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친구, 구준회
W. 이디야
비가온다. 침대에 멍하니 눈을 감고 누워 귀로는 빗소리를 듣는다. 타닥타닥- 오늘은 비가 좀 거세구나. 난 토도독 거리는 비가 더 좋은데. 밖에 나갈까, 말까.
항상 비가 오면 가벼운 차림으로 동네를 걷는다. 우산에 부딪혀 떨어지는 빗소리가 좋아서, 어느 날부터 습관이 됬다. 나가볼까.
대충 두꺼운 옷을 걸치고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겨울 냄새랑 비 냄새가 섞여 온다. 너무좋아.
타닥타닥- 우산에 비가 부딪혀 소리를 낸다. 10분쯤 걸었을까. 이재희-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설마 구준회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안다. 이 잊을 수 없는 목소리는 구준회다.
"미쳤나봐."
"누가."
"누구긴, 너지."
"맞아. 나 미쳤어."
"‥ 여기있는건 어떻게 알았어?"
"한 두번이야? 너 비 오는 날 나오는 거 지나가던 개도 알 걸."
"오바하지마"
"그래 미안, 장난이고 나 안 만나주는데 아쉬운 사람이 와야지, 별 수 있냐."
쿵- 내 심장 소리다. 펀치 쎄게 한 대 맞은 기분이다. 구준회는 아무렇지 않게 훅 들어온다. 사실 자기는 들어 온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하나 하나에 다 반응한다. 사소한거 하나에 의미 부여하고 혼자 생각하고 착각하고, 부정하고.
이러는 게 싫어서 요즘 피한건데 구준회는 아는지 모르는지 훅훅 들어온다.
"야 구준회."
"왜 이재희."
"맥주 콜?"
피해도 치고 들어오니까 이젠 의심이라도 안하게 다시 친구처럼 대해야겠다. 작전변경해야지.
&
구준회가 취했다.
"야, 이재희,"
취해도 발음은 곧다. 역시 구준회. 술 버릇은 한번도 본 적 없다. 눈이 풀리는 거 빼고
"너 요새 왜 그러는데."
"뭐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데 사실 쟤가 무슨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는 잔뜩 흐트러 져셔는. 왜 섹시해보이지. 아 원래 섹시하구나.
"너 우리 처음 본 날 기억하냐? 너 중 일때 나랑 같은 반이었잖아. 그때 부터 친했잖아 응?"
무슨 중딩때 이야기야. 새삼스럽게. 기억 안나.
다 기억해. 우리 서로 같은 반인거도 이학기 시작할 때 알고 서로 놀랐었잖아.
"막 복도에서 그냥 지나치다가 이학기 되서야 같은 반인거 알고 서로 놀라고 놀려잖아. 존재감 없다고 막 하면서. 기억나지?
고등학교 어디 갈지 서로 고민하다가 내가 너 따라간 거 알지? 너 친구 없으면 내가 놀아줘야지- 하면서 간 건데.
우리 주번도 같이 했잖아. 니가 맨날 나한테만 쓰레기 버리라고 시키고 넌 문 잠구고 같이 하교하고.
18살때 너 가출해서 울 때도 나 다 기억해. 너 울면서 전화와서는 비 다 맞고 있었잖아. 아, 너 그때부터 비 좋아한건가? 여튼‥"
다 아는데. 주절주절- 구준회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내 눈을 바라보면서. 기억력도 좋다. 나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구준회는 기억력도 좋다. 나도 다 기억해. 내가 가출한 날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엄청 사와서 나 먹이고 그네에 앉혀서 내 얘기 다 들어주고
니가 엄청 이쁜 여자애한테 고백 받아서 귀 빨개 지던거도 다 기억해. 내가 얼마나 부러웠는데!
"야 구준회. 일어나. 가자."
계산부터 하고 왔다. 구준회는 비틀대면서도 잘 걷는다. 어느새 비도 그쳤다.
데려다줄게- 술에 취한 구준회가 말했다. 취했는데 기사도 정신은 끝내준다.
무슨, 됬어. 그럼 저기 가로등 까지만 데려다 줄게. 거절은 안된다-
살살 걷다보니 벌써 가로등 앞이다.
"조심히 가. 가다가 벽에 부딪치지 말고."
"그래, 이재희 너도 조심히 들어가. 못 데려다 줘서 미안하다."
손을 대강 흔들고 비틀 대는 구준회를 보다가 나도 뒤돌아섰다.
찰박찰박 물웅덩이를 가로질러서 지나가는데 갑자기 물이 튀었다.
뒤돌아 보니 뛰어왔는지 구준회가 서있었다.
성큼 내앞까지 걸어와서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조심히 걸어가. 또 바닥보면서 걷지말고. 그리고-
"니가 요즘 왜 그러는진 모르겠는데 오늘은 평소 같아서 맘이 좀 편하네.
이재희.이 오빠 애태우지마. 속상해."
그러더니 휙 돌아서 걸어갔다.
구준회는 어떻게 하면 멋있는지 아는가 보다. 그나저나 술 취한거 맞아? 왜 저렇게 멀쩡한건데.