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한인은 다른 의미로 깨끗했다. 표정이 없었다.
"…朝鲜的……."
(…조선의…….)
그는 더듬더듬 모국어를 중얼거리다가 갑작스런 물 세례에 아픈 기침을 토해냈다. 의자에 팔과 다리를 삭도로 묶인 그는 한인 특유의 악착 같은 눈마저 잃은 채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너무 많이 맞아 피가 흐른 감각은 무디고 뭉툭했다. 그런 그를 둘러싸고, 주비의 일원들은 모조리 감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고문 당해 벌어지기 시작한 상처에서 따끔한 고통이 올라왔다. 그들은 왕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적은 편지를 가지고 온 중국의 충신인 그를 순순히 궁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원하는 무언가를 이루게 될 때까진 이 곳에 잡아둘 작정이었다.
바가지에 찬 물을 담아 다시 한 번 한인의 멍 든 몸을 적신 소년은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묘목을 쳐다봤다. 묘목은 남들보다 부족한 시야임에도 한인의 모든 것을 차근차근 꿰뚫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
이미 반 쯤 죽어버린 한인의 신경은 그 소리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묘목이 쓰는 건 조선 말이었다. 한인은 중국에서 박학하기로 유명했으나 작은 나라인 조선에 대해선 능통하지 못했다. 그는 그들에게 빼앗긴, 궁으로 가지고 가야 할 편지를 천천히 시선했다.
벽 중앙에 못으로 박힌 편지에는 담긴 내용 모두를 중국에서 적힌 것임을 인정하는 신장 자국이 있었다. 한인의 군주이면서 중국의 왕인 그가 친히 찍어준 나라의 상징이었다. 중국의 왕은, 조선이 자신의 편지에 신뢰를 가지게 하려면 나라의 상징인 신장을 찍어 보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충신에게 신장이 찍힌 편지를 조선에 가지고 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그 충신은 지금 주비에게 잡혀 편지에 새로운 글씨를 추가하기를 강요 받고 있었다. 중국의 왕은 지혜로웠고, 어떻게 해서든 조선의 군주를 병상에서 내려오게 하고 싶었지만 정작 군주의 나라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가 자신의 충신을 도착하게 한 그 곳은 하필이면 한양 외곽이었다. 중국이 왕의 치료를 돕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갈고 있을 주비가 급습을 노리고 있던 곳.
보기 좋게 그들에게 잡힌 한인은 꼼짝 없이 편지를 내놓아야 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시간 동안 매를 맞고 그들로부터 협박 당했다. 그는 몸이 아픈 고통보다도 한 나라를 망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정신적인 부담에 더욱 힘겨운 모습이었다. 한인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침묵에 묘목이 눈짓으로 소년에게 지시했다. 소년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한인의 턱을 세게 잡아서 돌렸다. 한인이 무심코 미간을 좁히며 신음 소리를 냈다.
"手指还好."
(손가락은 아직 무사하잖아.)
"……."
"涉笔最好."
(붓을 잡는 게 좋을 거야.)
소년은 한참 나이가 높은 한인에게 말하며 작게 킬킬거렸다. 한인은 자신의 모국어에 유창한 조선 소년이 명령하고 있는 것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그는 침묵했다. 소년은 재미 없다고 중얼거리며 그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묘목을 비롯한 주비의 일원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쾌한 감정을 숨김 없이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묘목은 괘씸한 한인을 그냥 죽이고 싶으면서도 아직 이용할 곳이 남았으므로 그 계획은 조금 나중으로 미루었다. 주비의 우두머리인 그가 한 번 눈짓하자 주비는 빠른 동작으로 다시 한인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피가 튀기고 뼈가 부러지는 아픔에 한인은 곧 끊어질 것만 같은 숨을 억지로 삼켜내었다. 버거운 고문을 참아내는 그의 성미는 지독했다.
한인이 붓을 잡겠다고 항복한 것은 손가락 몇 개가 잘렸을 때였다. 일부러 왼손의 손가락만을 빼앗은 묘목은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비의 일원들이 볏에 못 박았던 편지를 가지고 와 한인의 앞으로 내밀었다. 꼬박 이틀을 삭도에 묶여 있던 손목은 붉은 흉터가 가득했다. 자유로워진 두 손 중에 정상인 손가락은 가까스로 과반수를 넘었다. 한인은 억지로 힘을 주며 먹을 품은 붓을 잡았다.
그들 중 유일하게 중국 말을 배운 소년이 한인에게 새로 적을 문장들을 알려주었다. 소년은 어렸을 때 한인 벗을 둔 적이 있어 중국 말을 글로 적진 못하더라도 소리내어 말을 할 수는 있었다. 대륙에서 조선의 왕을 낫게 할 대책을 가지고 온 창하이입니다. 어리석은 실수로 시급한 편지를 궁으로 가지고 갈 수 없을 것 같아 이렇게 대신 옮겨 적어 보내드립니다. 아래는 편지가 중국의 것임을 백 번 인정하는 왕의 신장이니 부디 글의 모든 것을 믿으시고 조선의 태양을 지키시길 바랍니다. 나흘 후 중국에서 보낸 약재가 도착할 터이니, 그 때 한양의 가장 서쪽으로, 태양을 보내시어 그것들을 가지고 가시면 됩니다. 한인은 그 뒤로도 조선 말과 익숙한 한자가 섞인 문장을 몇 개 더 썼다. 글씨를 마치는 한인의 붓이 바보처럼 흔들했다. 묘목은 피 투성이인 그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수 년을 준비했던 난이 본격적으로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거짓된 문장이 추가된 편지를 소년은 소중히 감싸 다시 벽에 못을 박아 걸었다. 왕의 신장은 여전히 건재했다. 한인은 그 순간 세게 혀를 씹었다. 미련 없이 자결하는 그를 주비의 일원들은 무채색 눈동자로 방관했다. 묘목은 귀찮은 일이 덜어졌다고 찰나에 생각했다.
"대장, 이번만큼은 준회도 실수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 밤에 준회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지원한테는 이미 편지를 부쳤습니다."
구체적인 발언에 묘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난에 적극적이던, 후에 모든 것을 해결할 궁에 숨겨둔 주비의 일원인 그 소년은 부쩍 별 것 아닌 감정에 휩싸여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다. 엄한 말로 꾸짖기는 했지만 묘목은 그 소년이 사랑에 유난히 집착적인 것을 안다. 결핍된 사랑을 궁으로부터 채우려는 그 소년이 묘목은 살짝 불안했지만, 그래도 믿기로 했다. 그 곳에서 부모를 잃고 복수를 위해 제 발로 주비를 찾아온 것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새로운 과녁이 된, 태양과 혼인함으로 인해 왕족이 된 그녀를 죽이기 위해 궁의 숲으로 집결했을 당시, 주비의 해산을 요청하던 준회의 간절한 표정을 그는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주비의 목표는 왕족을 말살시키는 것이다. 왕족의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그들의 편이 되었으므로 마땅히 죽임 당할 이유가 있었다. 범이 득실거리는 그 곳에서 그 소년은 흡사 불에 탄 부모를 마지막으로 껴안았을 때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조선의 태양이 함몰되고 우리를 죽인 한양이 패망하는 것이다."
묘목이 입을 열자 모두가 숨을 멈추고 경청했다. 소년은 이 순간에도 탈 없이 말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때, 불에 타던 너희들의 딸과 아들과 형과 동생과 모친과 아버지를 생각하거라."
그는 피를 나눈 가족 대신에 불 속에서 눈 하나를 잃었다.
"결단코 우리가 먼저 함몰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묘목은 실패를 함몰로 바꾸어 불렀다. 날마다 태양이 저무는 서쪽에서 그를 만나 죽이고 그 다음으로는 조선의 궁을 없애버릴 것이다. 그 궤멸의 날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나흘 후에 모든 것은 마지막이 될 것이다.
18
머릿속에서 새빨간 경보가 울리고 있었다. 한빈의 집요한 눈이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거침 없이 돌진하려는 그의 모습에 이상하게 겁이 났다. 몇 번이고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내 팔목을 잡아왔다. 셀 수 없이 많은 입 맞춤 끝에 그는 기어이 내 귓바퀴 어딘가를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조금 거칠게 그를 저지하자 그 때에서야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나를 쳐다보는 그 두 개의 눈이 폭죽처럼 무쌍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껏 그 움직임을 멈추게 해놓고, 어떤 말도 꺼내지 않는 나를 보고 그는 문득 내 손가락을 찾아 더듬거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꽃 모양의 반지였다. 그는 가뿐한 힘으로 그걸 밖으로 끄집어 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울컥해 주먹을 쥐자 그가 멈칫했다.
"이젠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
"……버릴 겁니다."
그가 손에서 꽃 모양 반지를 굴리고 있었다. 단호한 목소리는 내게 반박할 틈조차 주지 않고 끝나버렸다.
낯선 소유욕을 보이고 있는 그에게선 날이 선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다급하게 그 팔을 붙잡았다. 고요한 시선이 뒤엉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안 됩니다, 그건……."
"됩니다."
"……그건 버리면 안 됩니다."
"버려도 됩니다. 버려야 합니다."
"……."
그는 내 입에 못을 박게 했다. 꼭 지켜야 하는 의무인 것처럼 그는 내 반지를, 그의 마지막 선물을 부러뜨릴 기세로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왜인지 그러지 말라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게 되면 어렵게 회복한 그와의 관계가 또 다시 무너질 것 같았다. 그게 사무치게 겁이 나면서도 흔들리고 있었다. 반지를 지킬 것인지 얌전히 그의 말을 들을 것인지 갈등됐다.
어느 틈엔가 한빈은 내 뺨에 손을 비비고 있었다. 퍽 자상한 손길은 내게 익숙하지 않아서 어설픈 눈물을 머금게 만들었다. 나는 이게 올바른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불확실함은 불안으로 이어졌다.
단단한 손에 목 끝이 잡혔다. 난폭하지 않고, 부드러움만이 남은 한빈의 힘이 내게로 실리고 있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말해도 후회할 것이다. 그렇다면 말하는 편이 더 나았다.
"…안 됩니다! 저하, 반지를, 반지를 돌려주세요."
"……빈궁."
"……."
"나와 사랑을 나눌 땐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다른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를, 내 형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게 다른 생각입니다."
"저하, 그래도 그것만은…."
"사람을 미치게 하지 마세요, 빈궁."
그가 말을 끊고 소리쳤다. 호통에 가까운 말투에 기가 눌렸다. 그는 억척스럽게 슬픈 눈을 하고 있으면서 노기 담긴 말을 쏘아댔다.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게.
"이깟, 이깟 반지가 그대에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예? 그런 겁니까? 아직도 내 형을, 잊을 수가 없어서 나한테서 내 형을 찾고자 하는 겁니까? 왜 대답을, 어째서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중요합니다, 저하."
"…지금 실수하신 겁니다."
"……."
"……내 형을 잊었다고 말하면 용서하겠습니다. 어서, 나만을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면 방금 말은 듣지 않은 걸로 하겠습니다."
"……."
"…어서요, 빈궁……. 왜, 왜 입을 다물고 있습니까. 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합니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애원하고 있었다. 완성되지 못한 한빈의 말 끝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차마 외면할 수 없는 그의 부탁이 메아리처럼 귓속에서 퍼지고 있었다. 지금 그가 얼마나 처절하게 사랑 받길 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기적인 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내 침묵에 그의 눈이 점점 슬픔으로, 검은 슬픔으로 물들고 있었다.
"…나를 울게 하지 마세요…. 빈궁……."
"……저하, 잊는 것과 사랑하는 건 다른 의미입니다."
"……."
"어떻게 해도 같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
"저는……. 잊어선 안 될 분이 있고 정작 저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
"…이런 제게 벌을 내리셔도 좋습니다."
"그럼 그 벌로 이 반지를 연못에 던지겠습니다."
"…안 됩니다. 그건…. 벌이 아닙니다."
끝끝내 반지를 포기하지 않는 내 태도에 그는 공허한 사람처럼 웃었다. 헛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커졌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눈을 깜빡이지 않고 그런 그를 쳐다봤다. 눈을 움직이면 그대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나를 원하는 그에게 미안해서, 그를 사랑해서, 그의 말을 들어줄 수 없어서. 눈물이 차올랐다.
"벌을 줄 겁니다."
"……."
"…영원히, 나한테서 도망치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게, 벌입니다."
그는 말을 끝내고 일어났다. 뒤를 돌지 않고 방을 나갔다. 긴장에 굳어있던 몸에 점차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내일 날이 밝으면 내 처소로 윤을 부르도록 해라.
대놓고 들으라는 식으로 그가 복도에서 소리쳤다. 딱히 마음은 아프지 않았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내가 잘못한 일이다. 내가 만든 일이다. 이윽고 궁녀 여럿의 알겠다는 대답이 작게 들려왔다. 방 밖으로 보이던 그의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가 이 곳을 떠났다. 나는 벅차오르는 어떤 감정을 막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처럼 왜 작은 반지 하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토록 바보처럼 구는 건지 철부지 같았다. 이제 그와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비를 맞고 열이 오른 몸이 무거웠다. 아팠다. 가만히 누워 누군가의 간호를 받으면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내 곁엔 아무도 없었고 늦은 시각에 이 방을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버티기 힘들게 외로워졌다.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 손가락이 싫었다.
오늘을 위해 붓을 들지 않았고 그냥 눈을 감았다.
꿈도 없이 긴 잠을 잤다. 사실 그렇다고 분명하게 확신을 하기는 어려웠다. 잠을 자면서 머릿속에 뭔가가 나타난 것 같기는 한데 두통이 치밀어서 간밤의 기억은 보기 좋게 조각났다. 나는 이마가 뜨거우면 시야가 점점 흐물거리게 된다는 사실을 방금 처음 알게 됐다. 천천히 아침 햇살이 번지고 있는 문 앞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지나치게 무리한 몸은 쉽게 복구되지 않았다.
기대할 것도 없이 한빈은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했다. 그는 오늘 혼자서 문안을 올렸고 혼자 밥을 먹었고 혼자서 공부를 하러 갔다. 나를 보러 오는 일도 없었고 내가 있는 곳을 걱정스럽게 서성이지도 않았다. 우리 사이의 균열은 점점 틈이 늘어나고 있었다. 더할 것 없이 완벽한 갈라짐이었다. 그 갈라진 틈에 발을 헛짚지 않는 방법은 없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균열을 피해가고 그와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나 대신 윤을 찾던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가 정말로 윤을 만날 것인지 아침 밥을 깨작거리면서 생각했다. 나를 걱정하던 그의 얼굴에서 마침내 윤을 대신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느꼈었는데 이젠 모든 게 소용 없어졌다. 억울하다고 누구를 붙잡고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다 나 때문에 생겨난 일이었으므로 모든 걸 견딜 각오를 해야 했다.
얼떨결에 먼 조선으로 와 숨을 쉬고 있는 지금이 만일 내 꿈의 한 조각이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것 전부가 악몽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만큼 나는 이 곳의 생활에 지쳐버렸고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냥 너무 많은 상처를 받게 됐다는 걸 덤덤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햇볕이 들어와 환하던 방이 일순간 검게 변했다. 의미 없는 일식이 찾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곳에서의 일식은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을 만큼 잦게 일어났다. 일식을 체감하게 되는 시간은 보통 오 분 정도였는데 빛이 사라지는 것에 민첩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몸은 그보다 훨씬 길게 태양의 부재를 느끼고는 했다. 새벽처럼 캄캄한 방 안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에 금방 다시 밝아졌다.
문득 곤이 떠올랐고 그에게 안부를 물으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문 밖에서 무언가를 알리는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의정부 이조판서 여식 윤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심박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우습게도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지우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만날 일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왠지 그녀를 피하게 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조금 가다듬고 알았다는 대답을 했다. 문은 느리게 열렸고, 윤은 무표정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밝게 웃었다. 어째선지 그녀에게서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세자빈. 윤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다가 쉴 틈 없이 눈을 접고 웃었다. 한빈이 불렀을 것이다. 그를 만나 행복한 일이 있었는지 윤은 들뜬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반갑지 않은 모습으로 그녀를 맞았다. 그럼에도 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내 밝은 표정이었다. 나와 소반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은 윤은 전보다 더 예쁘게 보였다. 작고 갸름한 얼굴선이 연한 분홍 빛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면서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할 말이 없었다.
궁녀가 차 두 잔을 내오기 전까지 윤 역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나와 이런 평화로운 다과를 즐기러 올 만큼 무른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는 그녀에게 대놓고 왜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직접적인 내 물음이 재밌는지 잠시 꺄르륵거리면서 웃었다.
"실은, 소녀가 이번에 혼기가 찼습니다. 그래서 바쁘게 혼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 예. 그러십……. 예?"
갑작스런 발언에 놀라 되묻자 윤은 어떻게 보면 얄미운 표정으로 입을 당겨 웃었다. 한빈은 윤과 함께 살고 싶어 했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윤이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윤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빈은 대체……. 뒤이어 나오는 그녀의 말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정지 당했다.
"성균관에 다니시는 찬우 도련님과 혼담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듣기로는, 도련님과 세자빈께서 옛부터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고 하시기에 이렇게 말씀드리러 찾아왔습니다."
"……."
"혹시라도 세자빈께서, 아직 도련님한테 마음이 있으시다면……. 세자빈께선 소녀를 깊게 미워하실 것 아닙니까. 그건 싫습니다. 이미 충분히 저를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
곱상한 외모를 믿고 맹랑한 말을 지껄이는 그녀는 여전히 얄미운 표정이었다. 그 말이 믿기지가 않아서 헛웃음이 났다. 윤의 사랑엔 단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찬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오로지 내 편이라고 믿었던 그마저 잃게 될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해졌다. 더불어 윤에게서 풍기는 이 익숙한 향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찬우의 냄새였다. 나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도록 살짝 혀를 씹었다. 나도 모르게 주머니 속의 모란을 만지고 있었다.
"그렇게나 부드러운 용모를 가지신 도련님께서 그런 아버지를 두셨다니 놀랍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듣고 싶지 않다고 해도 말할 생각이면서 굳이 공손한 척을 하는 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대께서는, 저하와 함께 동침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은근한 자부를 품은 말투였다. 나는 그녀가 어떤 말을 할지 몰라서 두려워졌다. 윤은 한 번 뒤를 돌아 문 밖에 모여 있는 궁녀들의 그림자를 확인하더니 얼어붙은 내게로 바짝 몸을 붙였다. 그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빈이 몇 번이고 입을 맞첬을 입술로 천천히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저하께서는 흥분하시면 언제나 제 얼굴을 만져주십니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따뜻하게……. 제가 조금이라도 아픈 소리를 내면 움직임을 멈추시고 다정하게 괜찮느냐고 물어주시기도 합니다. 저하께서는 세자빈을 탐할 마음이 없으십니다. 저하께선 그대를 싫어하십니다. 아주 지독히요."
"……."
"방금도 저하의 쓰다듬을 받고 왔습니다. 저하께서 저를 이렇게나 사랑하시는데, 제가 감히 마마의 옛 정인마저도 가져도 되겠습니까?"
"……."
"어머….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상처 받으셨습니까? 소녀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어떤 희롱도 아무렇지 않게 들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한빈은 아니었다. 그는 안 된다. 누구도 한빈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녀는 그를 낱낱이 파헤쳐서 세자의 격을 낮춰버렸다. 그에 대해 그런 식으로 떠들어대는 건 누구도 용서 받지 못할 짓이었다. 나는 그 점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주제를 모르고 나불거리는 저 입술을 도려내어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붉게 변한 뺨을 감싸 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곧 거친 동작으로 소반을 걷어 찼다. 찻잔이 깨지면서 파편이 튀었다. 뺨을 긋고 지나간 그 조각들 때문에 턱선 아래로 핏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내 피는 상처에서 방울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걸 닦을 생각 없이 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윤은 뺨을 맞은 게 억울한지 작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소반이 무너지던 작지 않은 소리에 궁녀 몇 명이 놀란 얼굴로 문을 열었다. 윤은 재주껏 상황 파악을 마친 모습이었고 좀 더 과장스럽게 뺨을 가렸다.
"…세자빈께서 손찌검을 하셨습니다!"
궁녀들은 그 말을 듣고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 받다가 이내 황급히 윤에게 붙어 뺨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화조차 생기질 않았다. 소매로 턱을 닦아냈다. 흥건하지 않았지만 상처는 욱신거렸다. 윤은 맞을 짓을 해놓고 괜한 엄살을 부리면서 나를 심심하면 아무 때나 손을 올리는 미친 사람 취급을 하고 있었다. 이내 가장 어려 보이는 궁녀가 내게로 다가와 걱정스런 얼굴로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윤은 궁녀들의 부축을 받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약 올려서 후련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윤이 방을 나갔다. 내게 괜찮냐고 물었던 궁녀가 혼자서 소반을 치우고 깨진 찻잔 조각들을 손으로 담고 있었다. 그녀의 작고 어린 손이 어느 순간부터 피 투성이가 됐다. 궁녀는 아픈 내색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잔해들을 치운 뒤 몸을 일으켰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던 그녀의 표정에서 언뜻, 여러 감정이 겹쳐 있었다. 걱정스러움과 약간의 동정심이었다. 나는 그걸 무시했다. 누구에게도 위로 받고 싶지 않았다.
소매는 점점 피로 젖었다. 닦아도 닦아도 작은 상처의 출혈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상처는 크기가 작은 대신에 정도가 깊은 모양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내의원으로 가 연고를 발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일제히 말을 주고 받던 모든 소리들이 끊어졌다. 궁녀들은 나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고 황급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들에게서 은근히 무시를 받았던 기억이 있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궁녀들은 건성으로 고개를 숙였고 나는 익숙하게 신을 찾아 자선당을 나왔다. 오늘 처음으로 보는 태양은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손바닥을 펴 눈이 아프지 않도록 그늘을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당차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검은 두건을 보고 알아차렸다. 준회는 말 없이 내 옆을 걷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군관복의 색이 짙은 빨강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디를 가십니까."
"……."
"…곤이 세자빈께 괜찮다는 말을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
"정녕 제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실 겁니까?"
"……."
"…내의원은 전의감 옆에 있습니다. 걷는 방향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고 반대로 걸음을 틀었다. 내의원을 향하고 있는 내 생각을 읽혔다. 준회가 내 상처를 알아보았다는 뜻이었다. 그가 옆에서 작게 한숨을 토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 멀리에 보이는 인영 두 개에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가만히 서서 윤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누구도 아닌 찬우였다.
그 둘을 스치기 직전에 찬우가 나를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게 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약간 당혹스러운 기색의 찬우가 보였다. 그는 옆에 있는 윤을 한 번 미간을 좁히고 쳐다보다가 이내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딱히 건넬 말이 없어서 그 행동을 가만 바라보고만 있었다.
"…세자빈, 안녕하십니까."
그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윤과 찬우의 조합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윤은 그의 옆에서 보기 드문 무감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찬우를 쳐다봤다. 무엇도 담겨 있지 않았던 표정엔 금방 노련한 웃음 꽃이 피었다.
"도련님, 세자빈께서 저희 혼담을 축하해주셨습니다."
"…지금 무슨 소릴……."
"조금 아팠지만요."
윤의 말에 찬우는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설명하기엔 입이 아플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대로 가던 길을 갔다. 준회가 말 없이 나를 따라왔다. 목 안에 거미줄이 생긴 느낌이었다. 간지럽고 질척했다. 그리고 끝 없었다. 앞으로 어떤 밝은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준회는 어느 순간에 걸음을 멈췄다. 눈 앞에 쓴 냄새가 나는 내의원이 나타났다. 빼꼼 고개를 빼고 그 안을 살피자, 모두가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질서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조금 멀리에서 책과 약재를 번갈아가며 확인하고 있는 윤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그 뒤통수에서 시선을 떼지 않자, 준회는 성큼성큼 그 안으로 들어가서 윤형의 앞에 섰다. 윤형은 갑자기 느껴지는 그림자에 흠칫하고 옆을 쳐다봤다. 둘의 시선이 교환되고 있는 게 보였고, 이윽고 윤형은 그와 함께 내의원의 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거니 서 있는 나를 한 번 보더니 윤형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말로 인사를 건네려던 그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 크게 눈을 치떴다. 윤형의 시선이 점차 걱정스러움으로 변했다. 그는 무심코 내 뺨 위의 상처를 건드리려던 것을 멈춘 뒤에 물었다. 상처를 파악하는 그의 눈이 예리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잠깐 어디에 긁혔습니다. 의원께서 걱정하실 일이 못 됩니다."
"횡으로 그어진 상처는 본인 과실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
"…누가, 어디에서 세자빈께 이런 흉을 만들었습니까. 세자빈께서 피가 나실 동안 호위무사는 대체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저를 질책하는 일은 세자빈을 치료한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윤형은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내 뺨을 쥐고 상처를 살폈다. 그가 딱지가 앉은 상처를 확인하면서 얼굴을 구겼다.
"…제가 저번에 드린 적이 있는 연고를 바르시면 호전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건 바를 수 없습니다."
내 거절에 윤형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그걸 바르면, 의원께서 슬퍼하실 것 아닙니까."
예전의 일을 생각하면서 내가 말했다. 윤형은 내 말에 고갤 끄덕이고 잠깐 행복한 것처럼 웃었다. 그는 다른 연고를 가지러 가겠다면서 이내 자리를 피했다. 그 마당엔 나와 내 호위무사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분의 짓입니까."
"……."
"…저하께 알리겠습니다."
"…소용 없어, 믿지 않으실 거야……."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일부러 작게 중얼거렸다. 준회는 내의원을 나오고 있는 윤형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윤형은 거친 자국이 있는 손가락에 투명한 액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내 뺨 위를 문질렀다. 나쁘지 않은 감촉이었다. 윤형은 상처가 덧나지 않게 물을 닿게 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나는 살며시 웃으면서 고갤 끄덕였고, 이윽고 그는 내의원 안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허릴 숙이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색이 없는 연고는 뺨 위에서 건조 중이었다. 준회가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와서 내게로부터 여름의 태양을 차단하기 위해 손바닥을 폈다. 걱정 없이 준회를 의지하던 예전이 생각나 나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여름에 물든 햇살이 밀어낼 틈 없이 빠르게 모든 만물을 적시고 있었다.
자선당으로 돌아왔다. 마루에 앉아 신을 벗고 있는 나를 쳐다보는 준회의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서 그걸 무시했다. 나날이 뜨거워지는 날씨는 넓은 하늘에서 고립되고 있었다. 하늘을 탈출해 대지에 빛을 심을 것처럼 뜨거운 공기였다.
복도에 들어서고 가장 처음 눈에 박힌 건 내 방 앞에 홀로 서 있는 세자였다. 나는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복도 위의 모든 궁녀들이 거의 미동도 없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가 내 방 앞을 찾아온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한빈의 차가운 쇠 같은, 딱딱하고 무정한 눈이 나를 쳐다봤다. 그는 내 존재를 알아차림과 동시에 살짝 인상을 썼다. 오늘 처음 보는 그의 얼굴에 탁한 색깔의 반점이 일어나 있었다. 색은 미약했지만 수가 많았다. 그리고 상처 주변에 특히나 그 색깔이 짙고 강했다. 어제만 해도 깨끗했던 그의 얼굴이 무언가에 의해 얼룩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갔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 너무 잘 알아서, 벌써부터 마음 속 깊은 곳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윤에게 손 댔습니까?"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물음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고, 그에게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하, 그녀와 가까이 지내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윤과 가깝게 지내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만 입을 놀려보시겠습니까."
"…저하. 그녀는……."
"빈궁."
"……예."
"왜 내 마음을 자꾸 다치게 합니까."
"……."
"내 마음이 넝마가 되어야만 그대가 편하겠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윤에 대한 그의 너무도 단단한 신뢰가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나를 죽이려고 하셨습니다. 대체 왜요? 내가 그만큼, 싫었던 겁니까?"
"…저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어제 그대가 내게 이상한 연고를 바르셨습니다. 독초 성분을 가진 그것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고 피부에 이상한 것들이 돋았습니다. 의녀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분명 크게 앓았을 겁니다."
"……."
"그 표정은 뭡니까. 나를 해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습니까? 그런 겁니까?"
그 말에 세상이 암전되는 걸 경험했다. 그는 나를 몰아붙이던 걸 멈추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빈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벌 주지 않을 겁니다."
"……."
"나한테서 도망 가도 됩니다."
"……저하."
"……잠시 친가로 귀양 보낼 것이니 그렇게 아세요."
그는 참 쉽게 마지막을 말하고 내게서 등을 돌렸다. 모든 게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뭐가 어디서 어떻게 엉키기 시작한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궁녀들은 그가 방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 예의 없음을 욕할 마음이 없었다. 왜 아무도 그에게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그게 너무 억울했다. 그리고 윤형에게서 속았다는 사실에 크게 속이 울렁이고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떠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해 괴로웠다.
귀양 보내겠다는 말이 진심인지 한 궁녀가 내게 방으로 가 물건을 챙기라고 했다. 나는 이상한 오기가 도져서 챙길 게 없다고 대꾸했다. 궁녀는 잠깐 말이 없었다. 이러는 내가 철 없는 어린 애로 보이는지 그녀들은 아래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미치도록 억울한데 이걸 알아줄 사람이 없어서 코 끝이 시큰해졌다.
그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쫓겨난 것이다. 향단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막막했다.
궁녀들에게 떠밀려 마당으로 나가자 말을 데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준회가 보였다. 저절로 입술을 깨물게 됐다. 넝마가 된 건 누구도 아닌 나였다. 한빈을, 사랑하고 있는데 미웠다. 나를 믿지 않고 그녀 생각만을 하고 있는 한빈이 내 마음이 다 아프도록 미웠다. 말에 올라타고 준회는 그 옆에서 고삐를 잡고 걸었다. 많은 걸 묻지 않는 그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귀양 당하는 길은 조용했다. 오로지 준회 혼자만 내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준회가 내의원 앞에서 말을 멈추게 했다. 그는 마치 내 모든 생각을 읽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가 나를 홀로 남겨두고 내의원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처럼, 윤형은 금방 내 앞으로 나타났다. 그는 말에서 내리고 있는 나를 조금 의아한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부르셨습니까? 혹, 상처를 덮은 연고가 아프십니까?"
걱정스러워서 미치겠다는 그 말투가 듣고 싶지 않았다. 귀를 막고 싶은 걸 참아내고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제게 연고를 주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예?"
"무얼 바라시고 제게 그런 위험한 것을 주신 겁니까?"
"…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미워하게 만드십니까!"
누군가한테서 속임을 당하는 건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하필이면 윤형이라는 게, 슬펐다. 그토록 자상하고 상냥했던 그가 왜 내게 그런 것을 주고 괜히 가슴을 설레게 했는지 슬펐다. 그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게 너무 슬펐다. 그는 울음을 꾹 눌러 담은 내 목소리에 적지 않게 당황한 눈치였다.
"어째서 독을 섞은 연고를 제게 주셨습니까. 왜 미움 받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드십니까…."
내 말에 그는 어쩔 줄 모르며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저는……. 저는 연고에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하의 얼굴에 이상한 것들이 돋았습니다."
"…그걸 왜, 세자저하가 바르셨습니까?"
"……."
그는 묻고 침묵했다. 윤형이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세자빈,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제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믿어주셔야 합니다."
윤형은 거의 울 것처럼 부탁하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빈에게 나타난 증상은 어떻게 생각해도 연고의 영향이었다. 그걸 발랐던 상처 주변이 가지고 있는 얼룩이 가장 심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연고를 담고 있던 주머니를 영영 잃어버리는 게 나았습니다. 괜히 준회에게 시켜 그걸 다시 가지고 오게 한 제 잘못입니다."
어두운 표정의 윤형이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내 옆의 호위무사를 쳐다봤다. 준회는 그 시선에 아무 말하지 않았다. 윤형은 작게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윤형의 얼굴이 어떤 좌절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대단한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잠깐 어깨를 떨었다.
나는 그를 두고 등을 돌렸다.
"…옆에 있는 그가, 원래의 연고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한테 속으신 겁니다, 세자빈."
그는 바꿈 당한 자신의 연고의 행방을 중얼거렸다. 나한테는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였다. 준회가 다시 말의 고삐를 잡으면서, 윤형을 한 번 위협적으로 쏘아보다가 웃었다.
/
*한인: 중국인.
*삭고: 밧줄.
*신장: 도장.
*여식: 딸을 다르게 부르는 말.
*횡: 가로 모양.
안녕하세요~ 조금 늦었나요...? (눈치)
이래 저래 나갈 일이 맣아서 컴퓨터 잡을 시간이 많이 없었네요 ㅠㅠ 죄송합니다!
뽀뽀 ㅎ... 하는 장면 몇 줄 쓰는데도 너무 힘들어서 장장 두 시간이 걸렸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위는... 제가 못 써서 포기... ㅎㅎ
정말로 끝이 보이네요 아마 스무편이면 끝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전은 김씨 형제 + 준회로 네 편 정도 구상 중인데... 대강 쓰면서 여러 의미로 눙물ㅇㅣ...★ 헷
비회원 독자 분께서 저번 편에 댓글을 남겨주셨는데... 그 밑에 답글로 남기면 보지 못하실 것 같아서 여기에 써드립니다!
암호닉은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있으니 주저 마시고 신청해주시면 제 사랑을... 드려요...♡ (수줍수줍) ㅋㅋㅋㅋㅋ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배꼽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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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도 이 글에 들어와 계시는 모든 분들!!
사랑을 드립니다!
거절은... 거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헿
한양 18편 감상평 예상 : 윤.................... 아... 윤........! 윤!! 윤아!!!!!!!!!!!!!!!!!!!!!!!!! 야!!!!!!!!!!!!!!!!!! (마동석 아저씨를 부른다)
항상 감사해요... 다음에 만납시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감사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