곡차곡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토록 나를 경멸하던 그의 눈동자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지극히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니, 상상도 못할 곤혹이었을 것이다.
무서워졌다. 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나는 어떻게 하더라도 그의 사랑을 단 조금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나를 미워하는 건 당연했다. 자연스러운 이치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나 자신이 조금 불쌍해졌다.
얼마가 지났을지 모르겠다. 봄 특유의 따사로운 햇살이 바닥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그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시야가 불투명해졌다가, 다시 그렇지 않아졌다가를 끝도 없이 반복했다. 눈물이 흐른 뺨이 뜨거웠다. 나는 금방 아무렇지도 않게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흐느끼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한 슬픔에서 우러나온 눈물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나는 웃었다. 웃어서, 준회를 쳐다봤다. 그는 아무런 기색 없이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나도 알아. 다 알고 있었어. 그냥 조금……. 놀란 것뿐이야. 이제 괜찮아."
"……그러십니까. 다행입니다."
"……응. 추하게 자꾸 울어서 곤란하게 만들고, 미안. 참, 들러야 할 곳이 있다면서. 가자."
거짓말이었다. 그런 사실은 알고 있지 않았다. 괜찮지도 않았다. 나는 그가 내 거짓에 속아 넘어가주길 바랬다. 그는 밑도 끝도 없는 깊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는 가자는 내 말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앞장을 섰다. 후원과 별궁을 이어주는 길목을 벗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가 분주한 모양새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옥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궁녀들과 그 사이에 검은색 상복을 아직 벗지 못한 사내들이 물건들을 옮기고 있었다. 준회가 그 중간에 나타나자 모두가 수군거리며 길을 비켜섰다. 나는 준회의 뒤를 말 없이 따랐다.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다. 나는 부디 그 사람들이 내 눈물의 흔적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기도했다.
준회가 나를 이끌어 데리고 간 곳은 궁의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이 곳의 궁들 중 가장 크기가 크고 기품이 넘치는 궁이었다. 준회의 말을 빌리자면 이 곳 안에 대전이라는 곳이 존재할 터였다. 준회가 평소 때 입던 옷과 비슷한 차림의 남자들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궁의 문을 열어주었다. 나도 따라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준회가 궁으로 들어가려는 바로 그 순간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내게로 뒤를 돌았다. 왜 갑자기 걸음을 멈추냐는 식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느리게 입을 떼었다.
"소인의 신분이 지극히 낮은 바, 특별한 허가가 없으면 저는 이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아아, 응."
"앞에 있는 궁녀들이 이제 곧 세자빈을 안내할 겁니다. 저는 그 때처럼 여기서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순식간에 궁녀 몇 명이 내 앞으로 나타났다. 준회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와 조금 더 있고 싶은데, 궁녀들은 자꾸만 나를 재촉하며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궁의 문이 닫혔다. 나는 조금 찜찜한 기색으로 궁녀들을 쳐다봤다. 그녀들도 곧 나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조금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반짝거리는 나무로 마감을 한 복도에서부터 나는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멀리서 복잡하고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윽고 복도에 끝에서, 나는 마른 침을 몇 번이고 삼켜내야 했다. 얇은 종이로 벽과 벽 사이를 막았으므로 확실하게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 너머로 수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전마마, 빈궁마마 납시셨습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면 지금, 이 안에 왕비가 있다는 말인가? 긴장이 돼서 손이 떨렸다. 이번엔 주먹을 꽉 쥐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험하게 떨리고 있는 이 손을 감추고 싶었다. 벽을 가로막고 있던 얇은 종이들이 걷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하나 같이 검은색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들은 모두 궁에서 일하는 높은 직책의 사람들일 것이다. 궁녀들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내 뒤로 물러났다. 이제부턴 혼자 저 앞으로 걸어나가란 소리였다. 맙소사. 속으로 좌절하는 대신에 겉으로는 최대한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왕비의 자리 바로 앞으로 가 앉았다. 형식적으로 깊게 머리를 숙이자, 그녀도 이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다지 좋지 못했던 첫 인상과 마찬가지로 지금 내 앞의 그녀는 나를 마땅치 않은 눈으로 쳐다봤다. 눈이 온화하지 못한 것이 지금의 세자와 비슷했다. 그렇다면 나를 나비로 부르던 그는, 왕을 닮았던 걸까. 잠깐 그런 아무런 의미 없는 생각을 했다.
그녀에겐 아들을 잃어 조금 침울한 기색이 있었다. 그러나 아주 미약했다. 오늘이 지나면 이 곳의 사람들에겐 세자의 죽음은 쉽게 잊혀질 것처럼 보였다.
"세자의 장례식에 참석해주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마마."
"그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 불렀습니다."
나는 그 말에 짧게 대답하며 흘긋거리며 주변을 쳐다봤다. 늙은 신하들 사이에 앳된 얼굴들이 몇 명 있었다. 그 중에서 동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향단의 말처럼, 단지 후궁의 자식이란 이유로 이 곳에서 박대를 당하는 걸까. 그런 생각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데, 갑자기 매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의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어딘지 모르게 꿍꿍이를 숨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이제 혼례가 겨우 이레 정도가 남았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부디, 새로운 세자와 별 탈 없이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 말에는 선뜻 그러겠노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세자의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이런 말을 던지는 이유는 대체 뭘까.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알았다는 식으로 짧게 대답을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아직 벗지 못한 검은색 두루마기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다음으로는 허전한 약지를 꼼지락댔다. 그가 선물한 반지가 그리웠다. 역시 주머니를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녀는 본격적으로 대담을 시작하려는지 잠시 자리를 고쳐 앉았다.
"혜민서의 송 의원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혜민서? 송 의원이라면, 윤형을 말하는 것인가. 사실 여태 만난 건 고작 두 번, 세 번이 전부라 친분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 사소한 걸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의문스러우면서도, 나는 짐짓 태연스럽게 왕비를 쳐다봤다. 그녀가 어떤 것을 위해 윤형을 들먹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대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주상전하의 상태가 많이 위독합니다. 내의원과 전의감이 중국에서도 도움을 받아 약재를 달여 올리고 있지만 별 다른 진척이 전혀 없습니다."
"……."
"그 자의 아버지가 몇 년 전까지 궁의 어의로 있었던 것을 그대도 알고 있을 겁니다. 나는 여태 그렇게 뛰어난 명의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자에겐, 전하의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궁으로 돌아오라는 우리의 전갈을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갈 마음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눈치껏 상황을 파악했다. 내가 대신 윤형에게 부탁을 하라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싫었다. 나는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따뜻한 위로를 주는 것만으로도 내게 충분한 도움이 되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고작 몇 번 얼굴을 맞대었다는 이유로 이렇게 큰 부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그의 착하고 무른 성격은 분명 어떻게 해서라도 내 부탁을 들어주려 노력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한동안 의원으로서의 생활에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나쁜 쪽으로.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도 틀어질 수 있다.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왕비는 이기적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게 느껴졌다. 한 나라의 국모이면서, 자신의 권력을 쥐고 있는 왕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람 몇 명 쯤의 상황은 쉽게 무시하고 손에 쥐어 흔들려고 했다. 분명, 윤형의 아버지에겐 궁으로 돌아오라는 부탁을 선뜻 받아낼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왕비는 그것을 몇 번이고 무시하며 왕족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나는 전보다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확실하게, 그러나 그녀의 기분은 상하지 않도록 거절해야 한다.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잦아들었던 손의 떨림이 다시 발병했다.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사람과 별 다른 친분이 없습니다. 그저, 친가에 있을 적에 한 번 진찰을 받은 것이 다입니다."
"……."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부탁을 차마 들어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왕비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뜻 모를 불안감에 슬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니, 그녀는 맹렬한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그 화를 차분하게 삭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두려움에 팔뚝마저 떨릴 지경이었다.
"세자빈. 전하를 위한 일입니다. 거짓을 고하지는 마세요."
"…거짓이 아니오라……."
"어명을 어기시겠다는 겁니까?"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막무가내였다. 조금의 짜증이 솟구칠 정도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을 궁으로 데려오시지요."
"…예?"
"우리에겐 명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필요로 하는 명의를 데려올 수는 없으니, 그 명의의 피를 물려받은 작자를 데리고 오면 어느 정도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자빈, 제 말이 틀렸습니까?"
하는 수 없었다. 나는 짓눌린 목소리로 끝내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윤형을 궁의 일에 끼어들도록 할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한 번 부탁을 드려보겠습니다."
"진작에 그러셨으면 되었을 것을, 어째서 거짓을 고하여 저를 난처에 빠뜨리십니까."
"…송구합니다."
"이만 가보셔도 좋습니다. 별궁에 다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정말로 혼례가 며칠 남지 않았으니, 게다가 그대께선 병가로 공부를 조금 쉬었으니, 그 배로 더욱 열심히 법도를 익히셔야지요."
왕비는 끝에 조금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뒤를 돌아 걸었다. 신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궁녀들이 종이를 걷어주었다. 길고 긴 복도가 보였다. 속이 울렁거려 복도가 꼭 멋대로 움직이는 구름다리처럼 보였다. 궁녀들이 내 옆과 뒤에 서며 내게 길을 안내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윤형에게 이 부탁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벌써부터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궁의 문을 열자, 미동도 않고 서 있는 준회가 보였다. 그는 나를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태양이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었다. 저녁이 찾아오려는 기미가 보였다.
"대담은 잘 이루어졌습니까."
"…응, 뭐……."
감흥 없이 대답하다가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흑룡포가 보였다. 옆에는 검은색 비단 옷을 입은 여자가 있었다. 세자였다. 그리고 세자가 사랑하는 그만의 정인이었다. 움직여야 하는데, 발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준회가 옆에서 무어라 소곤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떤 소리인지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까 그 여자의 웃음 소리만이 반복해서 귓전을 파고들 뿐이었다.
그 둘은 다정하게 귓속말을 나누더니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준회는 무엇인가가 담긴 한숨을 내쉬면서 잠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세자를 향한 채였다. 나는 그런 준회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흑룡포를 마주할 용기는 생기질 않았다. 또 그의 차가운 표정을 보게 될 것 같아서 겁이 났다.
"세자빈이 아니십니까!"
"……."
"처음 뵙겠습니다. 윤이라고 하옵니다. 저하와는, 전부터 절친한 사이입니다. 계속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실제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느닷 없는 밝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예뻤다. 웃음이 예쁘고, 웃으면서 접혀지는 눈 밑이 예쁘고, 맑은 목소리가 예쁘고, 길게 땋아 내려진 풍성한 머리칼도 예뻤다. 세자의 옆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는 그 당당함도 예뻤다. 그 둘은 잘 어울렸다. 내가 끼어들 틈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세자는 내내 말을 하고 있지 않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날이 아직 추운데 어디를 갔다 오십니까. 세자빈."
그가 먼저 말을 걸어준 게 기쁘면서도 한 편으로는 착잡했다. 윤의 앞에서는 내게만 보여주던 차가움을 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대전에 부르심이 있어 잠시 그 곳에 갔다오는 길입니다. 세자께서는……. 윤과 함께 어디를 갔다 오십니까."
"그대가 궁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자가 말했다. 가시가 담긴 어투였다. 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윤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걸, 그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추락했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하는 세자가 무서웠다. 겁 났다. 두려웠다.
준회가 천천히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 동태를 세자는 살짝 구겨진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준회는 그 멸시에도 위축되지 않으며 분명한 목소리로 할 말을 전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저하의 장례식에 판서 댁의 따님이 참석하신 것을 소인의 천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오만을 가려주시어, 제게 그 연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준회의 말에 세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망설임 없이 윤과 함께 반대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무시였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도 잘 구별할 수 없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이었다. 서러움을 넘어서는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본질을 알 수는 없어도 비참의 한 종류라는 것 쯤은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윤이 내게로 뒤를 도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얼굴엔 약간의 미안함 같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꿈결 같이 아름다우십니다.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
"다음에 또 뵙게 될 날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마저도 예뻤다. 세상 모든 남자라면 반해버리고 말 어여쁜 자태였다.
나도 말 없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준회와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별궁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다른 것을 생각하려 노력했다. 세자의 얼굴 말고, 다른 것들. 그가 아닌 다른 것들이면 다 되었다. 그렇지, 궁에서의 음식을 한 번 생각했다. 분명 맛있고 산해진미가 모두 모여 있을 상 차림일 것이다. 그리고, 또,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장례식이 끝난 뒤, 다시 말을 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또,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세자의 안중에 내가 없는 것처럼, 내 안중에도 그가 없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조용한 발악이었다.
별궁에 도착하고 준회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 의지할 곳이라곤 준회가 전부라는 것이 실감났다. 서러워졌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으며, 나는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안으로 들어간 뒤 옷을 갈아입었다. 짙은 보라색의 비단 옷이었다. 나는 그걸 입고 궁녀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집에 대한 향수가 도졌다. 지원과 향단이 떠올랐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게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중간에 궁녀들이 상을 차려 가지고 왔지만, 몇 숟갈을 떴을 뿐 다 먹지는 못했다. 마음이 무거워서 식욕이 생기질 않았다.
조금 일찍 잠에 들었고, 그 다음 날엔 그저 별궁 안에서만 조용히 숨 죽이고 지냈다. 하고 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해야 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형식적으로 준회와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다. 그 날의 일과는 그게 전부였다.
다시 다음 날이 되었다. 이 곳에 도착하고 삼 일이 되던 날이었다. 이젠 궁녀들의 시중이 익숙했다. 뜨거운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고 옷을 갈아입히는 동안에 말 한 마디 없는 그녀들이 단 며칠 안에 익숙해졌다.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했다.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면, 세자와 혼례를 올리게 될 날 또한 빠르게 다가오게 될 것이었다. 나는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빈궁마마, 며칠 동안 마마의 가르침을 도우실 글 선생이 납시었습니다."
이제 막 궁녀가 아침 상을 내가던 참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문 밖을 주시했다. 궁녀의 말이 사실인지, 그녀의 옆으로 그림자 하나가 언뜻 비춰졌다. 미닫이 식이 아닌, 얇은 종이를 덧발라 만들어진 별궁의 문 밖으로 가만히 서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아직 소화도 덜 됐는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공부라니. 방금 먹은 게 밖으로 튕겨저 나갈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가, 나는 서둘러 알았다는 대답을 올렸다. 새로운 사람과의 대면이라니 어쩐지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나는 인영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복건을 쓰고, 옆구리에 책 몇 권을 쥐고 있는 동혁이 보였다.
"그동안 무탈히 잘 지내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내전마마가 보내시어 왔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그대를 가르치게 되어 영광입니다."
문득 사람을 보내겠다는 왕비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말한 사람이 바로 동혁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녀가 조선에 널리고 널렸을 학문가 중에 굳이 동혁을 고른 것이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는 분명 동혁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혁이 궁에 출입하는 것 또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그녀와의 대담을 떠올려봐도, 그 곳에는 동혁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하지만 그걸 동혁에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나는 밝게 웃으며 책상이 있는 쪽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는 전과 다를 바 없이 예의 있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단 둘이 있으려니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아름다운 분이 바로 옆에 있으니 긴장이 되어, 저도 모르게 그대에게 실수를 할 것 같아 노심초사합니다."
"…그러십니까……."
"그럼, 책을 펴겠습니다."
동혁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어머니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형제가 어떻게 이렇게도 다를 수 있단 말인가. 문득 거의 자발적으로 세자의 생각을 하는 내가 안쓰러워졌다. 그는 단 조금도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 마음이 씁쓸해졌다. 옆에서 듣기 좋은 차분한 억양으로 동혁이 한자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세자의 생각을 떨쳐내고 싶었다. 죄책감 없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
*대전: 왕이 기거하며 업무를 보는 곳으로 궁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 본문에는 흐름상 왕이 등장하지는 않았다.
*내전마마: 왕비를 높여 이르는 말.
*대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눔.
*복건: 조선시대의 유학자 혹은 학문가들이 쓰던 관모로 관례 때의 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빨리 올리지 못할 것 같아서 오늘 올립니다!!
한빈이 때문에 무릎 잘린 건 저뿐인가요? (소곤소곤) ㅋㅋㅋㅋ
빨리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그럼 안녕!!
오늘은 기필코 모든 분들에게 답글을...(찡긋)
싫어하시면 어쩌죠... ㅎ
바나나킥 님
빈블리 님
김빱 님
일이세개 님
뜨뚜 님
뿌요뿌요 님
외에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댓글은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답니다... 8ㅅ8
과분하신 칭찬도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